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죽음에 대한 고민(마 26:36-46)
본문
예수님의 죽음에 대한 고민(마 26:36-46)
이달 3월은 사순절기간이고 이 3월에 고난주간과 부활주일이 다 들어 있습니다. 이 시기에 예수님은 무엇을 생각하고 계셨을까, 무엇을 고민하고 계셨을까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십중팔구 죽음에 관한 생각이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예수님의 죽음에 대한 고민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에 대해서 함께 생각해 보았으면 합니다.
아무리 강력한 힘을 가진 동장군(冬將軍)이라 할지라도 찾아오는 봄기운을 막지는 못합니다. 그래서 김남조 시인은 그 봄기운을 생명의 부싯돌이라 했습니다.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저승의 왕 하데스조차도 자신의 아내이자 부활의 여신인 페르세포네를 붙잡아 둘 수 없어서 그녀가 지상으로 돌아오는 계절이 봄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이 봄의 시작을 알리는 3월에 예수님은 계절의 변화와는 정반대로 죽음을 생각하셨습니다. 어찌 보면 자연현상과 부조화인 것 같아도 실상은 예수님의 고민과 십자가의 죽음은 지옥의 왕 마귀조차도 예수님을 포함해서 이미 죽은 자들과 또 앞으로 죽게 될 하나님을 믿는 모든 자들을 지옥에 붙들어 둘 수 없다는 강력한 선전포고인 것입니다. 겨울이 찾아오는 봄을 막을 수 없듯이 지옥은 하나님을 믿는 자들에게 생명을 되돌려 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요나를 삼켰던 물고기가 그를 해변에 토해내지 않을 수 없었던 것처럼, 지옥의 마귀가 예수님을 무덤 밖으로 토해내지 않을 수 없었던 것처럼 모든 믿는 자들의 생명을 토해내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고민과 십자가의 죽음은 불행의 끝이 아니라 행복의 시작인 것입니다.
일본인 소설가 엔도 슈사꾸가 쓴 책 가운데, 나의 예수란 것이 있습니다. 우리말로는 1981년에 예수 지하철을 타다로 번역되어 나왔는데요, 이 책에서 엔도는 예수님이 공생애 시작 때 받은 사단의 세 가지 시험을 좀 색다르게 해석하고 있습니다. 그에 의하면, 사단의 유혹은 민중의 강력한 요청으로써 인간의 구원을 지상에서 추구하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것이었다는 것입니다. 생활에 필요한 빵이야말로 그 어떤 구원의 말보다도 더 요긴한 게 아니냐고 묻는 것이었다고 했습니다.
이 사단의 유혹은 오늘날의 여러분과 나를 포함한 모든 현대인들의 강력한 요청일 것입니다. 이 요청에 효과적으로 응했던 사람들이 지난주에 끝난 MBC월화 드라마 「영웅시대」에서도 묘사되었지만, 박정희, 정주영, 이병철과 같은 분들이 아니었나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였을까요? 작가는 이병철씨의 가명을 국대호(國大虎)라 했고, 정주영씨의 가명을 천태산(天泰山)이라고 했습니다.
또 엔도는 사단은 예수님을 높은 산으로 데려가서는 자기에게 절만하면 천하만국과 그 영광을 다 주겠다고 했는데, 이 유혹은 혁명가들의 대장이 되어달라는 요청이었다고 했습니다.
