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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신(막 8: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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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동호
댓글 0 조회 12,221 2009.03.27 07: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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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신(막 8:11-13)

침례 요한으로 대표되는 유대교 신(神)의 이미지는 아버지였다. 아버지는 역시 노여움으로 벌을 주는 율법적인 이미지이다. 그것은 마치 메마른 사막에서 침례 요한이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고 외친 것처럼, 율법적이며, 준엄하고, 용서가 없는 엄부(嚴父)의 이미지이다. 
그러나 예수님으로 대표되는 기독교 신의 이미지는 어머니였다. 가난과 노동과 질병에 고통당하는 고단한 민중에게 필요한 것은 사해 호수 언덕의 유대사막처럼 삭막함이 아니라, 갈릴리 호수 언덕의 푸름과 같은 것이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예수님이 갈릴리 호수 언덕에서 삶에 지치고 상처 입은 민중에게 들려준 이 말씀은 인자한 어머니가 불러주는 자장가와 같은 것이었다.
예수님이 사해 호수 언덕 유대사막에서 받은 세 가지 시험은 예수님께 바라는 유대인들의 세 가지 희망사항이었다. “이 돌들로 떡덩이가 되게 하라”는 시험은 유대인들이 메시아의 자격으로 내세운 첫 번째 조건이었다. 제2출애굽사건을 주도할 메시아는 모세가 제1출애굽사건에서 보여준 것처럼 민중에게 만나를 내려 먹게 할 수 있어야 했다. 예수님이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한다”고 말씀한 것이나 바울이 유대인들은 표적을 구한다고 말한 것이 다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리라’고 말한 두 번째 시험은 바빌로니아, 페르시아, 헬라, 로마제국으로 이어지는 6백여 년 동안 땅바닥에 실추된 유대민족의 명예를 회복시킬 메시아인가를 증명해 보이란 뜻이었다. 민중이 예수님을 억지로 붙들어 왕으로 삼으려 했던 것이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지극히 높은 산에 데려가서 천하만국과 그 영광을 보여주며, 만일 엎드려 경배하면, 이것들을 다 주겠다’고 말한 세 번째 시험은 유대인들이 그토록 고대했던 다윗왕국의 권세와 영광을 천하만국 위에 세울 수 있는 메시아의 능력을 말한 것이다. 이런 것들은 유대인들이 꿈꿨던 다윗 왕가의 복원과 예루살렘 성전예배의 재건 그리고 유대교를 국교로 하는 세계통치를 실현하려는 세속적인 희망에서 비롯된 것이다. 예수님은 알렉산더 대왕처럼 강력하고 권세 있는 세속적인 메시아가 되어 달라는 유대민중의 이 세 가지 유혹을 강하게 뿌리쳤다.
유대민중이 예수님께 크게 실망하고 환멸을 느껴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빌라도 앞에서 외친 것이나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무력하고 쓸모없는 자로 여겨 팔아넘긴 것이 다 예수님께 걸었던 희망이 무너졌기 때문이었다. 예수님은 그들이 기대했던 세속적이고 정치적이며 군사적인 메시아가 되기를 거부했다. 그들의 희망은 수많은 인명의 피를 흘린 후에야 겨우, 그것도 일시적으로, 얻어질 수 있는 것이고, 궁극적이고 영원하며 영적인 안식과 평화를 가져다줄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빌라도 총독이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고 물었을 때, ‘네 말이 옳다. 하지만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다.’고 예수님이 대답한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유대인들이 추구했던 것은 땅의 것, 유한한 것, 일시적인 것이었고, 예수님이 주고자 했던 것은 하늘의 것, 무한한 것, 영원한 것이었다. 예수님이 가르치려 했던 것은 노여움의 신이 아니라 사랑의 신(神)이었다.
고독한 싸움
예수님이 고뇌하며 갈등했던 싸움은 세속적인 욕망과의 싸움이었다. 이 싸움에서 이겨 하나님의 뜻을 실현하려는 예수님의 노력은 끊임없는 기도로 나타났다. 예수님은 민중이 끈질기게 자기를 찾고 요구하는 것이 세속적인 욕망 때문이란 것을 아셨고, 그들의 유혹을 물리치셨다. 세속적인 욕망 때문에 표적을 구하는 민중에게 사랑의 신을 깨우쳐 주려했지만, 민중은 그의 곁을 떠났다.
