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과생명교회 주일설교

KCCS Digital Archive의 자료와 게시판을 분류별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설교자료 빛과생명교회 주일설교 KCCS Digital Archive

성도들이 의존할 능력, 겸손(사 14:12-20)

페이지 정보

profile_image
조동호
댓글 0 조회 12,245 2007.03.09 11:45

본문

성도들이 의존할 능력, 겸손(사 14:12-20) 잠언 16장 5절은 “마음이 교만한 자를 여호와께서 미워하신다.”고 했고, 18절에서는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다.”고 했습니다. 교만은 ‘너희는 나 이외의 신을 섬기지 말라’는 제1계명을 어기고 자신을 높이고 자기를 섬기는 ‘우상 죄’에 해당됩니다. 진위여부를 떠나서 대천사장 루시퍼가 교만에 빠져서 마귀가 되었다는 설은 굉장한 의미를 그 속에 담고 있습니다. 교만에 빠지면 가장 아름다웠던 것이 가장 추악한 것이 될 수 있고, 교만에 빠지면 가장 선했던 것이 가장 악한 것이 될 수 있고, 교만에 빠지면 가장 건설적이었던 것이 가장 파괴적인 것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사야서 14장 12-20절은 문자적으로 바벨론 왕과 그의 왕국의 멸망을 예언한 것이지만, 은유적으로는 대천사장 루시퍼의 타락을 암시하는 것으로 봅니다. 문자적으로는 ‘아침의 아들 계명성’이 바벨론의 왕을 말하는 것이지만, 은유적으로는 대천사장 루시퍼를 말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침의 아들 계명성’이 하늘에서 떨어졌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를 설명하는 구절이 13-15절입니다. “네가 네 마음에 이르기를 내가 하늘에 올라 하나님의 뭇별 위에 나의 보좌를 높이리라. 내가 북극 집회의 산 위에 좌정하리라. 가장 높은 구름에 올라 지극히 높은 자와 비기리라 하도다. 그러나 이제 네가 음부 곧 구덩이의 맨 밑에 빠치우리로다.” 음부는 죽음과 지옥을 말합니다. 교만의 결과는 패망이란 것을 말해줍니다. 창세기는 인류에게 찾아온 불행의 시초가 교만 때문이었다고 말합니다. 아담과 하와는 선악과를 먹고 하나님처럼 되려고 했다가 에덴동산에서 쫓겨났고, 생로병사의 악순환을 되풀이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호기심과 실험정신을 돋보이게 하는 내용이면서 동시에 추락의 위험을 경고하는 가장 잘 알려진 내용입니다. 유대인들은 이 열매를 지식의 열매라고 부릅니다. 지식에는 교만이 바늘과 실처럼 따라붙습니다. 그래서 선도 되고 악도 될 수 있습니다. 교만에 빠지면 인간의 장점인 호기심과 실험정신이 추악한 것이 되고, 악한 것이 되고, 파괴적인 것이 된다는 것입니다. 창세기는 사람들이 시날평지에다 바벨탑을 쌓아 하늘에 닿게 하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려고 했다가 언어에 혼잡을 벌로 받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인간의 과학과 기술을 돋보이게 하는 내용이면서 동시에 추락의 위험을 경고하는 잘 알려진 내용입니다. 과학은 인간에게 여러 가지로 편리함과 이로움을 주면서도 동시에 인간을 수렁에 빠뜨리게도 합니다. 과학과 기술문명을 선도하는 것이 인간을 대량으로 살상하기 위한 무기개발이었다는 점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습니다. 교만에 빠지면 인간에게 편리함과 이로움을 주는 과학기술도 추악한 것이 되고, 악한 것이 되고, 파괴적인 것이 된다는 것입니다. 창세기는 이런 사실을 경고하고 창조주이신 하나님 한분만을 섬길 것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겸손을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창조주와 피조물 사이의 좁힐 수 없는 간극(間隙)을 인정하고 하나님을 섬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같은 겸손한 신앙인들에게는 하나님께서 복을 주셨고, 하나님을 부정하고 무시한 자들에게는 무서운 벌을 내려 징계하셨다는 것입니다. 인간에게는 크게 두 가지 태도가 있습니다. 한 가지는 창세기의 가르침을 한낱 설화에 불과한 것으로 여겨 무시해버리는 것입니다. 이런 태도를 가진 사람들은 하나님을 부정하는 오만에 빠져서 필경은 멸망을 당하게 됩니다. 이사야서 14장 12-20절의 말씀도 그 점을 강조한 것입니다. 