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도들이 의존할 능력, 십자가(고전 1:1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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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도들이 의존할 능력, 십자가(고전 1:18-24)
십자가는 수치와 죽음의 상징입니다. 나약함과 무력함의 상징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십자가가 인류를 구원하는 하나님의 능력이 되고, 하나님의 지혜가 될 수 있습니까? 이것이 오늘 우리가 함께 생각해보기를 원하는 주제입니다.
성서는 우리가 의존할 능력이 십자가라고 말합니다. 십자가는 우리를 구원할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라고 말합니다. 어떻게 십자가가 그럴 수 있을까요? 이 물음에 답을 얻기 위해서는 그 십자가에 누가 못 박혔는가를 먼저 알아야 합니다. 성서는 그리스도가 못 박혔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못 박혔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십자가는 우리를 구원하는 하나님의 능력이 되고, 하나님의 지혜가 된다고 말합니다.
십자가에 못 박힌 개동이나 길동이가 우리를 구원하는 하나님의 능력이 되고 하나님의 지혜가 될 수는 없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힌 이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일 때만 가능한 일입니다. 십자가 나무가 무슨 마력이 있어서 능력이 있거나 지혜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 십자가에 못 박힌 하나님의 아들, 그분이 바로 우리를 구원하는 하나님의 능력이 되고, 하나님의 지혜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그 사실을 믿기 어렵다고 말합니다. 유대인들은 그리스도라 칭하는 자가 십자가에 못 박혔다면 그는 더 이상 그리스도가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리스도가 결코 십자가에 못 박힐 수 없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강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알렉산드로스나 카이사르와 같은 영웅으로 나타나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혔다는 사실은 매우 특별한 경우입니다. 역설적입니다. 약한 것이 강하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하나님이 이 땅에 보내신 그리스도가 영웅호걸이 아니었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나다니엘 호손의 단편 가운데 큰 바위 얼굴이 있습니다. 이 소설의 내용에 의하면, 어니스트란 소년이 어머니로부터 산마루에 우뚝 선 큰 바위 얼굴에 얽힌 전설을 듣게 됩니다. 장차 마을에 큰 바위 얼굴을 가진 큰 인물이 나올 것이라는 이야기였습니다. 소년은 큰 바위를 바라보며 영웅을 기다렸습니다. 세월이 흐르면서 어니스트는 마을 사람들이 큰 바위 얼굴이라고 믿었던 성공한 사람들을 만나게 됩니다. 그들 가운데는 사업가도 있었고, 군인도 있었고, 정치가도 있었고, 시인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 모두는 그 누구도 큰 바위 얼굴이 아닌게 판명났습니다.
어니스트는 큰 바위를 바라보며 사색하는 것을 즐겨했습니다. 그러는 사이에 배우지 아니한 지혜와 고매한 인격의 소유자로, 언행이 일치하는 목사로, 인자하고 장엄한 얼굴의 소유자로 서서히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결국 마을 사람들은 그에게서 큰 바위에 얽힌 예언이 성취된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이 소설에서 큰 바위 얼굴은 유대인들이 그토록 기다렸던 그리스도였다고 가정해 볼 수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알렉산드로스나 카이사르와 같은 영웅호걸을 기다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과 같은 영웅은 결코 하나님이 보내실 그리스도가 아닌 것이 드러났습니다. 그리스도는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는, 사람들이 “보기에 흠모할만한 아름다운 것이” 아무 것도 없는 한낱 가난한 동네의 목수였음이 드러났습니다. 그는 멸시를 받았고, 간고를 겪었으며, 찔림과 상함을 입었습니다. 그는 곤욕을 당하였고, 심문을 받았으며, 종국에는 사망에 이르렀습니다(사 53:1-12). 그런 그가 어떻게 그리스도가 되며, 우리 무리를 구원할 하나님의 능력과 하나님의 지혜가 된단 말입니까? 어떻게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가 우리를 구원하는 하나님의 능력이 되고, 하나님의 지혜가 된단 말입니까?
