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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갈래 길(계 14: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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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동호
댓글 0 조회 12,748 2007.06.21 10: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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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갈래 길(계 14:1-12)

인생에는 두 갈래 길이 있습니다. 주후 100년경에 쓰인 󰡔열두 사도들의 가르침󰡕, 일명 「디다케」란 책에 “두 가지 길이 있습니다. 하나는 생명의 길이고 다른 하나는 죽음의 길인데, 두 길의 차이가 큽니다.”라고 적고 있습니다. 성서 역시 두 갈래 길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넓고 편한 멸망의 길이 있는가하면 좁고 거친 생명의 길이 있습니다. 두말할 나위 없이 우리 성도들이 걸어야할 길은 좁은 길, 생명의 길입니다.
정채봉 잠언집, 󰡔날고 있는 새는 걱정할 틈이 없다󰡕란 책에 보면, “두 갈래 길”이란 제목의 글이 있습니다.
콩 형제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곡물상회에서 다른 콩들 속에 섞여 있었습니다. 어느 날, 형 콩은 콩나물 장수한테 팔려갔습니다. 주인은 그를 다른 콩들과 함께 어두운 통 속에 앉혀 놓고 언제고 잠들기 좋게 따뜻하게 방을 덥혀 주었습니다. 물도 먹고 싶을 때마다 흠뻑흠뻑 마셨습니다. 참으로 쑥쑥 커가기에 부족함이 없는 환경이었습니다.
반면 아우 콩은 농부한테로 팔려갔습니다. 그의 주인은 그를 햇빛이 내리는 밭에다 심었습니다. 밤에는 춥고 낮에는 더운 흙 속이었습니다. 물도 입이 부르트도록 빨아야 간신히 목을 축일 정도였습니다. 고통스러운 환경이었습니다.
그러나 남이 해주는 대로 편히 먹고 자란 형 콩은 사람들의 한 끼 국거리로 그 삶을 마쳤습니다. 다만 제힘으로 뿌리를 내리고 자란 아우 콩만이 백 배, 삼백 배의 후손을 보았습니다.
인생의 길에는 한 끼 국거리로 삶을 마칠 넓고 편한 멸망의 길이 있는가 하면, 백 배, 삼백 배의 후손을 볼 좁고 거친 생명의 길이 있다는 교훈의 글입니다.
정채봉은 “세 친구”란 글에서 이런 글도 적고 있습니다. 인간에게는 ‘재물’과 ‘친척’과 ‘선행’이라는 세 친구가 있는데, ‘재물’을 위해서 목숨을 걸만큼 인간은 그 친구를 위해서 온 열정과 정성을 쏟습니다. 그렇지만 정작 인간이 죽을 때는 단 한 발짝도 동행해주지 못하는 친구가 ‘재물’이란 것입니다. 두 번째 친구인 ‘친척’은 ‘재물’에 비해서 열정이나 정성이 많이 떨어지지만, 세 번째 친구인 ‘선행’에 비하면 그마나 정성과 열정을 많이 쏟는 편입니다. 이 두 번째 친구인 ‘친척’은 인간이 죽을 때 공동묘지까지 따라와 주지만 거기서 돌아설 수밖에 없는 친구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 친구인 ‘선행’은 솔직히 마지못해서 어쩌다 한 번씩 찾는 친구에 불과하지만, 정작 인간이 죽을 때는 천국까지 동행해 주는 진짜 친구라는 것입니다.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고.... 하늘에 쌓아 두라”(마 6:19-20)는 예수님의 충고를 마음에 새겨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 인간은 재물이나 친인척이 진정한 친구라 생각되어서 그 친구들에게 한평생 열정과 정성을 쏟지만, 실상은 그들이 우리 인간의 내세를 보장하는 친구들이 되지 못합니다. 그렇지만 이 땅에서 쌓는 선행들은 사후에까지도 명성과 생명을 지켜주고 보장해 줍니다. 좁고 험하지만, 선한 길이야말로 우리를 생명에로 끝까지 인도해줄 동행자입니다. 사람들이 모두 다 동일한 길을 걷는 것 같고, 동일한 물과 동일한 포도주를 마시는 것 같아보여도 그 끝이 첨예하게 다릅니다. 그 끝이 어떻게 다른가를 보여주는 것이 계시록 14장 1-12절의 내용입니다.
