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과생명교회 주일설교

KCCS Digital Archive의 자료와 게시판을 분류별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설교자료 빛과생명교회 주일설교 KCCS Digital Archive

인간이란 무엇인가?(창 1:26, 2:7)

페이지 정보

profile_image
조동호
댓글 0 조회 12,203 2007.05.24 10:32

본문

인간이란 무엇인가?(창 1:26, 2:7)

왜 어떤 사람은 호의호식할 수 있는 충분한 돈이 있고, 건강이 있고, 학식이 있고, 가정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감사나 만족을 모른 채 지극히 사소하고 작은 일을 견디지 못하고 목숨을 끊는 것일까요? 그 같은 사람들 가운데는 연예인도 있었고, 대기업의 총수도 있었고, 의사도 있었고, 지난주에는 이 동네에서 한의원을 개업하고 있는 한의사 한 분이 목숨을 끊었습니다.
왜 어떤 사람은 극심한 역경과 고난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에게 희망의 빛이 되기도 하고, 불세출의 걸작을 남기는 것일까요? 그러한 사람들 가운데는 예수님이 있었고, 헬렌 켈러와 테레사가 있었고, 스티븐 호킹이 있습니다. 사마천은 돈 50만 냥이 없어서 거세형을 받고 남자구실을 못했지만, 좌절하지 않고 󰡔사기󰡕(史記)라는 걸작을 남겼고, 손자는 발을 잘리는 단근형을 받아 절름발이가 되고서도 그 유명한 󰡔손자병법󰡕을 남겼습니다.
 어떤 사람은 이미 가진 게 많은데도 더 가지려고 발버둥을 치는가하면, 권정생 선생처럼 수입이 넉넉할 때나 부족할 때나 늘 살던 대로 가난한 삶을 실천하면서 늘어난 수입을 어려운 이웃을 돕는데 쓰는 사람도 있습니다. 
지난 17일(2007.5.17) 타계한 권정생 선생을 두고 매스컴에서는 ‘성자’라는 말을 서슴없이 쓰고 있습니다. 학력이라고 해봐야 초등학교 졸업이 다고, 70평생을 결핵과 싸우며, 5평 남짓한 흙담집에서 살다간 그를 두고 사람들은 예수님에 가장 가까운 성자였다며 칭찬일색입니다. 살았을 적에 그를 찾아갔던 사람들 가운데는 그에게 큰절을 올렸다는 목사겸 기자인 사람도 있고, 그를 이 시대의 훌륭한 지식인이라고 말한 사람도 있고, 그에게 크게 감명을 받고 눈물을 흘렸다는 사람도 있습니다.
왜 사람들은 높은 신분과 학식을 소원하면서도 못 배우고 천한 신분의 권 선생에 열광하는 것일까요? 도대체 그에게 무슨 특별한 것이 있었을까요? 2007년 5월 22일자 국민일보 ‘문화산책’에 손수호 기자가 쓴 “권정생 선생과 나눈 수박”이란 글에 보면, “그의 삶은 거룩했다. 얼굴은 경건했고, 눈은 깊었다. 입 매무새가 단정한 만큼 논리도 정연했다. 세상을 보는 태도는 선하고, 진지하고, 치열했다. 인공배설을 하며 고환에 결핵을 앓는 고통 속에서도 주옥같은 작품을 지어냈다. 몸뚱아리 하나 건사하기 힘든 조건에서도 공동체의 미래에 대해 끝없이 걱정하는 지식인이었다.”고 적고 있습니다.
권정생은 비록 가난했고, 질고에 시달렸고, 길가에 뒹구는 오물처럼 뒹굴며 살았지만, 그의 삶은 거룩했고, 경건했고, 선했고, 진지했고, 세상의 악과 싸우는 데는 치열했다는 것입니다.
그가 평생을 마음에 담고 살았을 성구를 신약에서 하나, 구약에서 하나씩을 생각해 봤습니다. 모두가 예수님에 관련된 성구들입니다.
[누가복음 9장 58절]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 
[이사야 53장 2-3절]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버린 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 않음을 받는 자 같아서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권정생 선생은 교회 주일학교 교사였습니다. 그에게서 어릴 적에 배웠던 한 성도는 말하기를, “그는 스승이자 어버이셨습니다. 그분의 삶은 오늘날 우리가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할 것인가를 성찰하게 하십니다.”고 했습니다. 또 어떤 분은 멍석 깔린 예배당 문간방에서 동네 꼬맹이들에게 이야기를 들려주시면 자리를 뜰 줄 몰랐다고 말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분의 삶에서 자신의 초라함과 부끄러움을 느낀다고 말합니다.
