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대민족의식: 우리는 떠돌이였네(신 26: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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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민족의식: 우리는 떠돌이였네(신 26:1-11)
현재 유대인 인구는 전 세계에 1400만 명이 있습니다. 그 가운데 60%인 840만 명이 떠돌이 디아스포라들입니다. 예수님 당시에는 전 세계에 450만 명의 유대인들이 있었습니다. 그 가운데 84%인 380만 명이 떠돌이 디아스포라들이었습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은 본향을 떠나 사는 것을 일컬어 유배생활이라고 말합니다. 이런 면에서 보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본향인 하나님의 나라를 떠나 이 땅에서 유배생활을 하고 있는 셈입니다. 반드시 돌아가야 할 본향이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신명기 26장 5절은 유대민족과 그 조상을 일컬어 ‘유리하는 아람 사람’이란 말을 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도 이삭도 야곱도 그들의 후손들도 떠돌이였다는 것입니다. 열두 아들들을 통해서 이스라엘 나라를 세웠던 야곱도 대표적인 떠돌이였습니다. 바로 앞에 선 야곱은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내 나그네 길의 세월이 일백삼십 년이니이다. 나의 연세가 얼마 못되니, 우리 조상의 나그네 길의 세월에 미치지 못하나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나이다”(창 47:9). 야곱은 자신의 일생이 험난한 떠돌이의 삶이었다고 고백한 것입니다. 출애굽기 23장 9절은 야곱의 후손들이 이집트에서 보낸 430년의 세월을 나그네의 세월이었다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유대인들은 본향에 대한 강한 집착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이것이 지나쳐서 영토지향주의로 나타나고 있는 것은 문제입니다.
창세기에 보면,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이 모두 본향에 묻히고 있고, 그 가운데 야곱과 요셉은 이집트에서 죽었는데, 본향에 묻히겠다는 확고한 신념 때문에 시신으로 본향에 돌아온 자들입니다. 우리도 죽으면 아버지 하나님이 계신 본향에 돌아가게 됩니다. 유대인들이 본향을 사모하는 이유는 가나안 땅을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기 때문입니다. 야곱이후 본향에 대한 집착은 유대인들의 집단무의식이 되고 있습니다. 이 집단무의식으로 인해서 유대인들은 아무리 오랜 세월을 외국에 나가 살아도 반드시 본향에 돌아간다는 의식을 갖고 살게 됩니다. 이 의식이 이집트 거주 430년 만에 대탈출을 만들고, 바벨론과 페르시아에서 보낸 유배생활 70년 또는 173년 만에 본향으로 돌아오는 행렬들을 만들고, 나라가 망한지 1878년 만에 나라를 세우는 기적을 만들어냈습니다. 아브라함에서 시작된 유랑의 세월이 3,800년이 된 지금도 유대인들은 불굴의 투지로 본향에 돌아가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습니다.
유대민족이 그토록 사모하는 본향이란 것이 사람이 살기에 적합한 곳이 못됩니다. 쓸모 있는 땅이 많지 않고, 물도 귀하고, 기후도 좋지 않은 곳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유배되어 살던 곳은 그들의 본향보다 훨씬 살기 좋은 곳들이었습니다. 이집트의 고센 땅은 유대인들의 본향에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비옥한 땅이었습니다. 바벨론이나 페르시아도 월등히 살기 좋은 곳이었습니다. 5백만이 넘는 유대인들이 거주하는 미국도 살기 좋은 곳입니다. 대다수의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이 거주하는 지역들은 그들의 본향보다 살기 좋은 곳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대인들은 일찍이 본향을 본적이 없는 그들의 후손들조차도 본향을 사모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물론 지난 수천 년의 세월 동안 나라 없이 핍박과 추방과 학살을 당하며 살아온 서러움의 세월도 무시할 수 없습니다. 이 부분에 있어서는 우리 민족도 마찬가집니다. 우리 민족도 일제치하에서 이런 동일한 아픔을 겪었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그들에 비하면 우리는 양반인 셈입니다. 주권을 빼앗긴 세월이 길지 않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살고 있는 이곳이 우리의 영원한 본향이 아니란 것입니다. 이 땅에서 사는 재미가 쏠쏠하다고 해서 본향으로 돌아가는 일에 대한 신념을 저버리면 영원한 삶을 놓치게 됩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11장 16절에서 말하기를, 우리가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해야할 때라고 말하면서 이 본향은 하늘에 있는 것으로써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예비한 성(城)이라고 했습니다.
