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과생명교회 주일설교

KCCS Digital Archive의 자료와 게시판을 분류별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설교자료 빛과생명교회 주일설교 KCCS Digital Archive

성도들이 의존할 능력, 창조사관(창 1:1-2)

페이지 정보

profile_image
조동호
댓글 0 조회 12,218 2007.04.14 16:04

본문

성도들이 의존할 능력, 창조사관(창 1:1-2)

창세기는 이스라엘 민족의 뿌리와 이동과 사상과 사명을 한 눈에 볼 수 있는 글입니다. 유대인들의 역사관은 창조사관입니다. 그 민족과 땅은 역사적으로 아주 오랜 기간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던 곳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불행했던 나라였고, 가장 처참하게 살았던 민족이었습니다. 그들의 땅은 아주 오랜 기간 그들의 무덤이었고, 그들은 그 무덤 속에 갇혔던 자들이었습니다. 그곳은 혼란스런 빈터였으며 어둠의 권세가 지배하던 곳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신은 언제나 그들 위에 있었고, 그들과 함께 했으며, 떠돌이였던 그들을 부르셨고, 약속의 땅으로 이동시키셨으며, 노예였던 그들을 해방시키셨고, 언약의 말씀으로 계명들을 주셨으며, 선민으로 택하셨고, 나라가 없던 그들에게 가나안 땅을 주셨습니다. 그곳이 비록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던 무덤 속과 같은 곳이었다 할지라도 그 위에 하나님의 신이 운행하던 곳이었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곳, 하나님의 신이 운행하던 곳에서 창조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어둠이 빛이 되고, 혼돈이 질서가 되고, 죽음이 생명이 되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동행하심이 있는 곳이면, 그곳이 비록 모래바람 몰아치는 삭막하고 황량한 사막일지라도, 버려진 두엄더미 같이 냄새나는 곳이라 할지라도, 그곳에서 꽃이 피고 샘이 솟고 양떼가 뛰놀고 마소가 풀을 뜯고 물을 마시는 젖과 꿀이 흐르는 옥토가 되고 에덴동산이 됩니다. 하나님이 동행하는 곳이면, 그곳이 비록 깊은 바다 속이라할지라도, 그곳에서 부활의 능력이 나타나고 창조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사막 같고, 두엄더미 같고, 바다 속 같았던 곳이 이스라엘 땅이고, 그곳에서 일어난 일들이 유대역사이고, 유대역사는 천지창조에서 시작됩니다. 그러나 그 역사가 다른 인류역사와 다른 것은 유대인의 역사가 철저하게 하나님이 개입하시고 관여하신 하나님의 경륜의 역사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보는 것, 곧 이스라엘의 역사를 하나님의 동행의 역사로 보는 것이 유대인들의 민족사관입니다.
유대인들의 민족사관은 창조사관입니다. 그들의 창조사관은 창조신앙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던 땅에 하나님의 신이 운행하시고, 그분이 말씀하시면 어둠이 빛이 되고, 혼돈이 질서가 되며, 죽음이 생명이 됩니다.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던 땅이 이스라엘 땅만은 아닙니다.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는 경험을 유대인들만이 하는 것은 아닙니다. 인류가 경험해온 것이고, 우리도 경험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우리들의 삶에 반드시 필요한 것, 그런 인류의 역사에 반드시 필요한 것, 그것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하나님이 수면 위에 운행하시고 계시다는 동행신앙입니다. 이 동행신앙에서 창조사관이 비롯되고, 창조사관은 우리들의 삶에 빛이 되고, 생명이 되고, 능력이 되고, 지혜가 됩니다.