첫째, 하나님께서 그분을 다시 살리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다시 살리신 것이 없었다면, 그분의 죽음은 개죽음이었을 것입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5장 15-20절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또 우리가 하나님의 거짓 증인으로 발견되리니, 우리가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셨다고 증거하였음이라.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사는 것이 없으면,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시지 아니하셨으리라.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사는 것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사신 것이 없었을 터이요,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것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도 망하였으리니,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이생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리라.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또 고린도후서 13장 4절에서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약하심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셨으나 오직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으셨으니, 우리도 저의 안에서 약하나 너희를 향하여 하나님의 능력으로 저와 함께 살리라.”
둘째,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가 우리를 구원하는 하나님의 능력이 되고, 하나님의 지혜가 되는 이유는 하나님이 십자가에 죽은 예수님을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사도행전 2장 36절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이 정녕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바울도 빌립보서 2장 6-11절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셋째,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가 우리를 구원하는 하나님의 능력이 되고, 하나님의 지혜가 되는 이유는 하나님이 십자가에 죽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병을 치유하고 죽은 자를 살리셨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사도행전 4장 10절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고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건강하게 되어 너희 앞에 섰느니라.”
넷째,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가 우리를 구원하는 하나님의 능력이 되고, 하나님의 지혜가 되는 이유는 하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써 그를 믿는 자들에게 사죄의 은총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로마서 6장 6절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찬송가 184장의 가사처럼, 하나님은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써 우리의 죄를 씻고, 성케 하고, 희게 하고, 정케 하고, 사죄의 증거가 되게 하고, 죄를 속하게 하고, 의가 되게 하고, 평안함과 소망이 되게 하고, 영생을 얻게 하고, 찬미의 제목이 되게 하셨습니다.
다섯째,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가 우리를 구원하는 하나님의 능력이 되고, 하나님의 지혜가 되는 이유는 하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를 하나님과 화목케 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고,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이 되게 하고, 하나님과 원수 되었던 우리를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셨습니다. 바울은 에베소서 2장 16-19절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또 오셔서 먼 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고 가까운 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이는 저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가 외인도 아니요 손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
세상 사람들이 추구하는바 권세와 명예와 재물은 사람들을 살리지 못합니다. 그러나 약하고 부드러운 사랑과 자비와 희생은 사람을 살립니다. 세상 사람들에게는 이것이 피하고 싶은 것이고 미련하게 보이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이것을 우리를 구원하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라고 선언하였습니다. 약하고 부드러운 것이 오히려 더 강하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말해 준 것입니다. 노자(老子) 제76장 ‘계강’(戒强)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있습니다. “살아 있는 사람의 몸은 부드럽고 연약하지만 죽은 사람의 몸은 굳고 단단하다(人之生也柔弱, 其死也堅强). 살아 있는 만물과 초목은 부드럽고 연약하지만 죽은 모든 것은 말라 딱딱하다(萬物草木之生也柔脆, 其死也枯槁). 그러므로 굳고 강한 것은 죽은 것이고 부드럽고 연약한 것은 산 것이다(故堅强者死之徒, 柔弱者生之徒). 군대가 강하면 승리하지 못하고, 나뭇가지가 강하면 부러지고 만다. 굳고 강한 것은 아래에 있고, 부드럽고 약한 것이 위에 있다(是以兵强則不勝, 木强則共, 强大處下, 柔弱處上).” 또 노자(老子) 제78장 ‘임신’(任信)에는 또 다음과 같은 글이 있습니다. “세상에 물처럼 약하고 부드러운 것이 없다. 그러면서도 굳세고 강한 것을 이기는 데 물보다 더 나은 것도 없다. 무엇도 그 본성을 바꿀 것이 없기 때문이다(天下莫柔弱於水而攻堅强者, 莫之能勝, 以其無以易之). 약한 것이 억센 것을 이기고, 부드러운 것이 단단한 것을 이기는 것을 세상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지만, 실행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弱之勝强, 柔之勝剛, 天下莫不知, 莫能行).”