고향이 친어머니라면, 타향은 의붓어머니입니다. 우리가 발붙이고 사는 이 땅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타향입니다. 잘 아시다시피 동물에게는 태어나서 자란 곳으로 돌아가려는 귀소본능(歸巢本能)이란 것이 있습니다. 제비, 갈매기, 연어, 송어 등은 귀소본능이 뛰어난 동물들입니다. 인간에게도 귀소본능은 있습니다. 심층심리학의 칼 구스타프 융(1875~1961)은 인간의 의식 가운데 인류가 공통적으로 지닌 '집단 무의식'이란 것이 있다고 했습니다. 집단 무의식이란 한 민족 또는 전체 인류가 공통으로 지니고 있는 일종의 ‘오래 된 기억'으로써 오랜 옛날부터 인류가 조상대대로 경험했던 축적된 의식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모든 사람들에게 공통으로 있는 정신이자 경향입니다. 여기에는 기독교가 말하는 천국과 지옥, 불교가 말하는 열반과 지옥, 그리스신화에서 말하는 낙원인 엘뤼시온(Elusion)과 지옥인 타르타로스(Tartaros)에 대한 종교적 상징들이 다 포함됩니다. 이런 것들은 우리 인간들이 돌아가야 할 궁극적인 본향은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서 예비한 영원한 성(城)이란 것을 말해줍니다. ‘인생은 나그네’란 말이나 ‘유리하는 아람 사람’이란 말은 다 우리 인간의 삶이 이 땅에서 끝나고 마는 것이 아니란 것을 무의식적으로 웅변해 주는 것입니다.
유대민족의식에 깊게 뿌리내리고 있는 떠돌이 의식은 초기 기독교인들의 의식 속에도 깊게 자리 잡고 있습니다. 히브리서 저자가 ‘더 나은 본향’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면, 베드로는 우리 성도들을 일컬어 ‘나그네와 행인’같다고(벧전 2:11) 했고, “나그네로 있을 때를 두려움으로 지내라”(벧전 1:17)고 충고하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그 긴 떠돌이 세월 동안 본향에 대한 기도를 단 하루도 쉬지 않았습니다. 매년 유월절 밤이면, “우리가 지금은 비록 여기 타향에 살아도 내년에는 이스라엘 땅에서 살게 될 것이다.”라고 희망을 노래했습니다. 유대인들은 본향에 들어가 사는 것을 하나님의 계명으로 받아드렸고, 본향에로의 이주를 ‘알리야’란 말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은 영적인 이스라엘 사람들이고, 하나님께서 우리 기독교인들에게 약속하신 새 예루살렘 성에 오르기 위해서 순례자의 길을 걷는 진정한 ‘알리야’들이어야 합니다.
이 떠돌이 정신에 바탕을 두고 개신교가 이 땅에 들어오기 전 조선의 천주교인들은 당국의 가혹한 박해에도 굴하지 않았고, 그 결과 일만 명이 넘는 순교자를 냈습니다. 이승훈이 세례를 받았던 1784년 이후부터 100년의 긴 세월동안 참혹한 박해를 받고서도 그 믿음을 배반하지 않았던 것은 이 땅이 영원히 살 그들의 본향이 아니란 떠돌이 의식 때문이었습니다.