로마제국의 지배아래서 헐벗고 굶주리며 목자 없는 양처럼 방황하는 민중의 처지를 알았던 예수님으로서는 이 사단의 유혹을 거절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예수님의 40일 단식기도는 민중의 강력한 요청에 대해서 뿐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찾고 자신의 행로를 결정지으려는 몸부림이었을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은 민중의 요청인 빵문제보다는 영혼문제, 세상의 명예와 권세보다는 가장 가치 있는 죽음을 놓고 고민하셨습니다. 그래서 엔도 슈사꾸는 그의 다른 책인 예수의 생애에서 말하기를, 예수님은 뭐라 표현할 수 없는 고통의 그림자와 피로에 지친 눈과 괴로운 빛이 감도는 매우 초췌한 모습이었다고 했습니다. 엔도의 추측이 어느 정도까지 옳은 것인지는 판단할 수 없지만, 적어도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사순절의 이 시기, 죽음을 앞둔 이 시기의 예수님에게는 아주 적절한 표현이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성공에 중독된 문화와 세상적인 명예와 권세와 부를 추구하며 승리의 월계관을 쓰고 힘차게 울러 퍼지는 팡파르 속에서 살기를 원하는 오늘의 현대인들에게 예수님의 이 고민은 많은 교훈을 남기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추종하던 제자들을 포함해서 예루살렘의 정치종교지도자들, 노동자와 농민들, 상인들까지도 영원히 사는 방법을 찾고 있었고 출세를 꿈꾸며 권세와 돈을 추구하고 있을 때, 오히려 예수님은 죽음을 놓고 심각하게 고민하셨던 것입니다. 땅속에서 생명이 꿈틀거리는 부활의 계절에 죽음을 생각하셨습니다. 전도서의 저자가 “지혜자의 마음은 초상집에 있으되, 우매자의 마음은 연락하는 집에 있다.”(전 7:4)고 했듯이, 사람들의 마음이 잔칫집에 가 있을 때, 예수님의 마음은 초상집에 가 있었던 것입니다. 또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막 8:35). 생명이 있을 때 죽음을 생각하고, 부요할 때 자발적인 가난을 생각하고, 건강할 때 병듦을 생각하고, 높은 지위에 있을 때 자발적인 낮아짐을 생각하는 것이 전도자가 말한 대로 지혜로운 자가 아닐까요? 강제하는 사람은 없지만, 자발적으로 대중적인 생각과 다르게 사는 것, 이것이 바로 죽고 나서 영원히 사는 길이고, 자발적으로 가난해지고 나서 영원히 부요해 지는 길이고, 자발적으로 낮아지고 나서 영원히 높임을 받는 길이란 것을 웅변적으로 예수님은 선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몇 일전에 댄(Dan)이란 미국인 친구로부터 이메일을 받았는데요, 그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너무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의 부활을 제외하고는 거의 모든 것에 대해서 믿을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이 자신으로써는 당황스럽다고 했습니다. 정말 그런 것 같지 않습니까? 하버드대학교 신학과 교수인 하비 콕스가 최근에 쓴 예수 하버드에 오다는 책을 보니까, 미국에서는 1950년대에 종교가 가파르게 쇠퇴하고 있다는 생각이 널리 펴져 있었다고 했습니다. 죽음이나 내세와 같은 거창한 물음에 대해서 교회 밖에서는 사람들이 더 이상 생각하려들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렇더라도 종교가 사라지고 말 것이란 자신감 넘치는 예언은 빗나갔다고 했습니다.
오늘날 우리 국민들의 종교에 대한 생각이 1950년대의 미국인들의 생각과 다를 게 전혀 없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죽음에 대한 고민은 현대인들이 생각하는 종교의 죽음, 곧 종교가 사라질 것이란 예언에 대한 선전포고나 다름없습니다.
아무리 피하고 싶어도 피할 수 없는 것이 죽음입니다. 다가올 죽음을 어떻게 맞이할 것인가, 어떻게 죽는 것이 가장 값진 죽음인가를 생각하게 해주는 것이 예수님의 죽음의 진정한 모습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죽음에 대한 고민은 자살이 유행처럼 번지고 있는 오늘의 실태를 고발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죽으면 그만이다는 세상풍조에 대한 강력한 도전인 것입니다.
