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앙이 주는 성서적 의미(렘 11:1-13)
본문
재앙이 주는 성서적 의미(렘 11:1-13)
8월은 우리 민족의 해방의 달입니다. 해방이란 속박에서 풀려난 것을 의미합니다. 성서에서 해방은 노예시장의 개념에서 설명합니다. 누군가에게 속박된 자를 몸값을 주고 그 속박에서 풀어 주는 것을 말합니다. 성서는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으로써 죄의 삯을 요구하는 하나님의 의에 죗값을 지불하고 죄에 속박되어 종노릇하는 인간들을, 특히 그 사실을 마음으로 믿고 받아드리는 자들을 해방시켜 주시는 것으로 구원의 교리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해방의 달 8월을 맞이해서 재앙이 주는 의미들에 대해서 함께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오늘은 먼저 재앙이 주는 성서적인 의미와 최근 문제가 되고 있는 피랍사건에 대해서 살펴보려고 합니다.
성서에서는 재앙이 주는 의미를 세 가지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경고의 의미, 둘째는 심판의 의미, 셋째는 구원의 의미입니다. 출애굽기에서도 그렇고, 요한계시록에서도 그렇고, 예언자들의 활동에서도 그렇고, 역사적 사건에서도 그렇습니다.
이스라엘의 유다왕국이 2600여 년 전 바벨론 제국에 패망하고 바벨론으로 유배되어가는 큰 재앙을 당했을 때 예언자들은 슬퍼하며 좌절하기보다는 재앙이 주는 교훈과 의미들에 대해서 깊이 성찰한 다음 자기 민족에게 닥친 재앙에는 경고의 의미, 심판의 의미, 구원의 의미가 있다는 사실을 깊이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 성찰에 근거해서 그들이 펼쳤던 운동이 회개운동과 회복운동이었습니다.
예언자들은 유다왕국이 패망한 원인을 하나님과 맺은 시내산 언약의 말씀을 지키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진단했습니다. 특히 우상숭배가 큰 죄였습니다.
예레미야는 11장에서 유다왕국에 대한 하나님의 선포를 싣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언약의 말을 좇지 않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3절)고 말씀하시면서 “이 언약은 내가 너희 열조를 쇠풀무 애굽 땅에서 이끌어 내던 날에 그들에게 명한 것이라. 곧 내가 이르기를 너희는 나의 목소리를 청종하고 나의 모든 명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너희는 내 백성이 되겠고,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리라. 내가 또 너희 열조에게 한 맹세 곧 그들에게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주리라 한 언약을 이루리라 한 것이다”(4-5절)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언약을 청종하고 준행하라는 대대에 걸친 예언자들의 간절하고 부지런한 선포를 외면하고 “청종치 아니하며 귀를 기울이지도 아니하고 각각 그 악한 마음의 강퍅한 대로 행하였다”(8절)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유다민족이 하나님을 반역했고, “다른 신들을 좇아 섬겼은즉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이 내가 그 열조와 맺은 언약을 파하였다”(9-10절)고 하셨습니다. 여기까지가 유다민족이 당한 재앙이 주는 경고의 의미입니다. 유다민족은 오랫동안 하나님이 보낸 황색경고를 무시했고, 심지어는 적색신호까지 멸시했던 것입니다.
그 결과가 무섭게 나타났습니다. 하나님은 선포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보라, 내가 재앙을 그들에게 내리리니, 그들이 피할 수 없을 것이라. 그들이 내게 부르짖을 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할 것인즉, 유다 성읍들과 예루살렘 거민이 그 분향하는 신들에게 가서 부르짖을지라도 그 신들이 그 곤액 중에서 절대로 그들을 구원치 못하리라(11-12절).
