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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 가운데 계신 하나님(고전 10:2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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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동호
댓글 0 조회 12,083 2009.03.21 05: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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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 가운데 계신 하나님(고전 10:23-24, 고후 2:17)

하나님이 인간에게 동식물과는 다른 인성(人性)이란 독특한 특성을 주셨을 때, 그분은 이미 모든 가능한 고통과 악함을 인간과 함께 겪기로 결심하신 것이다. 인성이란 지성과 감성과 자유의지를 말한다. 이성을 가진 인간의 지성과 감성과 자유의지는 원래 하나님만의 특권이었기 때문에 인간이 하나님의 것을 공유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신성(神性)에 근접한 존재란 것을 말해 준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인성을 주셔서 스스로 판단하고 결정하게 하신 것은 하나님이 해서는 안 될 치명적인 실수를 범했다고 말할 사람이 있을지 모르지만, 실은 하나님이 하신 결정들 가운데서 가장 잘 하신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인간에게 인간다움을 주신 일, 하나님의 인격성을 부여하신 일, 그래서 인간을 생각하는 동물이 되게 하신 일, 스스로 판단하고 결정하는 고등동물이 되게 하신 일이 인간에게 다 유익한 일이 되지는 못했다. 고린도전서 10장 23-24절,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은 아니요,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은 아니니, 누구든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말고 남의 유익을 구하라”는 말씀이 이를 증명한다. 하나님처럼 완전하고 완벽하며 거룩하다면, 모든 것이 가능하면서 모든 것이 유익하고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이 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고 남의 유익을 구하는 것이 되겠지만, 인간은 유한하고, 부족한 피조물이기 때문에 그가 내리는 판단과 자유 의지적 결정에 실수가 생기는 것을 피할 수 없다. 인간은 완벽하지 못하고, 완전하지 못하며, 거룩하지 못하기 때문에 남의 유익을 구하기보다는 항상 자기의 유익을 구하게 되고, 스스로 파멸의 구덩이를 파서 그것을 자기의 무덤으로 삼는 어리석음을 반복한다.
인간의 어리석음의 탓을 하나님께 돌릴 수 없다. 유일하신 하나님이 만드신 것은 그것이 천사일지라도 인간처럼 피조물이고, 피조물은 만들어진 존재이기 때문에 신이 될 수 없다. 그래서 오류와 실패를 피할 수 없다. 피조물의 죄성과 부족성은 숙명이다. 그렇게 된 것이 하나님의 탓은 아니다. 오히려 하나님이 인성을 인간과 함께 나누신 행위는 하나님이 자기 것을 포기하고, 피조물과 함께 나눈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큰가를 보여준 것이다. 인간이 결코 신이 될 수 없는 운명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특성을 나눠가진 것은 다른 동식물이 누리지 못한 큰 축복이고 특혜이다. 그러므로 인간이 범한 죄과들에 대해서 하나님을 탓할 수 없다. 좋은 것을 주신 하나님이 잘못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바르게 쓰지 못한 인간이 잘못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 땅에 존재하는 모든 악과 죄와 불행과 고통은 하나님이 만드신 것이 아니라 인간이 만든 것이다. 단지 하나님은 인간들이 생각하고 판단하고 결정하고 행하는 일들을 허락하고 계실 뿐이고, 그로 인한 고통을 인간과 함께 당하고 계시고, 그 고통가운데 계신다. 그렇다고 하나님이 인간의 죄악을 언제까지나 묵인하고 계시는 것은 아니다. 인과의 법칙에 따라 심판받게도 하시고, 인간이 세운 각종 규범과 규칙들로 심판받게 하시며, 사후의 세계인 천국과 지옥을 두어 궁극적인 심판을 받게도 하신다. 이로써 하나님은 인간에게 사랑과 정의를 동시에 실현하신다. 하나님은 인간이 겪는 모든 행복, 곧 사랑과 평화와 정의로운 분배뿐 아니라, 모든 불행, 곧 전쟁과 가난과 질병조차도 함께 겪고 계신 사랑의 하나님이시다.
두 가지 물음을 묻고자 한다. 첫째는 삶 속에서 하나님의 부재와 침묵을 몸서리치게 경험했고, 가슴을 찢는 불의와 절망에 깊은 상처를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기독교인으로서 착실하게 살아온 삶 그대로를 지속해가겠는가 이다. 둘째는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인간의 역사 속에서 활동하고 계심이 확실한 것을 알고서도, 지금처럼 느슨한 이름뿐인 기독교인의 삶을 지속해가겠는가 이다.
