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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시대에 적합한 인물: 베드로와 야고보(행 11: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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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동호
댓글 0 조회 12,386 2006.09.15 12: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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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시대에 적합한 인물: 베드로와 야고보(행 11:1-18)

유대교인들은 2500여 년 전부터 두 가지를 희망하고 있었습니다. 첫 번째가 메시아가 나타나는 것이고, 두 번째가 그 메시아가 가져올 ‘올람 하바’(Olam Ha-Ba)입니다. ‘올람 하바’란 ‘메시아 시대’ 혹은 ’다가올 세계‘(World to Come)를 뜻합니다. 이 ’올람 하바‘ 곧 ’다가올 메시아 세계‘는 흔히 말하는 ’종말시대‘ 또는 ’마지막 시대‘를 말하는 것입니다.
기독교에서는 이 ’다가올 마지막 세계‘가 2천 년 전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성육신사건에서 시작되었다고 봅니다. 그분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것은 인류의 대속을 위한 것이었고, 그분이 승천하시고 대신 보내신 보혜사 성령님의 활동은 다가올 마지막 세계의 실현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성령님의 활동을 통해서 세워진 교회가 ’올람 하바‘이고,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은총을 힘입어 하나님의 ’의롭다 하심‘과 성령님의 ’중생과 씻음과 거룩하게 하심‘을 받은 사람은 이 ’올람 하바‘의 시민이 되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이 오실 때까지 500여 년간 몹시 고대하던 그 마지막 세계 혹은 종말시대가 성령님의 활동을 통해서 ’교회‘라는 새 언약 공동체 속에서 ’이미‘ 시작되었고, 영적으로 실현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기독교에서는 이 시대를 교회시대, 혹은 성령시대라고 부릅니다. 또 이 시대를 다른 말로는 시작된 종말시대 또는 실현된 종말시대라고 부릅니다.
시작된 종말이나 실현된 종말이란 말은 영적인 종말을 뜻하는 것이고, 종말의 완성을 뜻하는 것은 ‘아직’ 아닙니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구원’이란 말, 혹은 ‘칭의’나 ‘중생’이란 말은 종말이 완성되는 때에 주어질 완전한 구원의 축복을 하나님으로부터 약속받고, 성령님으로 보증 받고, 인침 받고, 그 축복들을 성령님의 인도하심과 가르치심과 보호하심과 변호하심과 치료하심 속에서 맛보고 누리며 경험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인이 누리는 대표적인 축복은 하나님의 평강입니다. 마음의 평화, 가정의 평화, 이 평화가 있는 곳에 만사가 형통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것은 시작이지, 끝은 아닙니다. ‘끝’ 곧 ‘완성’은 그리스도의 재림의 때에 이뤄집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재림을 믿고 기다리는 것이 바로 이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8장 23절에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린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축복이 유대인들에게는 없습니다. 그들에게는 시작된 종말이나 실현된 종말의 축복이 없는 것입니다. 그 첫 번째 이유는 그들이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 있는 것은 조상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받는 약속뿐이고, 성령님으로 보증 받고, 인침 받고, 그 축복들을 성령님의 인도하심과 가르치심과 보호하심과 변호하심과 치료하심 속에서 맛보고 누리며 경험하는 것이 없습니다. 유대인들에게 시작된 종말의 축복이 없는 두 번째 이유는 그들이 말하는 ’다가올 시대‘란 그들 민족만의 축복이기 때문입니다. ’올람 하바‘는 유대인의 제2의 출애굽 사건, 곧 유대인의 대 구원 사건을 말하는데, 이 사건은 영적인 사건이 아니고, 육적인 사건입니다. 문자적인 이스라엘 왕국의 완전한 회복을 말하는 것입니다. 1948년 5월 14일에 이스라엘 국가가 건국되었는데, 건국된 지 60여년이 흘렀어도 이스라엘 왕국이 완전하게 회복되었다고 믿는 유대인은 없습니다. 아직 메시아가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이고, 세계를 통합할만한 여력도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활동하셨던 2천 년 전부터 오늘날까지 유대인들 가운데는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는 메시아닉 주(Messianic Jews), 곧 소수의 기독교인 유대인들이 있고,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지 않는 다수의 비기독교인 유대인들이 있습니다. 기독교가 처음 시작된 장소는 예루살렘이고, 시작한 사람들은 모두 유대인들이었습니다. 예루살렘에 교회가 세워진 것은 주후 30년 5월 28일이었고, 대표적 지도자는 예수님의 수제자였던 베드로와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였습니다.