예레미야뿐 아니라, 에스겔을 비롯한 당대에 활동한 선지자들이 동일한 내용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여기까지가 재앙이 주는 심판의 의미입니다. 교차로에서 황색경고는 물론이고, 심지어 적색신호까지 무시한 채 내달렸다면, 그 결과가 어떠했을지는 뻔한 일 아닙니까? 거대한 트럭을 들이받고 처참하게 찌그러진 티코꼴이 된 것이 2600년 전에 유다인들에게 실제로 일어났던 역사적 사건인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가 끝은 아닙니다. 유다왕국 패망이후 예언자들은 회개운동과 회복운동을 펼쳤습니다. 메시아에 관한 예언이 바로 바벨론 포로기 때에 예언자들의 회복운동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구약성서는 대부분 유대민족의 흥망성쇠의 원인을 언약을 얼마만큼 성실하게 지켰는가에서 찾고 있습니다. 예언자들의 활동표준은 바로 이 언약에 대한 성실성에 있었습니다. 그런 맥락에서 예언서들의 내용은 언약에 대한 유대민족의 성실성에 대한 성찰에서 비롯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왜 우리 민족이 이 엄청난 어려움에 처하게 되었는가, 왜 우리 민족이 이 엄청난 시련을 겪게 되었는가를 묻고, 그 해답을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얼마만큼 성실하게 지켰는가에서 찾았던 것입니다. 결론은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성실하게 지키지 못했다는 것이고, 그 결론을 근거로 예언자들은 유대민족을 대상으로 회개운동을 펼쳤습니다. 회개운동 후에 예언자들이 펼친 또 다른 운동이 있었는데 그것이 회복운동입니다. 회복운동이란 유다왕국의 회복에 대한 예언으로써 그 중심에 메시아 도래에 관한 예언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메시아가 오시는 때가 유다왕국이 회복되는 때인 것입니다.
예언자들의 회개운동과 회복운동의 근거는 하나님의 신실함이었습니다. 자기 백성과 언약을 맺으신 하나님은 결코 그 언약을 저버리지 않으십니다. 사람은 그 언약을 저버리지만, 하나님은 결코 그 언약을 버리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회개하면 미쁘신 하나님께서 회복하시고 구원하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재앙이 주는 구원의 의미입니다. 재앙을 당했을지라도 회개하면 반드시 하나님께서 회복하시고 구원하십니다. 그것이 성서의 이야기입니다. 계시록의 내용도 마찬가지고, 출애굽기의 내용도 마찬가지고, 역사가 주는 교훈도 마찬가집니다.
아프가니스탄에 건너간 한국인 의료봉사단원 23명이 지난 19일(2007.7.19)에 탈레반 민병대원들에 납치되었고, 단장인 배형규 목사와 심성민씨가 희생되었습니다. 더 이상의 희생자 없이 모두 풀려나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 정말 간절합니다.
우리는 이 불행한 사건에서도 동일한 의미들을 찾을 수 있습니다. 정부가 여행을 말리는 위험국가이고, 또 여행지역이 탈레반이 장악한 위험지역임에도 불구하고 목숨을 걸고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찾아간 것 까지는 좋은 일이었는데, 아쉽게도 치밀하지 못했고, 안전수칙을 지키지 못했던 같습니다. 야간이나 깊은 새벽에 움직이지 않고, 벌건 대낮에 그것도 23명씩이나 변복도 하지 않고 심지어는 민소매차림으로 버스를 타고 움직였기 때문에 그대로 노출되고 말았습니다. 설상가상으로 피랍직전에는 주민 대부분이 탈레반을 지지하는 지역의 시장을 보기 위해서 차에서 내려 약 30분간 산책을 했다고 합니다. 여기에 경고의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피랍사건 당시 아프가니스탄에서 봉사활동을 펼쳤던 한동대 총학회장 강윤희 씨는 피랍된 23명의 봉사단원들이 찾아가려고 했던 칸다하르에서 봉사활동을 마치고, 피랍사건이 있는지 이틀 뒤인 21일 카불로 돌아오는 여행은 긴장과 불안의 연속이었다고 소감을 밝혔습니다. 한동대봉사단은 치안이 불안하고 낮 시간이 더워 새벽에 출발하는 게 안전하다는 현지인의 충고에 따라 새벽 3시에 서둘러 길을 떠났고, 칸다하르 버스터미널에서 현지인과 섞여 버스 맨 뒷자리에 자리 잡은 강윤희씨 일행은 현지인처럼 옷을 입었고, 여학생들은 차도르로 얼굴을 감아 몸을 완전히 가린 채 6시간이 넘는 버스여행을 했다면서 최대한 조심하기 위해 서로 말 한마디도 하지 않은 채 카불까지 왔다고 긴박했던 당시의 상황을 설명했습니다. 같은 시기에 같은 장소들을 오고갔던 한동대팀은 샘물교회팀원들보다 훨씬 더 몸조심을 했기 때문에 원치 않는 최악의 상황을 피할 수 있었고, 샘물교회팀원들은 안전수칙을 지키지 못했기 때문에 원치 않는 최악의 상황을 맞게 되었던 것입니다.
