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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랑을 잔잔케 하실 그리스도(계 1-3장/ 막 4:35-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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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동호
댓글 0 조회 13,029 2005.03.16 14: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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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랑을 잔잔케 하실 그리스도(계 1-3장/ 막 4:35-41)

샐만(Sallman)의 1950년도 작품으로 크리벨과 베이츠(Kriebel & Bates)가 저작권을 가지고 보급하고 있는 성화가 있습니다. 풍랑이 일고 먹구름이 낀 바다에서 배의 키를 잡고 전방을 주시하고 있는 젊은이가 있고, 젊은이의 배후에 예수께서 지키고 서서 한 손은 청년의 어깨에 올려놓고, 한 손은 전방을 가리키고 있는 그림입니다. 그런데 젊은 항해사의 배후에 계신 예수는 보통 사람들이 눈으로 볼 수 없는 영으로 존재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보통 사람들은 실제 상황에서 젊은 항해사만 볼 수 있고 예수는 볼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림 속에 예수의 모습이 있는 것은 화가인 샐만이 영안으로 젊은 항해사 배후에 계신 예수를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림 속의 젊은 항해사도 영안으로 자기 뒤에 서 계신 예수를 보았기 때문인지 그의 표정에는 폭풍이 몰아닥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당황해 하거나 불안해하지 아니하고 당당한 모습으로 전방을 주시하고 있습니다. 예수를 볼 수 있는 영안이 있고, 그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귀가 있는 사람은 폭풍이 몰아치는 상황에서도 당당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계시록 1-3장의 내용도 한 장의 그림으로 감상 할 수가 있습니다. 물론 화가는 사도 요한입니다. 소아시아 지역에 말발굽 형태로 일곱 교회가 약 80KM 정도씩 떨어져 위치하고 있습니다. 시계 돌아가는 방향으로 에베소 교회는 8시 방향에, 서머나 교회는 10시 방향에, 버가모 교회는 11시 방향에, 두아디라 교회는 12시 방향에, 사데 교회는 2시 방향에, 빌라델비아 교회는 3시 방향에, 그리고 라오디게아 교회는 4시 방향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로마제국의 성난 군인들이 일곱 교회가 그려진 가운데에서 교인들을 잡아 쇠사슬로 묶어 놓고서, 창으로 위협하고, 십자가에 못박고, 사자 굴에 집어넣고, 채찍으로 때리고 있습니다. 로마 군인 중의 한 사람이 손에 횃불을 들고 교회마다에 불을 놓을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일곱 교회 사이로 키가 엄청나게 크고, 발에 끌리는 옷을 입고, 가슴에 금띠를 띠고, 그 머리와 털의 희기가 흰 양털 같고, 흰눈 같으며, 그의 눈은 불꽃같고, 그의 발은 풀무에 단련한 빛난 주석 같고, 그의 음성은 많은 물소리와 같으며, 그 오른손에 일곱 교회의 목회자를 상징하는 별이 있고, 그 입에서 좌우에 날선 검이 나오고, 그 얼굴은 해가 힘있게 비취는 것 같은 인자가 일곱 교회 사이에 서서 지키고 있습니다.
여기서 인자는 부활하신 예수입니다. 박해라는 엄청난 폭풍을 만난 교회라는 작은 배들이 금방이라도 전복될 것 같은 위급한 상황은 계시록이 기록된 당시의 현실이었지만 그 폭풍 속에서 예수를 본 것은 탁월한 영성과 믿음을 지닌 사도 요한이었습니다. 아무리 엄청난 박해의 물결이 몰아 닥쳐도 예수가 지키고 서 있는 한 교회는 든든합니다. 교회는 결코 무너지지 않습니다.