예수님 시대에 로마제국은 황제의 후원아래 ‘로마의 평화’(pax romana)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이 ‘팍스’(pax), 곧 ‘평화’는 평화라는 미명하에 자행되는 전쟁과 죽임과 착취와 탄압의 대가로 얻어지는 잠정적인 것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제시한 평화는 세상이 주는 팍스(pax)가 아니라, 하나님이 주는 샬롬(shalom)이었습니다. 하비 콕스는 이 샬롬, 곧 평화를 “황제의 이름으로 무자비하게 강제된 평화가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로써의 평화”라고 하였습니다. 이 평화는 다른 사람을 죽임으로써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 자진하여 십자가에 죽음으로써 얻어진 평화였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죽음에 대한 고민은 거짓 평화에 대한 강력한 선전포고였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에 대한 고민은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진 사회적 통설을 뒤집어엎고 대중의 인습적 세계관을 흔들어놓고 만 쓰나미요, 의식의 변화를 촉구한 것이며, 항상 죽음을 대비하고 살아야 할 것에 대한 강력한 경고입니다. 또한 예수님의 죽음에 대한 고민은 현 세계와 질서가 끝나고 새로운 세계와 새로운 질서가 도래할 것에 대한 예고이며, 궁극적인 하나님의 승리를 예고하는 복음인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마태복음 26장 36-46절의 말씀은 죽음을 앞둔 예수님의 번민과 고민이 얼마나 컸는가를 잘 드러내 보여줄 뿐 아니라 몇 가지 중요한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첫째,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데리고 겟세마네 동산에 올라가신 것은 죽음에 대한 번민과 고민 때문이었습니다. 육신적인 욕망을 기도로써 극복하고 하나님의 뜻을 반드시 성취하겠다는 강력한 의지의 표현이었을 것입니다.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에게 하신 말씀을 보면,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다”는 것이었고, 실제로도 고민하고 슬퍼하셨습니다.
둘째, 예수님의 이 번민과 고민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주님과 함께 깨어 있어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쉽게도 출세에 눈이 어두웠던 제자들은 눈앞에 닥친 어둠의 현실을 꿰뚫어 보지를 못했습니다. 팡파르가 울릴 내일을 위해서 그들이 기대했던 것은 주님과 함께 깨어서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달콤한 잠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제자들의 이런 무지한 현실에 강력히 책망하시며 도전하십니다. “너희가 나와 함께 한 시 동안도 이렇게 깨어 있을 수 없더냐?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고 하셨습니다. 어쩌면 이것이 오늘날의 여러분과 나의 현실일는지 모릅니다. 마땅히 깨어 있어 기도해야할 때인 지금 오히려 우리는 허황된 꿈에 젖어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죽음에 대한 고민은 이런 우리에게 강력히 도전하시는 것입니다. “너희가 나와 함께 한 시 동안도 이렇게 깨어 있을 수 없더냐?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
셋째, 예수님은 우리에게 기도의 본을 보이셨습니다.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예수님은 이 기도를 세 번 반복해서 하셨습니다. 세 번이 갖는 의미는 확증입니다. 예수님은 의심이 사라지고 확신이 설 때까지 기도하셨던 것입니다.
넷째, 인간의 죽음은 가장 나약한 상태임을 말해 줍니다. 예수님조차 고민하고 슬퍼하시며 번민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잖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의 능력은 인간이 가장 나약한 곳, 곧 실패의 장소에서 나타납니다. 예수님이 못 박힌 십자가에서 온 인류를 구원할 능력이 나타났고, 죽어서 갇힌 무덤에서 부활의 축복이 나타난 것이 바로 이 점을 강력하게 입증하는 것입니다.
사순절 시기인 3월 한 달간 우리 주님의 고난에 어떤 모양으로든 동참해 보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 주님과 함께하는 죽음에 대한 고민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하는 자살이나 안락사와 같은 것이 아닙니다. 주님과 함께하는 죽음에 대한 고민은 영원히 사는 축복에 관한 것이요, 마음에 이뤄지는 참 평화에 관한 것입니다. 이런 축복이 3월 한 달 내내 성도님들에게 있기를 축원합니다.
