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없는 참사, 누구의 죄 때문인가?(눅 13:1-5, 욘 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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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없는 참사, 누구의 죄 때문인가?(눅 13:1-5, 욘 1:12)
지구촌 곳곳이 이상기후로 몸살을 앓고 있습니다. 금년 한해만 아시아 지역에서 홍수나 폭우로 수천 명이 죽고 천만이 넘는 사람이 집을 잃었습니다. 유럽에서도 살인더위와 가뭄으로 인해서 인명과 재산피해가 컸습니다.
우리나라에는 하루걸러 한번 꼴로 비가 내렸습니다. 중앙재해대책본부에 따르면, 태풍 ‘매미’ 하나로 죽은 사람이 113명, 실종이 14명, 그리고 재산피해액이 4조3천320억원에 달한다고 합니다. 미국도 허리케인 이자벨로 인해서 최소 29명이 죽고, 6백만 명이 정전 피해를 입었습니다. 재산피해액이 7,080억원(600만 달러), 보험사가 지불해야할 돈이 1조 1,800억원(10억 달러)에 달할 것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허리케인으로 인한 미국의 피해가 매미로 인한 우리나라의 피해보다 크게 낮은 이유는 미국이 1주일 전부터 허리케인의 이동경로를 철저히 감시하고 대책을 마련한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런 자연재해들은 지구온난화 때문이라고 하는데요. 우리나라는 지난 32년간 1.6℃의 온도가 상승했다고 합니다. 이 정도의 온도상승에 입고 있는 피해가 적지 아니한데요, 100년 후에는 지구온도가 7~10℃까지 오르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그렇게 되면 해수면이 높아져 생기는 침수와 생태계교란, 그리고 농수산업의 피해는 물론이고, 너무 뜨거워서 사람이 살 수 없는 지구가 되고 말 것입니다. 왜 이런 참사가 빚어질까요? 누구의 죄 때문일까요? 지구는 지금 어쩌면 태풍과 성난 파도에 휩쓸리기 시작한 다시스로 향하는 배일는지도 모릅니다. 선원과 승객들은 이런 저런 방책을 강구하기도 하고 배를 살려보려고 백방으로 노력하지만, 그러나 해결책은 단 한 가지뿐입니다. 지구배의 선원과 승객 모두가 요나처럼 가슴을 치며 회개하는 것입니다. “너희가 이 큰 폭풍을 만난 것이 나의 연고인 줄을 내가 아노라”(욘 1:12).
성경은 인간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일방적인 명령을 주고받는 관계로 보지 않고 계약관계로 봅니다. 사람들은 흔히 “선악과를 먹지 말라”나 “내 앞에 다른 신을 두지 말라”와 같은 하나님의 말씀을 명령으로 이해하고 인간은 마땅히 하나님의 명령을 듣고 지켜야할 피동적인 존재로 인식합니다. 그러나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십계명이나 율법과 같은 것들은 계약법입니다. “~를 하지 말라”나 “~를 하라”와 같은 법은 그것을 만든 주체가 하나님일지라도 상대인 인간의 동의와 자발적인 행동이 없이는 지켜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결코 일방적일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에 나타난 인간과 하나님과의 관계는 축복과 저주를 조건으로 한 계약으로 시작되고 있고, 완전하지 못한 피조물 인간이 언제나 먼저 하나님과의 약속을 깨고 있고, 완전하지만,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이 언제나 솔선해서 뒷수습을 감당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을 한번 약속한 것은 반드시 지키는 분으로 고백하고 있고, 신실하신 하나님, 미쁘신 하나님 등으로 찬송합니다.
인간과 자연과의 관계도 마찬가집니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땅을 정복하고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셨어도 인간은 자연의 소유주가 아니라, 관리자에 불과합니다. 자연의 소유주는 그것을 만든 하나님이시고, 인간은 그것을 잠시 맡아 관리하는 정원지기와 같은 것인데, 그러니까 이것이 인간과 자연과의 관계이고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임무인데, 인간이 하나님께 부여받은 임무를 경홀히 여겨 소홀히 하는가하면 하나님과의 약속과 자연과의 묵계를 파기함으로써 자연의 일부인 뱀과 원수가 되고, 땅이 저주를 받아 인간에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내는 갈등관계가 되었습니다. 따라서 자연재해는 인간과 자연과의 갈등 때문에 빚어지는 현상이자 악순환인 것입니다. 이 악순환의 고리를 끊으려면 자연에 대한 인간의 책무를 보다 적극적으로 수행해야 합니다. 자연은 인간처럼 이성과 인격을 가진 존재가 아니기 때문에, 하나님이 등 돌리고 돌아선 인간에게 그들의 배신과 악의적인 행동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솔선수범하시고 내리사랑으로 인간에게 다가오듯이, 각가지 재해로 인간에게 피해를 입히는 자연을 향해서 인간은 욕심을 버리고 개발이란 이름으로 자행되는 착취를 멈추고, 보호하고 보존하는 일에 관심을 기우려야 할 것입니다.