샐만이 젊은 항해사 배후에 선 예수를 본 것처럼, 요한은 박해로 흔들리고 있는 교회 배후에 선 승리자 예수를 본 것입니다. 이는 마치 배를 요동치게 하던 바람과 풍랑을 향하여 “잔잔 하라. 고요 하라”는 명령을 막 내리시려는 순간의 모습입니다. 요한이 환상으로 본 인자는 우리를 사랑하사 피로서 죄에서 해방하시고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으로 삼으신 사랑의 예수이십니다. 이 분은 알파와 오메가 되시며,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또 장차 오실 전능의 왕이십니다. 이 분은 힘있고 전능한 심판주요, 재림주이시며, 발에 끌리는 옷을 입고, 가슴에 금띠를 띠고, 불꽃같은 눈과 단련된 발과 예리한 말씀의 검과 해처럼 빛나는 힘있는 모습을 하신 구원의 주시요, 교회의 목회자들을 장중에 붙으시고, 교회를 왕래하시며, 교회를 지키시는 주님이십니다. 이 예수가 폭풍을 잔잔케 하실 것입니다.
마가복음 4장 35-41절에 예수께서 풍랑을 진압하신 기사가 실려 있습니다. 어느 날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배를 타고 호수 건너편으로 가실 때에 피곤하셨던지 잠이 드셨습니다. 그 사이에 폭풍은 몰아 닥쳤고 배는 위태로웠습니다. 제자들은 몹시 당황했고 두려워했습니다. 그 때에 제자들은 예수를 깨우면서 “선생님, 우리의 죽게 된 것을 돌아보지 않습니까?” 라고 말했습니다. 잠에서 깨어나신 후에 예수는 믿음이 없어 떨고 있는 제자들을 구원해 주셨습니다. 바람과 바다를 향해서 ‘잠잠 하라. 고요 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러자 바람이 그치고 아주 잔잔하여 졌습니다.
예수의 갈릴리 호수에서의 풍랑진압에 관한 기사는 시대적인 정황으로 볼 때, 외부로부터 불어오는 박해의 돌풍으로 인해서 초대교회가 위태로움에 처한 모습을 읽을 수 있는 기적 이야기입니다. 제자들이 타고 있는 조그만 배는 교회를 상징합니다. 갈릴리 호수는 세상을 상징하는 것으로서 세상 속에 있는 교회를 어느 때라도 덮치기 위해서 풍랑과 바람을 동반합니다. 그 때마다 성도들은 부르짖습니다. “예수님, 우리의 죽게 된 것을 돌아보지 않습니까?”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또는 계시록 6장 9-10절의 말씀에서처럼 억울한 일을 당한 성도들이 하나님께 기원합니다. “하나님,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심판하여 우리 피를 신원하여 주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려나이까?” 그러나, 배 안에는 능력의 주님, 풍랑과 바람을 잔잔케 하실 그리스도께서 동승하고 계십니다. 믿음이 있고 영성이 밝은 사람들은 이 예수를 봅니다. 그 분이 바람과 바다를 향해서 ‘잠잠 하라. 고요 하라’고 꾸짖어서 구원해 주실 것을 확신합니다. 예수는 지금도 우리의 삶 중심부에 계시면서 때때로 몰아 닥쳐오는 폭풍을 잔잔케 하신다는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계시록 1장에 인자의 모습이 소개되고 있고, 계시록 2-3장에서는 각 교회에 예수의 간략한 특징이 소개되고 있고, 귀있는 자가 들어야 할 칭찬과 책망과 또 끝까지 이기는 자가 받게 될 축복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풍랑을 잔잔케 하실 그리스도가 계신데,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 라고 교회를 꾸짖는 말씀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초대교회는 엄청난 배교의 위협에 처해 있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서는 엄청난 시련을 각오해야 했습니다. 신앙으로 인해서 많은 사람들이 조롱을 받고, 채찍과 몽둥이로 매를 맞고, 사자굴의 밥이 되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많은 사람들이 신앙을 버렸습니다. 이 때에 주님께서는 교회들에게 “처음행위를 가지라”(2:5), “죽도록 충성하라”(2:10), “회개하라”(2:16),  “굳게 잡으라”(2:25), “네가 어떻게 받았으며 어떻게 들었는지 생각하고 지키어 회개하라”(3:3), “네 가진 것을 굳게 잡아 아무나 네 면류관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3:11), “네가 열심을 내라”(3:19)는 말씀들로 권면합니다.
