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말씀: 안식일의 목적(막 2:2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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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말씀: 안식일의 목적(막 2:23-3:5)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에는 인간의 삶을 억압하고 죽임의 일을 하는 것들이 많습니다. 그런 죽임의 일들은 목적과 수단이 뒤바뀔 때 일어나는 경우들이 많습니다. 원래는 수단이었던 것이 나중에 목적이 되어 수단과 목적이 뒤바뀔 때 많이 생깁니다. 한 예로 법은 원래 삶의 질서와 안녕을 위한 수단이지만, 법 그자체가 목적이 될 때 인간의 삶을 억압하는 도구가 되고 맙니다.
전 세계에서 유대교인들만큼 율법에 민감한 사람들도 없을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내리신 613개의 계명을 ‘미츠보트’라고 부릅니다. 이밖에도 랍비들이 만든 ‘게자이라,’ ‘타카나,’ ‘민하그’와 같은 전통들이 있습니다. 이들 랍비들의 전통 법들 가운데 다수를 차지하는 것이 안식일 법입니다. 안식일 법은 광야에서 사용했던 성막 제조과정에서 나타난 39가지 범주의 창조의 일들에서 뽑아낸 수백수천가지의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될 일들’입니다. 시대가 바뀌고 생활이 바뀌면 새로운 생활환경에 따른 새로운 안식일 법들이 만들어집니다. 따라서 안식일 법은 그 숫자를 가름하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안식일 법은 수단이 목적으로 뒤바뀐 대표적 케이스입니다.
신약성경 복음서에는 예수님과 유대인들 사이에서 벌어진 안식일 논쟁이 다수 실려 있습니다. 이들 논쟁들 속에서 나타난 유대인들이 생각하는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들에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습니다.
마가복음 2장 23-28절에서 제자들이 안식일에 밀 이삭을 자른 것은 안식일에 금지된 39가지 범주의 창조행위들 가운데 세 번째 ‘추수하기’나 ‘자르기’(Kotzair) 금지법을 어긴 것입니다. ‘자르기’ 금지법은 땅에서 나서 자라는 것은 무엇이든지 가지나 잎 하나도 뽑거나 잘라서는 안 된다고 명시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배고파 죽을 지경이라면 다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다윗이 자기와 및 함께한 자들이 핍절되어 시장할 때”에 성소에 들어가 “제사장 외에는 먹지 못하는 진설병을 먹고 함께한 자들에게도” 나눠준 사실을 언급하신 것은 생명을 구하는 일이 법보다 우선된다는 법정신을 일깨워 주신 것입니다.
손 마른 사람(막 3:1-5), 고창병자(눅 14:1-6), 눈먼 소경(요 9장), 꼬부라져 펴지 못하는 사람(눅 13:10-17), 38년 된 병자(요 5:1-18) 등을 안식일에 고친 것을 유대인들이 문제 삼았던 것은 안식일에 금지된 39가지 범주의 창조행위들 가운데 스물두 번째 ‘매듭풀기’(Matir) 금지법을 어겼기 때문입니다. 안식일 법에서는 ‘매듭매기’도 금지되지만, ‘매듭풀기’도 금지되고 있습니다. 이 부분을 명확하게 밝혀주고 있는 곳이 누가복음 13장 10-17절입니다. “십 팔년 동안을 귀신들려 앓으며 꼬부라져 조금도 펴지 못하는 한 여인”을 고치시고 나서, 분을 내며 책망하는 회당장에게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외식하는 자들아, 너희가 각각 안식일에 자기의 소나 나귀나 마구에서 풀어내어 이끌고 가서 물을 먹이지 아니하느냐? 그러면 십 팔년 동안 사단에게 매인 바 된 이 아브라함의 딸을 안식일에 이 매임에서 푸는 것이 합당치 아니하냐?” 이 말씀에서 보듯이 유대인에게는 안식일에 매인 것을 푸는 것이 금지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안식일에 마구에 묶어둔 소나 나귀를 풀어내어 이끌고 가서 물을 먹인다는 것입니다. 하물며 오랜 세월 질병에 시달리며 사단에게 매여 살아온 사람들을 안식일에 풀어주는 것이 합당치 아니하냐는 것입니다.