야고보서 1장 15절에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는다.”고 하였습니다. 욕심에 눈이 어두워서 수탈행위를 멈추지 않거나 사랑하며 돌보며 살기로 한 묵계를 깨게 되면 그 피해를 고스란히 인간이 입게 됩니다. 톨스토이의 글 「대자」에 곰 사냥 이야기가 있습니다.
숲 속 넓은 초원 큰 소나무에 무거운 통나무를 가지에 매달아 늘어뜨려 놓고 통나무 밑에다 꿀통을 놓아둡니다. 그러면 곰들이 나타나 코를 벌름거리며 꿀통으로 다가가 코끝을 처박고 꿀을 핥습니다. 그러다 보면, 소나무에 매달려 있던 통나무가 곰들의 몸에 닿아서 조금씩 움직이게 되고, 곰들을 건들게 됩니다. 이를 귀찮게 여긴 곰이 통나무를 멀찌감치 밀쳐버리면 사태는 악화됩니다. 곰에게서 멀어졌던 통나무는 여지없이 제자리로 돌아오면서 곰의 머리나 등을 치게 되기 때문입니다. 통나무에 얻어맞고 물러섰던 곰은 화가 나서 그 다음엔 통나무를 더 힘껏 더 멀리 던지게 되고, 그네처럼 멀리 밀려갔던 통나무는 더 큰 힘으로 되돌아와서는 그 순간 꿀통에 다가선 곰을 전보다 더 세게 쳐서 쓰러뜨립니다. 이런 일이 반복되게 되면 결국 한 놈이 통나무에 맞아 죽게 됩니다. 되로 주고 말로 받는 격이지요. 인간과 자연과의 관계가 이렇습니다. 인간들이 회개하지 않는 한, 해가 거듭 될수록 자연은 욕심꾸러기 인간들에게 엄청난 피해를 안겨줄 것입니다.
인간 세계에 펼쳐지는 끝없는 참사는 인간들의 지칠 줄 모르는 미움과 보복 때문이기도 합니다. “불을 놓아두면 끄지 못한다.”는 것이 톨스토이의 믿음입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2001년 9월 11일 뉴욕에서 발생한 테러사건입니다. 이 사건으로 무역센터 쌍둥이 건물이 완전히 붕괴되지 않았습니까? 이 때 붕괴된 무역센터는 1972년과 73년에 각각 110층으로 건축된 높이 417미터와 415미터에 이르는 쌍둥이 건물로써 이 테러사건으로 인해서 입은 인적 물적 손실액은 무려 53조원(450억 달러)에 달한다는 보고가 있습니다. 사소한 다툼과 미움은 작은 불일 때 꺼야지 버려두면 끄지 못하는 큰 불이 되어 결국에는 모든 것을 잃게 된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적잖은 사람들이 “불을 놓아두면 끄지 못한다.”는 격언을 용서해주거나 용서를 빌어서 시급하게 화해하지 않으면 화를 당할 수 있다는 말로 받지 않고 “불씨를 제거한다.”, “싹을 자른다.” 또는 “손을 본다.” 등의 말을 하면서 타는 불에 휘발유를 뿌립니다. 미군과 영국군이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를 침공한 것이나 이스라엘군이 팔레스타인 자치지구를 점령한 것이 다 ‘손을 본다.’는 그릇된 생각에서 비롯된 것들입니다.
