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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려주일사건이 갖는 의미(마 2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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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동호
댓글 0 조회 23,532 2005.03.26 1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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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려주일사건이 갖는 의미(마 21:1-9)

오늘의 종려주일입니다. 그리고 내일부터 토요일까지는 고난주간입니다. 종려주일예배는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기 일주일전 일요일에 나귀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할 때 민중이 성 밖으로 나와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큰 소리로 ‘호산나’와 ‘이스라엘의 왕’을 연호하며 영접했던 사건을 기념하는 예배입니다.
이 중요한 종려주일사건이 주후 30년 4월 2일 일요일에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이날의 사건이 갖는 의미에 대해서 살펴보려고 합니다.
나라의 주권을 빼앗긴 채 살아가던 유대인들에게 이 날은 기대 반 우려 반으로 모두가 설레는 날이었고 긴장이 감도는 날이기도 했습니다.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은 모두에게 큰 의미를 갖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에게는 3년 6개월여의 지난날의 고생을 끝내고 명예와 권세와 재물을 얻어 누릴 영광의 순간이 눈앞에 다가왔다고 생각한 때문이요, 유월절 명절에 예루살렘에 올라온 민중과 권력자들에게는 “이번 명절에는 과연 예수가 메시아임을 밝히 드려낼 것인가?”라는 기대 때문이었습니다. 유월절은 이스라엘 민족의 광복절이었기 때문에 로마제국의 지배아래 살아가는 유대인들로서는 유월절 명절엔 왠지 모를 흥분과 기대에 휩싸이곤 하였습니다. 그래서 유월절 명절에 예루살렘에 올라오는 사람들의 몸과 마음은 마치 부풀어 오른 풍선처럼 살짝 건들기만 해도 터질 것만 같았습니다. 그래서 유월절 명절은 민중봉기의 가능성이 연중 가장 높은 시기였고, 로마총독과 대제사장과 같은 권력자들에게는 결코 긴장의 끈을 늦출 수 없는 숨 가쁜 한 주간으로 기억되곤 했습니다.
이런 긴박한 상황 속에서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은 민중이 기대했던 대로 이뤄졌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에게는 그 일이 목숨을 걸어야하는 매우 위험한 것이었습니다. 비록 예루살렘에 입성하는 예수님의 모습이 나귀를 탄 우스꽝스런 모습이었지만, 환호하는 민중의 외침과 규모로 봐서는 권력자들의 의심을 피할 수 없는 일이었고, 바닥에 쏟아진 물처럼 되돌리고 싶어도 그리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하버드대학교 신학교수 하비 콕스는 이 일을 두고 마치 비행기가 이륙하기 위해 활주로를 질주하다가 가속이 붙어 더 이상은 멈춰 설 수 없게 되는 이른바 ‘불퇴의 지점’에 이른 것과 같다고 했습니다. 인터넷 조선일보에 실린 글에 보니까, 비행기는 견인차가 끌어주지 않는 한 후진을 할 수 없도록 만들어져 나온다고 합니다. 비행기는 자동차와 달리 엔진의 힘을 바퀴에 전달하는 장치가 없고, 엔진에서 내뿜는 배기가스의 반작용에 의해서 앞으로 나가기 때문에 자동차의 경우처럼 후진시킬 수 있는 기어가 없다고 합니다.
이런 정황 속에서 이뤄진 예수님의 예루살렘입성은 오늘날 우리들에게 여러 가지 것들을 생각하게 해줍니다.
첫째, 그 일은 정치적으로 비폭력저항을 유감없이 보여주는 일이었습니다. 간디나 마르틴 루터 킹이 펼쳤던 비폭력저항운동이 예수님에게서 배워 실천한 일이란 점은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나귀를 탄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은 황제나 개선장군의 위풍당당한 권위를 풍자적으로 비웃는 것이었고, 환영인파들이 크게 외쳤던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라는 외침은 예수님이 다윗왕의 합법적인 계승자란 뜻이며, 민중이 종려가지를 흔든 것은 예수님을 해방군장군이나 황제와 동일하게 취급하였다는 뜻이며, 또한 ‘예수를 왕으로!,’ 또는 ‘이스라엘 독립만세!’라고 쓴 피켓을 손에 든 것과 동일한 행동이었던 것입니다. 민중이 예수님을 로마제국의 압제로부터 해방시켜줄 영웅으로 환영하고 있는 장면이 연출된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의식주를 위한 일자리와 자유를 보장해줄 영웅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무력과 폭력을 거부하셨습니다. 이것이 그분이 정복을 상징하는 백마를 타지 않고 평화를 상징하는 나귀를 타신 진정한 뜻일 것입니다.