두 번째 태도는 창세기의 가르침을 겸손하게 받아드리고 하나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이런 태도를 가진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복을 주십니다. “하나님 잘 믿고 헌신적으로 살아왔는데, 하나님, 왜 내게는 복을 주지 않습니까?”라고 불평하기에 앞서서 자신의 문제점이 무엇인가를 깊이 살피는 겸손함이 우선되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첫째도 겸손, 둘째도 겸손, 셋째도 겸손입니다. 사람 앞에서 겸손하지 못한 것이 결국에는 하나님 앞에서 겸손하지 못한 것임을 아셔야 합니다. 목마른 자에게 냉수 한 컵 준 것이 우리 주님께 한 것이라고 말씀하지 않았습니까? 겸손하다는 것은 진지하고 신중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무작정 오르기보다는 내려올 일을 미리 걱정해 두는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한번 들어가면 나올 수 없는 미궁속이라도, 실타래를 풀면서 들어갔다가 나올 때 실을 따라 나오면 미궁을 탈출할 수가 있습니다. 무작정 들어가거나 무작정 오르기보다는 나올 때나 내려올 때의 일을 걱정해 두는 사람이 실타래를 준비하는 지혜로운 사람일 것입니다. 겸손하다는 것은 자기를 낮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서 인간의 몸으로 이 땅에 오신 일에서 가장 큰 의미는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내려오셨다는데 있습니다.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내려오는 것, 이것이 순리이고 자연의 법칙입니다. 물은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지 낮은 곳에서 높은 곳으로 흐르지 않습니다.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분수의 물도 오를 수 있는 곳까지 오르면 반드시 추락하고 맙니다. 물체는 받쳐놓거나 붙들어 매놓지 않으면 반드시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추락합니다. 물체를 치솟게 할 수는 있지만, 높이 오른 물체일수록 내려올 때에는 가속도가 붙게 되어 점점 빨라지고 중량도 커져서 추락의 정도가 심해집니다. 땅바닥에 발을 붙이고 사는 것이 자연스럽고 순리적인 것인데, 인위적으로 높이 오르려고 하면, 반드시 추락하여 상처를 입습니다. 그러나 스스로 낮추는 자는 높임을 받습니다. 우리 예수님께서는 하늘 보좌방에서 낮고 천한 이 땅에 내려오셨습니다. 우리 예수님은 모든 인위적인 신분들을 버리고, 낮고 천한 우리 인간들과 친구가 되셨고, 그들과 어울리셨습니다. 우리 예수님은 스승이었지만,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셨습니다. 우리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요 구세주였지만, 십자가에 죽기까지 자신을 낮추시고 하나님께 순종하셨습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그런 예수님을 높이 들어 하늘 우편 보좌에 앉히셨고, 모든 인간들로 하여금 그분 앞에 무릎을 꿇고 경배하게 하셨습니다. 교만은 고쳐야할 중병입니다.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교만은 질병이다’고 했습니다. 병을 고치지 않고 키우는 것은 위험한 일입니다. ‘교만’은 인간을 파멸로 몰아갈 무서운 내면의 적이란 사실을 눈치 챈 사람은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어리석은 사람의 문제점은 자기가 겸손하다고 생각한다는데 있습니다. 겸손을 가장한 ‘교만 병’에 걸려 죽어가고 있는데 정작 본인은 그 사실을 모른다는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습니다. 사도행전 27장 5절에 보면, 지금의 터키 땅 남쪽 해안에 루기아 도가 나옵니다. 옛날, 이곳 왕국에는 나라를 쑥대밭으로 만드는 ‘키마이라’라는 괴물이 있었는데, 왕은 그 괴물을 퇴치할 용사를 찾고 있었습니다. 키마이라는 머리가 사자와 산양을 합친 듯했고, 꼬리는 용과 비슷했는데, 입으로는 불을 뿜어냈기 때문에 이 괴물을 물리치고 살아 돌아온 용사가 없었습니다. 요새가 있으면 그 요새를 무너뜨리는 영웅이 있듯이, 이 키마이라를 물리칠 용사가 있었는데, 이름이 벨레로폰입니다. 벨레로폰이 괴물을 물리칠 수 있었던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었는데요, 첫째는, 예언자(폴뤼이도스)를 찾아가 자문을 구한 일입니다. 예언자는 키마이라를 죽이려면 하늘을 나는 페가소스가 필요하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벨레로폰이 말했습니다. “페가소스는 하늘을 나는 천마가 아닙니까? 