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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부활사건이 갖는 의미(계 7:9-10, 1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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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동호
댓글 0 조회 13,014 2005.03.26 1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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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부활사건이 갖는 의미(계 7:9-10, 15:2-3)

엘살바도르에 한 젊은 여인이 총탄으로 구멍이 뚫린 한 젊은 남자의 시신을 끌어안고 눈물을 뿌리는 현대판 피에타(성모 마리아가 예수님의 시체를 무릎 위에 올려놓고 슬퍼하는 장면)를 그린 생생한 포스터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포스터가 사람들의 눈길을 끈 것은 총을 맞아 구멍 뚫린 바로 그 상처에서 새싹이 돋고 새잎이 나고 있는 것입니다. 죽음에서 생명이 움트고 있는 희망을 그린 포스터였습니다. 흑암과 혼돈과 죽음이 지배하는 엘살바도르의 땅에도 반드시 정의와 평화가 부활할 것을 표현해 놓은 포스터였던 것입니다.
엘살바도르는 1980년대 초에 내전을 치렀던 인구 6백40만 명의 가난한 나라입니다. 그렇지만, 살바도르 곧 ‘구세주’란 뜻을 가진 나라의 이름에서 느껴지는 것, 포스터에 그려진 한 젊은 여성 - 젊은 여성은 생산의 능력을 갖고 있습니다. - 비록 가난하지만, 슬픔에 젖어있지만, 또 고통에 일그러져있지만, 그녀에게서 느껴지는 것, 또 비록 총탄에 쓰러졌지만, 자신의 희생을 밑거름삼아 새싹이 돋게 하는 젊은 청년에게서 느껴지는 강력한 메시지는 부활입니다. 희망입니다. 정의는 반드시 이긴다는 메시지입니다. 평화가 이긴다는 메시지입니다.
이 한 장의 포스터, 곧 총에 맞아 쓰러진 한 젊은 용사의 시신에서 돋아나는 새싹에서 마르틴 루터 킹 목사와 그를 따르던 흑인들이 손에 손을 잡고 힘차게 불렸던 그 유명한 노래, “We Shall Overcome! 우리는 이기라!"는 그 함성을 다시 듣게 됩니다. 홍해를 건넌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해변에서 불렸던 그 승리의 노래를 다시 듣게 됩니다. 적그리스도의 권세를 이기고 하늘보좌 앞 붉은 유리바닷가에 서서 구원받은 천상의 무리들(계 15:2-3), 곧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라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흰 옷을 입고 손에 종려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양 앞에 서서“(계 7:9) 부르는 그 힘찬 승리의 함성이 귓가에 쟁쟁합니다. 그들은 이렇게 외칩니다.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양께 있도다“(계 7:10). 이것이 예수부활사건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입니다.
이 부활의 의미를 잘 표현해 놓고 있는 그림이 김효숙님께서 1990년에 그린 석판화 ‘부활’입니다. 주보에 실린 그림에서 볼 수 있듯이 커다란 손바닥은 우리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 구멍 뚫린 하나님의 손이요, 예수님의 수난당한 손이요, 또한 상처뿐인 우리들의 손입니다. 그러나 그 손은 우리를 구원할 능력의 손이요 사랑의 손입니다. 그 하나님의 손이야말로 사단으로 상징되는 온갖 세상폭력으로 인해 파괴된 그 폐허의 현장에 새싹이 돋게 하고 새잎이 나게 하는 부활의 손이요, 능력의 손이요, 치유의 손인 것입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성령님과 더불어 십자가에 못 박힌 하나님의 손은 모든 창조와 건설을 일으키는 능력의 손입니다. 비록 그 손에 비수가 꽂히고 커다란 못이 박혀 구멍이 뚫리고 피범벅이 되는 경우에도 바로 그 현장에 새싹이 돋고 새잎이 나게 하는 정의의 손이요 평화의 손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힌 하나님의 손은 모든 죽음을 이기는 생명의 손이요, 모든 불의를 이기는 평화의 손입니다. 예수부활사건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가 바로 이것이고, 이 사실을 깨닫고 하나님께 드리는 감사예배가 바로 부활주일예배입니다.