그러나 아랍사람들의 복수에 대한 집념은 가공할 정도라고 합니다. 누군가가 살해당하면 그 피살자의 친인척에 속한 모든 남자들은 복수의무를 지니게 되며, 이 복수의무가 주어지는 혈연집단을 '카므사'라고 부릅니다. 만약 복수하지 못하거나 복수에 소홀하면 그 카므사의 명예는 형편없이 추락하여 그 카므사와는 교역도 결혼도 기피하기 때문에 카므사간의 싸움이 종족간의 전쟁으로 비화되는 사례가 적지 않다고 합니다. 같은 혈연집단끼리 이동하며 사는 사막의 유목생활이기 때문에 종족안전에의 연대책임이 강해질 수밖에 없었다는 것입니다. 이런 ‘피 보상’의 개념이 유대인들에게서는 ‘고엘 하담’이란 말로 나타납니다.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는 소위 말하는 보복정의를 강조합니다. 이것은 9.11테러와 같은 엄청난 비극이 왜 일어나는가에 대한 설명이 될 수 있습니다.
사소한 다툼이 미움을 부르고, 미움은 보복을 부르고, 보복은 피를 부릅니다. 예수님은 ‘피를 피로 갚으라.’는 사막의 계율을 바꿔서 ‘피를 용서로 갚으라.’는 사랑의 교훈을 십자가의 희생과 용서의 기도로써 친히 가르치셨습니다. 요한일서 4장 20절에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다.”고 한 말씀을 마음에 새겼으면 합니다.
최근 10년 동안 우리나라에는 여러 건의 대형사고가 있었습니다. 93년 3월 28일의 구포열차전복사고(사망 78, 부상 105), 93년 7월 26일의 아시아나기추락사고(사망 66), 93년 10월 10일의 서해훼리호침몰사고(사망 292), 94년 10월 21일의 성수대교붕괴사고(사망 32, 부상 17), 94년 10월 24일의 충주호유람선화재사고(사망 25, 실종 4, 부상 33), 94년 12월 7일의 아현동가스폭발사고(사망 12, 실종 1, 부상 65, 이재민 6백여 명), 95년 4월 28일의 대구가스폭발사고(사망 98, 실종 3, 부상 125), 95년 6월 29일의 서울 삼풍백화점붕괴사고(사망 458명, 실종 100여명, 부상 1천여 명)가 그것들입니다. 이들 사고로 인해서 수많은 사람들이 죽거나 다쳤고 재산피해도 엄청났습니다.
이럴 때 사람들은 곧잘 남에게서 불행의 원인을 찾으려고 합니다.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지도자를 원망하거나, 이웃을 원망하거나, 가족과 친지를 원망합니다. 그래서 환난이 닥칠 때면 언제나 어김없이 찾아오는 것이 분열입니다. 가정이 분열되고 사회가 분열됩니다. 1995년 7월 10일자 뉴스위크지는 이런 일련의 사고들을 일컬어 ‘끝없는 참사’ 또는 ‘사고왕국'이라는 타이틀로 기사를 쓰고 있고 이런 일련의 사고들이 김영삼 대통령의 과실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대통령을 책망한다고 적었습니다.
역사적으로 유태인들은 질병이나 여러 재앙들의 원인을 조상의 죄 탓이나 당사자의 죄 탓으로 이해했습니다. 재앙을 당한 자를 위로하고 돕기보다는 숨겨진 죄를 밝히기에 바빴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이 병자를 돌보시고 고쳐주실 때에 비방하고 손가락질했습니다.
교회가 세워지고 처음 300년 동안 로마제국으로부터 탄압을 받았던 그리스도인들은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기독교를 허용함으로써 비로소 신앙의 자유를 얻었습니다. 이 때부터 기독교인들은 급속히 늘어서 제국의 모든 시민이 교회를 출석하기에 이르렀습니다. 반대로 유태인들은 예수님을 죽인 살인자로 1000여 년간 탄압을 받아야 했습니다.
아돌프 히틀러는 자신과 어머니의 불행을 유태인들 탓으로 돌렸습니다. 그 결과 그는 600백만 유태인들의 원흉이 되고 말았습니다.
금년은 일본 관토(關東)대지진이 발생한 지 80주년이 되는 날입니다. 참고로 일본에는 80년 주기로 대지진이 발생한다는 연구가 있습니다. 며칠 전에도 어김없이 큰 지진이 발생했습니다. 1923년 9월 1일 오전 11시58분, 일본 도쿄와 요코하마 일대에 진도 7.9의 지진이 밀어닥쳐 14만여 명의 인명이 희생되고 가옥 57만 채가 파괴되거나 불에 탔습니다. 지진 후 공황상태에서 일본 내무성 경보국(警保局)이 ‘조선인들이 폭동을 일으켰다.’ ‘조선인들이 방화를 일삼고 우물에 독약을 넣었다.’ 등의 악성 유언비어를 퍼뜨렸습니다. 이 루머로 인해서 6일 동안에 일본 자경단원들과 군인들에 의해서 죽창과 흉기와 총칼에 살해된 우리 동포의 수가 일본의 공식집계만으로도 6,433명이나 되었습니다.