이제 예수님은 죽은 목숨이나 마찬가집니다. 나귀를 타고 입성하셨음에도 불구하고, 민중은 해방을 상징하는 종려가지를 흔들었고, 예수님은 스스로 왕이 될 생각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민중은 그를 해방군장군이나 유대인의 왕으로 환영하였습니다. 그분에게는 이것이 그분의 목숨을 재촉시키는 일이란 것을 제자들과 민중은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들에게 그런 호사스런 여유조차 허락되지 않았던 것이 그들이 처한 현실이었습니다.
이런 일련의 일들은 예수님을 죽음의 언덕 골고다로 몰고 가는 일이었습니다. 그런 사실을 예수님은 누구보다 더 잘 알고 계셨습니다. 피할 수 없는 운명의 그림자가 그를 따라붙고 있었던 것입니다. 여기에 예수님의 번민이 있었고, 민중의 뜻과 하나님의 뜻을 놓고 어느 한쪽을 선택하지 않을 수 없는 고민과 겟세마네기도가 있었습니다. 결과론적이지만, 만일에 예수님이 민중의 뜻을 좇아 군사들을 모집하여 독립전쟁을 일으켰다면, 주후 70년과 135년에 비참한 종말을 맞이한 두 차례의 독립전쟁에서처럼 처참한 결말을 보고 말았을 것이지만, 하나님의 뜻을 따라 비폭력저항으로 맞섰던 예수님은 비록 십자가의 처형을 면치는 못했지만, 그분이 펼쳤던 천국운동은 그야말로 그분의 사후에 요원의 불길처럼 번져 급기야는 전 세계를 정복하였던 것입니다. 평화를 상징하는 나귀를 탄 예수님,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님, 바보처럼 여겨졌던 예수님이 장엄한 최후의 승리자가 되신 것입니다. 이 예수님의 승리는 비폭력저항으로 영국으로부터 인도를 구한 간디와 백인들로부터 흑인들의 인권을 회복시킨 마르틴 루터 킹에로 그 전통이 이어져오고 있습니다. 나귀를 탄자가 백마탄자를 결국 이기는 진리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약한 것이 강한 것을 이기는 진리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둘째, 나귀를 탄 예수님은 인간적인 시각에서 보면 분명 실패한 메시아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실패는 성공에 중독된 문화 속에서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 진정한 성공이 어떤 것인가를 깊이 생각하게 만듭니다. 또 세상적인 성공이란 것이 얼마나 허망한 것인가를 말해 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서울대학교 김병종 교수가 즐겨 그렸던 ‘바보 예수’와 홍종명 화백이 그린 ‘바보 그리스도’가 이런 의도를 담고 있는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분들이 그린 ‘바보 예수’ 또는 ‘바보 그리스도’가 그 잘나빠진 인간의 능력과 지혜란 것이 얼마나 보잘것없는 것인가를 역설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듯이 예수님의 실패는 진정한 성공이 무엇인가를 잘 보여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나귀를 탄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은 백마를 탄 개선장군의 입성과 비교했을 때, 분명 우스꽝스런 바보의 행진이었을는지 모르지만, 이것은 허망한 세속에 젖어 사는 세속적인 사람들에 주는 조소이자 심판일 것입니다. 결과론적이지만, 예수님은 결단코 실패자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분은 평화스런 천국운동으로 전 세계를 손에 넣은 위대한 승리자이시며,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이신 것입니다.
셋째, 예수님이 우스꽝스런 나귀를 타셨다는 것은 예수님이 결코 들뜬 유월절분위기나 군중심리에 휘말리지 않았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예수님이 전혀 사람을 태워본 일이 없는 어린 나귀를 타신 것은 그분이 얼마나 하나님과 역사 앞에 신중하게 행동했나를 말해 주는 증거입니다.