복음서는 민중이 예수님한테서 사랑의 중요성을 배우려하기보다는 표적만을 구했기 때문에 예수님을 슬픔에 빠지게 했다고 전한다. “너희는 표적과 기사를 보지 못하면 도무지 믿지 아니하리라”(요 4:48)고 하셨고,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적을 구하느냐?”며 “마음속에 깊이 탄식하시며”(막 8:12) 요나의 표적밖에는 보일 것이 없다고 단호하게 말씀하셨다.
사랑의 하나님 혹은 하나님의 사랑을 말하기는 쉽지만, 그것을 현실에 증명하기란 쉽지 않다. 사랑은 대개의 경우 현실에 무력하고 직접 쓸모가 없기 때문이다. 예수님 시대에도 가슴을 찢는 불의와 절망에 깊은 상처를 입은 민중은 현실에 쓸모 있는 것만을 원했다. 사랑보다는 현실적인 것만을 원했다. 병든 자들은 병 낫기만을 바랐고, 굶주린 자들은 먹을 것만을 바랐고, 억압에 눌린 자들은 해방만을 바랐다. 민중이 바란 것은 표적뿐이었다. 예수님이 많은 표적을 행하였다는 복음서 기록의 이면을 잘 살펴보면, 슬픔과 질병과 굶주림의 고통 속에 있는 민중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며 진심으로 위로하고 돌보신 반면, 기적과 이사와 표적을 구하는 현실적이고 세속적인 이들과는 대립하신 것을 볼 수 있다.
고통을 겪는 사람들은 현실에 필요한 표적만을 구하지만, 정작 그들이 겪는 가장 큰 불행은 표적이 없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편에 서서 그들을 이해하고 사랑을 베풀자가 없는 것이다. 톨스토이가 󰡔사람이 무엇으로 사는가?󰡕에서 밝힌 것처럼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사랑이지 표적이 아니다. 따라서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기적을 행하는 하나님이 아니라, 사랑을 베푸는 하나님이시다. 그 하나님이 인간의 고통과 함께 계시다는 것을 증명해 보이기 위해서 예수님은 고통당하는 사람들과 함께 고통당하셨고, 슬퍼하는 사람들과 함께 슬퍼하셨으며, 최후에는 그들의 대속(代贖)을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
김남조 시인은 신앙에세이집 󰡔이제와 우리 죽을 때에󰡕란 책에서 이렇게 썼다. “진실은 오히려 상처투성이일 때가 많다. 막 원정 가위로 다듬고 난 봄날의 정원이기보다 겨울 하상(河床)의 밑바닥을 흐르는 찬 물줄기일 수 있다. 부서지고 피 흘리면서 다가오는 진실, 일그러지고 반은 불에 타 버렸을 수도 있는 진실, 어차피 사람은 이것을 맞아 주어야 한다. 상처 나고 피 흘리는 진실을 사랑해야 한다. 슬픔에 대한 사랑, 고난에 대한 사랑, 이를 거쳐 가지 않고서는 아무 것도 성취하지 못하며 어떤 생산과 창조에도 결코 다다를 수가 없다.”고 했다. 또 「생명」이란 시에서는 “금가고 일그러진 걸 사랑할 줄 모르는 이는 친구가 아니다. 상한 살을 헤집고 입 맞출 줄 모르는 이는 친구가 아니다.”고 했다. 예수님은 금가고 일그러진 민중을 사랑하셨고, 상한 살을 헤집고 입 맞추기를 원하셨으며, 그런 하나님을 민중의 친구로 소개하려고 하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예수님한테서 사랑의 하나님을 배우려 하지 않았고, 표적을 행하는 하나님만을 원했다. 따라서 민중은 사랑의 신을 말하는 예수님한테서 그들의 기대가 깨지고 환상이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민중만이 아니라, 제자들까지도 그랬다. 그래서 그들은 모두 예수님을 떠났고, 예수님은, 구상 시인의 시구처럼, 홀로써 가야만 했다. 제자들의 배반과 도피 속에서 백성들의 비웃음과 돌팔매를 맞으며 그분은 십자가의 길을 홀로써 가야만 했다.