흑사병이 고대도시 아테네를 강타했을 때 일찍이 겪어보진 못한 이 무서운 병으로 인해서 아테네는 죽음과 공포의 도시로 변해 버렸습니다. 그런데 아테네 시민들은 이 재앙의 원인을 아테네 시민에게 위대한 민주주의 시대를 열어준 페리클레스(Perikles/495?-429 BC)의 탓으로 돌렸고, 그 결과 아테네의 전성시대는 막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문제의 원인을 남에게서 찾으려 하면 엄청난 비극이 초래됩니다. 그러므로 우리 앞에 어려움이 전개될 때마다 우리는 그 탓을 남에게서 찾지 말고 우리 안에서 찾아야 합니다. 요나처럼 가슴을 치며 회개해야 합니다. “너희가 이 큰 폭풍을 만난 것이 나의 연고인 줄을 내가 아노라”(욘 1:12). 예수님도 누가복음 13장 1-5절에서 경고하셨습니다. “그 때 마침 두어 사람이 와서 빌라도가 어떤 갈릴리 사람들의 피를 저희의 제물에 섞은 일로 예수께 고하니, ‘너희는 이 갈릴리 사람들이 이같이 해 받음으로써 모든 갈릴리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치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또 실로암에서 망대가 무너져 치어죽은 열여덟 사람이 예루살렘에 거한 모든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치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여기서 빌라도가 희생물을 드리던 갈릴리 사람들을 학살하여 그 흘린 피가 제물에 물들게 한 사건은 폭동에 연루된 사건일 것이고, 실로암망대가 무너져 사람들이 깔려 죽은 것은 인재(人災)로 봐야할 것입니다. 이들 재앙을 당한 사람들에 대해서 당시의 유태인들은 죽은 자들에게 회개치 아니한 무슨 죄가 있어서 벌을 받은 게 아닐까하는 생각을 품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에게 밖에서 또는 남에게서 죄를 찾지 말고, 안에서 또는 자기 안에서 잘못을 찾아 회개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폭동과 관련한 것이든 인재(人災)로 인한 것이든 인간의 불행은 ‘우리는 그와 같은 화를 면하게 돼서 기쁘다’가 아니고, ‘우리도 회개치 아니하면 언제든지 저들처럼 될 수 있다’는 하나님의 경고인 것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의 예언자들은 재앙이 닥칠 때마다 민중에게 재앙의 원인을 외부에서 찾지 말고 내부에서 찾아 회개할 것을 강하게 당부하였습니다. 예언자들의 반성기준은 언제나 ‘우리 하나님의 자녀들이 하나님과의 약속을 잘 지켜왔는가, 하나님을 경외하고 다른 신을 섬기지 않기로 한 약속을 잘 지켜왔는가, 이웃을 사랑하며 하나님의 소유를 잘 관리해야할 임무를 소홀히 하지 않았는가.’ 등이었습니다. 이런 자기반성과 회개가 오늘날의 끊임없는 참사 앞에서 우리 신앙인들이 가져야할 겸허한 자세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누구의 죄 때문인가’를 묻기 전에 ‘내 탓이오’라고 말할 수 있을 때 우리 인간들은 우리 앞에 닥치는 참사가 자연재해로 인한 것이든, 인간관계에서 빚어지는 것이든 크게 줄여나갈 수 있을 것이고, 하나님의 나라도 앞당겨 실현될 수 있을 것입니다. 혹자는 인간이 빨리 망하면 망할수록 하나님의 나라가 더 빨리 도래한다고 말할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것은 크게 잘못된 생각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든, 인관과의 관계든, 혹은 자연과의 관계든, 그 어떤 관계든 간에 관계를 개선하고 평화로운 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 그 첫걸음은 ‘내 탓이오’라고 가슴을 치며 회개하는 것입니다. 오늘의 끝없는 참사, 그것은 다름 아닌 바로, 여러분과 나, 우리의 모두의 잘못 때문입니다.