개신교가 이 땅에 들어온 때는 일본이 조선을 삼키려는 야욕을 들어내기 시작하던 때였습니다. 이때의 개신교는 비록 이제 막 조선 땅에 복음의 씨를 뿌려 싹을 내던 단계였지만, 분연히 일어서 민족운동과 애국운동을 일으켰고, 민중을 계몽하며, 항일투쟁과 구국운동에 앞장섰습니다. 그들이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이 땅이 영원히 살 그들의 본향이 아니란 떠돌이 의식 때문이었습니다. 이 떠돌이 의식을 가진 조선의 개신교 신자들이 행한 일들을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조선의 개신교 신자들은 이 땅에서 외세를 물리치고 자주독립국가를 이룩하는데 헌신했습니다. 이런 일을 행한 사람들 중의 대표적인 사람이 월남 이상재 선생입니다. 이상재는 초대 주미공사 박정양을 따라 서기관으로 1년간 미국생활을 하면서 그들의 발전된 문명이 성서에 근거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1902년 한성감옥에 수감되어서는 성서를 여러 차례 읽고 기독교인이 됩니다.
1884년 12월에 개화파 인사들이 주도한 갑신정변의 실패로 미국에 망명했던 서재필이 기독교인이 되어 돌아왔고, 그가 세운 독립협회가 1898년에 정부에 의해 강제해산을 당하고, 독립협회의 간부들에게 체포령이 떨어져 이승만을 비롯한 많은 개화파 인사들이 한성감옥에 수감됩니다. 이상재와 그의 아들 승인도 1902년에 체포되어 한성 감옥에 수감됩니다. 이곳 감옥에 이승만이 주선하여 도서실을 개설하였는데, 언더우드, 아펜젤러, 게일, 헐버트와 같은 선교사들이 책을 마련하여 주었습니다. 이들이 넣어준 책들 가운데는 교양서적은 물론이고, 성서를 비롯한 기독교 서적들이 많았는데, 이때에 기독교에 개종한 사람들은 이승만과 이상재 말고도, “삼천리 반도 금수강산 하나님 주신 동산”을 쓴 남궁억 선생을 비롯한 유성준, 이원긍, 김정식, 홍재기, 안국선, 이승인, 신흥우와 같은 분들이 있습니다.
이들 개화파 기독교인들은 일본이 1904년에 일어난 노일전쟁에서 이기고 한반도에서 러시아를 몰아냄으로써 명실상부한 한반도 지배자로 부상하게 되면서 석방되었는데 모두 연동교회로 모였습니다. 그들 가운데 일부가 묘동교회와 안동교회를 세웠고, YMCA를 창설하여 청년운동을 펼쳤습니다. 특히 이상재 선생은 ‘YMCA신앙강좌’를 통해서 기독교 신앙과 민족주의로 의식화된 청년들을 많이 길러냈습니다.
둘째, 조선의 초기 개신교 신자들은 곳곳에 신학문을 가르치는 학교를 세워 민족계몽운동에 헌신하였습니다. 이들 가운데 대표적인 사람이 오산학교를 세운 남강 이승훈 선생입니다. 이승훈은 1907년 기독교인이자 평양에 대성학교를 세운 도산 안창호 선생의 연설을 듣고 그 이튿날로 상투를 자르고 개화인이 되었으며, 즐기던 술과 담배를 끊고 신민회에 가담하여 1910년 8월 한일합방이 되기까지 4년간 국권의 회복을 위해서 힘썼습니다.
셋째, 조선의 초기 개신교 신자들은 민족독립운동에 헌신하였습니다. 1919년 3월 1일에 있었던 독립만세운동은 우리 민족사에 있어서 영원히 잊을 수 없는 거국적인 민족운동이었습니다. 그런데 독립선언문의 기초자인 육당 최남선을 비롯해서 서명자 33인 가운데 16명이 기독교인이었습니다. 독립선언문의 내용 역시 기독교 사상을 바탕으로 한 자유, 평등, 독립이었습니다.
민족독립운동에 힘쓴 기독교인들은 많지만, 그 가운데서 상도파 독립지사 몇 사람을 간략하게 소개하겠습니다.
구연영 전도사는 1895년 명성황후 시해사건과 단발령에 반발해서 을미의병(乙未義兵)을 일으킨 의병장 출신이었는데, 민족운동에의 꿈을 실현시키기 위해서 1897년 2월 스스로 남대문에 위치한 상동교회를 찾아가 기독교인이 된 독립지사입니다. 구연영 전도사는 그곳에서 엡윗(Epworth) 청년회를 조직하여 활동하였는데, 일진회규탄연설을 자주한 때문에 일본군에 체포되어 이천에서 미루나무에 묶인 채 아들과 함께 총살당했습니다.