계시록 14장 1-7절을 보면, 좁고 험하지만, 생명의 길을 걸었던 사람들이 나옵니다. 이 사람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렸던 사람들입니다. 고문과 탄압에도 불구하고 우상숭배로 자신들을 더럽히지 아니하고, 끝까지 신앙의 정절을 지켰던 사람들입니다. 거짓말하지 않고, 흠이 없는 신앙생활로 예수님의 인도하심대로 순종하며 따랐던 사람들입니다. 이 사람들이 하나님의 보좌 앞 불이 섞인 유리바다 해변에 서서 새 노래, 승리의 노래, 모세의 노래, 예수의 노래를 부르고 있습니다(계 15:2-3). 이들은 다시는 배고프지 않고, 목마르지 않고, 더위에 쓰러지지 않고, 햇빛에 화상을 입지 않고, 생명수 샘물을 마시게 되고, 모든 눈물을 씻기우고, 구원의 흰옷을 입으며, 승리의 월계관을 쓰게 될 자들입니다(계 7:16-17).
또 8-11절을 보면, 넓고 편하지만, 멸망의 길을 걸었던 사람들이 나옵니다. 이들은 자기들도 우상숭배 하였을 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까지 우상숭배를 강요했던 자들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진노의 포도주를 마실 자들이며, 유황이 타는 불 못에서 고통을 당하고, 그 고난의 연기로 인하여 밤낮 쉼을 얻지 못하는 자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12절은 우리 성도들이 인내로써 신실하게 믿음을 지켜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말합니다.
물과 포도주는 성경에서 두 가지 의미로 쓰이고 있습니다. 한 가지는 생명을 상징하는 부활에 쓰이고, 다른 한 가지는 죽음을 상징하는 심판에 쓰입니다. 물과 포도주가 어떤 사람에게는 생명과 부활이 되기도 하고, 또 어떤 사람에게는 죽음과 심판이 되기도 합니다.
성서에서 샘물처럼 작은 물은 생명수나 성령 혹은 씻음을 상징하지만, 강과 호수 또는 바다와 같이 큰물은 죽음을 상징합니다. 포도주도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보듯이 기쁨과 부활과 생명을 상징할 때가 있고, 계시록에서 보듯이 진노와 죽음을 상징할 때가 있습니다. 포도주는 마시면 쓰고, 색깔이 붉기 때문에 고통과 피 흘림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인간에게 주어진 축복 중에 하나가 물입니다. 아직까지 다른 행성들에 물이 존재한다는 기사를 읽어보지 못했습니다. 인간은 물 때문에 살고, 물 때문에 재난을 당하는가하면, 물 때문에 목숨을 빼앗기기도 합니다. 물은 인간에게 생명이 되기도 하고 죽음이 되기도 합니다. 창세기 1장을 보면, 물은 처음에 죽음을 상징하는 흑암 가운데 있었고,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빛 가운데 있게 되었습니다. 종교학자 미르치아 엘리아데(Mircea Eliade)의 지적처럼 물 위로 떠오르는 것은 창조와 부활과 생명을 상징하는 것이지만, 물속에 가라앉는 것은 죽음과 해체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물은 생명을 낳기도 하고 해체와 죽음을 낳기도 하는 것입니다. 기독교에서 행하는 침례나 세례가 죽음과 매장, 삶과 부활을 상징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태초에 물이 우주형성에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했듯이, 물은 인간의 형성에도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양수’라 불리는 물은 태아를 보호하고 지켜주는 역할을 합니다. 양수는 외부의 충격에서 태아를 보호하고, 태아의 몸을 고루 발달시켜 주며, 태아가 양수에 떠 있어 팔다리를 자유롭게 움직일 수 해주며, 탯줄에 감기지 않도록 보호해 줍니다. 또 양수는 항균과 체온유지 작용도 합니다.
