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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말씀: 형제를 용서하라(마 18:2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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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동호
댓글 0 조회 15,443 2007.01.26 23:26

본문

예수님의 말씀: 형제를 용서하라(마 18:21-35)

작가 박완서의 묵상집, 󰡔옳고도 아름다운 당신󰡕에 보면, 이런 글이 있습니다.
신자가 아닌 이들이 기독교에 대해 잘못 알고 있는 것 중 가장 흔한 오해는 아마 용서와 회개에 대해서가 아닌가 싶다. 교인이기 때문에 더 착하게 살겠지, 혹은 더 정직하려니 하고 신뢰해주는 경우보다는 저들은 아무리 나쁜 짓을 해도 회개하면 용서받을 수 있을 테니까 옳지 못한 짓을 예사로 할 거라고 여기는 경우가 더 많다. 심지어는 예수쟁이는 용서받을 수 있다는 전제하에 나쁜 짓을 밥 먹듯이 할 수도 있는 사람이라고 비웃는 이까지 있다...... 그러나 그 말씀을 한번만 더 새겨들으면 우리더러 무진장 용서해주라고 하셨지, 우리를 무진장 용서해주겠다는 말씀은 결코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가 과연 이웃을 한 번도 아니고 무진장 용서할 수 있는가?
박완서는 본문 마태복음 18장 21-35절을 무진장 용서받을 수 있다는 뜻으로 오해하지 말고, 무진장 용서해주라는 주님의 뜻을 힘써 실천하는 사람이 되자는 뜻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톨스토이는 “악마의 일은 아름답고 신의 일은 까다롭다”란 글에서 형제의 과실을 용서하는 것은 사단의 계략을 무너뜨리는 일이라고 믿었습니다. 대략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옛날에 아주 착한 주인이 있었는데, 재산도 많고 종들도 많았습니다. 종들은 주인을 매우 존경했고, 순종했습니다. 그런데 마귀는 주인의 착한 성품과 종들의 순종적인 태도를 못마땅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마귀는 아레예프라는 종을 조종해서 주인을 화나게 만들고 종들에게 주인에 대한 나쁜 인상을 심으려고 했습니다. 마치 마귀가 하나님의 면전에 섰을 때, 하나님께서 욥같이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가 세상에 없다”(욥 1:8)고 칭찬하자, 마귀가 하나님께 말하기를, “욥이, 아무것도 바라는 것이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겠습니까? 주께서, 그와 그의 집과 그가 가진 모든 것을 울타리로 감싸 주시고, 그가 하는 일이면 무엇에나 복을 주셔서, 그의 소유를 온 땅에 넘치게 하지 않으셨습니까? 이제라도 주께서 손을 드셔서, 그가 가진 모든 것을 치시면, 그는 주님 앞에서 주님을 저주할 것입니다.”(욥 1:9-11)라고 했듯이, 아레예프는 다른 종들을 꼬드겼습니다. “고분고분하고, 일 잘하고, 매사에 주인의 마음에 들게 하니까 잘해 주는 것이지, 뭔가를 수틀리게 하고, 화를 나게 해보라고. 그러면 세상에서 가장 나쁜 주인보다 더 가혹하게 보복할 테니까 말이야.”