지구촌 곳곳이 이상기후로 몸살을 앓고 있습니다. 금년 한해만 아시아 지역에서 홍수나 폭우로 수천 명이 죽고 천만이 넘는 사람이 집을 잃었습니다. 유럽에서도 살인더위와 가뭄으로 인해서 인명과 재산피해가 컸습니다.
우리나라에는 하루걸러 한번 꼴로 비가 내렸습니다. 중앙재해대책본부에 따르면, 태풍 ‘매미’ 하나로 죽은 사람이 113명, 실종이 14명, 그리고 재산피해액이 4조3천320억원에 달한다고 합니다. 미국도 허리케인 이자벨로 인해서 최소 29명이 죽고, 6백만 명이 정전 피해를 입었습니다. 재산피해액이 7,080억원(600만 달러), 보험사가 지불해야할 돈이 1조 1,800억원(10억 달러)에 달할 것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허리케인으로 인한 미국의 피해가 매미로 인한 우리나라의 피해보다 크게 낮은 이유는 미국이 1주일 전부터 허리케인의 이동경로를 철저히 감시하고 대책을 마련한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런 자연재해들은 지구온난화 때문이라고 하는데요. 우리나라는 지난 32년간 1.6℃의 온도가 상승했다고 합니다. 이 정도의 온도상승에 입고 있는 피해가 적지 아니한데요, 100년 후에는 지구온도가 7~10℃까지 오르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그렇게 되면 해수면이 높아져 생기는 침수와 생태계교란, 그리고 농수산업의 피해는 물론이고, 너무 뜨거워서 사람이 살 수 없는 지구가 되고 말 것입니다. 왜 이런 참사가 빚어질까요? 누구의 죄 때문일까요? 지구는 지금 어쩌면 태풍과 성난 파도에 휩쓸리기 시작한 다시스로 향하는 배일는지도 모릅니다. 선원과 승객들은 이런 저런 방책을 강구하기도 하고 배를 살려보려고 백방으로 노력하지만, 그러나 해결책은 단 한 가지뿐입니다. 지구배의 선원과 승객 모두가 요나처럼 가슴을 치며 회개하는 것입니다. “너희가 이 큰 폭풍을 만난 것이 나의 연고인 줄을 내가 아노라”(욘 1:12).
성경은 인간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일방적인 명령을 주고받는 관계로 보지 않고 계약관계로 봅니다. 사람들은 흔히 “선악과를 먹지 말라”나 “내 앞에 다른 신을 두지 말라”와 같은 하나님의 말씀을 명령으로 이해하고 인간은 마땅히 하나님의 명령을 듣고 지켜야할 피동적인 존재로 인식합니다. 그러나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십계명이나 율법과 같은 것들은 계약법입니다. “~를 하지 말라”나 “~를 하라”와 같은 법은 그것을 만든 주체가 하나님일지라도 상대인 인간의 동의와 자발적인 행동이 없이는 지켜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결코 일방적일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에 나타난 인간과 하나님과의 관계는 축복과 저주를 조건으로 한 계약으로 시작되고 있고, 완전하지 못한 피조물 인간이 언제나 먼저 하나님과의 약속을 깨고 있고, 완전하지만,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이 언제나 솔선해서 뒷수습을 감당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을 한번 약속한 것은 반드시 지키는 분으로 고백하고 있고, 신실하신 하나님, 미쁘신 하나님 등으로 찬송합니다.
인간과 자연과의 관계도 마찬가집니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땅을 정복하고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셨어도 인간은 자연의 소유주가 아니라, 관리자에 불과합니다. 자연의 소유주는 그것을 만든 하나님이시고, 인간은 그것을 잠시 맡아 관리하는 정원지기와 같은 것인데, 그러니까 이것이 인간과 자연과의 관계이고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임무인데, 인간이 하나님께 부여받은 임무를 경홀히 여겨 소홀히 하는가하면 하나님과의 약속과 자연과의 묵계를 파기함으로써 자연의 일부인 뱀과 원수가 되고, 땅이 저주를 받아 인간에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내는 갈등관계가 되었습니다. 따라서 자연재해는 인간과 자연과의 갈등 때문에 빚어지는 현상이자 악순환인 것입니다. 이 악순환의 고리를 끊으려면 자연에 대한 인간의 책무를 보다 적극적으로 수행해야 합니다. 자연은 인간처럼 이성과 인격을 가진 존재가 아니기 때문에, 하나님이 등 돌리고 돌아선 인간에게 그들의 배신과 악의적인 행동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솔선수범하시고 내리사랑으로 인간에게 다가오듯이, 각가지 재해로 인간에게 피해를 입히는 자연을 향해서 인간은 욕심을 버리고 개발이란 이름으로 자행되는 착취를 멈추고, 보호하고 보존하는 일에 관심을 기우려야 할 것입니다.