왜 사람들은 건강하기를 원하고, 부자 되기를 소원하면서 질고와 가난에 찌들게 산 권정생 선생에 열광하는 것일까요? 권정생 선생의 성공과 유명세는 그가 실천한 가난함과 그가 당한 질고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가난과 질고와 고독이 그를 ‘성자’로 빚어낸 것입니다. 그의 경우에서 보면,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이 당연하고 지당해 보입니다. 사람들이 성자의 삶에 열광하는 이유는 자신이 성자가 될 수 없거나 성자가 되기를 원치 않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자기가 할 수 없거나 하지 못하는 일을 성자로부터 대리만족을 얻고자 하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좋은 의미에서 사람들은 성자의 삶을 본받고 싶어 하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복음서에 보면, 예수님의 말씀과 행동에 권세가 있었다는 기록이 많습니다. 권정생 선생에 대해서 써놓은 글들을 보면 그와 비슷한 권세가 그에게서도 느껴집니다. 꼭 필요한 만큼만 갖는 것, 사람답게 사는 것, 존귀한 삶이든 천한 삶이든 자신의 삶을 희생하여 꽃을 피우게 하고 열매를 맺게 하는 것, 자신을 낮춰 이웃을 섬기며 사는 것에 진정한 권세가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인간이 무엇입니까? 창세기 1장 26절과 2장 7절은 인간이 무엇인가를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인간은 첫째로 만들어진 존재란 것이고, 그러나 둘째로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따라 만들어진 만물의 으뜸이란 것이며, 셋째로 하나님께서 그 코에 생기를 불어넣어 만든 육과 영으로 된 영적인 존재란 것입니다.
첫째, 인간은 피조물입니다. 인간은 만들어졌습니다. 만들어졌기 때문에 유한하고, 유한하기 때문에 부족합니다. 부족하기 때문에 완전하지 못합니다. 완전하지 못하기 때문에 거룩하지 못하고, 거룩하지 못하기 때문에 의롭지 못합니다. 인간은 만들어졌기 때문에 신(神)이 아닙니다. 신(神)이 아니기 때문에 완전하지 못하고, 완전하지 못하기 때문에 약하고, 약하기 때문에 오류나 죄를 범합니다. 그러므로 피조물은 필연적으로 또는 운명적으로 죄인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또 피조물이기 때문에 병에도 걸리고, 가난하기도 하고, 고통과 슬픔을 겪기도 하고, 외로움을 겪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이 동식물과 다른 것은 하나님의 특별한 관심과 사랑 가운데서 만들어진데 있습니다. 비록 인간이 하나님처럼 완전하지는 못하지만, 다른 피조물과는 특별한 차이가 있다는 것을 부정하지 못할 것입니다.
인간이 만들어진 존재란 것을 알면, 자기를 만드신 참 신(神)이 계시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 신이 창조주 하나님이신 것을 알면, 그분이외의 것은 다 만들어진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만들어진 것은 만드신 하나님 한분 앞에서 모두가 평등하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차별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남녀노소빈부귀천의 차별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여기서 좀더 발전하게 되면, 인간과 동식물과의 차별도 느낄 수 없게 되어 자연을 사랑하게 되고 생명을 존귀한 것으로 여기게 됩니다.
인간이 만들어진 존재란 것을 알면, 창조주 하나님 말고는 그 어느 곳에도 신성(神聖)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 한분만이 경배와 찬양의 대상이란 것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모든 거짓 신들을 거부하게 됩니다. 명예의 신, 권력의 신, 황금의 신을 거부하게 됩니다. 자만의 신, 오만의 신도 거부하게 됩니다. 이와 같은 것들은 모두 다 성서가 배격하는 우상들이고, 마귀의 권세아래 있는 것임을 알게 됩니다.