안식일 법에는 위급상황에서 생명을 구하는 일을 안식일 법보다 상위에 두고 있어서 생명을 구하기 위해서는 안식일 법을 어길 수 있도록 하고 있습니다. 안식일에 우물에 빠진 사람이나 짐승을 구해내는 것, 짐승에게 먹이와 물을 주는 것 등은 안식일 법을 지키는 것보다 우선되기 때문에 안식일에 우물에 빠진 사람이나 짐승을 구해내는 것, 안식일에 마구에 묶인 짐승을 풀어내어 이끌고 가서 물을 먹이는 것 등이 허용되었던 것입니다.
요한복음 5장 1-18절에서 38년 된 병자가 고침을 받고 일어나 자기 짐을 챙겨들고 그곳을 떠나간 것은 안식일에 금지된 39가지 범주의 창조행위들 가운데 서른아홉 번째 ‘운반하기’(Hotza'ah) 금지법을 어긴 것입니다. ‘운반하기’ 금지법은 개인영역에서 공공영역으로 혹은 그 반대 방향으로 물건 옮기기, 운반하기, 던지기, 밀기 등을 금합니다. 공공영역의 한 장소에서 대략 2미터 이상 물건을 운반할 수 없게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유대인의 안식일 법을 문제 삼으신 것은 목적과 수단이 뒤바꿨기 때문입니다. 안식일은 쉼을 위한 수단이지 목적이 아닙니다. 안식일의 목적은 인간과 피조물의 쉼과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에 있습니다. 쉼의 참된 의미는 매인 것에서 풀려나는 것입니다. 업무의 과중에서 풀려나는 것이고, 시간의 매임에서 풀려나는 것이며, 육체의 고달픔에서 풀려나는 것이고, 정신의 매임에서 풀려나는 것이며, 영혼의 매임에서 풀려나는 것입니다. 안식일은 사람을 살리기 위한 것입니다. 그래서 안식일의 참된 의미는 살림의 일에 있습니다. 손 마른 것을 고쳐주고, 꼬부라진 것을 펴주고, 소경의 눈을 뜨게 해주고, 38년 동안 누워 있던 자를 일으켜 세워주는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안식일은 사람을 위해 있는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점에서 살림의 일을 하는 자가 진정으로 안식일의 주인이 됩니다. 예수님은 이 점을 간파하시고 말씀하셨습니다. “안식일은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니, 이러므로 인자는 안식일에도 주인이니라.”
바리새인들, 서기관들, 율법사들은 이런 점들을 간파하지 못한 채 안식일의 노예가 되어 안식일을 위한 안식일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사람이 목적이 아니라, 안식일이 목적이었습니다. 자기들만 안식일 법의 노예가 되는 것이 아니라, 무지하고 병들고 가난한 백성들까지 안식일 법의 노예로 삼았습니다. 안식일 법은 병들고 가난한 자들을 억압하는 수단으로 쓰이고 있었습니다. 안식일에 병 고치는 자와 고침 받은 자들을 책망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 같은 자들을 긍휼히 여겨서 도와주려고하기보다는 오히려 죄인으로 간주하여 무시하였습니다. 그 같은 자들을 부축해주고 살려줘야 하는 데 오히려 그들이 당하는 질병의 고통과 가난의 시련을 죄 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은 다른 유대인들이 하는 것처럼 율법의 문자적 해석이나 랍비들이 만든 구전법에 얽매이기보다는 율법의 정신에 따라 생활하셨습니다. 법 이전에 사랑과 살림의 일을 실천하셨습니다. 바리새인들의 문제는 안식일을 잘 지키지 않는다든지, 십일조나 금식기도를 잘 하지 않는다든지 하는 그런 것들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런 것들은 남보다 뛰어났습니다. 그들의 문제는 다른 사람에 대한 배려, 관심, 긍휼과 같은 사랑의 행위와 살림의 일은 없고, 죽임과 매임의 일뿐이었다는 점입니다. 따라서 바리새인들의 율법적인 행위들은 진정한 의미에서 정의로운 행위들이 아니었습니다. 병들고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을 도와서 살리기보다는 오히려 숨통을 조여 죽이는 행위들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안식일에 “아무 일도 하지 말라”고 하셨는데, 여기서의 ‘일’을 유대인들이 ‘창조행위’로 본 것이 문제였습니다. 창조행위는 하나님의 일입니다. 창세기 1장에 나타난 하나님의 창조행위에는 세 가지 범주의 일들이 있습니다. 어둠이 빛이 되게 하는 것, 혼돈이 질서가 되게 하는 것, 죽음이 생명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안식일에 “아무 일도 하지 말라”고 하신 것이 과연 이 세 가지 범주의 일을 하지 말라고 하셨는가라는 물음을 던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대답은 “그렇지 않다”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세 가지 범주의 창조행위를 안식일에 더욱 적극적으로 해야 할 살림의 일로 보셨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유대인들이 성막건축과 관련된 39가지의 일을 창조행위의 39가지 범주로 보고, 이것들을 안식일에 하지 말아야할 일들의 범주로 확대 해석한 것을 비난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안식일에 “아무 일도 하지 말라”고 하신 말씀에서의 ‘일’은 하나님의 일, 곧 세 가지 범주의 창조행위가 아니라, 인간들의 일, 곧 죽임의 일을 말한다고 봅니다. 