천마는 지혜의 여신 아테나의 황금고삐에만 복종한다는데, 내가 무슨 수로 그 고삐를 구하겠습니까?” 예언자는 신에게 간절하게 간구하면 뜻을 이룰 수 있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둘째는, 벨레로폰의 경건한 신앙심 때문이었습니다. 길을 떠난 벨레로폰이 한 도시에 이르러서보니, 동쪽에는 지혜의 여신 아테나의 신전이 있고, 서쪽에는 애욕의 여신 아프로디테의 신전이 있었습니다. 두 신전 중 한 곳에서 하룻밤을 묵어가야하는데, 벨레로폰은 지혜의 신 아테나 신전을 선택했습니다. 애욕의 신 아프로디테 신전의 여사제들은 예배자들에게 웃음을 파는 성창들이었기 때문에 벨레로폰으로써는 여간 마음이 쓰이고 끌리는 것이 아니었지만, 예언자의 충고를 잊지 않았던 것입니다. 밤에 아테나 여신이 꿈에 나타났습니다. “저 애욕의 신전에 들지 않고 이 지혜의 신전에 든 너의 선택이 기특하다. 너에게 황금고삐를 내릴 것인즉, 페가소스를 붙잡아 뜻하던 바를 이루라.”고 하였습니다. 벨레로폰이 꿈을 깨어보니, 과연 황금고삐가 옆자리에 놓여 있었습니다. 그리고 벨레로폰은 천마 페가소스를 붙잡아 탔고 키마이라를 죽이는데 성공하였습니다. 한낱 인간에 불과한 벨레로폰이 그의 작은 믿음 때문에 날개 달린 천마 페가소스를 얻어 탈수가 있었고, 천마 페가소스의 날개 덕분에 괴물을 물리치고 영웅의 반열에 오를 수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만 벨레로폰의 마음에 ‘오만’(Hybris)이란 이름의 ‘죽음에 이르는 병’이 도지고 말았습니다. 오만은 마음속에 만들어지는 ‘자기우상’인데, 이 우상에 빠지면 여기에 상응하는 업보를 받게 되는데, 벨레로폰도 이 업보로 인해서 추락하고 맙니다. 벨레로폰은 천마 페가소스를 타고 신들의 보좌에까지 오르고 싶어졌습니다. 신들의 보좌에까지 오르고자한 오만함이 주변 사람들에게는 또 어떻게 나타났을지 충분히 짐작이 가고 남으실 것입니다. 벨레로폰은 페가소스를 타고 하늘궁전을 향해서 오르고 또 올랐습니다. 제우스가 가만히 보고 있으려니까, 벨레로폰이 하는 짓이 우습기도 하고 괘씸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날벼락을 던져서 태워버릴까 생각하다가 마음을 바꿔서 말의 몸에 붙어서 피를 빠는 강력한 ‘등에’ 한 마리를 만들어 페가소스의 꼬리 밑에 붙게 하여 피를 빨게 하였습니다. 페가소스가 괴로움을 참지 못하고 몸부림을 치는 바람에 그만 벨레로폰은 천마의 등에서 튕겨 나와 지상으로 추락하고 말았습니다. 날개 달린 페가소스가 몸을 날려 벨레로폰을 받아 줄만도 했지만, 그는 이미 신의 노여움을 받은 터라 페가소스로써도 그런 너그러운 자비를 벨레로폰에게 베풀 수가 없었습니다. 결국 벨레로폰은 ‘방황의 들’이라 불리는 알레이온 벌판에 떨어졌는데요, 갈대숲덕분에 목숨만은 잃지를 않았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는 절름발이에 장님까지 되어 사람들의 발길이 뜸한 길만 골라 세상을 ‘방황‘하다가 쓸쓸하게 죽었다고 합니다. 날개가 있다는 것은 크나큰 행운이요 축복일 수 있지만, 자만하는 순간 추락하게 된다는 귀중한 교훈을 주는 이야기입니다. 한 때 그 영광이 새벽별처럼 빛났던 자가 하나님의 보좌를 넘보는 오만과 자기숭배로 인해서 무덤에조차 묻히지 못하고, 깊은 웅덩이에 빠져, 버려진 나뭇가지처럼, 칼에 찔려 돌구덩이에 버려진 시체들에 짓눌리고, 발에 짓밟힌 시체같은 처량한 처지가 되고 말았다는 것이 오늘의 본문말씀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기를 낮추시고 십자가에 죽기까지 복종하셨고, 하나님께서 그런 예수님을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시고, 모든 이들로 예수님의 이름에 무릎을 꿇게 하시고, 또 모든 입으로 예수님을 그리스도와 주로 시인하게 하셨습니다. 만일 우리가 예수님을 본받고 하나님 앞과 사람 앞에서 우리 자신을 낮출 뿐 아니라,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리는 겸손한 자의 삶을 산다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을 높이시고 영광을 받게 하여 주실 것입니다. 사도행전 9장 31절, “주를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로 진행하여 수가 더 많아졌다.”는 말씀이 바로 이런 깊은 뜻을 가진 말씀입니다. 우리가 의지할 능력은 겸손입니다. 겸손은 약해 보이지만, 하나님의 능력을 일으키는 힘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성령님의 위로를 받고 한 해를 진행시켜간다면 반드시 큰 복을 받게 될 것입니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