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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민의 조건: 본향을 생각함(히 11:1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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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동호
댓글 0 조회 12,639 2006.03.30 1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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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민의 조건: 본향을 생각함(히 11:13-16)

‘선민’이란 선택된 민족을 말합니다. 유대인들의 자긍심이 바로 이 선민사상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유대인들 가운데 뛰어난 인물들이 많은 것도 바로 이 선민사상 때문입니다. 더욱이 그들은 과거 수천 년 동안 그들의 이 선민사상 때문에 타민족들로부터 엄청난 박해를 받아왔던 민족입니다. 이런 시련이 그들을 더욱 뭉치게 했고, 강한 연대감을 갖게 했을 것입니다.

신약성서에 기반을 둔 우리 기독교인들은 이들 유대인들을 ‘옛 선민’이란 뜻으로 ‘구약공동체’라고 말합니다. ‘구약공동체’란 ‘옛 언약 공동체’란 뜻인데, 유대인들은 이제 과거의 선민이란 뜻으로 쓰이는 말입니다. ‘신약’이란 말은 ‘새 언약’이란 뜻이고, ‘교회’는 ‘새 언약 공동체’를 말합니다. 그러니까 신약성서는 우리 기독교가 ‘새 언약 공동체’이고, 진정한 의미의 선민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고, 하나님을 죽은 자를 살리시는 분으로 믿는 우리가 새 언약 공동체요, 선민인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 기독교인들의 삶을 보면, 과연 선민의 자격이 있는지, 선민의 가치가 지나치게 평가절하된 것은 아닌지 질문해 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2000년 전에는 로마시민권을 갖는 것은 일종의 특권이었고, 로마시민권을 갖기 위해서는 그에 상응하는 보상이나 노력이 있어야했습니다. 그러던 것이 주후 212년 카라칼라 황제의 ‘안토니누스 칙령’으로 누구나 로마제국의 시민이면, 로마인이든, 속주민이든 상관없이 시민권을 갖게 되니까 모두가 평등한 권리를 갖게 돼서 좋긴 했는데, 시민권의 가치가 바닥을 치는 결과를 가져와 결국 로마제국의 쇠퇴를 불러오게 되었던 것입니다.

뜻있는 기독교인들이 심히 우려하는 바가 바로 이것입니다. 바울의 복음전파로 기독교 복음이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주인이나 노예나 양반이나 상놈의 구별 없이 누구나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누리게 된 것은 매우 좋은데, 자칫 값싼 은혜로 전락하여 복음의 가치가 바닥을 치는 결과를 가져와 기독교의 쇠퇴를 불러오는 것은 아닐까라는 것입니다. 실제로 기독교 인구는 세계 여러 곳에서 줄어들고 있습니다.

이런 문제를 놓고 오늘은 우리가 “선민의 조건”이란 제목으로 신앙을 가진 유대인들의 일상적인 삶에 대해서 살펴보려고 합니다.

오늘날 유대교의 대부분의 가르침과 또 축일과 예배에 따른 전통들은 길게는 2500년, 짧게는 1900여년이나 된 아주 오랜 것들입니다. 예를 한 가지 들면, 유대인들은 하루 세 번씩 기도하는데, 아침(Shacharit), 오후(Minchah) 그리고 저녁(Ma'ariv)에 합니다. 이 때 하는 기도인 ‘쉐모네 에스레이’라 부르는 18개의 기도는 2500여 년 동안 변함없이 동일하게 해온 기도입니다. 신약성서에는 이 세 번의 기도가 좀 더 구체적으로 오전 9시, 12시 그리고 오후 3시에 한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우리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운명하신 시간도 바로 이들 기도시간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수천 년에 걸쳐 약속의 땅 가나안 본향을 생각하며 살아온 민족입니다. 그들은 회당을 건축할 때 반드시 예루살렘을 향하도록 짓습니다. 기도할 때에도 예루살렘을 향해서 합니다.

3800여 년 전 아브라함 때부터 유대인들의 오랜 숙원은 가나안 땅을 차지하고 그곳에서 사는 것입니다. 출애굽하여 가나안 땅을 차지한 처음 3-4백년간은 그런대로 숙원이 풀린 듯싶었습니다. 그런데 솔로몬이 죽고(주전 931년) 국가는 남과 북으로 나뉘었습니다. 그 후 200여년 후에 북왕국 이스라엘은 2730여 년 전인 주전 722년에 앗수리아 제국에 완전히 망해버렸고, 남왕국 유다도 2600여 년 전인 주전 586년 바벨론 제국에 멸망당하고 쓸 만한 사람들은 모두가 바벨론으로 끌려갔습니다. 그곳에서 그들은 짧게는 70년, 길게는 173년, 더 길게는 아예 그곳에서 수백 년 또는 수천 년을 이어 살게 되었지만, 그곳에서 그들은 하나님을 원망하기보다는 회개운동을 펼쳤고, 회복운동, 곧 메시아사상을 발전시켰습니다. 그곳에서 그들은 예루살렘을 향해서 회당을 짓고, 하루 세 번 예루살렘을 향해서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루 세 번씩 드리는 쉐모네 에스레이 기도를 통해서 그들은 본토에 돌아갈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기도의 응답은 2세대부터 5-6세대의 사람들에게 이뤄져, 최초로 주전 537년에 본토에 돌아온 유대인들은 그토록 곤란한 가운데서도 제일 먼저 시작한 일이 성전재건이었고, 20년 만에 완공을 보게 되었습니다(주전 516년).