야고보서 1장 15절에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는다.”고 하였습니다. 욕심에 눈이 어두워서 수탈행위를 멈추지 않거나 사랑하며 돌보며 살기로 한 묵계를 깨게 되면 그 피해를 고스란히 인간이 입게 됩니다. 톨스토이의 글 「대자」에 곰 사냥 이야기가 있습니다.
숲 속 넓은 초원 큰 소나무에 무거운 통나무를 가지에 매달아 늘어뜨려 놓고 통나무 밑에다 꿀통을 놓아둡니다. 그러면 곰들이 나타나 코를 벌름거리며 꿀통으로 다가가 코끝을 처박고 꿀을 핥습니다. 그러다 보면, 소나무에 매달려 있던 통나무가 곰들의 몸에 닿아서 조금씩 움직이게 되고, 곰들을 건들게 됩니다. 이를 귀찮게 여긴 곰이 통나무를 멀찌감치 밀쳐버리면 사태는 악화됩니다. 곰에게서 멀어졌던 통나무는 여지없이 제자리로 돌아오면서 곰의 머리나 등을 치게 되기 때문입니다. 통나무에 얻어맞고 물러섰던 곰은 화가 나서 그 다음엔 통나무를 더 힘껏 더 멀리 던지게 되고, 그네처럼 멀리 밀려갔던 통나무는 더 큰 힘으로 되돌아와서는 그 순간 꿀통에 다가선 곰을 전보다 더 세게 쳐서 쓰러뜨립니다. 이런 일이 반복되게 되면 결국 한 놈이 통나무에 맞아 죽게 됩니다. 되로 주고 말로 받는 격이지요. 인간과 자연과의 관계가 이렇습니다. 인간들이 회개하지 않는 한, 해가 거듭 될수록 자연은 욕심꾸러기 인간들에게 엄청난 피해를 안겨줄 것입니다.
인간 세계에 펼쳐지는 끝없는 참사는 인간들의 지칠 줄 모르는 미움과 보복 때문이기도 합니다. “불을 놓아두면 끄지 못한다.”는 것이 톨스토이의 믿음입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2001년 9월 11일 뉴욕에서 발생한 테러사건입니다. 이 사건으로 무역센터 쌍둥이 건물이 완전히 붕괴되지 않았습니까? 이 때 붕괴된 무역센터는 1972년과 73년에 각각 110층으로 건축된 높이 417미터와 415미터에 이르는 쌍둥이 건물로써 이 테러사건으로 인해서 입은 인적 물적 손실액은 무려 53조원(450억 달러)에 달한다는 보고가 있습니다. 사소한 다툼과 미움은 작은 불일 때 꺼야지 버려두면 끄지 못하는 큰 불이 되어 결국에는 모든 것을 잃게 된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적잖은 사람들이 “불을 놓아두면 끄지 못한다.”는 격언을 용서해주거나 용서를 빌어서 시급하게 화해하지 않으면 화를 당할 수 있다는 말로 받지 않고 “불씨를 제거한다.”, “싹을 자른다.” 또는 “손을 본다.” 등의 말을 하면서 타는 불에 휘발유를 뿌립니다. 미군과 영국군이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를 침공한 것이나 이스라엘군이 팔레스타인 자치지구를 점령한 것이 다 ‘손을 본다.’는 그릇된 생각에서 비롯된 것들입니다.