빛의 일보다는 어둠의 일, 질서의 일보다는 혼돈의 일, 생명의 일보다는 죽임의 일들을 일삼는 것이 인간들의 일입니다. 이런 일들을 안식일 하루만이라도 멈추고 하나님께 예배하며 그분의 살림의 일을 묵상하고 본받으라는 것이 안식일에 “아무 일도 하지 말라”는 하나님의 계명의 참 뜻이라고 예수님은 우리에게 암시하셨습니다. 이 부분이 가장 잘 드러난 장면이 마태복음 12장 9-13절과 마가복음 3장 1-5절입니다.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갔을 때, 거기 말라버린 한 쪽 손을 가진 사람이 있었습니다. 마태복음 12장에서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함정에 빠뜨리려고 물었습니다. “안식일에 병을 고치는 것이 옳습니까?” 예수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너희 중에 어떤 사람에게 양이 한 마리 있는데, 그 양이 안식일에 구덩이에 빠졌으면 구해 내지 않겠느냐? 사람이 양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 그러므로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이 옳으니라.” 마가복음 3장 4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 그리고는 그 사람의 손을 고쳐주셨습니다.
사람을 살리는 것이 창조행위라면 그 창조행위는 안식일에 “아무 일도 하지 말라”는 계명을 어기는 것이 아니란 것입니다. 그러나 그 반대로 살림의 일을 비난하고 질타하는 유대인들이야말로 참된 안식일의 의미를 왜곡하는 자들이었습니다. 안식일 법에는 위급상황에서 생명을 구하는 일을 안식일 법보다 상위에 두고 있어서 생명을 구하기 위해서는 안식일 법을 어길 수 있도록 하고 있었습니다. 안식일에 우물에 빠진 사람이나 짐승을 구해내는 것, 짐승에게 먹이와 물을 주는 것 등은 안식일 법을 지키는 것보다 우선되기 때문에 안식일에 우물에 빠진 사람이나 짐승을 구해내는 것, 안식일에 마구에 묶인 짐승을 풀어내어 이끌고 가서 물을 먹이는 것 등이 허용되었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대인들이 예수님의 살림의 일을 비난하고 질타한 것은 사람을 위한 안식일의 목적이 변질되어 억압의 수단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서 있는 것처럼 왜곡된 까닭이었습니다. 안식일의 목적은 업무의 과중에서 풀려나는 것이고, 시간의 매임에서 풀려나는 것이며, 육체의 고달픔에서 풀려나는 것이고, 정신의 매임에서 풀려나는 것이며, 영혼의 매임에서 풀려나는 것입니다. 안식일은 사람을 살리기 위한 것입니다. 그래서 안식일의 참된 의미는 살림의 일에 있습니다. 한 믿음 안에서 교우들이 모여 하나님께 예배드림으로써 하나님과의 관계를 개선하고, 교우들과 친교하며, 온 가족이 모여 쉼으로써 끈끈한 가족관계를 살리는 살림의 일에 있습니다.
안식일을 잘 지키는 것은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창조의 일을 본받고, 살림의 일을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5장 19절에서 말씀하시기를, “아들이 아버지의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은 21절에 의하면, “죽은 자들을 일으켜 살리시는 것”입니다. 이 죽은 자를 살리는 일을 아들 예수님도 하신다는 것입니다. 이 일을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것을 보고 배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한 주간 세상에 살면서 세상의 일, 죽임의 일들을 많이 했습니다. 일주일 가운데 단 하루만이라도 하나님 앞에 나와서 예배하고 하나님의 일, 복음의 일, 살림의 일을 행하기도 하고 묵상하고 반성하면서 마음의 평화와 위로를 얻는 것이 안식일의 목적입니다. 빛의 일, 생명의 일, 복음의 일은 적극적으로 행하고, 어둠의 일, 죽임의 일, 세상의 일은 멈추는 것이 안식일을 거룩히 지키는 일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에는 인간의 삶을 억압하고 죽임의 일을 하는 것들이 많습니다. 그런 죽임의 일들은 목적과 수단이 뒤바뀔 때 일어나는 경우들이 많습니다. 원래는 수단이었던 것이 나중에 목적이 되어 수단과 목적이 뒤바뀔 때 많이 생깁니다. 한 예로 법은 원래 삶의 질서와 안녕을 위한 수단이지만, 법 그자체가 목적이 될 때 인간의 삶을 억압하는 도구가 되고 맙니다.