인간은 물 없이 살 수 없습니다. 그래서 물을 마셔야 살 수 있고, 물로 씻고, 농사짓고 전기를 얻습니다. 이렇듯 누구나 다 물로 사는 것 같지만, 결국에는 물로 인해서 영생을 얻게 될 성도들이 있는가하면, 물로 인해서 멸망에 이르게 될 자들이 있습니다.
물에도 두 갈래 길이 있습니다. 물은 생명을 상징하기도 하지만, 죽음의 세계를 상징하기도 합니다. 물이 죽음을 상징할 경우에 물 바깥 해변은 구원을 상징하게 됩니다. 성경에서는 물론이고 그리스로마 신화에서조차 동일한 상징으로 쓰이고 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0장 1-4절에서 물에 대해서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우리 조상들이 다 구름 아래 있고, 바다 가운데로 지나며, 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고, 다 같은 신령한 식물을 먹으며,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저희를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
이 말씀에서 바울은 이집트를 죄악이 가득한 세상으로, 홍해를 죽음의 바다로, 홍해를 건넌 것을 침례나 세례 받음으로, 광야를 교회로, 광야에서 먹고 마신 만나와 반석의 물을 교회에서 행하는 성만찬의 빵과 포도주로 설명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요단강은 죽음의 강이 되고, 가나안복지는 하나님의 나라 곧 천국이 됩니다. 기독교에서 행하는 침례나 세례가 바로 이것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리스신화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누구나 영혼의 세계로 인도하는 여러 개의 강들을 건너야 하지만 그 끝은 첨예하게 갈린다고 말합니다. 통곡소리가 들리는 참혹한 비통의 강이 있고, 검고 깊은 시름의 강, 분노의 불길이 용솟음치는 불의 강, 이승의 일을 까맣게 잊고 저승에서 다시 태어나게 하는 망각의 강이 있고, 증오의 강인 스튁스 강이 있습니다. 사람이 죽으면 제일 먼저 ‘카론’이란 뱃사공이 태워주는 바닥없는 소가죽 배를 타고 비통의 강을 건너게 됩니다. 비통의 강을 건너게 되면 그 갈래인 시름의 강이 나오고, 이 시름의 강을 건너게 되면 불의 강이 나오고, 이 불의 강을 건너게 되면, 망각의 강이 나옵니다. 이 망각의 강을 건너게 되면 너른 벌판이 나오게 되는데, 오른쪽 들판에는 낙원인 엘뤼시온(Elusion)이 있고, 왼쪽 들판에는 지옥인 탈타로스(Tartaros)가 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죽음을 상징하는 강을 건너게 되지만, 그 강의 끝은 첨예하게 다른 두 갈래 길이 있다는 것을 말해 주는 것입니다.
낙원 엘뤼시온에서는 지복을 누리지만, 지옥 탈타로스에서는 형용키 어려운 형벌을 받습니다. 탄탈로스는 물속에 몸을 잠그고 있는데도 영원히 갈증에 시달립니다. 탄탈로스가 마시려고 입을 대면 물이 달아나 버리기 때문입니다. 익시온은 영원히 도는 불 수례에 매달려 비명을 지릅니다. 티튀오스는 독수리의 부리에 살을 파 먹히면서 영원히 소리 지르고, 다나오스의 딸들은 밑 빠진 독에다 영원히 물을 길어다 붓습니다. 시쉬포스는 산꼭대기로 바위를 굴려 올려야 하지만, 바위는 산꼭대기에 도달하기 무섭게 다시 굴러 떨어집니다. 천국에 이르지 못한 자들이 겪게 될 고통의 종류들을 설명해 준 것입니다. 아무리 신화라고는 하지만, 지옥은 우리 인간이 갈 곳이 못되는 아주 무서운 곳입니다.