아레예프는 가장 좋은 양들을 맡아 돌보는 목동이었는데, 주인은 양을 사려고 찾아온 손님들에게 가장 좋은 숫양을 한 마리 보여주고 싶어 했습니다. 그러자 아레예프는 실수를 가장한 고의로, 손님들 앞에서 주인을 화나게 만들려고, 숫양을 붙잡아 두 다리를 차례로 나뭇가지 꺾듯이 부러뜨리고 말았습니다. 이를 지켜본 마귀는 너무나 좋아했고, 주인은 흙빛이 되어 한동안 말을 하지 못했습니다. 이것을 숨어서 지켜보던 종들과 손님들은 숨을 죽이고, 주인이 어떻게 나올지를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이윽고 주인은 무언가를 털어 버리려는 듯이 몸을 털더니, 고개를 들고는 잠깐 동안 하늘을 뚫어져라 보았습니다. 그리고는 만면에 웃음을 띠면서 아레예프에게 말했습니다. “아레예프, 자네 주인이 나를 화나게 만들라고 했구먼. 그런데 말이야. 나의 주인은 자네 주인보다 훨씬 강하다네. 자네는 나를 화나게 할 수 없었지만, 나는 자네 주인을 화나게 만들어 보이겠네. 자네는 나에게 벌을 받기보다는 오히려 하루 속히 종의 신분에서 벗어나고 싶겠지. 그렇지 않은가, 아레예프? 그래서 말인데, 나는 자네에게 벌을 주지 않겠네. 오히려 이참에 손님들이 보는 앞에서 자네를 자유인이 되게 해 주겠네. 축제 때 입을 새 옷을 가지고 자네가 원하는 대로 어서 떠나게.” 주인은 악한 종을 벌하지 않고, 용서했을 뿐 아니라, 오히려 선물을 주어 종의 신분을 벗게 해주었습니다. 마귀는 이를 갈면서 억울해 하다가 숨어서 지켜보던 나무 위에서 굴러 떨어져 땅 속을 쑤시고 들어가 버렸다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에게 마귀의 일은 아름답고 하나님의 일은 까다롭게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살림의 일은 마귀의 죽임의 일을 멈추게 할 가장 강력한 무기입니다. 포용과 용서는 살림의 일이며 하나님의 일입니다. 마귀가 가장 싫어하는 일입니다. 그래서 마귀를 물리치는 가장 훌륭한 전략이 용서하는 일입니다. 
주기도문 가운데,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마 6:12)는 “그리고 우리가 우리에게 빚진 자들을 용서한 것과 같이 당신은 우리의 죄들을 우리에게 용서하옵소서.”란 뜻입니다. 여기서 ‘죄’는 경제적인 채무를 뜻합니다. 죄를 하나님께 진 빚으로 이해한 것이고, 그런 이해를 바탕으로 본문 마태복음 18장 21-35절의 ‘불의한 종의 비유’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주기도문에서 용서는 ‘일용할 양식과 같이 날마다의 삶을 위한 필수조건입니다. 하나님은 죄가 없으신 분이기 때문에 죄사함 없이 하나님과 진정한 관계를 맺을 수 없습니다. 또 하나님께 죄사함을 구하기 전에 먼저 형제의 죄를 용서하는 아량을 보여야 합니다. “이웃의 잘못을 용서하는 자가 용서를 받을 것이요, 자비를 베풀지 않는 자는 하나님의 용서를 기원할 수 없다”고 유대교 문서 시락서 28장 2-4절은 말하고 있습니다. 또 “대 속죄일은 하나님을 거슬린 죄를 속하지만, 피해자의 용서가 보장되지 않는 한 동료 인간을 거슬린 죄는 용서받지 못한다”고 탈무드 요마(Talmud Yoma) 8장 9절은 말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유대인들은 대속죄일 때 하나님께 죄사함 받기 위해서 먼저 이웃의 죄를 용서하는 관례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면, 너희 천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시려니와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고 마태복음 6장 14-15절에서 말씀하셨습니다. 바울은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고 에베소서 4장 32절에서 권면하셨습니다. 이와 같이 형제를 용서하는 일은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는 신앙인의 기본자세입니다.
마태복음 18장 21-35절에서 ‘용서하다’는 의미는 무언가를 떠나보내는 개념으로써 ‘죄나 징계로부터 풀어주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용서’란 것은 형제가 저지른 죄나 잘못을 ‘떠나보내 주는’ 혹은 ‘없애 주는’ 태도 혹은 자세를 말합니다.