그러나 아랍사람들의 복수에 대한 집념은 가공할 정도라고 합니다. 누군가가 살해당하면 그 피살자의 친인척에 속한 모든 남자들은 복수의무를 지니게 되며, 이 복수의무가 주어지는 혈연집단을 '카므사'라고 부릅니다. 만약 복수하지 못하거나 복수에 소홀하면 그 카므사의 명예는 형편없이 추락하여 그 카므사와는 교역도 결혼도 기피하기 때문에 카므사간의 싸움이 종족간의 전쟁으로 비화되는 사례가 적지 않다고 합니다. 같은 혈연집단끼리 이동하며 사는 사막의 유목생활이기 때문에 종족안전에의 연대책임이 강해질 수밖에 없었다는 것입니다. 이런 ‘피 보상’의 개념이 유대인들에게서는 ‘고엘 하담’이란 말로 나타납니다.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는 소위 말하는 보복정의를 강조합니다. 이것은 9.11테러와 같은 엄청난 비극이 왜 일어나는가에 대한 설명이 될 수 있습니다.
사소한 다툼이 미움을 부르고, 미움은 보복을 부르고, 보복은 피를 부릅니다. 예수님은 ‘피를 피로 갚으라.’는 사막의 계율을 바꿔서 ‘피를 용서로 갚으라.’는 사랑의 교훈을 십자가의 희생과 용서의 기도로써 친히 가르치셨습니다. 요한일서 4장 20절에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다.”고 한 말씀을 마음에 새겼으면 합니다.
최근 10년 동안 우리나라에는 여러 건의 대형사고가 있었습니다. 93년 3월 28일의 구포열차전복사고(사망 78, 부상 105), 93년 7월 26일의 아시아나기추락사고(사망 66), 93년 10월 10일의 서해훼리호침몰사고(사망 292), 94년 10월 21일의 성수대교붕괴사고(사망 32, 부상 17), 94년 10월 24일의 충주호유람선화재사고(사망 25, 실종 4, 부상 33), 94년 12월 7일의 아현동가스폭발사고(사망 12, 실종 1, 부상 65, 이재민 6백여 명), 95년 4월 28일의 대구가스폭발사고(사망 98, 실종 3, 부상 125), 95년 6월 29일의 서울 삼풍백화점붕괴사고(사망 458명, 실종 100여명, 부상 1천여 명)가 그것들입니다. 이들 사고로 인해서 수많은 사람들이 죽거나 다쳤고 재산피해도 엄청났습니다.
이럴 때 사람들은 곧잘 남에게서 불행의 원인을 찾으려고 합니다.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지도자를 원망하거나, 이웃을 원망하거나, 가족과 친지를 원망합니다. 그래서 환난이 닥칠 때면 언제나 어김없이 찾아오는 것이 분열입니다. 가정이 분열되고 사회가 분열됩니다. 1995년 7월 10일자 뉴스위크지는 이런 일련의 사고들을 일컬어 ‘끝없는 참사’ 또는 ‘사고왕국'이라는 타이틀로 기사를 쓰고 있고 이런 일련의 사고들이 김영삼 대통령의 과실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대통령을 책망한다고 적었습니다.
역사적으로 유태인들은 질병이나 여러 재앙들의 원인을 조상의 죄 탓이나 당사자의 죄 탓으로 이해했습니다. 재앙을 당한 자를 위로하고 돕기보다는 숨겨진 죄를 밝히기에 바빴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이 병자를 돌보시고 고쳐주실 때에 비방하고 손가락질했습니다.
교회가 세워지고 처음 300년 동안 로마제국으로부터 탄압을 받았던 그리스도인들은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기독교를 허용함으로써 비로소 신앙의 자유를 얻었습니다. 이 때부터 기독교인들은 급속히 늘어서 제국의 모든 시민이 교회를 출석하기에 이르렀습니다. 반대로 유태인들은 예수님을 죽인 살인자로 1000여 년간 탄압을 받아야 했습니다.
아돌프 히틀러는 자신과 어머니의 불행을 유태인들 탓으로 돌렸습니다. 그 결과 그는 600백만 유태인들의 원흉이 되고 말았습니다.
금년은 일본 관토(關東)대지진이 발생한 지 80주년이 되는 날입니다. 참고로 일본에는 80년 주기로 대지진이 발생한다는 연구가 있습니다. 며칠 전에도 어김없이 큰 지진이 발생했습니다. 1923년 9월 1일 오전 11시58분, 일본 도쿄와 요코하마 일대에 진도 7.9의 지진이 밀어닥쳐 14만여 명의 인명이 희생되고 가옥 57만 채가 파괴되거나 불에 탔습니다. 지진 후 공황상태에서 일본 내무성 경보국(警保局)이 ‘조선인들이 폭동을 일으켰다.’ ‘조선인들이 방화를 일삼고 우물에 독약을 넣었다.’ 등의 악성 유언비어를 퍼뜨렸습니다. 이 루머로 인해서 6일 동안에 일본 자경단원들과 군인들에 의해서 죽창과 흉기와 총칼에 살해된 우리 동포의 수가 일본의 공식집계만으로도 6,433명이나 되었습니다.