기왕에 마실 물이라면 영원히 목마르지 않고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주님이 주시는 생수를 마셔야 합니다(요 4:10-14). 기왕에 건널 죽음의 강이라면 그 끝이 기쁨과 부활과 영생을 주는 곳이라야 합니다. 우리 성도님들은 이미 올바른 길로 접어들었고, 주님이 주시는 영생수를 마시기 시작했습니다. 이대로 간다면, 그 끝이 반드시 낙원이 될 것이라 확신합니다.
포도주도 마찬가지입니다. “이것을 받아 마셔라.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바 나의 피 곧 새 언약 피”라고 말씀하신 주님의 명령을 따라 영생에 이르는 포도주를 마시는 성도들이 있는가 하면, 세상에서 마시고 취하지만, 결국에는 하나님의 진노의 포도주를 마셔야할 자들이 있다는 점입니다.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예수님이 만든 포도주가 보여주는 상징은 기쁨과 부활입니다. 예수님의 이 표적은 엘리야가 사르밧 과부에게 베푼 기적과 동일한 것입니다(왕상 17:8-16). 엘리야는 사르밧 과부의 집에 남은 한 움큼의 가루와 약간의 기름이 떨어지지 아니하고 없어지지 않도록 기적을 베풀었습니다. 이 기적은 엘리야가 사르밧 과부에게 베푼 첫 번째 기적이었으며, 여인이 선지자에게 “하나님의 사람이여 당신이 나로 더불어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왕상 17:18)라고 한 말과 예수님께서 마리아에게 한 말씀이 동일하다는 점에서 볼 때, 예수님께서 포도주를 만든 기적은 엘리야가 가루와 기름을 떨어지게 않게 하고 없어지지 않게 한 기적과 맥을 같이 합니다.
또 가나의 혼인잔치는 마지막 날에 우리 성도들에게 있을 천국잔치를 상징적으로 보여 줍니다. 구세주이신 예수님은 포도주가 떨어져 축제분위기가 식어가는 상황에서 더 좋은 포도주를 만들어 줌으로써 기쁨이 넘치는 축제로 그 분위기를 살려내셨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은 우리 믿는 자들에게 기쁨을 주시고, 부활을 주시고, 영생을 주십니다.
올해로 이준 열사 서거 10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100년 전 이준은 이상설(李相卨), 이위종(李瑋鍾)과 함께 네덜란드 수도 헤이그에서 을사보호조약의 부당성을 만방에 알리는 노력을 하다가 7월 14일 현지에서 4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는 우리에게 다음과 같이 권면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죽는다는 것이 무엇이며, 사람이 산다는 것이 무엇이냐, 죽어도 죽잖은 것이 있고, 살아도 살지 아니함이 있나니, 그릇 살면 차라리 죽음만도 못하고, 제대로 죽으면 되려 영생하느니, 살고 죽는 게 모두 제게 달렸다면, 모름지기 죽고 삶을 바르게 힘쓰라.
인생에는 두 갈래 길이 있습니다. 넓고 편한 멸망의 길이 있는가하면 좁고 거친 생명의 길이 있습니다. 두말할 나위 없이 우리 성도들이 걸어야할 길은 좁은 길, 생명의 길입니다. 성서는 물과 포도주의 양면성을 말해줍니다. 예수님을 믿고 영생을 얻는 자에게 물은 생명수가 되고, 포도주는 부활과 기쁨이 되지만, ‘이생뿐이다.’ ‘죽으면 그만이다’는 식으로 세상을 산 사람들에게는 물이 죽음이 되고, 멸망이 되고, 포도주가 진노가 되고, 고통이 됩니다. 지금은 눈에 보이지 않고, 귀에 들리지 않고, 손에 잡히지 않지만, 망각의 강을 건넌 후에는 낙원으로 갈 사람과 지옥으로 갈 사람이 명확하게 나눠지게 됩니다. 우리 모두 낙원의 들에 도달하는 성도들이 되도록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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