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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역할(눅 15:1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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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동호
댓글 0 조회 12,631 2006.06.30 09:27

본문

잃어버린 역할(눅 15:11-32)

사물 가운데 가장 튼튼하고 안정된 모습을 갖춘 것이 삼각형이라고 합니다. 무거운 짐과 사람을 태우는 자전거의 뼈대가 삼각형인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인간관계도 삼각관계가 어쩌면 가장 튼튼하고 안정된 관계일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가정은 아버지와 어머니와 자녀가 삼각구도를 이룰 때 더 안정적입니다. 부부만의 삶이나, 부자 또는 부녀지간의 삶이나, 모자 또는 모녀지간의 삶은 왠지 불안정해 보입니다.
하나님의 가정도 삼각구도로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본질적으로 한 분이시지만, 그 한 분 하나님의 인격은 세 분으로 되어 있습니다. 삼각형은 일정한 면적을 가진 하나의 도형이지만 좌변 우변 밑변과 세 개의 꼭짓점으로 이루어지듯이, 하나님도 한 분이시지만,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인격을 갖추고 있어 완전한 모습의 삼각구도를 이루고 계십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국기에 정삼각형 두 개를 포개놓아 육각형별을 그려놓고 있는 것입니다. 태양은 하나이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광선과 빛과 열로 삼각구도를 이루듯이 하나님도 보이지 않지만 성부와 성자와 성신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들 세 신적 인격은 무한한 사랑 속에서 한 몸을 이루고 있고, 한 몸을 이루면서도 자신의 고유한 인격성 속에서 서로 구분되어 있습니다.
연속극이나 소설에서 흔하게 등장하는 것도 삼각구도입니다. 한 남자와 두 여자, 한 여자와 두 남자, 혹은 세 남자 아니면 세 여자 사이에서 빚어지는 사랑과 갈등을 그린 이야기들이 많습니다.
성경도 예외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인간 최초의 불행은 하나님과 인간과 뱀이라는 삼각관계와 하나님과 아담과 이브라는 또 다른 삼각관계에서 비롯되었으며, 이어지는 성경의 이야기들 가운데에서도 이 삼각구도가 잘 드러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아브라함과 사라와 하갈, 리브가와 야곱과 에서, 야곱과 라헬과 레아, 사무엘과 사울과 다윗, 사울과 다윗과 요나단, 마르다와 마리아와 예수님, 주인과 빚진 종과 그의 동료, 부자와 나사로와 아브라함, 간음하다 잡힌 여인과 유대인들과 예수님 등 헤아릴 수 없이 많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읽을 때에 이런 삼각구도를 잘 보고 삼각관계 속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잘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삼각형에서 어느 한 꼭짓점을 제거해 버리면 도면은 사라지고 직선만 남게 되듯이 삼각관계에서 어느 한 쪽의 이야기를 잘라버리고 읽게 되면, 둘만의 이야기나 혼자만의 이야기로 축소되어 본래의 뜻이 충분히 전달되지 않는 경우가 생깁니다.
복음서의 밑바닥에 깔려 있는 가장 기본적인 삼각관계는 '바리새인들과 세리와 죄인들과 예수님’와의 관계 즉 ‘가진 자와 소외된 자와 예수님’과의 관계입니다. 예수님은 가진 자들보다는 소외된 자들의 편에 서서 그들과 함께 밥상교제를 자주 나누셨습니다. 오죽했으면,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마 11:19) 라는 비난을 받았겠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의 위선을 책망하면서 세리와 죄인들의 입장을 옹호하셨습니다.
이 삼각관계에서 세리와 죄인들, 바리새인들, 예수님이라는 세 꼭짓점은 어느 하나도 희생될 수 없는 분명한 자기 역할이 있습니다. 이들 각자의 역할이 분명해질 때에 예수님께서 하신 일이 어떤 일인지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세리와 죄인들과 예수님의 관계만을 부각시킨 채 바리새인들의 역할을 제거해버리거나 바리새인들과 예수님의 관계만을 부각시킨 채 세리와 죄인들의 역할을 제거해 버려서는 안 됩니다. 보통은 바리새인들을 나쁜 사람, 구원받지 못할 율법주의자들로 여겨서 제거해 버리고, 세리와 죄인들과 예수님과의 관계만을 놓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세리와 죄인들의 자리에 신자들을 대입시키고 예수님의 자리에 하늘 우편 보좌에 앉아 계신 그리스도를 대입시켜 생각합니다. 그리고 나면 나 같은 죄인을 살리신 구세주의 존귀와 속죄의 의미는 부각이 되어 은혜롭지만, 바리새인들의 비난에도 불구하고 세리와 죄인들과 더불어 밥상 교제를 나누신 사랑의 사건 즉 예수님의 타인을 위한 삶이 부각되지 못하고 구원사적인 해석과 교리적인 의미로 끝나고 마는 단점이 있습니다.