전덕기 목사는 남대문 상동교회를 중심으로 민족운동을 펼치다가 1911년 데라우치 암살음모사건 때에 체포되어 고문과 악형을 받고, 그 후유증으로 39세의 나이로 순절(殉節)하였습니다. 전덕기는 독립협회, 엡윗청년회, 신민회 등에서 구한말 민족운동단체의 핵심 멤버로 활동하였는데, 특히 을사보호조약 무효상소운동(1905), 헤이그밀사사건(1907), 데라우치 총독 암살음모사건(1911)과 같은 굵직한 항일구국운동을 주도하였습니다. 그가 만든 엡윗청년회, 공옥학교, 상동청년학원을 중심으로 형성된 상도파의 주요 멤버 가운데는 주시경, 이승만, 헤이그 밀사로 활동했던 이준 등이 포함되어 있었고, 비록 상도파는 아니지만, 을사보호조약 무효상소운동을 함께 펼쳤던 진남포 감리교 청년회 총무 김구도 포함되어있었습니다.
이준 열사는 민영환을 중심으로 이상재 등과 함께 1902년 개혁당이라는 비밀결사를 조직하여 활동하다가 체포되어 감옥살이를 했고, 1904년에는 일제의 앞잡이 노릇을 하는 일진회에 대항하기 위하여 공진회를 조직하여 활동하다가 철도(鐵島)라는 섬으로 잠시 유배를 가기도 하였습니다. 1905년 11월 을사보호조약 체결 때에는 을사보호조약 무효상소운동이 전덕기 목사가 시무하는 상동교회에서 열었는데, 이준은 김구 등과 함께 적극 가담하여 상소문을 작성하였습니다. 이 점에 대해서 김구는 백범일지에서 의병운동이 구사상의 애국운동이라면, 우리 예수교인의 항일운동은 신사상의 애국운동이라고 하였습니다.
1907년 6월에 네덜란드의 수도 헤이그에서는 미국, 영국, 러시아를 비롯한 40개국 대표 225명이 참석한 가운데 제2회 만국평화회의가 열렸습니다. 고종은 일본의 감시를 피해 헤이그에 비밀특사를 파견하였는데, 이상설, 이준, 이위종이 뽑혔습니다. 특사들의 임무는 을사보호조약의 무효와 일본의 침략적 근성을 세계 여러 나라에 알려 그들의 후원을 얻고자 함이었습니다. 헤이그에 도착한 특사들은 숙소를 정하고 당당히 태극기를 내걸고 활동을 시작했고, 일본 대표들의 훼방에도 불구하고, 특사들의 노력으로 일제의 만행이 신문지상을 통해서 세계 여러 나라에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한국 대표들은 끝내 만국회의에 초청 받지 못했고, 이에 이의를 제기하며 항의했던 이준은 그가 묻고 있던 호텔에서 돌연히 순국(殉國)하고 말았습니다. 그의 시신은 기독교식으로 네덜란드에 묻혔다가 56년 만인 1963년 9월 30일에 고국으로 돌아와 수유리 한신대학원 뒷산에 다시 묻혔습니다.
이런 모든 가치 있는 일들이 떠돌이 정신에서 비롯된 것들입니다. 영원한 본향을 사모하는 떠돌이 정신을 가진 자들이 이 땅의 독립과 주권회복을 위해서 목숨을 바쳤다는 것은 역설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영원한 본향에 대한 사모함이 없는 자들은 이 땅에서 출세하여 권세를 누리며 살기를 추구하지만, 이 땅의 독립과 주권회복을 위해서 일하는 것은 고사하고 오히려 친일의 앞잡이 노릇들을 했습니다.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일신의 안일을 생각하는 유대인이라면 정치군사적으로 불안한 고국에로 돌아가려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진정한 떠돌이 정신을 가진 ‘알리야’라면 이스라엘을 지키는 전사가 되기 위해서 본향으로 이주할 것입니다. 기독교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영원한 본향을 사모하는 떠돌이 정신을 가진 신자라면, 복음과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자기 몸을 바칠 것입니다.