예수부활사건은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과 영원한 행복을 약속하는 것인 동시에 종말에 있을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에 대한 우리 신앙인들의 믿음이 결코 헛되지 않은 것임을 웅변해 주는 것입니다. 이점을 잘 노래하고 있는 것이 작년에 작고한 구상 선생님의 ‘부활송’입니다. 수년 전에 이 시를 영어로 번역해서 미국의 친구들에게 소개하기도 했던 적이 있습니다. 한번 들어보시겠습니까?
죽어 썩은 것 같은 매화의 등걸에 승리의 화관인 듯 꽃이 눈부시다.
당신 안에 생명을 둔 만물이 저렇듯 죽어도 죽지 않고,
또다시 소생하고 변신함을 보느니 당신이 몸소 부활로 증거한 우리의 부활이야 의심할 바 있으랴!
당신과 우리의 부활이 있으므로 진리는 있는 것이며,
당신과 우리의 부활이 있으므로 정의는 이기는 것이며,
당신과 우리의 부활이 있으므로 달게 받는 고통은 값진 것이며,
당신과 우리의 부활이 있으므로 우리의 믿음과 바람과 사랑은 헛되지 않으며,
당신과 우리의 부활이 있으므로 우리의 삶은 허무의 수렁이 아니다.
봄의 행진이 아롱진 지구의 어느 변두리에서 나는 우리의 부활로써 성취될 그날의 누리를 그리며 황홀에 취해 있다.
그렇습니다. “당신과 우리의 부활이 있으므로 진리는 있는 것이며, 당신과 우리의 부활이 있으므로 정의는 이기는 것이며, 당신과 우리의 부활이 있으므로 달게 받는 고통은 값진 것이며, 당신과 우리의 부활이 있으므로 우리의 믿음과 바람과 사랑은 헛되지 않으며, 당신과 우리의 부활이 있으므로 우리의 삶은 허무의 수렁이 아니다.”가 되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 부분을 로마서 5장 3-5절에서 이렇게 읊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우리는 환난 가운데서도 자랑을 합니다. 우리가 환난은 인내를 낳고, 인내는 품격을 낳고 품격은 희망을 낳는 줄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희망은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 마음속에 부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부활사건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는 우리가 바라고 믿고 참고 인내하는 일들이 결코 헛되지 않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부활사건은 고난당하신 예수님의 성공이요 영광이지만, 그 사건을 기획하고 감독하고 연출하신 분은 역시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인류역사라는 큰 구원드라마의 연출자이시고, 감독자이십니다. 그분이 연출하신 인류의 구세주 예수님의 영웅성이 무엇인가를 잘 설명해 주는 글이 있어서 소개해 드리려고 합니다.
조선일보 「일사일언」(2005년 3월 22일자)에 경희대 NGO대학원 이동수 교수가 “이순신의 영웅성”이란 글을 실었는데, 다음과 같이 적고 있습니다. 이미 읽어보신 분들이 계시겠지만, 한 번 더 그 내용을 음미해보셨으면 합니다.
요즘 주말 저녁엔 TV 드라마 ‘불멸(不滅)의 이순신’을 보는 재미에 푹 빠져 있다. 왜냐하면 정치학자인 나는 이 드라마에서 기존의 개념과는 다른 ‘영웅’의 이미지, 기존의 권력 투쟁과는 다른 ‘정치’의 가능성을 발견하기 때문이다.