본문의 말씀을 풀어보겠습니다. 먼저 ‘태초에 하나님이’란 말을 살펴보겠습니다. 창조이전 상태와 창조에 관한 학자들의 생각은 다양합니다. 2절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어둠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물 위에 움직이고 계셨다”는 말씀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3절에서 “빛이 있으라”고 말씀하기 이전에 이미 ‘땅’과 ‘물’이 언급되었고, 혼돈과 공허와 흑암 상태의 어떤 물질을 암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또 2절의 말씀은 1절의 말씀의 결과로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빛이 있기 이전 상태인 ‘땅’과 ‘물’과 혼돈과 공허와 흑암의 상태는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한 말씀의 결과로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보면, 1-2절과 3절 이하의 칠일창조의 말씀은 시간적인 간격이 생기게 됩니다. 그리고 이 시간적 간격, 즉 1-2절과 3절 사이의 시간적 간격이 과연 얼마나 될까 라는 궁금증이 생깁니다. 그러나 아무도 알 수가 없습니다. 다만 몇몇 유명한 신학자들(예: Unger, Scofield Bible)은 1-2절을 ‘원창조’라 부르고, 3절을 ‘재창조’라고 부릅니다. 이 원창조와 재창조 사이의 기간에 천사장 루시퍼와 그의 추종 천사들의 타락이 있었고, 이들이 변하여 사단이 되고, 악마들이 되었다고 보는 견해가 있습니다(계 12:7-17, 사 14:12-15, 겔 28:12-19).
그리고 유대인들은 3절 이하의 재창조, 곧 칠일창조 가운데서 인류를 창조하신 제6일째 날을 기념하여 설날로 지킵니다. 또 그날을 이스라엘 역사가 시작되는 날로 봅니다. 그날이 음력으로 가을추수 때인 티쉬리월 1일인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그날로부터 2007년 4월 15일 오늘까지를 5767년으로 계산합니다. 이 5767년의 기간은 원창조를 포함한 기간이 아니라, 재창조이후의 기간입니다.
원창조에서 재창조까지의 기간이 얼마나 되는지를 성경은 말해주지 않습니다. 그러나 과학자들은 이 기간이 수십억 년 또는 수백억년이나 된다고 말합니다. 중요한 것은 과학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어둠이 깊음 위에 있던 곳에 하나님의 영이 여전히 활동하고 계셨고, 혼돈과 공허와 어둠을 바꿔 빛이 있고, 질서가 있고, 생명체가 살아 활동하는 역동적인 곳으로 만드셨다는데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어둠을 빛이 되게 하신 하나님, 혼돈을 질서가 되게 하신 하나님, 죽음을 생명이 되게 하신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이 하나님이 지금도 우리와 동행하시면서 우리들의 어둡고 혼돈하고 주검과 같은 삶을 빛과 질서와 생명으로 바꿔주실 창조주이신 것을 믿으시고 어떤 경우에도 희망의 끈을 놓지 않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두 번째로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란 말을 보겠습니다. 히브리어로 하늘을 ‘샤마임’이라고 합니다. ‘샤마이’의 복수형이며, 항상 복수 형태로만 쓰입니다. 이처럼 하늘이 복수형으로 쓰이는 것은 고대 히브리인들이 하늘을 세 개의 층으로 구분하였기 때문입니다. 새들이 날아다니는 공중인 첫째 하늘, 해와 달과 별이 운행하는 우주인 둘째 하늘, 그리고 천사들이 거하는 셋째 하늘이 그것입니다. 바울이 고린도후서 12장 2절에서 셋째 하늘에 이끌러 간 자에 대해서 언급한 것도 바로 이 셋째 하늘과 관련된 것이라 봅니다.
히브리어로 땅을 ‘아레츠’라고 합니다. 사람과 생물이 거주하는 지구뿐 아니라, 땅 아래의 지하세계까지 포괄하는 말입니다. 결국 ‘천지’란 말은 하늘에서 땅 끝까지 이 우주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포함합니다. 천하의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창조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또 하나님 한분 말고는 모든 것이 다 피조물이란 사실을 말해 주는 것입니다.
피조물이란 것이 무엇입니까? 만들어졌다는 뜻입니다. 만들어진 것에는 완전한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부족합니다. 부족하기 때문에 완전하지 못하고 완전하지 못한 것은 거룩하지 못한 것이고, 거룩하지 못한 것은 죄가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 한분만 완전하시고, 완전하기 때문에 거룩하신 것입니다. 인간은 잘났거나 못났거나 다 만들어진 피조물이고, 피조물이기 때문에 부족한 존재이고, 부족하기 때문에 죄인인 것이고, 죄인이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평등한 것입니다. 죄인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떠나 살아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천지만물을 창조하셨다는 것은 천지만물이 다 하나님의 것임을 말하는 것입니다. 천지만물의 아버지가 하나님이신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천지대군 곧 우리 인간들의 어버이이십니다. 어버이가 자식을 버리는 것 보셨습니까? 자식은 어버이를 버릴망정 어버이는 자식을 버리지 않습니다. 어버이는 자식을 사랑합니다. 어버이는 자식을 위해서 희생을 감수합니다. 어버이는 자식의 부족과 허물을 다 감싸 앉습니다. 어버이는 자식의 실수와 과실을 다 용서합니다.