현재 유대인 인구는 전 세계에 1400만 명이 있습니다. 그 가운데 60%인 840만 명이 떠돌이 디아스포라들입니다. 예수님 당시에는 전 세계에 450만 명의 유대인들이 있었습니다. 그 가운데 84%인 380만 명이 떠돌이 디아스포라들이었습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은 본향을 떠나 사는 것을 일컬어 유배생활이라고 말합니다. 이런 면에서 보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본향인 하나님의 나라를 떠나 이 땅에서 유배생활을 하고 있는 셈입니다. 반드시 돌아가야 할 본향이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신명기 26장 5절은 유대민족과 그 조상을 일컬어 ‘유리하는 아람 사람’이란 말을 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도 이삭도 야곱도 그들의 후손들도 떠돌이였다는 것입니다. 열두 아들들을 통해서 이스라엘 나라를 세웠던 야곱도 대표적인 떠돌이였습니다. 바로 앞에 선 야곱은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내 나그네 길의 세월이 일백삼십 년이니이다. 나의 연세가 얼마 못되니, 우리 조상의 나그네 길의 세월에 미치지 못하나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나이다”(창 47:9). 야곱은 자신의 일생이 험난한 떠돌이의 삶이었다고 고백한 것입니다. 출애굽기 23장 9절은 야곱의 후손들이 이집트에서 보낸 430년의 세월을 나그네의 세월이었다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유대인들은 본향에 대한 강한 집착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이것이 지나쳐서 영토지향주의로 나타나고 있는 것은 문제입니다.
창세기에 보면,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이 모두 본향에 묻히고 있고, 그 가운데 야곱과 요셉은 이집트에서 죽었는데, 본향에 묻히겠다는 확고한 신념 때문에 시신으로 본향에 돌아온 자들입니다. 우리도 죽으면 아버지 하나님이 계신 본향에 돌아가게 됩니다. 유대인들이 본향을 사모하는 이유는 가나안 땅을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기 때문입니다. 야곱이후 본향에 대한 집착은 유대인들의 집단무의식이 되고 있습니다. 이 집단무의식으로 인해서 유대인들은 아무리 오랜 세월을 외국에 나가 살아도 반드시 본향에 돌아간다는 의식을 갖고 살게 됩니다. 이 의식이 이집트 거주 430년 만에 대탈출을 만들고, 바벨론과 페르시아에서 보낸 유배생활 70년 또는 173년 만에 본향으로 돌아오는 행렬들을 만들고, 나라가 망한지 1878년 만에 나라를 세우는 기적을 만들어냈습니다. 아브라함에서 시작된 유랑의 세월이 3,800년이 된 지금도 유대인들은 불굴의 투지로 본향에 돌아가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습니다.
유대민족이 그토록 사모하는 본향이란 것이 사람이 살기에 적합한 곳이 못됩니다. 쓸모 있는 땅이 많지 않고, 물도 귀하고, 기후도 좋지 않은 곳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유배되어 살던 곳은 그들의 본향보다 훨씬 살기 좋은 곳들이었습니다. 이집트의 고센 땅은 유대인들의 본향에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비옥한 땅이었습니다. 바벨론이나 페르시아도 월등히 살기 좋은 곳이었습니다. 5백만이 넘는 유대인들이 거주하는 미국도 살기 좋은 곳입니다. 대다수의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이 거주하는 지역들은 그들의 본향보다 살기 좋은 곳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대인들은 일찍이 본향을 본적이 없는 그들의 후손들조차도 본향을 사모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물론 지난 수천 년의 세월 동안 나라 없이 핍박과 추방과 학살을 당하며 살아온 서러움의 세월도 무시할 수 없습니다. 이 부분에 있어서는 우리 민족도 마찬가집니다. 우리 민족도 일제치하에서 이런 동일한 아픔을 겪었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그들에 비하면 우리는 양반인 셈입니다. 주권을 빼앗긴 세월이 길지 않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살고 있는 이곳이 우리의 영원한 본향이 아니란 것입니다. 이 땅에서 사는 재미가 쏠쏠하다고 해서 본향으로 돌아가는 일에 대한 신념을 저버리면 영원한 삶을 놓치게 됩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11장 16절에서 말하기를, 우리가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해야할 때라고 말하면서 이 본향은 하늘에 있는 것으로써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예비한 성(城)이라고 했습니다.