그리고 끝까지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 나무의 과실을 주어 먹게 하리라”(2:7), “이기는 자는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아니하리라”(2:11),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감추었던 만나를 주고 또 흰 돌을 주겠다”(2:17), “새벽별을 주리라”(2:28), “이기는 자는 . . . 흰옷을 입을 것이요, 내가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반드시 흐리지 아니하고 그 이름을 내 아버지 앞과 그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리라”(3:5), “이기는 자는 내 하나님 성전에 기둥이 되게 하리라”(3:12),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 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3:21)는 말씀으로 보상을 약속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모두 구원을 상징하는 말들입니다. 능력의 주, 만 왕의 왕이 계시니, 잠시 받는 환난을 견디고 참으라, 그리하면, 구원을 받으리라. 바울이 로마 교인들에게 하셨던 말씀처럼, 요한은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 성도들에게 “현재의 고난은 장차 올 영광에 족히 비교 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이것이 계시록이 우리에게 들려주는 만세 불변의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오늘 우리에게도 가감없이 그대로 적용됩니다. 신앙의 어려움이 닥쳐 올 때, 우리는 승리의 주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는 정죄함이 없고, 결코 실패함이 없습니다. 환난 중에서도 부활하신 승리의 주님을 바라보는 믿음의 사람들이 되어야겠습니다.
교회에 주는 경고 가운데 니골라당의 행위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는 이단의 무리로서 이교 사회와의 타협을 추구했던 집단입니다. 그들은 영적으로 자유 함을 얻으면, 우상숭배나 음행을 해도 좋다고 믿었습니다.
발람의 교훈에 대한 경고도 있습니다. 민수기 25장에 싯딤에서 발생된 에피소드가 소개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남자들이 모압 여자들과 음행 하면서 바알브올을 섬기게 되자, 하나님의 진노로 염병이 퍼져 2만 4천명이 죽게 되는 엄청난 벌을 받게 됩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광야생활 40년을 마치고 약속의 땅에 진입하기 위하여 여리고성 맞는 편 요단강 건너편 모압평지에 진을 쳤습니다. 이 때 모압의 왕 발락이 예언자 발람을 초대하여 바알의 신전이 있는 브올산에 올라가 이스라엘을 저주토록 하였습니다.
염병이 번진 싯딤은 사막문화권이 끝나고 농경문화권이 시작되는 관문과 같은 곳입니다. 예로부터 항구도시에는 홍등가가 발달했습니다. 마찬가지로 광야에서 40년을 유랑하던 이스라엘의 남성들이 농경문화권의 첫 관문인 이곳 싯딤에서 바알 종교의식에 접하게 되었습니다. 바알은 농사의 신이었기에 농사가 잘되기 위해서는 하늘의 남신과 땅의 여신 사이에 성적 교접이 이루어져야 된다고 보았으며, 이같은 행위가 아리따운 사당의 여사제들과 직접적인 예배의 행위로 이루어졌다고 봅니다. 그러기에 바알브올의 예배에는 성적인 요소가 있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예배의 행위는 분명히 이스라엘 민족에게 매우 매혹적인 것으로 인식되었을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섬기는 야훼는 모습도 없고, 모습을 만들어서도 안되고, 볼 수도 없었습니다. 신화도 없고, 여신도 없고, 여사제도 없었습니다. 이런 메마른 종교의식에 식상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알숭배에 빠지는 것은 너무도 자명한 사실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가나안에 정착한 이후로 끝없이 부딪쳐왔던 유혹이 바로 바알숭배였습니다. 아무튼 이스라엘 남성의 일부가 싯딤에서 성창과의 첫 행위를 경험했을 것이고, 그 결과 상당수가 성병으로 인해서 죽었을 것으로 봅니다. 이것이 발람의 유혹에 의해서 이루어진 일이라고 계시록은 말합니다.