뉴스위크에 따르면 납치를 지휘한 압둘라 잔이란 이름의 탈레반 지휘관은 6월에 미군에 의해서 체포된 상관인 다로 칸이란 인물을 석방시키기 위해서 외국인 납치 대상을 물색해 왔고, 카불과 칸다하르를 잇는 도로를 감시하던 중이었다고 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일본 마이니치(每日)신문에 의하면, 피랍된 봉사단원들이 시장을 산책하면서 일부 여성이 민소매 차림으로 돌아다녔고, 주민의 제지에도 불구하고 비디오 촬영을 했다는 것입니다. 주민들이 탈레반에 이들의 존재를 알렸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경고의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억울하고 불행한 일을 당한 이들의 실수를 나무랄 목적으로 말씀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이 사건이 주는 교훈을 생각해 보기위한 것에 불과합니다. 더욱이 오늘 말씀의 초점은 광복의 달을 맞이해서 재앙이 주는 의미를 생각해 보는 것입니다. 피랍사건은 수많은 재앙들 가운데 한 가지일 뿐이고, 가장 최근에 일어난 일이기 때문에 언급하고 있을 뿐입니다.
재앙을 당한 자든 재앙을 피한 자든 모든 이들에게, 재앙은 당할 수도 있고 피할 수도 있다는 것을 준엄하게 경고한다는 사실입니다. 23명이 피랍된 것에 대해서 우리는 기도가 부족했기 때문이거나 운명으로 예정된 일이었기 때문이거나 하나님이 그들을 보호하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식으로 문제를 보려 해서는 안 됩니다. 사도 바울이 선교사로서 겪었던 수많은 불행한 일들이, 심지어 참수형을 받아 순교한 일까지, 기도가 부족했기 때문이거나 운명으로 예정된 일이었기 때문이거나 하나님이 그를 보호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그 모든 일들이 다 하나님의 일이 이루어지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오히려 우리는 인간이 당하는 모든 재앙에서 하나님이 주시는 교훈을 찾아야 합니다. 그 속에는 경고의 의미가 있고, 심판의 의미가 있고, 구원의 의미가 있기 때문입니다.
샘물교회팀의 불행은 어쩌면 과욕에서 빚어졌을 수 있습니다. 그 결과로 전 국민이 엄청난 충격과 슬픔에 빠지게 되었고, 그간에 아프카니스탄에서 쌓았던 선교적 노력들을 수포로 돌아가게 하고 말았습니다. 더욱이 우리의 마음을 슬프게 하는 것은 적어도 당분간은 아프간 사람들을 도울 수 없게 되었고, 아프가니스탄에서 체류했던 선교사들이나 자원봉사자들이 조속히 철수하거나 또 다른 선교지로 떠나야한다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이번 일로 인한 최대 피해자들은 복음에 목말라하고, 도움의 손길이 절실한 수많은 불행한 아프간 사람들이 될 것입니다. 여기에 심판의 의미가 있습니다.