흔히 영웅이란 우리가 범접할 수 없는 다른 종류의 인간, 즉 ‘초인(超人)’으로 간주된다. 우리는 현실정치의 아귀다툼을 한탄하면서 그런 영웅의 출현을 기다린다. 이런 영웅주의는 초인에 의한 구원과 통치를 바라는 전근대적인 발상으로써 <2천 년 전 유대인들의 발상> 민주주의 시대엔 맞지 않는다. 하지만 ‘불멸의 이순신’이 보여주는 영웅성은 이와 다르다. 그는 양반이라는 신분의 보호를 받으며 탁월한 능력을 지닌 영웅으로 그려지지 않는다. 오히려 역적의 자식이라는 신분적 한계로 인해 고통을 당한 사람, 사랑하는 사람과 친구들을 구할 수 없었지만 희망을 버리지 않는 사람, 양반 출신임에도 민중의 아픔을 돌본 사람, 불리한 싸움에서도 포기하지 않는 사람, 귀선(龜船) 제작에 실패하여 부하들을 수장(水葬)시켰는데도 그 책임자를 처벌하기는커녕 오히려 독려하는 사람, <복음서가 그린 예수님 상> 그리고 항상 고민을 안고 있는 인간적인 모습으로 묘사된다. <엔도 슈사쿠가 󰡔예수의 생애“에서 묘사한 예수님 상>
이런 그의 모습은 우리의 공감을 자아내고 그처럼 행동하도록 자극한다. 즉 ‘불멸의 이순신’의 영웅성의 본질은 ‘초월적인 능력’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한계 지워진 인간들이 실패와 아픔의 고통을 겪으면서도 결코 포기하지 않는 실행적 노력, 즉 ‘불멸적인 행동’에 있다. 바로 그런 행동들이 임진왜란 때 나라를 구하고, 오늘날 산업화와 민주화를 이루어낼 수 있었던 원동력이 아니었을까.
이동수 교수가 말하는 이 마지막 부분, “‘불멸의 이순신’의 영웅성의 본질은 ‘초월적인 능력’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한계 지워진 인간들이 실패와 아픔의 고통을 겪으면서도 결코 포기하지 않는 실행적 노력, 즉 ‘불멸적인 행동’에 있다.”는 이 부분이 바로 인류를 아픔과 불행에서 건지신 예수님의 영웅성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설명하는 것이 아닐까요?
예수부활사건은 사람을 죽이는 폭력에 대한 항거이며 치명타입니다. 삶을 불구로 만들고 파괴하는 모든 생명파괴를 이기실 하나님의 최후승리에 대한 예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경은 예수님이 그냥 단순히 ‘죽었다’고 말하지 않고, “십자가에 못 박혔다”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십자가에 못 박힌 사람을 다시 살리는 것은 그의 억울한 죽음을 가져온 모든 구조적인 악들, 곧 인류에게 고통과 죽음을 가져다주는 모든 악한 제도에 대한 박격이며, 빛이 어둠을, 질서가 혼돈을, 생명이 죽음을, 하나님의 평화가 인간의 잔인함과 욕심과 포학함을 이긴다는 그 최후의 승리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예수부활사건은 동터오는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웠음을 선포했던 그 예수님의 희망을 그분을 믿고 따르는 제자들이 계속해서 선포하여 주기를 바라는 것이기도 합니다. 부활신앙의 전문가로 알려진 영국의 유명한 신학자 라이트(N. T. Wright)는 말하기를, 예수부활사건이 주는 큰 의미는 하나님께서 새로운 모습의 세계를 이 땅에 이미 출범시킨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부활사건은 우리 기독교인들이 펼쳐야할 생태계보존운동이나 정치적 행동의 기초라는 말도 하였습니다. “부활은 죽음이 정복된다는 표시다”는 말도 하였습니다.
예수부활사건이 주는 의미를 한 마디로 요약한다면, 긍정적인 변화입니다. 부정이 변하여 긍정이 되고, 닫힘이 변하여 열림이 되고, 흑암이 변하여 빛이 되고, 죽음이 변하여 생명이 되는 변화 말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을 믿는 믿음이 주는 기적입니다. 아픔과 상처와 분노와 한으로 넘치던 여러분의 잔이 기쁨과 평화와 감사와 용서로 넘치기를 바랍니다. 흑암과 혼돈과 죽음의 무덤에서 박차고 일어나 기쁨과 희망과 생명이 넘치는 그리스도의 평강을 누리며 사시기를 바랍니다. 부활의 축복이 여러분에게 넘치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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