인간이 만들어진 존재란 것을 알면, 마귀나 그 세력들에게 두려움을 품지 않습니다. 마귀도 귀신도 다 피조물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예배의 대상이 아닙니다. 두려움의 존재가 아닙니다. 따라서 마귀나 귀신들에게 제사를 바치지 않습니다.
인간이 만들어진 존재란 것을 알면, 창조주 하나님께 예배할 의무를 알게 됩니다. 인간이 만들어진 존재란 것을 알면, 자신이 책임적 존재란 것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께는 예배하고 섬겨야할 책임을 알게 되고, 이웃들을 사랑하고 섬겨야할 책임을 알게 되고, 자연을 잘 관리하고 보전해야할 책임을 알게 됩니다. 이 책임을 다하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가 사는 사회가 천국이 되어가지 못하고, 오히려 지옥으로 변해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인간이 만들어진 존재란 것을 알면, 자기가 한없이 부족한 존재요 죄인이란 것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겸손을 배우게 됩니다. 용서를 배우게 됩니다. 인내를 배우게 됩니다. 사랑을 배우게 됩니다. 노력을 배우게 됩니다. 인간은 부족함을 채워가는 존재이지, 결코 채워진 존재가 아니란 것을 알게 됩니다.
둘째, 인간은 만물의 영장입니다. 창세기 1장 26절에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고 적고 있습니다. 이렇게 성서는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하나님의 모양대로 지어진 존재’라고 말합니다. 성서이외의 평가들을 보면,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치적 동물’로, 프로타고라스는 ‘만물의 척도’로, 호머는 ‘최약(最弱)의 존재’로, 세네카는 ‘사회적 동물’과 ‘이성적 동물’로, 소포클레스는 ‘신기한 존재’로, 셰익스피어는 ‘만물의 영장’으로, 파스칼은 ‘신과 동물의 중간적 존재’와 ‘생각하는 갈대’로, 엥겔스는 ‘관념의 생산자’로, 사르트르는 ‘자유의지의 행동인’으로, 하이데거는 ‘존재의 목동’으로, 오펜라이머는 ‘우주의 불량소년’으로 평가했습니다. 이밖에도 특성에 따라서 ‘웃는 동물’, ‘옷을 입는 동물’, ‘말을 하는 동물’, ‘불을 이용하는 동물’, ‘문자가 있는 동물’, ‘세금을 내는 동물’ 등등으로 설명되고 있습니다.
또 인간에게 붙여진 학명(學名)도 다양합니다. 최초로 붙여진 학명은 잘 알려진 대로 ‘호모 사피언스’입니다. 인간이 다른 동물과 달리 영적인 지혜를 소유했다는 뜻입니다. 이후로 경제적인 인간이란 뜻으로 ‘호모 에코노미쿠스’, 공작인이란 뜻으로 ‘호모 파베르’, 기능적 인간이란 뜻으로 ‘호모 하빌리스’, 형이상학적 인간이란 뜻으로 ‘호모 메타피시쿠스’, 광포한 인간이란 뜻으로 ‘호모 데멘스’, 상징적인 인간이란 뜻으로 ‘호모 심볼리쿰’, 놀이하는 인간이란 뜻으로 ‘호모 루덴스’, 야만적 인간이란 뜻으로 ‘호모 바르바리타스’ 등으로 불렸습니다. 최근에는 ‘호모 노에티쿠스’라는 학명이 유행을 하고 있습니다. 신성한 정신적 충동에 의해서 자신의 의식이 우주 전체와 하나라는 사실을 깨달은 존재란 뜻입니다.
인간에 대한 이런 모든 평가가 가능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따라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아마 인간을 다른 동물과 구별되게 하는 것이면서 또한 하나님과 공통으로 갖고 있는 무엇인가일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눈 코 입 귀 팔 다리와 같은 육체의 형상이나 모양으로는 설명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오히려 인간본성의 질에서 찾아야 할 것입니다. 