한 가지 더 엄격하게 드러난 심판은 탈레반 민병대원들에 대한 반인륜적이고 잔인한 행위들이 전 세계에 적나라하게 들어났다는 사실입니다. 그들의 잔악한 행위는 그들이 추구하고 지향하는 이슬람제국의 허상이 얼마나 공허하고 무가치한가를 온 세계만방에 선포하고 말았습니다. 그들을 적대시하는 국민도 아니고, 그들과 총부리를 겨누는 적군도 아닌, 오히려 그들 백성을 도와주고 병을 치료해주기 위해서 많은 비용과 시간을 들여 건너간 순결하고 고결한 민간인들을 피랍해서 자신들의 동료 몇 사람을 석방시킬 목적으로 살해하고 죽음으로 몰아가는 몰염치하고 짐승보다 못한 비이성적인 살인자들임을 만방에 드러내고 말았습니다. 이것이야말로 분명 그들에게 임한 준엄한 심판인 것입니다. 여기에 군사작전까지 펼쳐진다면 그들이 아끼는 목숨을 잃게 되는 더 큰 불행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여기에 심판의 의미가 있습니다.
이 뿐 아니라, 이 불행한 사건에는 하나님의 구원의 의미도 깊게 배여 있습니다. 피랍된 한국인들을 살리려는 정부의 노력은 물론이고, 온 국민들의 염원과 기도야말로 한 생명이 천하보다 귀하다는 생명존엄의 사상을 심어주고 있고, 목숨을 걸어야할 만큼 위험한 나라를 찾아가 봉사하려다가 피랍되어 희생되었거나 고초를 겪게 된 이번 사건은 32명의 무고한 목숨을 앗아간 조승희 사건을 덮고 한국인들의 봉사정신을 온 세계만방에 알리는 사건이 되기도 합니다. 여기에 구원의 의미가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하나님은 이번 사건을 계기로 신앙인들의 믿음을 단련하고 시험하십니다.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주님께서는 때때로 신앙인들에게 믿음을 위해서 목숨도 바칠 것까지를 요구하십니다. 이 땅에서 하나님과 복음을 위해서 목숨을 잃는 자는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될 것을 굳게 약속하셨습니다. 무엇보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은혜를 베푸시고 고난을 극복하게 하시며, 끝내는 살아 돌아오도록 인도하실 것입니다. 여기에 구원의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8월은 우리 민족의 해방의 달입니다. 해방이란 속박에서 풀려난 것을 의미합니다. 성서에서 해방은 노예시장의 개념에서 설명합니다. 누군가에게 속박된 자를 몸값을 주고 그 속박에서 풀어 주는 것을 말합니다. 성서는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으로써 죄의 삯을 요구하는 하나님의 의에 죗값을 지불하고 죄에 속박되어 종노릇하는 인간들을, 특히 그 사실을 마음으로 믿고 받아드리는 자들을 해방시켜 주시는 것으로 구원의 교리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해방의 달 8월을 맞이해서 재앙이 주는 의미들에 대해서 함께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오늘은 먼저 재앙이 주는 성서적인 의미와 최근 문제가 되고 있는 피랍사건에 대해서 살펴보려고 합니다.
성서에서는 재앙이 주는 의미를 세 가지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경고의 의미, 둘째는 심판의 의미, 셋째는 구원의 의미입니다. 출애굽기에서도 그렇고, 요한계시록에서도 그렇고, 예언자들의 활동에서도 그렇고, 역사적 사건에서도 그렇습니다.
이스라엘의 유다왕국이 2600여 년 전 바벨론 제국에 패망하고 바벨론으로 유배되어가는 큰 재앙을 당했을 때 예언자들은 슬퍼하며 좌절하기보다는 재앙이 주는 교훈과 의미들에 대해서 깊이 성찰한 다음 자기 민족에게 닥친 재앙에는 경고의 의미, 심판의 의미, 구원의 의미가 있다는 사실을 깊이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 성찰에 근거해서 그들이 펼쳤던 운동이 회개운동과 회복운동이었습니다.
예언자들은 유다왕국이 패망한 원인을 하나님과 맺은 시내산 언약의 말씀을 지키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진단했습니다. 특히 우상숭배가 큰 죄였습니다.