임종을 앞둔 어떤 늙은 스승이 마지막 가르침을 주기 위해 제자를 불렀습니다. 스승은 자기의 입을 벌려 제자에게 보여주며 물었습니다. “내 입안에 무엇이 보이느냐?” “혀가 보입니다.” “이는 보이지 않느냐?” “스승님의 치아는 다 빠지고 하나도 남아 있지 않습니다.” “이는 다 빠지고 없는데 혀는 남아 있는 이유를 알겠느냐?” “이는 단단하기 때문에 빠져버리고 혀는 부드러운 덕분에 오래도록 남아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스승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습니다. “그렇다. 부드러움이 단단함을 이긴다는 것, 이것이 세상사는 지혜의 전부이니라.”고 했다고 합니다.
세속적인 관점에서 볼 때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님은 바보일 수 있습니다. 2천 년 전 상당수의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기피하였고, 헬라인들은 어리석게 생각하였습니다. 실제로 예수님은 끊임없이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를 포기하고, 자기를 낮추는 바보요, 지상의 낮은 자리에 내려와 사람들과 함께 고난을 나눈 바보였습니다. 남들이 하는 것처럼 위를 향해 오르려하지 않고, 아래를 향해 내려왔기 때문에 바보였습니다. 바울이 빌립보서에서 지적한 것처럼, 천상의 영광보좌를 버리고, 죽기 위해 낮은 이 땅에로 임하신 순례자였기 때문에 바보요, 마태의 설명대로, 왕의 신분자로서 마구간의 말구유에 임한 순례자였기 때문에 바보요, 누가가 피력한 것처럼, 잘나고, 지체 높고, 부유한 자들과의 교제를 마다하고,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의 친구로 임한 순례자였기 때문에 바보요,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백마 탄 정복자 승리의 왕으로 임하기를 바랐는데도 죽음을 향해서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간 순례자였기 때문에 바보였습니다.
어떤 사람이 “너희를 미워하는 자를 선대하라”고 말했다면, 그렇게 말한 사람은 바보로 취급당하지 않고 배길까요? 또 그 사람이 “너희를 욕하고 저주하는 자를 위해 기도하고 축복하라.”고 했다면, 그렇게 말한 사람이 바보가 아니면 무엇이라고 생각되겠습니까? 또 그 사람이 “네 이 뺨을 치는 자에게 저 뺨도 돌려대라.”고 말했다면, 또 “겉옷을 뺏는 자에게 속옷도 금하지 말라.”고 말했다면, 또 “원수를 사랑하고 미워하지 말라”고 말했다면, 그 사람이 바보가 아니라고 믿을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요?
낙오자 되기 싫어서 저마다 한발자국이라도 더 빨리 올라가기 위해서 친구를 끌어내리고 형제를 짓밟는 세상에 예수님은 오히려 내려오셨습니다. 움켜쥐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는 세상이라고 부모도 친구도 때로는 자식에게도 손을 펴지 않는 세상에 예수님은 모든 것을 버리고 내려오셨습니다. 행색을 보아 말 걸고, 배경을 살펴 사람 사귀는 세상에 예수님은 그저 사람이니까 귀하다며 내려오셨습니다. 빈부귀천 가리지 않고, 사람이면 다 품에 안고, 피 흘려 마시우고, 살 찢어 먹이셨으니, 이런 말도 안 되는 사랑이 어디에 있습니까? 이런 바보 같은 사랑이 어디에 있습니까? 인류를 그토록 사랑하신 예수님은 바보가 아닙니까?
바보들의 순례는 아래로의 순례입니다. 세상 사람들의 가치관으로 볼 때에는 아래로의 순례가 어리석은 바보들의 순례일지 몰라도, 하나님의 가치관에서 볼 때에는 위대한 순례행진인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이들 바보들이야말로, 참으로 지혜로운 자들이요, 깨달은 자들이요, 눈뜬 자들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바보들을 구원하십니다. 하나님은 그런 바보들에게 은총을 베푸십니다. 하나님은 그런 바보들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주십니다. 하나님은 바보같이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을 축복하십니다. 그래서 십자가는 우리가 의존할 하나님의 능력이 되고 하나님의 지혜가 됩니다. 약한 것이 강한 것을 이긴다는 것, 바보 같은 것이 사람을 살린다는 것, 세상 사람들이 기피하고 어리석게 생각하는 십자가에 구원의 능력이 있다는 사실을 막바지에 이른 이 사순절에 우리 모두가 묵상의 주제로 삼았으면 합니다.