이들 기독교인 유대인들을 보는 신학자들에는 두 가지 부류가 있습니다. 먼저 진보적인 신학자들은 기독교인 유대인들이 그들 자신들을 유대교 안에서의 개혁운동으로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성전제사를 드렸고, 안식일을 지켰으며, 할례를 행하고, 절기와 음식에 관한 법들을 지켰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유일신으로 섬겼고, 예수님을 선지자나 교사의 한 사람으로 보았으며, 신적이나 반신적 존재로 보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복음주의 신학자들은 예루살렘에 집중된 기독교인 운동이 할례를 행하고, 성전제사를 드리고, 절기와 음식에 관한 법들을 지킨 것을 제외하고는 바울 라인의 기독교인들의 신앙과 거의 다르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믿었고, 삼위일체의 한 인격으로 보았으며, 메시아와 구세주로 보았다고 말합니다. 
제 생각으로는 진보 보수 신학자들이 말하는 두 가지 견해의 유대인들이 언제나 있었고 지금도 마찬가지라고 봅니다. 공통점은 그들이 예수님을 메시아였다고 믿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비기독교인 유대인들은 메시아에 대한 이해를 우리 기독교인들과 달리 합니다. 그들이 우리 기독교인들이 믿는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지 못하는 이유는 그들이 생각하는 메시아는 다윗 왕처럼 그들 나라의 왕이 될 사람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생각하는 메시아는 우리가 말하는 ‘구세주’(救世主)도 아니고, 죄가 없으신 삼위일체 신도 아닙니다. 이스라엘의 영광을 되찾게 해줄 다윗과 같은 영웅이자 제2의 출애굽 사건을 이끌 모세와 같은 인물이라고 보기 때문입니다. 그 같은 인물이 유대인들을 이스라엘로 돌아오게 하고 예루살렘을 회복시킴으로써 정치적 영적 구원을 가져다 줄 것이며, 이스라엘에 한 정부를 세울 것이고, 그것을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를 위한 전 세계 정부의 중심에 세울 것이며, 성전을 재건할 것이고, 성전예배를 다시 세울 것이며, 이스라엘의 종교법정 체계를 회복시킬 것이고, 나라 법으로써 유대법을 세울 것이라고 믿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사건과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을 접하기까지는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었던 유대인들조차도 여타의 다른 유대인들과 마찬가지로 메시아가 무죄한 신적 또는 반신적 존재일 것이라든지, 인류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부활하실 구세주이시며 다시 이 땅에 오실 메시아일 것이라는 생각을 해보지 않았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부활사건과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은 그들의 보편적인 생각을 바꾸기에 충분히 충격적인 사건들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록 그들이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었고, 하나님의 아들 구세주로 믿었다 할지라도, 그 메시아가 온 인류의 대속, 곧 이방인을 위한 메시아도 된다는 생각을 갖지는 못했고, 유대인과 이스라엘 나라만을 위한 메시아라는 생각을 쉽게 떨쳐버리지를 못했습니다. 그것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이 사도행전 10-11장입니다. 본문을 좀 더 자세하게 살펴보기 전에 우리가 알아야할 한 가지를 먼저 말씀드리겠습니다.