이달 3월은 사순절기간이고 이 3월에 고난주간과 부활주일이 다 들어 있습니다. 이 시기에 예수님은 무엇을 생각하고 계셨을까, 무엇을 고민하고 계셨을까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십중팔구 죽음에 관한 생각이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예수님의 죽음에 대한 고민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에 대해서 함께 생각해 보았으면 합니다.
아무리 강력한 힘을 가진 동장군(冬將軍)이라 할지라도 찾아오는 봄기운을 막지는 못합니다. 그래서 김남조 시인은 그 봄기운을 생명의 부싯돌이라 했습니다.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저승의 왕 하데스조차도 자신의 아내이자 부활의 여신인 페르세포네를 붙잡아 둘 수 없어서 그녀가 지상으로 돌아오는 계절이 봄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이 봄의 시작을 알리는 3월에 예수님은 계절의 변화와는 정반대로 죽음을 생각하셨습니다. 어찌 보면 자연현상과 부조화인 것 같아도 실상은 예수님의 고민과 십자가의 죽음은 지옥의 왕 마귀조차도 예수님을 포함해서 이미 죽은 자들과 또 앞으로 죽게 될 하나님을 믿는 모든 자들을 지옥에 붙들어 둘 수 없다는 강력한 선전포고인 것입니다. 겨울이 찾아오는 봄을 막을 수 없듯이 지옥은 하나님을 믿는 자들에게 생명을 되돌려 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요나를 삼켰던 물고기가 그를 해변에 토해내지 않을 수 없었던 것처럼, 지옥의 마귀가 예수님을 무덤 밖으로 토해내지 않을 수 없었던 것처럼 모든 믿는 자들의 생명을 토해내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고민과 십자가의 죽음은 불행의 끝이 아니라 행복의 시작인 것입니다.
일본인 소설가 엔도 슈사꾸가 쓴 책 가운데, 나의 예수란 것이 있습니다. 우리말로는 1981년에 예수 지하철을 타다로 번역되어 나왔는데요, 이 책에서 엔도는 예수님이 공생애 시작 때 받은 사단의 세 가지 시험을 좀 색다르게 해석하고 있습니다. 그에 의하면, 사단의 유혹은 민중의 강력한 요청으로써 인간의 구원을 지상에서 추구하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것이었다는 것입니다. 생활에 필요한 빵이야말로 그 어떤 구원의 말보다도 더 요긴한 게 아니냐고 묻는 것이었다고 했습니다.
이 사단의 유혹은 오늘날의 여러분과 나를 포함한 모든 현대인들의 강력한 요청일 것입니다. 이 요청에 효과적으로 응했던 사람들이 지난주에 끝난 MBC월화 드라마 「영웅시대」에서도 묘사되었지만, 박정희, 정주영, 이병철과 같은 분들이 아니었나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였을까요? 작가는 이병철씨의 가명을 국대호(國大虎)라 했고, 정주영씨의 가명을 천태산(天泰山)이라고 했습니다.
또 엔도는 사단은 예수님을 높은 산으로 데려가서는 자기에게 절만하면 천하만국과 그 영광을 다 주겠다고 했는데, 이 유혹은 혁명가들의 대장이 되어달라는 요청이었다고 했습니다.