전 세계에서 유대교인들만큼 율법에 민감한 사람들도 없을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내리신 613개의 계명을 ‘미츠보트’라고 부릅니다. 이밖에도 랍비들이 만든 ‘게자이라,’ ‘타카나,’ ‘민하그’와 같은 전통들이 있습니다. 이들 랍비들의 전통 법들 가운데 다수를 차지하는 것이 안식일 법입니다. 안식일 법은 광야에서 사용했던 성막 제조과정에서 나타난 39가지 범주의 창조의 일들에서 뽑아낸 수백수천가지의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될 일들’입니다. 시대가 바뀌고 생활이 바뀌면 새로운 생활환경에 따른 새로운 안식일 법들이 만들어집니다. 따라서 안식일 법은 그 숫자를 가름하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안식일 법은 수단이 목적으로 뒤바뀐 대표적 케이스입니다.
신약성경 복음서에는 예수님과 유대인들 사이에서 벌어진 안식일 논쟁이 다수 실려 있습니다. 이들 논쟁들 속에서 나타난 유대인들이 생각하는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들에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습니다.
마가복음 2장 23-28절에서 제자들이 안식일에 밀 이삭을 자른 것은 안식일에 금지된 39가지 범주의 창조행위들 가운데 세 번째 ‘추수하기’나 ‘자르기’(Kotzair) 금지법을 어긴 것입니다. ‘자르기’ 금지법은 땅에서 나서 자라는 것은 무엇이든지 가지나 잎 하나도 뽑거나 잘라서는 안 된다고 명시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배고파 죽을 지경이라면 다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다윗이 자기와 및 함께한 자들이 핍절되어 시장할 때”에 성소에 들어가 “제사장 외에는 먹지 못하는 진설병을 먹고 함께한 자들에게도” 나눠준 사실을 언급하신 것은 생명을 구하는 일이 법보다 우선된다는 법정신을 일깨워 주신 것입니다.
손 마른 사람(막 3:1-5), 고창병자(눅 14:1-6), 눈먼 소경(요 9장), 꼬부라져 펴지 못하는 사람(눅 13:10-17), 38년 된 병자(요 5:1-18) 등을 안식일에 고친 것을 유대인들이 문제 삼았던 것은 안식일에 금지된 39가지 범주의 창조행위들 가운데 스물두 번째 ‘매듭풀기’(Matir) 금지법을 어겼기 때문입니다. 안식일 법에서는 ‘매듭매기’도 금지되지만, ‘매듭풀기’도 금지되고 있습니다. 이 부분을 명확하게 밝혀주고 있는 곳이 누가복음 13장 10-17절입니다. “십 팔년 동안을 귀신들려 앓으며 꼬부라져 조금도 펴지 못하는 한 여인”을 고치시고 나서, 분을 내며 책망하는 회당장에게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외식하는 자들아, 너희가 각각 안식일에 자기의 소나 나귀나 마구에서 풀어내어 이끌고 가서 물을 먹이지 아니하느냐? 그러면 십 팔년 동안 사단에게 매인 바 된 이 아브라함의 딸을 안식일에 이 매임에서 푸는 것이 합당치 아니하냐?” 이 말씀에서 보듯이 유대인에게는 안식일에 매인 것을 푸는 것이 금지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안식일에 마구에 묶어둔 소나 나귀를 풀어내어 이끌고 가서 물을 먹인다는 것입니다. 하물며 오랜 세월 질병에 시달리며 사단에게 매여 살아온 사람들을 안식일에 풀어주는 것이 합당치 아니하냐는 것입니다.
안식일 법에는 위급상황에서 생명을 구하는 일을 안식일 법보다 상위에 두고 있어서 생명을 구하기 위해서는 안식일 법을 어길 수 있도록 하고 있습니다. 안식일에 우물에 빠진 사람이나 짐승을 구해내는 것, 짐승에게 먹이와 물을 주는 것 등은 안식일 법을 지키는 것보다 우선되기 때문에 안식일에 우물에 빠진 사람이나 짐승을 구해내는 것, 안식일에 마구에 묶인 짐승을 풀어내어 이끌고 가서 물을 먹이는 것 등이 허용되었던 것입니다.