십자가는 수치와 죽음의 상징입니다. 나약함과 무력함의 상징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십자가가 인류를 구원하는 하나님의 능력이 되고, 하나님의 지혜가 될 수 있습니까? 이것이 오늘 우리가 함께 생각해보기를 원하는 주제입니다.
성서는 우리가 의존할 능력이 십자가라고 말합니다. 십자가는 우리를 구원할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라고 말합니다. 어떻게 십자가가 그럴 수 있을까요? 이 물음에 답을 얻기 위해서는 그 십자가에 누가 못 박혔는가를 먼저 알아야 합니다. 성서는 그리스도가 못 박혔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못 박혔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십자가는 우리를 구원하는 하나님의 능력이 되고, 하나님의 지혜가 된다고 말합니다.
십자가에 못 박힌 개동이나 길동이가 우리를 구원하는 하나님의 능력이 되고 하나님의 지혜가 될 수는 없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힌 이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일 때만 가능한 일입니다. 십자가 나무가 무슨 마력이 있어서 능력이 있거나 지혜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 십자가에 못 박힌 하나님의 아들, 그분이 바로 우리를 구원하는 하나님의 능력이 되고, 하나님의 지혜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그 사실을 믿기 어렵다고 말합니다. 유대인들은 그리스도라 칭하는 자가 십자가에 못 박혔다면 그는 더 이상 그리스도가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리스도가 결코 십자가에 못 박힐 수 없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강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알렉산드로스나 카이사르와 같은 영웅으로 나타나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혔다는 사실은 매우 특별한 경우입니다. 역설적입니다. 약한 것이 강하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하나님이 이 땅에 보내신 그리스도가 영웅호걸이 아니었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나다니엘 호손의 단편 가운데 큰 바위 얼굴이 있습니다. 이 소설의 내용에 의하면, 어니스트란 소년이 어머니로부터 산마루에 우뚝 선 큰 바위 얼굴에 얽힌 전설을 듣게 됩니다. 장차 마을에 큰 바위 얼굴을 가진 큰 인물이 나올 것이라는 이야기였습니다. 소년은 큰 바위를 바라보며 영웅을 기다렸습니다. 세월이 흐르면서 어니스트는 마을 사람들이 큰 바위 얼굴이라고 믿었던 성공한 사람들을 만나게 됩니다. 그들 가운데는 사업가도 있었고, 군인도 있었고, 정치가도 있었고, 시인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 모두는 그 누구도 큰 바위 얼굴이 아닌게 판명났습니다.
어니스트는 큰 바위를 바라보며 사색하는 것을 즐겨했습니다. 그러는 사이에 배우지 아니한 지혜와 고매한 인격의 소유자로, 언행이 일치하는 목사로, 인자하고 장엄한 얼굴의 소유자로 서서히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결국 마을 사람들은 그에게서 큰 바위에 얽힌 예언이 성취된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이 소설에서 큰 바위 얼굴은 유대인들이 그토록 기다렸던 그리스도였다고 가정해 볼 수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알렉산드로스나 카이사르와 같은 영웅호걸을 기다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과 같은 영웅은 결코 하나님이 보내실 그리스도가 아닌 것이 드러났습니다. 그리스도는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는, 사람들이 “보기에 흠모할만한 아름다운 것이” 아무 것도 없는 한낱 가난한 동네의 목수였음이 드러났습니다. 그는 멸시를 받았고, 간고를 겪었으며, 찔림과 상함을 입었습니다. 그는 곤욕을 당하였고, 심문을 받았으며, 종국에는 사망에 이르렀습니다(사 53:1-12). 그런 그가 어떻게 그리스도가 되며, 우리 무리를 구원할 하나님의 능력과 하나님의 지혜가 된단 말입니까? 어떻게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가 우리를 구원하는 하나님의 능력이 되고, 하나님의 지혜가 된단 말입니까?