그 후로도 이스라엘 사람들은 계속해서 고국으로 돌아왔습니다. 고국 땅에 와서 살게는 되었지만, 여전히 페르시아제국과 헬라제국의 지배를 거쳐 예수님 때인 로마제국의 지배까지 무려 6-7백여 년 동안이나 외세에 눌려 살아야했습니다. 그 사이에 남의 나라에 나가 사는 유대인이 4백만 명이 넘게 되었습니다. 본토에 사는 유대인들이 70여만 명에 불과한 것에 비하면 나가 사는 사람들이 6배나 더 많았던 것입니다. 오늘날에는 13백만 유대인들 가운데 5백만 명이 본토에 살고 있고, 또 다른 5백만 명이 미국에 살고, 나머지 3백만 명이 유럽과 아프리카 등지에 살고 있습니다. 여전히 남의 나라에 사는 유대인이 본토에 사는 유대인들보다 수적으로 더 많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로마제국 당시 이스라엘에는 두 번의 독립전쟁이 있었습니다. 첫 번째가 66-70년까지의 전쟁으로써 유대인들이 패하고 예루살렘과 성전은 초토화가 되었습니다. 이때부터 성전은 영구히 사라졌습니다. 그리고 주후 132-135년까지 있었던 또 한 번의 독립전쟁의 실패로 모든 유대인들이 본토에서 쫓겨납니다. 그리고 1948년 5월 14일 건국을 선언하게 됩니다. 나라가 망한지 1878년만이었습니다. 그야말로 감격과 감동의 순간이었습니다. 기쁨의 함성이 천지를 울렸고, 기쁨의 눈물이 대지를 적셨습니다.

유대인들은 그 긴 세월 동안 가나안 땅, 본향에 대한 기도를 단 하루도 쉬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2500년 넘게 매일 세 번씩 이런 기도를 드렸습니다.

우리들의 자유를 위해서 거대한 쇼파르(양각나팔)를 울리게 하소서. 우리들의 유배생활로부터 모일 수 있도록 깃발을 올리게 하옵소서. 지구 곳곳으로부터 우리들을 함께 모이게 하옵소서. 그의 백성 이스라엘의 흩어진 자들을 모으시는 하쉠 당신이시여, 복을 받으시옵소서.

또 매년 춘분이 지나고 보름달이 뜨는 유월절 밤이면, 가족과 친지들이 모여 이렇게 희망을 노래했습니다. “우리가 지금은 비록 여기 타향에 살아도 내년에는 이스라엘 땅에서 살게 될 것이다. 지금은 노예이지만 내년에는 자유인이 될 것이다.” 랍비들 가운데는 “그 땅을 취하여 거기 거하라. 내가 그 땅을 너희 산업으로 너희에게 주었음이라.”한 민수기 33장 53절에 의지해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약속한 가나안 땅을 취하고, 거기서 사는 것이 계명이라고 선언해왔습니다. 또 탈무드는 그 땅 자체가 매우 거룩해서 거기서 걷기만 해도 앞으로 다가올 세계에서 행복한 삶을 살수 있다고 적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이스라엘 밖에서의 삶을 비정상적인 상태로 간주하면서 그러한 삶을 유배생활이라고 말합니다. 따라서 유대인들은 언젠가는 이스라엘 땅에로 돌아가게 될 것이란 희망을 결코 포기하지 않습니다. 그 희망은 ‘하티크바’(Ha-Tikvah, 희망)에 표현되고 있습니다. 이 ‘하티크바’는 시온주의자들의 운동가이자 이스라엘 나라의 국가(國歌)이기도 합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마음 속 깊이만큼 오랫동안 유대인의 영혼은 따스하다.
그리고 동쪽 끝자락을 향해서 시온에로 눈은 향하고,
우리의 희망은 아직 사라진 것이 아니다.
이천년을 간직한 희망은 우리 자신의 땅에서 자유민이 되는 것,
시온과 예루살렘의 땅에서 우리 자신의 땅에서 자유민이 되는 것,
시온과 예루살렘의 땅에서.