배신자들의 대표 가룟 유다
지난 6백여 년간 바빌로니아, 페르시아, 헬라와 로마제국에 차례로 나라의 주권을 빼앗긴 채 살아온 유대인들에게 유월절 축제는 기대 반 우려 반으로 가슴 설레는 날이었고 긴장이 감도는 날이었다. 유월절은 제1출애굽사건을 기념하는 동시에 지난날의 역사를 되돌아보고, 그 고통과 역경과 방랑의 세월을 되씹으며, 이방민족에게 유린당한 약속의 땅의 회복을 염원하는 축제였다. 따라서 8일 동안 열리는 이 축제기간 동안 유대인들은 왠지 모를 흥분과 기대에 휩싸였고, 몸과 마음이 부풀어 오른 풍선과 같아서 누군가가 찔러만 주면 당장이라고 폭동이 터질 것만 같았다. 그래서 유월절은 민중봉기의 가능성이 연중 가장 높은 시기였고, 권력층의 사람들이 결코 긴장의 끈을 늦출 수 없는 숨 가쁜 한 주간이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것은 그의 행동을 예의 주시해왔던 사람들이 봉기의 때가 왔다고 믿게 할 만한 오해의 불길 속에 몸을 던진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예수님은 기대에 찬 사람들에게 ‘무언가를 터뜨려 줄 사람’으로 인식되었다. 제자들은 그간의 고생을 끝내고 명예와 권세와 재물을 얻게 될 순간이 눈앞에 왔다고 생각했고, 민중과 권력자들은 “이번 명절에는 과연 예수가 메시아임을 밝히 드러낼 것인가?”라는 기대와 우려를 갖고 있었다. 메시아의 출현을 막아야할 정치권에서는 예수님을 체포할 구실을 찾으려고 정보원들을 붙여 감시하면서 적절한 때를 기다리며 긴박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처음부터 민족해방과 다윗왕국의 영광재현을 위해서 반란을 일으켜 줄 것을 바라는 민중의 세속적인 기대와는 전혀 다른 사랑의 복음을 전하려 했기 때문에 민중의 환멸이 극에 달하게 될 것을 알고 계셨다.
예수님은 일찍부터 자신이 폭력을 수반하는 세속적인 메시아가 될 생각이 없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사랑의 메시아로 왔지, 정치적인 메시아로 오신 것이 아니었다. 예수님은 민중의 영원한 반려자이기를 바랐지, 통치자가 되기를 원치 않았다. 그러나 민중은 처음부터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고, 갖고 싶은 것만 갖고자 했다. 따라서 민중은 예수님의 사랑의 교훈을 이해하지 못했다. 아니 어쩌면 고의로 눈을 가리고 귀를 막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런 그들의 눈에 예수님은 현실문제에 눈이 어두운 무력한 사내 또는 쓸모없는 인간으로 비춰졌을 것이다. 예수님께 거는 기대가 컸던 만큼 민중의 환멸은 순식간에 증오로 바뀌었다. 그들이 빌라도 앞에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고, 어설픈 혁명가였을 바라바를 놓으라고 외친 것도 다 이 증오심 때문이었다.
제자들 가운데는 가룟 유다만이 예수님이 사랑의 하나님을 가르치기 위해서 민중의 기대를 저버린 채 분노의 불길 속에 몸을 던지려한다는 것을 알고 고뇌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의 마음은 정을 줬던 여인에게 환멸을 느껴 헤어지려 해도 쉽게 헤어질 수 없는 사내의 마음과도 같았을 것이다. 따라서 그의 배신은 예수님에게서 환멸을 느낀 모든 이들의 뜻을 대변하는 것이었다. 그는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랍비여, 당신은 하나님이 사랑이시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이 가혹한 현실에 사랑의 하나님은 어디에 있단 말입니까? 랍비여, 당신은 사랑보다 큰 것이 없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인간은 사랑보다 지금 당장 효과가 있는 것을 원합니다. 현실에 쓸모 있는 것밖에는 바라지 않습니다. 그것이 인간입니다.”
예수님은 유다의 이 고통을 알고 계셨다. 그분은 가슴을 찢는 불의와 절망에 깊은 상처를 입은 민중과 함께 계셨고, 영원한 동반자가 되기를 원하셨지만, 욕망의 신을 섬겼던 그들은 예수님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을 이해하셨고, 용서하셨으며, 그들을 위해서 기꺼이 홀로써 십자가의 길을 가셨다.
세속적인 욕망으로 가득한 우리의 마음에 부디 사랑의 하나님이 좌정하시게 되기를 기도한다. 세속적인 메시아를 고대했던 민중이나 스승을 배신했던 제자들은 다름 아닌 우리 자신들의 일그러진 자화상이다. 우리가 하나님께 얻기를 원하는 것이 세속적인 욕망의 채움인지, 아니면 그분의 어머님 품같은 사랑인지를 깊이 생각해봤으면 한다. 우리가 바라는 것이 기적을 행하는 하나님인지, 아니면 사랑을 베푸는 하나님인지를 생각해 봤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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