흑사병이 고대도시 아테네를 강타했을 때 일찍이 겪어보진 못한 이 무서운 병으로 인해서 아테네는 죽음과 공포의 도시로 변해 버렸습니다. 그런데 아테네 시민들은 이 재앙의 원인을 아테네 시민에게 위대한 민주주의 시대를 열어준 페리클레스(Perikles/495?-429 BC)의 탓으로 돌렸고, 그 결과 아테네의 전성시대는 막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문제의 원인을 남에게서 찾으려 하면 엄청난 비극이 초래됩니다. 그러므로 우리 앞에 어려움이 전개될 때마다 우리는 그 탓을 남에게서 찾지 말고 우리 안에서 찾아야 합니다. 요나처럼 가슴을 치며 회개해야 합니다. “너희가 이 큰 폭풍을 만난 것이 나의 연고인 줄을 내가 아노라”(욘 1:12). 예수님도 누가복음 13장 1-5절에서 경고하셨습니다. “그 때 마침 두어 사람이 와서 빌라도가 어떤 갈릴리 사람들의 피를 저희의 제물에 섞은 일로 예수께 고하니, ‘너희는 이 갈릴리 사람들이 이같이 해 받음으로써 모든 갈릴리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치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또 실로암에서 망대가 무너져 치어죽은 열여덟 사람이 예루살렘에 거한 모든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치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여기서 빌라도가 희생물을 드리던 갈릴리 사람들을 학살하여 그 흘린 피가 제물에 물들게 한 사건은 폭동에 연루된 사건일 것이고, 실로암망대가 무너져 사람들이 깔려 죽은 것은 인재(人災)로 봐야할 것입니다. 이들 재앙을 당한 사람들에 대해서 당시의 유태인들은 죽은 자들에게 회개치 아니한 무슨 죄가 있어서 벌을 받은 게 아닐까하는 생각을 품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에게 밖에서 또는 남에게서 죄를 찾지 말고, 안에서 또는 자기 안에서 잘못을 찾아 회개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폭동과 관련한 것이든 인재(人災)로 인한 것이든 인간의 불행은 ‘우리는 그와 같은 화를 면하게 돼서 기쁘다’가 아니고, ‘우리도 회개치 아니하면 언제든지 저들처럼 될 수 있다’는 하나님의 경고인 것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의 예언자들은 재앙이 닥칠 때마다 민중에게 재앙의 원인을 외부에서 찾지 말고 내부에서 찾아 회개할 것을 강하게 당부하였습니다. 예언자들의 반성기준은 언제나 ‘우리 하나님의 자녀들이 하나님과의 약속을 잘 지켜왔는가, 하나님을 경외하고 다른 신을 섬기지 않기로 한 약속을 잘 지켜왔는가, 이웃을 사랑하며 하나님의 소유를 잘 관리해야할 임무를 소홀히 하지 않았는가.’ 등이었습니다. 이런 자기반성과 회개가 오늘날의 끊임없는 참사 앞에서 우리 신앙인들이 가져야할 겸허한 자세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누구의 죄 때문인가’를 묻기 전에 ‘내 탓이오’라고 말할 수 있을 때 우리 인간들은 우리 앞에 닥치는 참사가 자연재해로 인한 것이든, 인간관계에서 빚어지는 것이든 크게 줄여나갈 수 있을 것이고, 하나님의 나라도 앞당겨 실현될 수 있을 것입니다. 혹자는 인간이 빨리 망하면 망할수록 하나님의 나라가 더 빨리 도래한다고 말할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것은 크게 잘못된 생각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든, 인관과의 관계든, 혹은 자연과의 관계든, 그 어떤 관계든 간에 관계를 개선하고 평화로운 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 그 첫걸음은 ‘내 탓이오’라고 가슴을 치며 회개하는 것입니다. 오늘의 끝없는 참사, 그것은 다름 아닌 바로, 여러분과 나, 우리의 모두의 잘못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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