이 두 가지 실존적인 물음을 던지고 있는 소설이 김은국의 󰡔순교자󰡕란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이 소설은 6.25동란 직전에 공산군에 의해서 피랍된 열네 명의 목사들에 관한 이야기로 시작된다. 이들 목사들이 한꺼번에 피랍된 배경은 생일을 맞이한 목사를 축하하려는 모임을 그들 가운데 누군가가 공산군에 밀고했기 때문이다. 피랍된 열네 명의 목사들은 반동혐의로 칠 일간 밤낮으로 고문을 받고 만신창이가 되었으며, 마지막 날 밤에 두 명만 풀려나고, 나머지 열두 명은 총살되었다. 풀려난 두 명 가운데 한 사람은 젊은 목사로서 평소 존경해마지 않던 목사의 목숨구걸과 배교행위에 정신이 돌아버렸다. 체포된 공산군 소좌의 말에 따르면, 이들 목사들은 훌쩍거리며, 낑낑거리며, 엉엉 울면서 죽어갔고, 살려달라고 아우성치며, 자기네 신을 부정하고 동료들을 헐뜯는 꼴사나운 모습을 보였다는 것이다. 또 한 명의 풀려난 목사는 신 목사로서 다른 동료 목사들과는 달리 목숨을 아끼지 아니하고 공산군에 대항했던 사람이다. 체포된 공산군 소좌의 말에 따르면, 그는 용기 있는 자로서 당당하였고, 소좌인 자기의 얼굴에 침을 뱉을 만큼 배짱이 두둑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용감한 신 목사와 미쳐버린 한 목사를 풀어주고 나머지는 총살시켰다는 것이다. 살고자한 자들은 죽고, 죽고자한 자들은 살아난 예상을 뒤엎는 사건이었다.
가장 떳떳하게 살아 돌아온 신 목사는, 그러나, 스스로 배신자의 누명을 뒤집어쓰고 온갖 비방과 침 뱉음과 돌팔매를 맞으며 십자가를 진다. 그러고는 억울하게 희생된, 그러나 믿음을 배신한, 열두 명의 동료들을 순교자로 치켜세운다. 신 목사는 그들이 자신의 배신 때문에 죽었노라고 사람들 앞에 고백하며 철저하게 뉘우친다. 그것은 살아남아 있는 모든 자들, 곧 방첩대와 같은 국가기관의 종사자들과 신자들이, 설사 그의 고백이 진실이 아닐지라도, 신 목사가 그렇게 고백해주기를 간절히 바랐던 그런 고백이었다. 따라서 방첩대는 순교자추도예배를 준비시키고, 신문들은 연일 그들의 영웅적 미덕과 용기를 드높였다.
공산군의 총칼 앞에서도 지조를 꺾지 아니하고 죽음을 불사하며 항쟁했던 신 목사는 순교자가 되지 못하고 살아 돌아온 것을 후회스럽게 생각하면서도, 죽은 동료 목사들을 순교자로 치켜세우기 위해서 정작 떳떳했던 자신에게는 동료들을 공산군에 밀고한 배신자의 누명을 씌운 채, 가룟 유다란 손가락질과 비난을 한 몸에 받으면서도, 폐암말기에 접어든 자신의 육신은 돌보지 아니하였고, 가슴을 찢는 불의와 절망에 깊은 상처를 입은 영혼들을 말씀과 기도로 치유하며, 피난민들을 돌보면서 죽는 순간까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정작 하나님을 믿지 못했다. 일생동안 하나님의 침묵과 부재에 고뇌하며 괴로워했으면서도 끝까지 자신의 일신을 생각지 않았고 그의 무죄를 아는 방첩대의 장교들이 그를 그토록 피신시켜 살려보려고 백방으로 노력하지만, 그는 오갈 곳 없는 목자 잃은 양떼들을 돌보기위해서 중공군의 침략에도 피신하지 않으며, 공산군에 체포되어 처형되는 그 날까지 하나님의 종으로서의 역할을 신실하게 수행한다.