로마제국의 지배아래서 헐벗고 굶주리며 목자 없는 양처럼 방황하는 민중의 처지를 알았던 예수님으로서는 이 사단의 유혹을 거절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예수님의 40일 단식기도는 민중의 강력한 요청에 대해서 뿐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찾고 자신의 행로를 결정지으려는 몸부림이었을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은 민중의 요청인 빵문제보다는 영혼문제, 세상의 명예와 권세보다는 가장 가치 있는 죽음을 놓고 고민하셨습니다. 그래서 엔도 슈사꾸는 그의 다른 책인 예수의 생애에서 말하기를, 예수님은 뭐라 표현할 수 없는 고통의 그림자와 피로에 지친 눈과 괴로운 빛이 감도는 매우 초췌한 모습이었다고 했습니다. 엔도의 추측이 어느 정도까지 옳은 것인지는 판단할 수 없지만, 적어도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사순절의 이 시기, 죽음을 앞둔 이 시기의 예수님에게는 아주 적절한 표현이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성공에 중독된 문화와 세상적인 명예와 권세와 부를 추구하며 승리의 월계관을 쓰고 힘차게 울러 퍼지는 팡파르 속에서 살기를 원하는 오늘의 현대인들에게 예수님의 이 고민은 많은 교훈을 남기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추종하던 제자들을 포함해서 예루살렘의 정치종교지도자들, 노동자와 농민들, 상인들까지도 영원히 사는 방법을 찾고 있었고 출세를 꿈꾸며 권세와 돈을 추구하고 있을 때, 오히려 예수님은 죽음을 놓고 심각하게 고민하셨던 것입니다. 땅속에서 생명이 꿈틀거리는 부활의 계절에 죽음을 생각하셨습니다. 전도서의 저자가 “지혜자의 마음은 초상집에 있으되, 우매자의 마음은 연락하는 집에 있다.”(전 7:4)고 했듯이, 사람들의 마음이 잔칫집에 가 있을 때, 예수님의 마음은 초상집에 가 있었던 것입니다. 또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막 8:35). 생명이 있을 때 죽음을 생각하고, 부요할 때 자발적인 가난을 생각하고, 건강할 때 병듦을 생각하고, 높은 지위에 있을 때 자발적인 낮아짐을 생각하는 것이 전도자가 말한 대로 지혜로운 자가 아닐까요? 강제하는 사람은 없지만, 자발적으로 대중적인 생각과 다르게 사는 것, 이것이 바로 죽고 나서 영원히 사는 길이고, 자발적으로 가난해지고 나서 영원히 부요해 지는 길이고, 자발적으로 낮아지고 나서 영원히 높임을 받는 길이란 것을 웅변적으로 예수님은 선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몇 일전에 댄(Dan)이란 미국인 친구로부터 이메일을 받았는데요, 그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너무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의 부활을 제외하고는 거의 모든 것에 대해서 믿을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이 자신으로써는 당황스럽다고 했습니다. 정말 그런 것 같지 않습니까? 하버드대학교 신학과 교수인 하비 콕스가 최근에 쓴 예수 하버드에 오다는 책을 보니까, 미국에서는 1950년대에 종교가 가파르게 쇠퇴하고 있다는 생각이 널리 펴져 있었다고 했습니다. 죽음이나 내세와 같은 거창한 물음에 대해서 교회 밖에서는 사람들이 더 이상 생각하려들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렇더라도 종교가 사라지고 말 것이란 자신감 넘치는 예언은 빗나갔다고 했습니다.
오늘날 우리 국민들의 종교에 대한 생각이 1950년대의 미국인들의 생각과 다를 게 전혀 없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죽음에 대한 고민은 현대인들이 생각하는 종교의 죽음, 곧 종교가 사라질 것이란 예언에 대한 선전포고나 다름없습니다.
아무리 피하고 싶어도 피할 수 없는 것이 죽음입니다. 다가올 죽음을 어떻게 맞이할 것인가, 어떻게 죽는 것이 가장 값진 죽음인가를 생각하게 해주는 것이 예수님의 죽음의 진정한 모습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죽음에 대한 고민은 자살이 유행처럼 번지고 있는 오늘의 실태를 고발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죽으면 그만이다는 세상풍조에 대한 강력한 도전인 것입니다.