요한복음 5장 1-18절에서 38년 된 병자가 고침을 받고 일어나 자기 짐을 챙겨들고 그곳을 떠나간 것은 안식일에 금지된 39가지 범주의 창조행위들 가운데 서른아홉 번째 ‘운반하기’(Hotza'ah) 금지법을 어긴 것입니다. ‘운반하기’ 금지법은 개인영역에서 공공영역으로 혹은 그 반대 방향으로 물건 옮기기, 운반하기, 던지기, 밀기 등을 금합니다. 공공영역의 한 장소에서 대략 2미터 이상 물건을 운반할 수 없게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유대인의 안식일 법을 문제 삼으신 것은 목적과 수단이 뒤바꿨기 때문입니다. 안식일은 쉼을 위한 수단이지 목적이 아닙니다. 안식일의 목적은 인간과 피조물의 쉼과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에 있습니다. 쉼의 참된 의미는 매인 것에서 풀려나는 것입니다. 업무의 과중에서 풀려나는 것이고, 시간의 매임에서 풀려나는 것이며, 육체의 고달픔에서 풀려나는 것이고, 정신의 매임에서 풀려나는 것이며, 영혼의 매임에서 풀려나는 것입니다. 안식일은 사람을 살리기 위한 것입니다. 그래서 안식일의 참된 의미는 살림의 일에 있습니다. 손 마른 것을 고쳐주고, 꼬부라진 것을 펴주고, 소경의 눈을 뜨게 해주고, 38년 동안 누워 있던 자를 일으켜 세워주는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안식일은 사람을 위해 있는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점에서 살림의 일을 하는 자가 진정으로 안식일의 주인이 됩니다. 예수님은 이 점을 간파하시고 말씀하셨습니다. “안식일은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니, 이러므로 인자는 안식일에도 주인이니라.”
바리새인들, 서기관들, 율법사들은 이런 점들을 간파하지 못한 채 안식일의 노예가 되어 안식일을 위한 안식일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사람이 목적이 아니라, 안식일이 목적이었습니다. 자기들만 안식일 법의 노예가 되는 것이 아니라, 무지하고 병들고 가난한 백성들까지 안식일 법의 노예로 삼았습니다. 안식일 법은 병들고 가난한 자들을 억압하는 수단으로 쓰이고 있었습니다. 안식일에 병 고치는 자와 고침 받은 자들을 책망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 같은 자들을 긍휼히 여겨서 도와주려고하기보다는 오히려 죄인으로 간주하여 무시하였습니다. 그 같은 자들을 부축해주고 살려줘야 하는 데 오히려 그들이 당하는 질병의 고통과 가난의 시련을 죄 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은 다른 유대인들이 하는 것처럼 율법의 문자적 해석이나 랍비들이 만든 구전법에 얽매이기보다는 율법의 정신에 따라 생활하셨습니다. 법 이전에 사랑과 살림의 일을 실천하셨습니다. 바리새인들의 문제는 안식일을 잘 지키지 않는다든지, 십일조나 금식기도를 잘 하지 않는다든지 하는 그런 것들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런 것들은 남보다 뛰어났습니다. 그들의 문제는 다른 사람에 대한 배려, 관심, 긍휼과 같은 사랑의 행위와 살림의 일은 없고, 죽임과 매임의 일뿐이었다는 점입니다. 따라서 바리새인들의 율법적인 행위들은 진정한 의미에서 정의로운 행위들이 아니었습니다. 병들고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을 도와서 살리기보다는 오히려 숨통을 조여 죽이는 행위들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안식일에 “아무 일도 하지 말라”고 하셨는데, 여기서의 ‘일’을 유대인들이 ‘창조행위’로 본 것이 문제였습니다. 창조행위는 하나님의 일입니다. 창세기 1장에 나타난 하나님의 창조행위에는 세 가지 범주의 일들이 있습니다. 어둠이 빛이 되게 하는 것, 혼돈이 질서가 되게 하는 것, 죽음이 생명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안식일에 “아무 일도 하지 말라”고 하신 것이 과연 이 세 가지 범주의 일을 하지 말라고 하셨는가라는 물음을 던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대답은 “그렇지 않다”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세 가지 범주의 창조행위를 안식일에 더욱 적극적으로 해야 할 살림의 일로 보셨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유대인들이 성막건축과 관련된 39가지의 일을 창조행위의 39가지 범주로 보고, 이것들을 안식일에 하지 말아야할 일들의 범주로 확대 해석한 것을 비난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안식일에 “아무 일도 하지 말라”고 하신 말씀에서의 ‘일’은 하나님의 일, 곧 세 가지 범주의 창조행위가 아니라, 인간들의 일, 곧 죽임의 일을 말한다고 봅니다. 