고향이 친어머니라면, 타향은 의붓어머니입니다. 우리가 발붙이고 사는 이 땅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타향입니다. 잘 아시다시피 동물에게는 태어나서 자란 곳으로 돌아가려는 귀소본능(歸巢本能)이란 것이 있습니다. 제비, 갈매기, 연어, 송어 등은 귀소본능이 뛰어난 동물들입니다. 인간에게도 귀소본능은 있습니다. 심층심리학의 칼 구스타프 융(1875~1961)은 인간의 의식 가운데 인류가 공통적으로 지닌 '집단 무의식'이란 것이 있다고 했습니다. 집단 무의식이란 한 민족 또는 전체 인류가 공통으로 지니고 있는 일종의 ‘오래 된 기억'으로써 오랜 옛날부터 인류가 조상대대로 경험했던 축적된 의식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모든 사람들에게 공통으로 있는 정신이자 경향입니다. 여기에는 기독교가 말하는 천국과 지옥, 불교가 말하는 열반과 지옥, 그리스신화에서 말하는 낙원인 엘뤼시온(Elusion)과 지옥인 타르타로스(Tartaros)에 대한 종교적 상징들이 다 포함됩니다. 이런 것들은 우리 인간들이 돌아가야 할 궁극적인 본향은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서 예비한 영원한 성(城)이란 것을 말해줍니다. ‘인생은 나그네’란 말이나 ‘유리하는 아람 사람’이란 말은 다 우리 인간의 삶이 이 땅에서 끝나고 마는 것이 아니란 것을 무의식적으로 웅변해 주는 것입니다.
유대민족의식에 깊게 뿌리내리고 있는 떠돌이 의식은 초기 기독교인들의 의식 속에도 깊게 자리 잡고 있습니다. 히브리서 저자가 ‘더 나은 본향’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면, 베드로는 우리 성도들을 일컬어 ‘나그네와 행인’같다고(벧전 2:11) 했고, “나그네로 있을 때를 두려움으로 지내라”(벧전 1:17)고 충고하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그 긴 떠돌이 세월 동안 본향에 대한 기도를 단 하루도 쉬지 않았습니다. 매년 유월절 밤이면, “우리가 지금은 비록 여기 타향에 살아도 내년에는 이스라엘 땅에서 살게 될 것이다.”라고 희망을 노래했습니다. 유대인들은 본향에 들어가 사는 것을 하나님의 계명으로 받아드렸고, 본향에로의 이주를 ‘알리야’란 말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은 영적인 이스라엘 사람들이고, 하나님께서 우리 기독교인들에게 약속하신 새 예루살렘 성에 오르기 위해서 순례자의 길을 걷는 진정한 ‘알리야’들이어야 합니다.
이 떠돌이 정신에 바탕을 두고 개신교가 이 땅에 들어오기 전 조선의 천주교인들은 당국의 가혹한 박해에도 굴하지 않았고, 그 결과 일만 명이 넘는 순교자를 냈습니다. 이승훈이 세례를 받았던 1784년 이후부터 100년의 긴 세월동안 참혹한 박해를 받고서도 그 믿음을 배반하지 않았던 것은 이 땅이 영원히 살 그들의 본향이 아니란 떠돌이 의식 때문이었습니다.
개신교가 이 땅에 들어온 때는 일본이 조선을 삼키려는 야욕을 들어내기 시작하던 때였습니다. 이때의 개신교는 비록 이제 막 조선 땅에 복음의 씨를 뿌려 싹을 내던 단계였지만, 분연히 일어서 민족운동과 애국운동을 일으켰고, 민중을 계몽하며, 항일투쟁과 구국운동에 앞장섰습니다. 그들이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이 땅이 영원히 살 그들의 본향이 아니란 떠돌이 의식 때문이었습니다. 이 떠돌이 의식을 가진 조선의 개신교 신자들이 행한 일들을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조선의 개신교 신자들은 이 땅에서 외세를 물리치고 자주독립국가를 이룩하는데 헌신했습니다. 이런 일을 행한 사람들 중의 대표적인 사람이 월남 이상재 선생입니다. 이상재는 초대 주미공사 박정양을 따라 서기관으로 1년간 미국생활을 하면서 그들의 발전된 문명이 성서에 근거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1902년 한성감옥에 수감되어서는 성서를 여러 차례 읽고 기독교인이 됩니다.