예수님 시대에 로마제국은 황제의 후원아래 ‘로마의 평화’(pax romana)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이 ‘팍스’(pax), 곧 ‘평화’는 평화라는 미명하에 자행되는 전쟁과 죽임과 착취와 탄압의 대가로 얻어지는 잠정적인 것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제시한 평화는 세상이 주는 팍스(pax)가 아니라, 하나님이 주는 샬롬(shalom)이었습니다. 하비 콕스는 이 샬롬, 곧 평화를 “황제의 이름으로 무자비하게 강제된 평화가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로써의 평화”라고 하였습니다. 이 평화는 다른 사람을 죽임으로써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 자진하여 십자가에 죽음으로써 얻어진 평화였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죽음에 대한 고민은 거짓 평화에 대한 강력한 선전포고였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에 대한 고민은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진 사회적 통설을 뒤집어엎고 대중의 인습적 세계관을 흔들어놓고 만 쓰나미요, 의식의 변화를 촉구한 것이며, 항상 죽음을 대비하고 살아야 할 것에 대한 강력한 경고입니다. 또한 예수님의 죽음에 대한 고민은 현 세계와 질서가 끝나고 새로운 세계와 새로운 질서가 도래할 것에 대한 예고이며, 궁극적인 하나님의 승리를 예고하는 복음인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마태복음 26장 36-46절의 말씀은 죽음을 앞둔 예수님의 번민과 고민이 얼마나 컸는가를 잘 드러내 보여줄 뿐 아니라 몇 가지 중요한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첫째,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데리고 겟세마네 동산에 올라가신 것은 죽음에 대한 번민과 고민 때문이었습니다. 육신적인 욕망을 기도로써 극복하고 하나님의 뜻을 반드시 성취하겠다는 강력한 의지의 표현이었을 것입니다.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에게 하신 말씀을 보면,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다”는 것이었고, 실제로도 고민하고 슬퍼하셨습니다.
둘째, 예수님의 이 번민과 고민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주님과 함께 깨어 있어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쉽게도 출세에 눈이 어두웠던 제자들은 눈앞에 닥친 어둠의 현실을 꿰뚫어 보지를 못했습니다. 팡파르가 울릴 내일을 위해서 그들이 기대했던 것은 주님과 함께 깨어서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달콤한 잠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제자들의 이런 무지한 현실에 강력히 책망하시며 도전하십니다. “너희가 나와 함께 한 시 동안도 이렇게 깨어 있을 수 없더냐?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고 하셨습니다. 어쩌면 이것이 오늘날의 여러분과 나의 현실일는지 모릅니다. 마땅히 깨어 있어 기도해야할 때인 지금 오히려 우리는 허황된 꿈에 젖어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죽음에 대한 고민은 이런 우리에게 강력히 도전하시는 것입니다. “너희가 나와 함께 한 시 동안도 이렇게 깨어 있을 수 없더냐?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
셋째, 예수님은 우리에게 기도의 본을 보이셨습니다.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예수님은 이 기도를 세 번 반복해서 하셨습니다. 세 번이 갖는 의미는 확증입니다. 예수님은 의심이 사라지고 확신이 설 때까지 기도하셨던 것입니다.
넷째, 인간의 죽음은 가장 나약한 상태임을 말해 줍니다. 예수님조차 고민하고 슬퍼하시며 번민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잖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의 능력은 인간이 가장 나약한 곳, 곧 실패의 장소에서 나타납니다. 예수님이 못 박힌 십자가에서 온 인류를 구원할 능력이 나타났고, 죽어서 갇힌 무덤에서 부활의 축복이 나타난 것이 바로 이 점을 강력하게 입증하는 것입니다.
사순절 시기인 3월 한 달간 우리 주님의 고난에 어떤 모양으로든 동참해 보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 주님과 함께하는 죽음에 대한 고민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하는 자살이나 안락사와 같은 것이 아닙니다. 주님과 함께하는 죽음에 대한 고민은 영원히 사는 축복에 관한 것이요, 마음에 이뤄지는 참 평화에 관한 것입니다. 이런 축복이 3월 한 달 내내 성도님들에게 있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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