유대인들은 오늘날에도 지속적으로 이스라엘로 이주합니다. 이스라엘로의 이주를 ‘알리야’(aliyah)라 하는데 문자적으로 ‘오름’이란 뜻입니다. 그러니까 시온에 오른다는 뜻으로 보시면 됩니다. 한 예로 러시아 한 나라에서만 이스라엘로 이주한 ‘알리야’의 수가 1998년에 1만4천 명, 1999년에 3만 명, 2000년 2만 명에 이릅니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의 이주에는 러시아의 경제가 어려운 탓도 있지만, 그간 쌓았던 모든 것을 버리고 본토에 이주하여 모든 것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하는 고달픈 삶일 텐데도 그들은 이스라엘로의 이주를 ‘시온에 오름’(ascension to Zion)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고향이 친어머니라면, 타향은 의붓어머니입니다. 우리가 발붙이고 사는 이 땅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타향입니다. 잘 아시다시피 동물에게는 태어나서 자란 곳으로 돌아가려는 귀소본능이란 것이 있습니다. 제비, 갈매기, 연어, 송어 등은 귀소본능이 뛰어난 동물들입니다. 인간도 마찬가집니다. 고향이 그리워 목 놓아 부르기도 하고, 시로 적어 고향을 노래하기도 합니다. 대표적인 노래가 정지용 선생의 ‘향수’일 것입니다.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회돌아 나가고,
얼룩백이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그곳이 참아 꿈엔들 잊힐리야.

질화로에 재가 식어지면 뷔인 밭에 밤바람 소리 말을 달리고,
엷은 졸음에 겨운 늙으신 아버지가 짚벼개를 돋아 고이시는 곳,
그곳이 참아 꿈엔들 잊힐리야.

전설바다에 춤추는 밤물결 같은 검은 귀밑머리 날리는 어린 누이와
아무렇지도 않고 여쁠 것도 없는 사철 발벗은 안해가 따가운 햇살을 등에 지고 이삭 줍던 곳, 그곳이 참아 꿈엔들 잊힐리야.

하늘에는 성근 별 알 수도 없는 모래성으로 발을 옮기고,
서리 까마귀 우지짖고 지나가는 초라한 지붕, 흐릿한 불빛에 돌아 앉어 도란도란거리는 곳, 그곳이 참아 꿈엔들 잊힐리야.

그래서일까요? 명절이면 사람들은 떠나온 고향을 찾아가기 위해서 모든 수고를 아끼지 않습니다. 만원버스, 초만원 열차, 주차장을 방불케 하는 고속도로, 오고가는 비용과 선물보따리에 이르기까지 아무리 시간이 많이 걸리고, 아무리 고생스럽고, 아무리 비용이 많이 들더라도 사람들은 기어이 고향에 돌아가려고 합니다. 특히나 이북에서 고향을 등지고 남하한 이산가족들, 고국을 떠나 먼 타향에서 힘겹게 살아가는 이민자들은 고향을 몹시도 그리워합니다. 이런 절절한 심정이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도 있어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2500년이 넘도록 본토에 돌아가기를 소망하며 하루에도 세 번씩 동일한 기도를 하고 있고, 축일이나 안식일 예배 때도 이 기도를 반복하곤 합니다.

이와 같은 이스라엘 사람들의 본향에 대한 집념, 이것이 바로 선민이 되는 첫째 조건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영적인 이스라엘 사람들이고, 하나님께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약속하신 새 예루살렘의 시온에 오르기 위해서 순례자의 길을 걷고 있는 진정한 ‘알리야’들입니다. 그런데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과연 얼마만큼 우리들의 영혼의 본향, 곧 우리가 영원히 돌아가야 할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서 생각합니까? 유대인들이 본토를 그리는 마음의 절반만 가져도, 또 이 땅에서의 삶이 단지 거쳐 가는 나그네의 삶에 불과하다는 생각만 해도 이 땅에서의 삶과 소유에 그토록 집착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11장 13-16절에서 믿음의 조상들이 “나온바 본향,” 곧 태어나고 자란 육체적인 고향을 사모하기보다는 오히려 ‘더 나은 본향,’ 곧 하나님께서 준비해놓으신 영원한 하나님의 도성을 사모하는 자들이라고 했습니다. 야곱은 이집트에서 죽었지만, 약속의 땅에 묻히기를 원했습니다. 요셉도 이집트에서 죽고 또 그곳에 묻혔지만, 유골만큼은 반드시 약속의 땅에 묻어달라는 유언을 남겼고, 모세와 여호수아와는 유언을 지켰습니다. 여기서 약속의 땅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새 예루살렘이요,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말하는 것입니다. 육신이 태어나고 자란 고향을 사모하기보다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는 성도들이 되도록 합시다.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는 마음, 이 간절한 마음이 하나님의 선민이 되는 첫째 조건입니다. 골로새서 3장 1-2절은 말씀하기를,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땅엣 것만을 생각지 않고, 위엣 것을 깊이 생각하고 추구하는 하나님의 선민이 되도록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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