이세벨에 대한 경고는 자주 언급되고 있습니다. 이세벨은 시돈 사람의 왕 옛 바알의 아리따운 딸로서 아합의 선왕인 오므리가 정략적으로 아합 왕과 결혼을 시킴으로서 이스라엘에 들어온 이방여인입니다. 솔로몬 왕이 종교적으로 타락을 금치 못했던 원인도 이 정략결혼에 의해서 많은 이방여인들이 궁에 입성한 때문입니다. 그들이 올 때에는 반드시 자신들의 신과 제사장들과 몸종들을 동반합니다. 그러면, 그들을 위해서 이스라엘은 사당을 지어주고, 궁전을 지어 주어야 합니다. 아합 왕도 이세벨을 위해서 바알신전을 지어주고, 자신도 바알을 숭배했습니다. 이는 아합이 이세벨의 유혹에 넘어간 때문입니다. 이 이세벨이 아합의 권세를 이용해서 온 이스라엘 백성에게 야훼를 버리고 바알을 숭배토록 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계시록에서 이세벨은 로마제국이 교회에 황제숭배를 강요했던 당시의 상황에 비추어서 볼 때, 반드시 제거되어야 할 악녀의 상징으로 부각된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구약성경 열왕기상에 보면, 바알과 아세라신의 선지자 850명이 엘리야에 의해서 결국 기손 강의 물귀신이 되었고, 아합왕은 전투에서 피흘려 죽음으로서 그 피를 개들이 핥았으며, 이세벨은 창밖으로 던져져 그 피가 담과 말에 튀었으며, 그 시체는 짓밟히고 말았습니다. 이것이 박해세력의 최후였다는 점을 계시록은 우리들에게 암시적으로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계시록에서의 음행과 우상숭배는 같은 뜻으로 쓰인 말입니다. 우상숭배는 영적으로 신랑 되신 그리스도를 버리고 다른 신랑을 찾아가는 음행과 같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행위가 호세아 선지자 시대에 심하게 일어났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야훼를 버리고 바알을 숭배했던 것입니다. 바알 종교는 이스라엘 민족에게 매우 매혹적인 종교였던 것 같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반드시 박해상황이 아니더라도, 세상의 유혹에 빠져 신앙의 정조를 버리는 많은 사람들에게 계시록은 엄한 경고를 하고 있다고 보아집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기서 두 가지로 결론을 말할 수 있겠습니다. 첫째, 어떠한 시련과 역경 속에서도 신앙의 정조를 버리지 말라. 둘째, 세상의 유혹에 빠져 신앙의 정조를 팔지 말라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찬송가 461장에 나오는 김환란 박사의 찬송시를 소개하고 마치겠습니다. 이 찬송시는 그녀가 22세 때인 일제의 탄압으로 민족이 시련을 겪고 있을 때에 쓴 것입니다.

1)캄캄한 밤 사나운 바람 불때/ 만경창파 망망한 바다에/ 외로운 배 한 척이 떠나가니/ 아 위태하구나 위태하구나
2)비바람이 무섭게 몰아치고/ 그 놀란 물 큰 파도 일 때에/ 저 뱃사공 어쩔 줄 몰라하니/ 아 가련하구나 가련하구나
3)절망 중에 그 사공 떨면서도/ 한 줄기의 밝은 빛 보고서/ 배안에도 하나님 계심 믿고/ 오 기도 올린다 기도 올린다
4)아버지여, 이 죄인 굽어보사/ 성난 풍란 잔잔케 하시고/ 이 불쌍한 인생을 살리소서/ 오 우리 하나님 우리 하나님
5)모진 바람 또 험한 큰 물결이/ 제아무리 성내어 덮쳐도/ 권능의 손 그 노를 저으시니/ 오 맑은 바다라 맑은 바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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