예레미야는 11장에서 유다왕국에 대한 하나님의 선포를 싣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언약의 말을 좇지 않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3절)고 말씀하시면서 “이 언약은 내가 너희 열조를 쇠풀무 애굽 땅에서 이끌어 내던 날에 그들에게 명한 것이라. 곧 내가 이르기를 너희는 나의 목소리를 청종하고 나의 모든 명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너희는 내 백성이 되겠고,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리라. 내가 또 너희 열조에게 한 맹세 곧 그들에게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주리라 한 언약을 이루리라 한 것이다”(4-5절)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언약을 청종하고 준행하라는 대대에 걸친 예언자들의 간절하고 부지런한 선포를 외면하고 “청종치 아니하며 귀를 기울이지도 아니하고 각각 그 악한 마음의 강퍅한 대로 행하였다”(8절)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유다민족이 하나님을 반역했고, “다른 신들을 좇아 섬겼은즉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이 내가 그 열조와 맺은 언약을 파하였다”(9-10절)고 하셨습니다. 여기까지가 유다민족이 당한 재앙이 주는 경고의 의미입니다. 유다민족은 오랫동안 하나님이 보낸 황색경고를 무시했고, 심지어는 적색신호까지 멸시했던 것입니다.
그 결과가 무섭게 나타났습니다. 하나님은 선포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보라, 내가 재앙을 그들에게 내리리니, 그들이 피할 수 없을 것이라. 그들이 내게 부르짖을 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할 것인즉, 유다 성읍들과 예루살렘 거민이 그 분향하는 신들에게 가서 부르짖을지라도 그 신들이 그 곤액 중에서 절대로 그들을 구원치 못하리라(11-12절).
예레미야뿐 아니라, 에스겔을 비롯한 당대에 활동한 선지자들이 동일한 내용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여기까지가 재앙이 주는 심판의 의미입니다. 교차로에서 황색경고는 물론이고, 심지어 적색신호까지 무시한 채 내달렸다면, 그 결과가 어떠했을지는 뻔한 일 아닙니까? 거대한 트럭을 들이받고 처참하게 찌그러진 티코꼴이 된 것이 2600년 전에 유다인들에게 실제로 일어났던 역사적 사건인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가 끝은 아닙니다. 유다왕국 패망이후 예언자들은 회개운동과 회복운동을 펼쳤습니다. 메시아에 관한 예언이 바로 바벨론 포로기 때에 예언자들의 회복운동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구약성서는 대부분 유대민족의 흥망성쇠의 원인을 언약을 얼마만큼 성실하게 지켰는가에서 찾고 있습니다. 예언자들의 활동표준은 바로 이 언약에 대한 성실성에 있었습니다. 그런 맥락에서 예언서들의 내용은 언약에 대한 유대민족의 성실성에 대한 성찰에서 비롯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왜 우리 민족이 이 엄청난 어려움에 처하게 되었는가, 왜 우리 민족이 이 엄청난 시련을 겪게 되었는가를 묻고, 그 해답을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얼마만큼 성실하게 지켰는가에서 찾았던 것입니다. 결론은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성실하게 지키지 못했다는 것이고, 그 결론을 근거로 예언자들은 유대민족을 대상으로 회개운동을 펼쳤습니다. 회개운동 후에 예언자들이 펼친 또 다른 운동이 있었는데 그것이 회복운동입니다. 회복운동이란 유다왕국의 회복에 대한 예언으로써 그 중심에 메시아 도래에 관한 예언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메시아가 오시는 때가 유다왕국이 회복되는 때인 것입니다.
예언자들의 회개운동과 회복운동의 근거는 하나님의 신실함이었습니다. 자기 백성과 언약을 맺으신 하나님은 결코 그 언약을 저버리지 않으십니다. 사람은 그 언약을 저버리지만, 하나님은 결코 그 언약을 버리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회개하면 미쁘신 하나님께서 회복하시고 구원하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재앙이 주는 구원의 의미입니다. 재앙을 당했을지라도 회개하면 반드시 하나님께서 회복하시고 구원하십니다. 그것이 성서의 이야기입니다. 계시록의 내용도 마찬가지고, 출애굽기의 내용도 마찬가지고, 역사가 주는 교훈도 마찬가집니다.