빛의 일보다는 어둠의 일, 질서의 일보다는 혼돈의 일, 생명의 일보다는 죽임의 일들을 일삼는 것이 인간들의 일입니다. 이런 일들을 안식일 하루만이라도 멈추고 하나님께 예배하며 그분의 살림의 일을 묵상하고 본받으라는 것이 안식일에 “아무 일도 하지 말라”는 하나님의 계명의 참 뜻이라고 예수님은 우리에게 암시하셨습니다. 이 부분이 가장 잘 드러난 장면이 마태복음 12장 9-13절과 마가복음 3장 1-5절입니다.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갔을 때, 거기 말라버린 한 쪽 손을 가진 사람이 있었습니다. 마태복음 12장에서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함정에 빠뜨리려고 물었습니다. “안식일에 병을 고치는 것이 옳습니까?” 예수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너희 중에 어떤 사람에게 양이 한 마리 있는데, 그 양이 안식일에 구덩이에 빠졌으면 구해 내지 않겠느냐? 사람이 양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 그러므로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이 옳으니라.” 마가복음 3장 4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 그리고는 그 사람의 손을 고쳐주셨습니다.
사람을 살리는 것이 창조행위라면 그 창조행위는 안식일에 “아무 일도 하지 말라”는 계명을 어기는 것이 아니란 것입니다. 그러나 그 반대로 살림의 일을 비난하고 질타하는 유대인들이야말로 참된 안식일의 의미를 왜곡하는 자들이었습니다. 안식일 법에는 위급상황에서 생명을 구하는 일을 안식일 법보다 상위에 두고 있어서 생명을 구하기 위해서는 안식일 법을 어길 수 있도록 하고 있었습니다. 안식일에 우물에 빠진 사람이나 짐승을 구해내는 것, 짐승에게 먹이와 물을 주는 것 등은 안식일 법을 지키는 것보다 우선되기 때문에 안식일에 우물에 빠진 사람이나 짐승을 구해내는 것, 안식일에 마구에 묶인 짐승을 풀어내어 이끌고 가서 물을 먹이는 것 등이 허용되었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대인들이 예수님의 살림의 일을 비난하고 질타한 것은 사람을 위한 안식일의 목적이 변질되어 억압의 수단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서 있는 것처럼 왜곡된 까닭이었습니다. 안식일의 목적은 업무의 과중에서 풀려나는 것이고, 시간의 매임에서 풀려나는 것이며, 육체의 고달픔에서 풀려나는 것이고, 정신의 매임에서 풀려나는 것이며, 영혼의 매임에서 풀려나는 것입니다. 안식일은 사람을 살리기 위한 것입니다. 그래서 안식일의 참된 의미는 살림의 일에 있습니다. 한 믿음 안에서 교우들이 모여 하나님께 예배드림으로써 하나님과의 관계를 개선하고, 교우들과 친교하며, 온 가족이 모여 쉼으로써 끈끈한 가족관계를 살리는 살림의 일에 있습니다.
안식일을 잘 지키는 것은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창조의 일을 본받고, 살림의 일을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5장 19절에서 말씀하시기를, “아들이 아버지의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은 21절에 의하면, “죽은 자들을 일으켜 살리시는 것”입니다. 이 죽은 자를 살리는 일을 아들 예수님도 하신다는 것입니다. 이 일을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것을 보고 배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한 주간 세상에 살면서 세상의 일, 죽임의 일들을 많이 했습니다. 일주일 가운데 단 하루만이라도 하나님 앞에 나와서 예배하고 하나님의 일, 복음의 일, 살림의 일을 행하기도 하고 묵상하고 반성하면서 마음의 평화와 위로를 얻는 것이 안식일의 목적입니다. 빛의 일, 생명의 일, 복음의 일은 적극적으로 행하고, 어둠의 일, 죽임의 일, 세상의 일은 멈추는 것이 안식일을 거룩히 지키는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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