문제는 아무도 바리새인의 역할에 자신을 대입하려 하지 않는다는 점이며, 예수님의 역할에 감히 자신을 대입하려 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신자들은 열이면 열 사람 모두가 겸손히 자신을 세리와 죄인들의 역할에 대입시켜 그리스도의 사랑과 위로 받기만을 원한다는 점입니다. 그러나 사복음서가 우리에게 전하고자 한 복음은 ‘예수께서 많은 사람의 죄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셨다’에 국한되지 않고,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으라”(눅 9:23)를 포함합니다. 마찬가지로 '바리새인들과 세리와 죄인들과 예수님’와의 삼각관계에서 복음서가 우리에게 전하고자 한 복음은 ‘예수님이 세리와 죄인의 친구였다’에 국한되지 않고,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세리와 죄인의 친구가 되어 나를 좇으라’를 포함합니다.
오늘의 말씀 '탕자의 비유'(눅 15:11-32)에서 나타나는 기본 골격도 삼각관계입니다. 성실하게 열심히 일하는 첫째 아들과 재산을 탕진하고 거지꼴이 되어 돌아온 둘째 아들과 그런 둘째 아들을 책망하지 않고 따뜻하게 맞아드리는 아버지가 세 꼭짓점을 이룬 삼각구도입니다.
사람들은 이 비유를 읽을 때에 먼저 아버지의 자리에 하나님을 대입시켜 읽고, 첫째 아들과 둘째 아들의 자리에 우리 자신이나 다른 사람을 대입시켜 읽습니다. 대개의 경우는 첫째 아들의 자리를 제거해 버린 채, 아버지의 자리에 하나님을 대입시켜 읽고, 둘째 아들의 자리에 자신을 대입시켜 읽습니다. 그렇게 되면, 삼각구도는 깨어지게 되고, 하나님의 용서와 죄인의 회개만이 부각되어 인간끼리의 사랑과 용서가 그늘에 가려지게 됩니다. 그렇게 되서 ‘두 아들의 아버지의 비유’가 ‘돌아온 탕자의 비유’로 탈바꿈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탕자의 비유,’ 좀 더 정확히 말해서 ‘두 아들의 아버지의 비유’가 말해진 배경은 예수님에게 찾아온 세리와 죄인들, 그들을 영접하여 함께 밥상 교제를 하신 예수님, 예수님을 비판하는 바리새인들과 율법학자들과의 삼각관계였습니다(눅 15:1-2). 세리와 죄인들을 정죄하고 그런 사람들과 어울리는 예수님을 비판하는 자들은 종교인들인 바리새인들과 율법학자들이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이들의 주장을 물리치고 세리와 죄인들의 인권을 회복시키려고 이 비유를 들어 말씀하셨습니다.
이 비유는 회개보다는 오히려 사랑과 용서의 중요성을 부각시키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소외된 자들을 멸시하고 정죄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사랑하고 용서해야 할 것을 가르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세리와 죄인의 친구가 되신 예수님의 사건 즉 사랑하고 용서하고 회개하는 사건이 형제와 형제 사이에서 일어나고,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일어나야 할 것을 가르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이 비유에서 우리가 조심해야 할 것은 예수님을 아버지로, 바리새인들과 율법학자들을 첫째 아들로, 세리와 죄인들을 둘째 아들로 못 박아 이해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또는 아버지를 하나님으로, 첫째 아들을 잘 믿는 신자로, 둘째 아들을 우리 자신으로 못 박아 이해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문학제나 성극발표 때처럼 이 비유를 가지고 단막극을 한다고 가정해 봅시다. 우리들 가운데 어느 누군가가 ‘탕자의 비유’에 등장하는 세 인물들의 배역을 맡아 해볼 수 있을 것입니다. 첫째 아들 역, 둘째 아들 역, 그리고 아버지 역, 이렇게 세 가지 역할이 있습니다. 자, 여러분은 어느 역을 맡아 하시겠습니까? 자기에게 가장 어울리는 역 또 가장 하고 싶은 역이 무엇입니까? 어쩌면 많은 분들이 둘째 아들 역을 맡고 싶어 할지 모르겠습니다. 그 동안 자신을 대입시켜 생각해본 아주 익숙한 역이니까 말입니다. 첫째 아들 역을 맡겠다는 사람도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성실한 장남이니 말입니다. 문제는 아버지 역을 맡겠다는 사람이 있을까 하는 것입니다. 누군가 맡기는 하겠지만 왠지 자신의 역이 아닌 것 같다는 이질감을 갖게 될는지도 모릅니다. 그 역은 하나님이 맡아하시는 것이라고 우린 늘 생각하곤 했으니까 말입니다.