세 번째로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흑암’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호쉐크’는 해가 지거나 등불이 꺼지면 찾아오는 ‘자연적인 어둠’(15:17), 하나님께서 직접 자연법칙을 초월해서 오게 하시는 ‘초자연적인 흑암’(시 105:28, 암 8:9), 하나님의 종들을 통하여 오는 ‘기적적인 흑암’(출 20:21, 수 24:7) 등의 의미로 사용됩니다.
‘흑암’은 빛이 없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흑암’은 ‘고난’을 상징합니다(시 112:4, 사 5:30, 애 4:8). 그러나 이 고난은 신앙의 성숙을 가져옵니다. 또한 ‘흑암’은 ‘죄악’을 상징합니다(욥 18:6, 엡 5:11). 죄의 삯은 사망입니다(롬 6:23). ‘흑암’은 ‘타락’을 상징합니다(롬 13:12). ‘흑암’은 ‘미움’을 상징합니다(요일 2:9-10). 미움의 결과는 살인으로까지 이어질 수 있습니다(마 5:21-22). ‘흑암’은 ‘영적 소경’을 상징합니다(행 13:11). 인간이 증오심이나 분노의 감정에 사로잡히게 되면 사리를 분별하기 힘들어집니다. ‘흑암’은 ‘죽음’을 상징합니다(욥 10:21-22). 죽음은 생명이 없는 것입니다(요 1:4). ‘흑암’은 ‘지옥’을 의미합니다(마 22:13). 지옥은 영원한 어두움으로 표현됩니다. 마지막으로 ‘흑암’은 사단의 권세를 상징합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혼돈하고 공허하며 깊은 흑암의 권세에 직면하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모든 흑암의 권세, 혼돈과 공허를 빛과 질서와 생명으로 바꿔놓으셨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우리 신자들도 매우 자주 이런 흑암과 혼돈과 공허의 세력 앞에 놓이게 됩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흑암을 빛으로, 혼돈을 질서로, 공허를 생명에로 바꿔놓으신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도 하나님처럼 흑암을 빛에로, 혼돈을 질서로, 죽음을 생명에로 바꿔가는 경험들을 축적해가야 하는 것입니다.
네 번째로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를 살펴보겠습니다. ‘하나님의 영’은 히브리어로 ‘루아흐 엘로힘’이라 하며, 성령님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을 뜻하는 ‘엘로힘’은 복수 명사로써 삼위일체 하나님을 말합니다. 따라서 창조는 성부 하나님과 성령 하나님 그리고 성자 하나님의 합작 사역임을 암시하는 말씀입니다.
성령을 말하는 ‘루아흐’는 구약성경에 378회나 사용되었습니다. 이 하나님이 수면에 운행하셨다는 말씀은 마치 어미 새가 새끼에 대한 애정과 관심을 가지고 그 위에서 선회를 하듯이 성령님께서 원시 지구의 표면 위를 깊은 관심과 애정을 가지고 움직이고 계셨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수면 위에’란 말은 사물을 감각적으로 표현하는 히브리인들의 관용적인 표현으로써 성령님께서 원시 지구의 표면을 운행하실 때 얼굴과 얼굴이 맞닿을 정도로 근접한 상태에서 운행하셨음을 말해 해줍니다. 이는 사람이 살아갈 지구를 깊은 관심과 애정을 가지고 돌보셨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이처럼 원시 지구를 끊임없이 선회하셨던 성령님의 모습은 우주만물을 만드신 후에는 더욱 세밀한 관심과 사랑으로 특히 인간들에게 베풀어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혼돈과 공허와 깊은 흑암까지도 관심을 기울이시고 새롭게 하여 질서와 생명과 빛으로 바꿔놓으신 것을 보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혼돈과 공허와 흑암의 상태에 살아가는 우리 인간들에게 보다 깊은 관심과 애정을 갖고 계시고 고치시기를 원한다는 사실을 마음에 깊이 새겼으면 합니다. 수천 년에 걸친 고난과 시련 속에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지 아니하고, 유대민족의 오늘이 있는 것은 그들의 창조사관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겪는 혼돈과 공허와 흑암과 고통의 배후에 하나님이 언제나 동행하고 계시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