유대인들 가운데는 두 종류의 유대인들이 있습니다. 먼저 말씀드린 두 종류의 유대인은 예수님을 믿고 안 믿는 신앙과 관련된 것이었지만, 지금 말씀드리는 두 종류의 유대인은 거주 지역에 관련된 것입니다. 팔레스타인 땅에서 출생해서 아람어를 쓰고, 히브리어 성경을 읽으며, 이스라엘 영내에서 거주하는 유대인을 히브리파 유대인이라고 사도행전은 말합니다. 그러나 외국에서 출생해서 헬라어를 쓰고, 헬라어 성경을 읽으며, 외국에 거주하면서 이스라엘 영내를 출입하는 디아스포라 유대인을 헬라파 유대인이라고 사도행전은 말합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보려는 유대인은 팔레스타인 땅에서 출생해서 아람어를 쓰고, 히브리어 성경을 읽으며, 이스라엘 영내에서 거주하는 히브리파 유대인이고, 그들 가운데서도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고 따르는 기독교인 유대인이며, 그 대표자격인 베드로와 야고보의 사고와 신념과 역할과 사명에 관한 것입니다.
사도행전 10장 14-15절에 보면, “속되고 깨끗지 아니한” 것과 “하나님께서 깨끗케 하신 것”이 비교되어 있습니다. “속되고 깨끗지 아니한” 것은 유대인이 이방인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이고, “하나님께서 깨끗케 하신 것”은 사도행전 10장 22절에서 볼 수 있듯이 백부장 고넬료처럼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를 말하는 것입니다. 비록 속되고 깨끗지 아니한 이방인일지라도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하나님께서 깨끗케 하시기 때문에 아무라도 속되다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실을 비기독교인 유대인들은 물론이고,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는 베드로조차도 깨닫지 못했고, 알지 못했고, 이해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히브리파 유대인들의 한계였고, 그들의 활동범위를 동족에게 제한시키는 족쇄였다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이것이 왜 하나님께서 베드로에게 세 번씩이나 환상을 보이고, “하나님께서 깨끗케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고 말씀하셨는가라는 물음의 답입니다.
베드로가 고넬료 가정에 모인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나서 예루살렘으로 돌아갔을 때, 11장 3절의 말씀을 보면, 예루살렘 교회의 유대인들이 베드로가 고넬료의 집에 들어가 함께 먹고 교제한 사실에 대해서 힐난하며 나무랐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유대인만의 하나님이 아니라 이방인의 하나님도 되시고, 하나님이 유대인의 구원만을 위하지 아니하시고, 동일하게 이방인의 구원도 위하신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 히브리파 유대인들의 한계였고, 그들의 활동범위를 동족인 유대인에게 제한시킨 족쇄였던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2장 11-18절을 보면, 바울이 베드로를 책망했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베드로가 안디옥교회를 방문했을 때, 이방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고 있었는데, 예루살렘 교회의 수장인 야고보가 보낸 히브리파 유대인들이 도착하자 이방인과 함께 음식 먹는 것을 보고 비방할 것을 두려워하여 자리를 피했다는 것입니다. 그러자 다른 유대인들조차도 베드로를 따라 자리를 떠나는 이중적인 태도를 보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갈라디아서 2장 14-16절에 따르면, 모든 사람이 보는 자리에서 베드로에게 “네가 유대인으로서 이방을 좇고 유대인답게 살지 아니하면서 어찌하여 억지로 이방인을 유대인답게 살게 하려느냐? 우리는 본래 유대인이요, 이방 죄인이 아니로되,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아는 고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에서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고 면책했다는 것입니다.
베드로와 야고보와 같은 인물이 쉽사리 빠져나올 수 없는 올무가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이스라엘 회중이 시내산에서 하나님과 언약을 맺고 받은 십계명과 율법의 말씀인 토라였습니다. 할례를 포함한 그 토라의 내용을 지키지 않고서는 그 누구라도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없다는 신념이 그들을 가두는 올무였던 것입니다.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었던 히브리파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이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을 섬기는 것을 유대교에 개종하는 차원에서 이해하려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들에게 할례를 요구한 것이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이런 문제가 좀 더 구체적으로 논의 되고 있는 곳이 사도행전 15장입니다. 바울과 바나바가 일차 선교여행을 성공리에 마치고 안디옥 교회로 돌아왔을 때, 예루살렘 교회에서 올라온 자들이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능히 구원을 얻지 못한다.”(행 15:1)고 주장하게 되면서 그들과 바울사이에 심한 변론이 일게 되었습니다. 이 문제에 대해서 안디옥 교회는 바울과 바나바를 몇몇 사람들과 함께 예루살렘 교회에 보내어 사도들의 의견을 듣게 하였습니다. 이 일로 예루살렘에서 사도와 장로들의 총회가 열리게 되었습니다. 많은 변론이 있고난 다음에 베드로의 설득과 야고보의 중재로 주님께로 돌아온 이방인들을 ‘문의 개종자’의 수준에서 처리하자고 제안하였습니다.