그러나 이런 역할극의 포인트는 바로 이 세 번째 역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그 동안 맡아오지 않았던 역, 당연히 우리에게 어울리지 않는 역이라고 생각했던 바로 그 역을 맡아 볼 때 이제까지 우리가 놓쳐버린 이 비유의 진실한 의미를 이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자기에게 주어진 기득권 속에서 뭔가 보장된 미래를 위하여 성실하고 겸손하게 일하지만, 자기에게 보장된 미래가 조금이라도 위협을 받게 될 때는 얼굴을 붉히고 화를 내는 큰아들의 모습이 우리 신앙인들의 모습이 아닐까요? 뭔가 불리한 듯한 여건을 타파해보려고 자기 몫을 강하게 주장도 하고, 모험적으로 사업을 시도해 보기도 하지만, 실패하고 좌절하는 가운데 부모에게 돌아와 도움을 청하는 둘째 아들의 모습 또한 우리 신앙인들의 모습이 아닐까요? 그래서 이들 두 아들의 역할은 우리 자신에게 썩 어울리는 역이라고 생각하고 계시지는 않습니까?
그런데 문제는, 실패하고 상처받고 돌아온 아들을 아무런 조건 없이 맞아들이는 아버지, 그런 아버지에게 얼굴을 붉히며 항의하는 큰아들에게 '내 것이 다 네 것인데 뭘 그러니' 하시면서 너그럽게 감싸는 아버지, 두 아들 가운데 어느 한 편도 배척하지 않고 다 포용하여 아름다운 삼각관계를 이루는 아버지, 이 아버지의 모습 또한 우리의 모습일 수 있는지요? 첫째 아들이나 둘째 아들의 역할은 잘 떠맡아 하면서도 아버지의 역할은 나와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것으로 여기거나 하나님께 떠맡기는 것이 우리 신앙인들의 모습이 아닐까요?
문제는 누가 이 아버지의 역할을 감히 해야 하는가 입니다. 그들이 바로 우리들입니다. 우리가 해야 할 역할이 바로 용서하고 포용하고 사랑하며 감싸는 일입니다. 물론 우리가 해야 할 역할 가운데 빼놓을 수 없는 것이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오는 일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언제까지나 죄짓고 회개하고 돌아오는 역할에다 평생을 바칠 수만은 없지 않습니까? 우리 그리스도인 한 사람 한 사람이 이 아버지의 역할을 수행해낼 때에 오늘날 크게 문제가 되고 있는 가정에서 혹은 교회에서 혹은 공동체들에서 발생되는 분열과 분쟁으로부터 탈피할 수 있을 것입니다.
바리새인들과 율법학자들과 세리와 죄인들과 예수님께서 이룬 삼각관계 속에서 예수님은 자신의 역할을 하나님께 떠넘기지 않았습니다. 그 분이 십자가를 지신 것도 자기 역할에 충실했기 때문입니다. 그 분은 끝까지 자기 역할을 잘 해 내셨으며, 우리에게도 항상 '나를 좇으라'고 부탁하셨습니다. 우리가 그 분을 좇는 길은 그 분이 하신 대로 따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동안 그 분이 하신 일들을 하나하나 실천하며 좇기보다는 그 분이 하신 일들 속에 담긴 신학적인 의미와 교리에 매달려 왔던 것이 사실입니다. 이제는 우리가 각자의 역할을 바로 해야 할 때입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이 탕자의 역할에 안주하여 반복하고 있는 동안 세상은 점점 더 혼탁해져가고 있고, 부정과 부패는 날로 깊어져 가고 있고, 폭력과 타락이 난무하고 있으며, 갈등과 대립과 미움이 끊이지 않고 있습니다. 이제는 우리의 역할을 좀 바꾸어야 할 때입니다. 탕자가 되어 눈물을 흘리기보다는, 자기 몫의 손익을 따지며 돌아온 형제를 기뻐하지 않는 맡아들 같은 사람이 되기보다는, 뜨거운 가슴으로 용서하고 포용하는 아버지와 같은 사람이 되어야 할 때입니다. 이런 역할을 우리들이 잘 감당함으로서 우리 교회가 용서와 사랑이 넘치는 공동체로 발전되기를 기원해 마지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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