생각할 수 있고, 판단할 수 있고, 결정할 수 있고, 느낄 수 있고, 표현할 수 있고, 말할 수 있는 지성과 감성과 의지를 담은 ‘인성’과 ‘영성’을 제외하고는 달리 하나님과 인간이 닮아 있는 부분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과 인간에게 공통으로 있는 특성은 인성과 영성입니다. ‘인성’이란 지성(혹은 이성), 감성, 의지, 그리고 관계성을 말하는 것이고, ‘영성’이란 영이신 하나님의 신성의 일부를 부여받은 것을 말합니다. 동물에게 영성은 없습니다. 다소의 지능과 감정과 의지와 관계성은 있지만, 인간처럼 그 지성으로 학문을 창출할 수 없고, 그 감정을 문화 예술로 승화시킬 수 없으며, 본능 말고는 의지적 결단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관계성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동물들도 사회성을 갖고는 있지만, 인간처럼 복잡한 형태의 사회구조나 관계형성을 이룰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 네 가지 인성의 요소는 사람을 사람 되게 하는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의 형태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 네 가지 요소를 가진 인간은 하나님에게는 예배자로서, 만물에게는 청지기로서, 하나님께는 예배와 찬양을, 만물에게는 관리와 보전의 관계를 원만하게 해결해 나갈 수 있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인간이 만물의 으뜸이기 때문에 다른 동물과는 차원이 다른 높은 이상과 철학과 윤리를 실천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예수님, 슈바이처, 테레사, 권정생과 같은 성자나 성녀가 가능한 것입니다.
셋째, 인간은 영혼을 가진 존재입니다. 창세기 2장 7절에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생기’는 호흡을 뜻하고, ‘생령’은 살아있는 짐승이란 뜻에 불과하지만, 하나님께서 사람이외에 다른 피조물들은 이와 같은 특별한 방법으로 만들지 않았기 때문에 ‘생기’는 단순한 호흡 이상의 것을 암시하는 것이고, ‘생령’은 단순한 짐승 이상의 것을 암시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드실 때 당신의 형상과 모양을 따라 만드셨기 때문이며, 하나님의 호흡은 하나님의 영의 분출과 파생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이 말은 하나님의 영원하신 영에서 인간을 위한 유한한 영이 파생되는 것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하나님으로부터 생기를 받고 생령이 되었다는 말씀은 영혼을 가진 존재가 되었다는 뜻이 되는 것입니다. 또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하나님의 모양대로 지음을 받았다는 말은 하나님이 영이시기 때문에 인간을 하나님처럼 영적인 존재로 만드셨다는 뜻이 됩니다. 그래서 인간은 영이신 하나님으로부터 다소의 신성을 부여받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로 인해서 인간은 비록 피조물이지만 하나님과 영적인 교제를 가질 수가 있습니다. 교제만 가능한 것이 아니라, 아시시의 수도승 프랜시스(Francis of Assisi/1182-1226)와 여기에 버금가는 권정생처럼 영성을 높여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런 특별한 은혜를 입은 영적인 존재임을 자각하고 하나님과 깊은 영적인 교제를 쌓아가야 합니다. 인간은 영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육체만을 위해서 살 수가 없습니다. 비록 인간이 부족하고 연약하고 죄짓기 쉬운 존재이지만, 교양과 수양에 따라서는 예수님처럼, 슈바이처처럼, 테레사처럼, 권정생처럼 성자나 성녀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형상과 모양을 따라 만드시고 인성과 영성과 영혼을 불어넣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짧은 인생 천하게 살지 맙시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