신 목사와는 성격이 다르지만, 국가와 전우들을 살리기 위해서 중공군에 대항하다가 전사한 박 대위와 방첩대 대장 장 대령이 있다. 이들은 전우들의 퇴로를 열어주기 위해서 싸움터에 남아 기꺼이 총알받이가 되었던 순직자들이다. 또 야전 병원장이었던 민 소령은 퇴각명령을 받고, 피신시킬 수 있는 모든 환자들을 후송시킨 후에도 피신이 불가능한 다섯 명의 중환자들의 곁을 떠나지 못하고 그들과 함께 남았다가 중공군의 폭격을 받아 순직하였다. 이들 모두는, 비록, 하나님을 믿는 신앙이 없거나 있다 해도 약했지만,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았다는 점과 그런 신선한 태도를 보인 신 목사와도 관련이 있다는 점에서 순교자다운 모습을 보인 참다운 자들이었다. 이것이 삶 속에서 하나님의 부재와 침묵을 몸서리치게 경험했고, 가슴을 찢는 불의와 절망에 깊은 상처를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기독교인으로서 착실하게 살아온 삶 그대로를 지속해가겠는가라고 묻는 첫째 물음에 대한 답이다. 신 목사나 박 대위, 장 대령, 민 소령과 같은 사람들은, 비록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하나님이 삶 속에 개입하고 계심을 믿기 어려워했지만, 사람을 사랑하고 나라를 사랑했다. 그들은 성경말씀대로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고 남의 유익을 구했다. 그로써 그들은 이 땅에서 뿐만 아니라 저 하늘에서도 명성과 명예를 얻고, 성공을 거둔 사람들이 되었다. 그들은 하나님을 믿기 힘들어했지만, 하나님은 그들의 고뇌와 고통 속에 함께 계셨다.
다른 한편, 공산군에 피랍되어 처형된 열두 명의 목사들 가운데는 신도들과 동료 목사들로부터 존경을 한 몸에 받았던 기독교계의 탁월한 지도자로서 박 목사란 분이 소개되었는데, 그분의 아들이 자신의 아버지를 광신적인 사람이며, 독선과 과장된 신앙과 신에 대한 집념으로 밤낮없이 자신을 괴롭혔던 사람이라고 일컬을 만큼 철저한 신앙인이었다. 박 목사의 아들은 앞서 소개된 박 대위로써 동경에서 대학을 마친 엘리트이며, 아버지의 광신적인 신앙에 반감을 품고 무신론자가 된 자이다. 그의 아버지는 그런 아들을 악마에게 넘어간 자식이란 막말을 교인들 앞에서조차 서슴지 않았다. 그토록 신앙으로 똘똘 뭉친 박 목사가 공산군에 총살당하기 직전 일 분간씩 하고 싶은 기도를 하라는 허락을 받았을 때 “난 기도할 수 없어!”라고 말했고, 기도하지 않은 채 절대고독 속에서 죽음을 맞이하였다. 젊은 한 목사는 자신이 그토록 존경해 마지않던 박 목사의 이 추한 마지막 모습에 큰 충격을 받았고, 설상가상으로 신 목사가 그에게 하나님이 없다는 말을 귀띔하자 정신이 돌아버렸던 것이다.
전쟁터에 군사들을 내모는 알렉산더 대왕이나 나폴레옹 장군의 장엄한 연설처럼, 혹은 일제 말에 조선의 젊은이들은 태평양 전쟁터에 내몰기 위해서 춘원 이광수가 토해냈던 웅변처럼 오늘날에도 일부 추하고 비겁한 목사들의 설교는 언제나 힘이 있어 보이지만, 그 이면에는 군사들을 사지로 내모는 전쟁영웅들의 애국심을 불태우게 하는 그럴싸한 연설들처럼, 성도들의 유익을 위하기보다는 자기와 조직의 유익을 위해서 희생을 강요하는 설교들이 얼마나 많은가? 이것이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인간의 역사 속에서 활동하고 계심이 확실한 것을 알고서도, 지금처럼 느슨한 이름뿐인 기독교인의 삶을 지속해가겠는가라고 묻는 둘째 물음에 대한 답이다. 입과 말로는 하나님의 살아 계심과 삶 속에 개입하심을 철저히 믿고 강조하지만, 실제의 삶에서는 자기의 유익만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들은 자기 자신에게 실패한 사람들이고, 하나님에게도 실패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입으로 하나님을 말하지만, 하나님은 그들과 함께 계시지 않는다. 바울은 고린도후서 2장 17절에서 “우리는 수많은 사람들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아니하고 곧 순전함으로 하나님께 받은 것 같이 하나님 앞에서와 그리스도 안에서 말하노라”고 했다. 이 말의 뜻을 영어 NIV성경의 말씀으로 풀이하면, 다른 수많은 사람처럼 ‘이익’을 얻기 위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장사’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보내심을 받은 자들처럼 하나님 앞에서와 그리스도 안에서 ‘진실함’으로 말한다는 것이다. 바울의 말은 이익을 얻기 위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팔지 않는다는 뜻이다. 또 바울은 고린도전서 13장 5절에서 사랑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한다.”고 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자기의 유익만을 구하고 남의 유익을 구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에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시고, 인간의 유익을 구하신다. 그래서 그분은 인간의 고통에 동참하시고, 그 고통 가운데 계신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그것을 우리들에게 교훈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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