1884년 12월에 개화파 인사들이 주도한 갑신정변의 실패로 미국에 망명했던 서재필이 기독교인이 되어 돌아왔고, 그가 세운 독립협회가 1898년에 정부에 의해 강제해산을 당하고, 독립협회의 간부들에게 체포령이 떨어져 이승만을 비롯한 많은 개화파 인사들이 한성감옥에 수감됩니다. 이상재와 그의 아들 승인도 1902년에 체포되어 한성 감옥에 수감됩니다. 이곳 감옥에 이승만이 주선하여 도서실을 개설하였는데, 언더우드, 아펜젤러, 게일, 헐버트와 같은 선교사들이 책을 마련하여 주었습니다. 이들이 넣어준 책들 가운데는 교양서적은 물론이고, 성서를 비롯한 기독교 서적들이 많았는데, 이때에 기독교에 개종한 사람들은 이승만과 이상재 말고도, “삼천리 반도 금수강산 하나님 주신 동산”을 쓴 남궁억 선생을 비롯한 유성준, 이원긍, 김정식, 홍재기, 안국선, 이승인, 신흥우와 같은 분들이 있습니다.
이들 개화파 기독교인들은 일본이 1904년에 일어난 노일전쟁에서 이기고 한반도에서 러시아를 몰아냄으로써 명실상부한 한반도 지배자로 부상하게 되면서 석방되었는데 모두 연동교회로 모였습니다. 그들 가운데 일부가 묘동교회와 안동교회를 세웠고, YMCA를 창설하여 청년운동을 펼쳤습니다. 특히 이상재 선생은 ‘YMCA신앙강좌’를 통해서 기독교 신앙과 민족주의로 의식화된 청년들을 많이 길러냈습니다.
둘째, 조선의 초기 개신교 신자들은 곳곳에 신학문을 가르치는 학교를 세워 민족계몽운동에 헌신하였습니다. 이들 가운데 대표적인 사람이 오산학교를 세운 남강 이승훈 선생입니다. 이승훈은 1907년 기독교인이자 평양에 대성학교를 세운 도산 안창호 선생의 연설을 듣고 그 이튿날로 상투를 자르고 개화인이 되었으며, 즐기던 술과 담배를 끊고 신민회에 가담하여 1910년 8월 한일합방이 되기까지 4년간 국권의 회복을 위해서 힘썼습니다.
셋째, 조선의 초기 개신교 신자들은 민족독립운동에 헌신하였습니다. 1919년 3월 1일에 있었던 독립만세운동은 우리 민족사에 있어서 영원히 잊을 수 없는 거국적인 민족운동이었습니다. 그런데 독립선언문의 기초자인 육당 최남선을 비롯해서 서명자 33인 가운데 16명이 기독교인이었습니다. 독립선언문의 내용 역시 기독교 사상을 바탕으로 한 자유, 평등, 독립이었습니다.
민족독립운동에 힘쓴 기독교인들은 많지만, 그 가운데서 상도파 독립지사 몇 사람을 간략하게 소개하겠습니다.
구연영 전도사는 1895년 명성황후 시해사건과 단발령에 반발해서 을미의병(乙未義兵)을 일으킨 의병장 출신이었는데, 민족운동에의 꿈을 실현시키기 위해서 1897년 2월 스스로 남대문에 위치한 상동교회를 찾아가 기독교인이 된 독립지사입니다. 구연영 전도사는 그곳에서 엡윗(Epworth) 청년회를 조직하여 활동하였는데, 일진회규탄연설을 자주한 때문에 일본군에 체포되어 이천에서 미루나무에 묶인 채 아들과 함께 총살당했습니다.