‘문의 개종자’란 문안의 객, 곧 손님이란 말에서 온 것으로써 하나님을 경외하는 이방인들을 지칭하는 말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의 궁극적인 희망사항이 이방인들의 완전한 개종이었다 치더라도, ‘하나님 경외자들’에게는 613개의 명령과 금령을 포함한 토라 전체의 준수가 요구되지 않았습니다. 그 대신 그들에게는 노아의 일곱 개의 율법이 요구되었습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오늘날 유대인들은 ‘하나님 경외자들’을 ‘노아의 자녀들’(B'nai Noah)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유대인들은 이 일곱 개의 율법이 최초의 ‘하나님 경외자’였던 아담과 노아에게 주어졌던 것이며, 유대인들이 기대하는 ‘올람 하바,’ 곧 다가올 세계에 동참하고 싶어 하는 이방인들에게 요구하는 율법입니다.  이들 일곱 개의 노아의 율법은 (1)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 (2)우상들을 숭배하지 말라. (3)간음하지 말라. (4)살인하지 말라. (5)도둑질하지 말라. (6)동물의 살코기를 산채로 먹지 말라. (7)사법체계를 제정하라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15장에 소개된 사도총회에서 결정된 네 가지 금지사항들, 즉 우상의 더러운 것, 음행, 목매어 죽인 것, 피를 금하라는 야고보의 절충 제안은 바로 유대인들이 ‘하나님 경외자들’에게 요구했던 내용들이었던 것입니다.
결론을 말씀드리겠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수제자로서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고 하신 마태복음 16장 18-19절의 말씀대로 그리스도의 교회의 설립권과 승인권을 가진 사도였습니다. 그의 입에서 나온 설교로 최초의 교회인 예루살렘 교회가 설립되었고, 빌립이 세운 사마리아 교회와 바울의 선교교회들이 그의 권위아래서 승인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가 교회 설립권과 승인권을 가진 사도 중의 사도였다 할지라도 그의 역할은 거기까지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야고보는 예수님의 동생으로서 예루살렘 교회의 대표자였습니다. 야고보가 예루살렘 교회의 최고 책임자로 부상되던 때에 사도들은 떠돌이 순회 목회자의 길을 걷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아무리 야고보가 최초의 그리스도의 교회인 예루살렘 교회의 수장이었다 할지라도 그의 역할 또한 거기까지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베드로나 야고보와 같은 히브리파 유대인들은 그들의 사고가 민족주의에 제한받고 있었기 때문에 이스라엘 민족이란 한계를 넘어 지평을 넓히기가 심히 어려웠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쓰신 그들의 역할도 거기까지였습니다. 바울이 갈라디아서 2장 7-8절에서 “도리어 내가 무할례자에게 복음 전함을 맡기를 베드로가 할례자에게 맡음과 같이 한 것을 보고, 베드로에게 역사하사 그를 할례자의 사도로 삼으신 이가 또한 내게 역사하사 나를 이방인에게 사도로 삼으셨다.”고 말한 것에서 보듯이 하나님께서는 베드로와 야고보의 역할을 그들의 민족인 소수 유대인에게 한정시켰던 것입니다. 그래서 수많은 열방 민족을 향한 사역은 지평이 넓고 열방민족을 품을 수 있는 넓은 가슴과 뜨거운 열정을 가졌던 바울에게 넘어갔던 것입니다. 우리를 옥죄는 올무가 무엇인지, 우리의 시야를 좁게 만드는 것이 무엇인지, 우리의 역할과 사역을 제한시키는 것이 무엇인지를 살펴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신명기 19장 8절의 말씀처럼 여러분 지경을 넓혀 하나님이 주시고자 하는 보다 큰 복을 받아 누리시는 성도님들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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