첫째, 하나님께서 그분을 다시 살리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다시 살리신 것이 없었다면, 그분의 죽음은 개죽음이었을 것입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5장 15-20절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또 우리가 하나님의 거짓 증인으로 발견되리니, 우리가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셨다고 증거하였음이라.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사는 것이 없으면,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시지 아니하셨으리라.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사는 것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사신 것이 없었을 터이요,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것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도 망하였으리니,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이생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리라.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또 고린도후서 13장 4절에서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약하심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셨으나 오직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으셨으니, 우리도 저의 안에서 약하나 너희를 향하여 하나님의 능력으로 저와 함께 살리라.”
둘째,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가 우리를 구원하는 하나님의 능력이 되고, 하나님의 지혜가 되는 이유는 하나님이 십자가에 죽은 예수님을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사도행전 2장 36절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이 정녕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바울도 빌립보서 2장 6-11절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셋째,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가 우리를 구원하는 하나님의 능력이 되고, 하나님의 지혜가 되는 이유는 하나님이 십자가에 죽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병을 치유하고 죽은 자를 살리셨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사도행전 4장 10절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고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건강하게 되어 너희 앞에 섰느니라.”
넷째,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가 우리를 구원하는 하나님의 능력이 되고, 하나님의 지혜가 되는 이유는 하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써 그를 믿는 자들에게 사죄의 은총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로마서 6장 6절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찬송가 184장의 가사처럼, 하나님은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써 우리의 죄를 씻고, 성케 하고, 희게 하고, 정케 하고, 사죄의 증거가 되게 하고, 죄를 속하게 하고, 의가 되게 하고, 평안함과 소망이 되게 하고, 영생을 얻게 하고, 찬미의 제목이 되게 하셨습니다.
다섯째,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가 우리를 구원하는 하나님의 능력이 되고, 하나님의 지혜가 되는 이유는 하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를 하나님과 화목케 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고,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이 되게 하고, 하나님과 원수 되었던 우리를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셨습니다. 바울은 에베소서 2장 16-19절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또 오셔서 먼 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고 가까운 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이는 저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가 외인도 아니요 손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
세상 사람들이 추구하는바 권세와 명예와 재물은 사람들을 살리지 못합니다. 그러나 약하고 부드러운 사랑과 자비와 희생은 사람을 살립니다. 세상 사람들에게는 이것이 피하고 싶은 것이고 미련하게 보이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이것을 우리를 구원하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라고 선언하였습니다. 약하고 부드러운 것이 오히려 더 강하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말해 준 것입니다. 노자(老子) 제76장 ‘계강’(戒强)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있습니다. “살아 있는 사람의 몸은 부드럽고 연약하지만 죽은 사람의 몸은 굳고 단단하다(人之生也柔弱, 其死也堅强). 살아 있는 만물과 초목은 부드럽고 연약하지만 죽은 모든 것은 말라 딱딱하다(萬物草木之生也柔脆, 其死也枯槁). 그러므로 굳고 강한 것은 죽은 것이고 부드럽고 연약한 것은 산 것이다(故堅强者死之徒, 柔弱者生之徒). 군대가 강하면 승리하지 못하고, 나뭇가지가 강하면 부러지고 만다. 굳고 강한 것은 아래에 있고, 부드럽고 약한 것이 위에 있다(是以兵强則不勝, 木强則共, 强大處下, 柔弱處上).” 또 노자(老子) 제78장 ‘임신’(任信)에는 또 다음과 같은 글이 있습니다. “세상에 물처럼 약하고 부드러운 것이 없다. 그러면서도 굳세고 강한 것을 이기는 데 물보다 더 나은 것도 없다. 무엇도 그 본성을 바꿀 것이 없기 때문이다(天下莫柔弱於水而攻堅强者, 莫之能勝, 以其無以易之). 약한 것이 억센 것을 이기고, 부드러운 것이 단단한 것을 이기는 것을 세상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지만, 실행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弱之勝强, 柔之勝剛, 天下莫不知, 莫能行).”