전덕기 목사는 남대문 상동교회를 중심으로 민족운동을 펼치다가 1911년 데라우치 암살음모사건 때에 체포되어 고문과 악형을 받고, 그 후유증으로 39세의 나이로 순절(殉節)하였습니다. 전덕기는 독립협회, 엡윗청년회, 신민회 등에서 구한말 민족운동단체의 핵심 멤버로 활동하였는데, 특히 을사보호조약 무효상소운동(1905), 헤이그밀사사건(1907), 데라우치 총독 암살음모사건(1911)과 같은 굵직한 항일구국운동을 주도하였습니다. 그가 만든 엡윗청년회, 공옥학교, 상동청년학원을 중심으로 형성된 상도파의 주요 멤버 가운데는 주시경, 이승만, 헤이그 밀사로 활동했던 이준 등이 포함되어 있었고, 비록 상도파는 아니지만, 을사보호조약 무효상소운동을 함께 펼쳤던 진남포 감리교 청년회 총무 김구도 포함되어있었습니다.
이준 열사는 민영환을 중심으로 이상재 등과 함께 1902년 개혁당이라는 비밀결사를 조직하여 활동하다가 체포되어 감옥살이를 했고, 1904년에는 일제의 앞잡이 노릇을 하는 일진회에 대항하기 위하여 공진회를 조직하여 활동하다가 철도(鐵島)라는 섬으로 잠시 유배를 가기도 하였습니다. 1905년 11월 을사보호조약 체결 때에는 을사보호조약 무효상소운동이 전덕기 목사가 시무하는 상동교회에서 열었는데, 이준은 김구 등과 함께 적극 가담하여 상소문을 작성하였습니다. 이 점에 대해서 김구는 백범일지에서 의병운동이 구사상의 애국운동이라면, 우리 예수교인의 항일운동은 신사상의 애국운동이라고 하였습니다.
1907년 6월에 네덜란드의 수도 헤이그에서는 미국, 영국, 러시아를 비롯한 40개국 대표 225명이 참석한 가운데 제2회 만국평화회의가 열렸습니다. 고종은 일본의 감시를 피해 헤이그에 비밀특사를 파견하였는데, 이상설, 이준, 이위종이 뽑혔습니다. 특사들의 임무는 을사보호조약의 무효와 일본의 침략적 근성을 세계 여러 나라에 알려 그들의 후원을 얻고자 함이었습니다. 헤이그에 도착한 특사들은 숙소를 정하고 당당히 태극기를 내걸고 활동을 시작했고, 일본 대표들의 훼방에도 불구하고, 특사들의 노력으로 일제의 만행이 신문지상을 통해서 세계 여러 나라에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한국 대표들은 끝내 만국회의에 초청 받지 못했고, 이에 이의를 제기하며 항의했던 이준은 그가 묻고 있던 호텔에서 돌연히 순국(殉國)하고 말았습니다. 그의 시신은 기독교식으로 네덜란드에 묻혔다가 56년 만인 1963년 9월 30일에 고국으로 돌아와 수유리 한신대학원 뒷산에 다시 묻혔습니다.
이런 모든 가치 있는 일들이 떠돌이 정신에서 비롯된 것들입니다. 영원한 본향을 사모하는 떠돌이 정신을 가진 자들이 이 땅의 독립과 주권회복을 위해서 목숨을 바쳤다는 것은 역설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영원한 본향에 대한 사모함이 없는 자들은 이 땅에서 출세하여 권세를 누리며 살기를 추구하지만, 이 땅의 독립과 주권회복을 위해서 일하는 것은 고사하고 오히려 친일의 앞잡이 노릇들을 했습니다.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일신의 안일을 생각하는 유대인이라면 정치군사적으로 불안한 고국에로 돌아가려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진정한 떠돌이 정신을 가진 ‘알리야’라면 이스라엘을 지키는 전사가 되기 위해서 본향으로 이주할 것입니다. 기독교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영원한 본향을 사모하는 떠돌이 정신을 가진 신자라면, 복음과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자기 몸을 바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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