아프가니스탄에 건너간 한국인 의료봉사단원 23명이 지난 19일(2007.7.19)에 탈레반 민병대원들에 납치되었고, 단장인 배형규 목사와 심성민씨가 희생되었습니다. 더 이상의 희생자 없이 모두 풀려나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 정말 간절합니다.
우리는 이 불행한 사건에서도 동일한 의미들을 찾을 수 있습니다. 정부가 여행을 말리는 위험국가이고, 또 여행지역이 탈레반이 장악한 위험지역임에도 불구하고 목숨을 걸고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찾아간 것 까지는 좋은 일이었는데, 아쉽게도 치밀하지 못했고, 안전수칙을 지키지 못했던 같습니다. 야간이나 깊은 새벽에 움직이지 않고, 벌건 대낮에 그것도 23명씩이나 변복도 하지 않고 심지어는 민소매차림으로 버스를 타고 움직였기 때문에 그대로 노출되고 말았습니다. 설상가상으로 피랍직전에는 주민 대부분이 탈레반을 지지하는 지역의 시장을 보기 위해서 차에서 내려 약 30분간 산책을 했다고 합니다. 여기에 경고의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피랍사건 당시 아프가니스탄에서 봉사활동을 펼쳤던 한동대 총학회장 강윤희 씨는 피랍된 23명의 봉사단원들이 찾아가려고 했던 칸다하르에서 봉사활동을 마치고, 피랍사건이 있는지 이틀 뒤인 21일 카불로 돌아오는 여행은 긴장과 불안의 연속이었다고 소감을 밝혔습니다. 한동대봉사단은 치안이 불안하고 낮 시간이 더워 새벽에 출발하는 게 안전하다는 현지인의 충고에 따라 새벽 3시에 서둘러 길을 떠났고, 칸다하르 버스터미널에서 현지인과 섞여 버스 맨 뒷자리에 자리 잡은 강윤희씨 일행은 현지인처럼 옷을 입었고, 여학생들은 차도르로 얼굴을 감아 몸을 완전히 가린 채 6시간이 넘는 버스여행을 했다면서 최대한 조심하기 위해 서로 말 한마디도 하지 않은 채 카불까지 왔다고 긴박했던 당시의 상황을 설명했습니다. 같은 시기에 같은 장소들을 오고갔던 한동대팀은 샘물교회팀원들보다 훨씬 더 몸조심을 했기 때문에 원치 않는 최악의 상황을 피할 수 있었고, 샘물교회팀원들은 안전수칙을 지키지 못했기 때문에 원치 않는 최악의 상황을 맞게 되었던 것입니다.
뉴스위크에 따르면 납치를 지휘한 압둘라 잔이란 이름의 탈레반 지휘관은 6월에 미군에 의해서 체포된 상관인 다로 칸이란 인물을 석방시키기 위해서 외국인 납치 대상을 물색해 왔고, 카불과 칸다하르를 잇는 도로를 감시하던 중이었다고 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일본 마이니치(每日)신문에 의하면, 피랍된 봉사단원들이 시장을 산책하면서 일부 여성이 민소매 차림으로 돌아다녔고, 주민의 제지에도 불구하고 비디오 촬영을 했다는 것입니다. 주민들이 탈레반에 이들의 존재를 알렸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경고의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억울하고 불행한 일을 당한 이들의 실수를 나무랄 목적으로 말씀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이 사건이 주는 교훈을 생각해 보기위한 것에 불과합니다. 더욱이 오늘 말씀의 초점은 광복의 달을 맞이해서 재앙이 주는 의미를 생각해 보는 것입니다. 피랍사건은 수많은 재앙들 가운데 한 가지일 뿐이고, 가장 최근에 일어난 일이기 때문에 언급하고 있을 뿐입니다.