임종을 앞둔 어떤 늙은 스승이 마지막 가르침을 주기 위해 제자를 불렀습니다. 스승은 자기의 입을 벌려 제자에게 보여주며 물었습니다. “내 입안에 무엇이 보이느냐?” “혀가 보입니다.” “이는 보이지 않느냐?” “스승님의 치아는 다 빠지고 하나도 남아 있지 않습니다.” “이는 다 빠지고 없는데 혀는 남아 있는 이유를 알겠느냐?” “이는 단단하기 때문에 빠져버리고 혀는 부드러운 덕분에 오래도록 남아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스승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습니다. “그렇다. 부드러움이 단단함을 이긴다는 것, 이것이 세상사는 지혜의 전부이니라.”고 했다고 합니다.
세속적인 관점에서 볼 때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님은 바보일 수 있습니다. 2천 년 전 상당수의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기피하였고, 헬라인들은 어리석게 생각하였습니다. 실제로 예수님은 끊임없이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를 포기하고, 자기를 낮추는 바보요, 지상의 낮은 자리에 내려와 사람들과 함께 고난을 나눈 바보였습니다. 남들이 하는 것처럼 위를 향해 오르려하지 않고, 아래를 향해 내려왔기 때문에 바보였습니다. 바울이 빌립보서에서 지적한 것처럼, 천상의 영광보좌를 버리고, 죽기 위해 낮은 이 땅에로 임하신 순례자였기 때문에 바보요, 마태의 설명대로, 왕의 신분자로서 마구간의 말구유에 임한 순례자였기 때문에 바보요, 누가가 피력한 것처럼, 잘나고, 지체 높고, 부유한 자들과의 교제를 마다하고,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의 친구로 임한 순례자였기 때문에 바보요,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백마 탄 정복자 승리의 왕으로 임하기를 바랐는데도 죽음을 향해서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간 순례자였기 때문에 바보였습니다.
어떤 사람이 “너희를 미워하는 자를 선대하라”고 말했다면, 그렇게 말한 사람은 바보로 취급당하지 않고 배길까요? 또 그 사람이 “너희를 욕하고 저주하는 자를 위해 기도하고 축복하라.”고 했다면, 그렇게 말한 사람이 바보가 아니면 무엇이라고 생각되겠습니까? 또 그 사람이 “네 이 뺨을 치는 자에게 저 뺨도 돌려대라.”고 말했다면, 또 “겉옷을 뺏는 자에게 속옷도 금하지 말라.”고 말했다면, 또 “원수를 사랑하고 미워하지 말라”고 말했다면, 그 사람이 바보가 아니라고 믿을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요?
낙오자 되기 싫어서 저마다 한발자국이라도 더 빨리 올라가기 위해서 친구를 끌어내리고 형제를 짓밟는 세상에 예수님은 오히려 내려오셨습니다. 움켜쥐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는 세상이라고 부모도 친구도 때로는 자식에게도 손을 펴지 않는 세상에 예수님은 모든 것을 버리고 내려오셨습니다. 행색을 보아 말 걸고, 배경을 살펴 사람 사귀는 세상에 예수님은 그저 사람이니까 귀하다며 내려오셨습니다. 빈부귀천 가리지 않고, 사람이면 다 품에 안고, 피 흘려 마시우고, 살 찢어 먹이셨으니, 이런 말도 안 되는 사랑이 어디에 있습니까? 이런 바보 같은 사랑이 어디에 있습니까? 인류를 그토록 사랑하신 예수님은 바보가 아닙니까?
바보들의 순례는 아래로의 순례입니다. 세상 사람들의 가치관으로 볼 때에는 아래로의 순례가 어리석은 바보들의 순례일지 몰라도, 하나님의 가치관에서 볼 때에는 위대한 순례행진인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이들 바보들이야말로, 참으로 지혜로운 자들이요, 깨달은 자들이요, 눈뜬 자들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바보들을 구원하십니다. 하나님은 그런 바보들에게 은총을 베푸십니다. 하나님은 그런 바보들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주십니다. 하나님은 바보같이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을 축복하십니다. 그래서 십자가는 우리가 의존할 하나님의 능력이 되고 하나님의 지혜가 됩니다. 약한 것이 강한 것을 이긴다는 것, 바보 같은 것이 사람을 살린다는 것, 세상 사람들이 기피하고 어리석게 생각하는 십자가에 구원의 능력이 있다는 사실을 막바지에 이른 이 사순절에 우리 모두가 묵상의 주제로 삼았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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