민중의 들뜬 분위기와는 달리 예수님의 마음은 오히려 괴롭고 무거웠습니다. 눈앞의 상황이 자신을 죽음으로 내 몰고 있었고, 인간들이란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기보다는 자기욕심을 앞세우기 때문에 기대했던 것만큼의 이익이 없을 때는 언제라도 배신하고 돌아설 것이고, 희생양으로 처형되기를 바랄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실제로 예수님은 채 일주일도 지나지 않아서 그분을 환영했던 바로 그들의 배신으로 십자가형을 받았고, 그들로부터 조롱과 멸시를 받으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부여한 자신의 독특한 사명에 대해서 오랫동안 심사숙고해왔고, 민중이 무엇을 원하는지, 제자들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권력자들이 무엇을 논하고 있는지 잘 알고 계셨습니다. 그들의 기대는 하나님의 계획과는 거리가 먼 것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사느냐 죽느냐의 사생결단을 내려야할 중요한 시점에 이르렀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만일 민중의 기대를 저버리고 하나님의 뜻에 따르기를 결정한다면, 민중이 지금은 기대와 흥분 속에 일시적으로 환호의 물결을 이루지만, 흥분이 식는 날엔 성난 파도로 돌변하여 대제사장의 무리와 한패가 되어 자기를 집어삼킬 것과 사랑하는 제자들조차 자신을 버리고 도망할 것, 그리고 자신을 팔아넘길 자도 있다는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민중 특히 열심당원들은 오병이어 표적 직후 예수님을 억지로 잡아 왕을 삼으려고 했다가 실패한 이후로(요 6:15) 예수님 곁을 떠났던 자들이지만(요 6:66),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에 대한 기대감과 흥분을 감추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기대는 예수님이 어린 나귀를 타신 진심을 알게 된 후에 무너졌고, 분노로 돌변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빌라도 법정에서 소란을 피웠습니다. 그들은 실망과 분노의 외침을 토해냈습니다. “없이 하소서. 없이 하소서. 그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요 19:15).
결국 예수님은 유대인의 왕이 되기를 바라는 제자들의 기대와 민중의 요구를 뿌리치고 “죽으면 죽으리라”(에 4:16)는 각오로 봉기군을 이끌기 위해 백마를 타고 칼을 차고 방패를 손에 쥐는 대신에 겸손과 평화를 상징하는 어린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습니다(마 21:1-11; 막 11:1-11; 눅 19:29-44; 요 12:12-19). 예수님의 이런 행위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우리 모두가 겸손의 나귀를 타야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분쟁과 소요의 앞잡이가 되는 것이 아니라, 항상 겸손하며 사랑하며 섬겨야할 평화의 도구들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모두가 들뜬 분위기 속에서도 군중심리에 휩쓸리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따랐던 예수님, 하나님의 뜻대로 십자가의 길을 걸었던 예수님의 행동은 그분이 왜 어린 나귀를 선택했는지를 오늘도 우리에게 말없이 교훈하고 계십니다.
넷째, 종려주일의 환호성은, 다른 각도에서 보면, 일주일 후에 있었던 부활주일의 기쁨과 환희를 위한 전주곡이기도 합니다. 이것은 먼 옛날 홍해를 건넌 이스라엘 민족이 홍해해변에서 구세주 하나님께 춤추며 환호하던 사건의 회상이자 환난을 이기고 믿음을 지킨 성도들이 손에 종려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양 앞 불이 섞인 유리 바닷가에 서서 구원의 노래를 큰 소리로 외쳐 부르는 낙원에서의 환호성이기도 합니다. 또 종려주일의 환호성은 재림의 때에 백마 타고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심판 주 그리스도를 백마 타고 뒤따르며 ‘만왕의 왕, 만주의 주’를 큰 소리로 연호하며, 구원과 능력이 우리 하나님께 있음을 찬양할 할렐루야성가대원들의 환호성입니다.
비록 예수님은 보좌대신에 십자가에, 왕관대신에 가시관을, 홀대신에 갈대를, 올리브마사지대신에 채찍 맞음으로 인한 피범벅을, 옥쇄대신에 쇠못을, 금띠대신에 창찔림을, 왕복대신에 알몸의 수치를 당하셨지만, 그분의 예루살렘입성과 민중의 환호성은 그분과 성도들이 십자가의 고난을 이기고 거둘 대승(大勝)에 대한 예표였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받은 성도들은 이미 영적으로 부활주일의 환호성과 낙원에서의 환호성의 대열에 동참한 자들입니다. 이제 남은 것은 끝까지 믿음을 지키다가 주께서 재림하실 그때에 그분을 마중 나가는 일이며,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에서 구세주를 환호하며 찬양하는 일입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이 대승의 환호성이 매 시간 우리의 삶 속에서 이루어지고 맛보아지는 일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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