재앙을 당한 자든 재앙을 피한 자든 모든 이들에게, 재앙은 당할 수도 있고 피할 수도 있다는 것을 준엄하게 경고한다는 사실입니다. 23명이 피랍된 것에 대해서 우리는 기도가 부족했기 때문이거나 운명으로 예정된 일이었기 때문이거나 하나님이 그들을 보호하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식으로 문제를 보려 해서는 안 됩니다. 사도 바울이 선교사로서 겪었던 수많은 불행한 일들이, 심지어 참수형을 받아 순교한 일까지, 기도가 부족했기 때문이거나 운명으로 예정된 일이었기 때문이거나 하나님이 그를 보호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그 모든 일들이 다 하나님의 일이 이루어지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오히려 우리는 인간이 당하는 모든 재앙에서 하나님이 주시는 교훈을 찾아야 합니다. 그 속에는 경고의 의미가 있고, 심판의 의미가 있고, 구원의 의미가 있기 때문입니다.
샘물교회팀의 불행은 어쩌면 과욕에서 빚어졌을 수 있습니다. 그 결과로 전 국민이 엄청난 충격과 슬픔에 빠지게 되었고, 그간에 아프카니스탄에서 쌓았던 선교적 노력들을 수포로 돌아가게 하고 말았습니다. 더욱이 우리의 마음을 슬프게 하는 것은 적어도 당분간은 아프간 사람들을 도울 수 없게 되었고, 아프가니스탄에서 체류했던 선교사들이나 자원봉사자들이 조속히 철수하거나 또 다른 선교지로 떠나야한다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이번 일로 인한 최대 피해자들은 복음에 목말라하고, 도움의 손길이 절실한 수많은 불행한 아프간 사람들이 될 것입니다. 여기에 심판의 의미가 있습니다.
한 가지 더 엄격하게 드러난 심판은 탈레반 민병대원들에 대한 반인륜적이고 잔인한 행위들이 전 세계에 적나라하게 들어났다는 사실입니다. 그들의 잔악한 행위는 그들이 추구하고 지향하는 이슬람제국의 허상이 얼마나 공허하고 무가치한가를 온 세계만방에 선포하고 말았습니다. 그들을 적대시하는 국민도 아니고, 그들과 총부리를 겨누는 적군도 아닌, 오히려 그들 백성을 도와주고 병을 치료해주기 위해서 많은 비용과 시간을 들여 건너간 순결하고 고결한 민간인들을 피랍해서 자신들의 동료 몇 사람을 석방시킬 목적으로 살해하고 죽음으로 몰아가는 몰염치하고 짐승보다 못한 비이성적인 살인자들임을 만방에 드러내고 말았습니다. 이것이야말로 분명 그들에게 임한 준엄한 심판인 것입니다. 여기에 군사작전까지 펼쳐진다면 그들이 아끼는 목숨을 잃게 되는 더 큰 불행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여기에 심판의 의미가 있습니다.
이 뿐 아니라, 이 불행한 사건에는 하나님의 구원의 의미도 깊게 배여 있습니다. 피랍된 한국인들을 살리려는 정부의 노력은 물론이고, 온 국민들의 염원과 기도야말로 한 생명이 천하보다 귀하다는 생명존엄의 사상을 심어주고 있고, 목숨을 걸어야할 만큼 위험한 나라를 찾아가 봉사하려다가 피랍되어 희생되었거나 고초를 겪게 된 이번 사건은 32명의 무고한 목숨을 앗아간 조승희 사건을 덮고 한국인들의 봉사정신을 온 세계만방에 알리는 사건이 되기도 합니다. 여기에 구원의 의미가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하나님은 이번 사건을 계기로 신앙인들의 믿음을 단련하고 시험하십니다.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주님께서는 때때로 신앙인들에게 믿음을 위해서 목숨도 바칠 것까지를 요구하십니다. 이 땅에서 하나님과 복음을 위해서 목숨을 잃는 자는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될 것을 굳게 약속하셨습니다. 무엇보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은혜를 베푸시고 고난을 극복하게 하시며, 끝내는 살아 돌아오도록 인도하실 것입니다. 여기에 구원의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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