베드로는 형제를 용서해 주는 횟수를 일곱 번으로 제한했습니다. 이 일곱 번은 당시 유대교의 관습에 비하면 매우 관대한 것이었습니다. 당시 랍비들은 “사람이 죄를 범하면 한 번, 두 번, 세 번 용서하고, 네 번째는 용서하지 말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베드로가 제시한 용서의 횟수 일곱 번은 매우 관대한 것이었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드로는 용서해 주는 횟수에만 관심했지, 형제를 잃어버린 양처럼 찾아야할 소중한 가치란 것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잃어버린 형제를 얻기 위한 것이라면 횟수가 문제될 것이 없다는 것이 예수님의 신념이었습니다. 용서 자체도 중요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형제의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입니다. 부모는 자식을 사랑하기 때문에 자식의 잘못을 용서하고, 용서하고, 또 용서합니다.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잘못을 범한 형제에 대한 깊은 관심과 사랑을 베풀라는 말씀이었던 것입니다. 관심과 사랑이 없는 용서는 어쩌면 잘못을 용인하고 방임하는 것일는지 모릅니다. 그런 실수를 우리 모두는 범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께 몇 번이나 용서해 주면 족하겠는가고 물었을 때, 예수님은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시면서 비유를 들어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사람이 임금에게 일만 달란트를 빚졌는데, 갚을 길이 없는 것을 알고 그 많은 빚을 무상으로 탕감해주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자기에게 일백 데나리온을 빚진 동료를 붙잡아 빚을 다 갚을 때까지 옥에 가두려고 했다는 것입니다. 임금에게 탕감 받은 것의 60만분의 일밖에 되지 않는 작은 빚이었습니다. 그래서 임금은 그를 불러다가 말하기를,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관을 불쌍히 여김이 마땅치 아니하냐?’ 하고, 주인이 노하여 그 빚을 다 갚도록 저를 옥졸들에게 붙이니라. 너희가 각각 중심으로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내 천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마 18:21-35)고 하셨다는 것입니다.
이 비유에서 임금은 하나님을, 동관은 형제를 말합니다. 임금으로부터 빚을 탕감 받은 사람은 우리 신앙인들입니다. 일만 달란트는 신앙인들의 목숨 값을 입니다. 노동자 하루 품삯을 6만원으로 계산했을 때, 일만 달란트는 3조 6,000억 원이나 되는 어마어마한 액수입니다. 개인으로써는 도저히 갚을 수 없는 큰돈입니다. 그러나 100데나리온은 600만 원에 불과한 돈입니다. 자기 목숨에 해당되는 큰 죄를 사함 받고서도 형제의 작은 죄나 실수를 용서하지 못한다면, 아직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았다고 말할 수 없는 사람입니다.
이 비유는 기독교 복음이 갖는 은혜의 특성을 잘 보여줍니다. 형제의 실수나 잘못을 용서해야 하는 이유는 나의 죄를 용서받거나 나의 죄로부터 구원받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이미 용서받았고, 구원받았기 때문에, 그것도 아주 큰 죄로부터 사함 받았기 때문에 감사의 표시로 형제들의 작은 실수나 잘못들을 용서하라는 것입니다. 비유에 등장하는 주인공은 임금의 큰 은혜를 입고도 감사할 줄 몰랐습니다. 그가 하나님께 받은 은혜에 감사한 마음을 가졌다면, 동료에게 베풀어야할 작은 사랑을 거절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또 이 비유는 용서의 근원이 하나님께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천지대군이신 하나님은 용서의 주님이십니다. 인간들의 죄를 용서하시되, 당신께서 인간의 죗값을 친히 담당하신 분이십니다. 누가 과연 남의 죗값을 짊어지고 스스로 감당하려고 하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간을 용서하시고 구원하시기 위해서 우리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또한 자기를 저주하고 희롱하고 때리며 십자가에 못 박는 자들을 용서하시고 그들을 위해서 기도하셨습니다.
또 이 비유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우리도 이웃의 형제들을 불쌍히 여김이 마땅하다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큰 죄를 사함 받고도 중심으로 형제를 용서하지 않는다면, 하나님께서도 우리의 죄를 용서치 않으시겠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 4장 32절에서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고 하셨고, 예수님은 누가복음 6장 27-28절에서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미워하는 자를 선대하며, 너희를 저주하는 자를 위하여 축복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사랑과 용서의 주님이십니다. 우리가 몸담고 있는 기독교는 사랑과 용서를 가르치는 종교입니다. 2006년 2월 19일, KBS1TV 일요스페셜에서 방영한 다큐프로 “당신을 용서합니다.”에 소개된 분들, 곧 용서할 수 없는 절박한 상황에서 용서를 실천하고 있는 분들이 있었는데, 그분들이 다 기독교인들임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서울시 구기동에 사는 고정원씨는 가톨릭신자로서 2005년 10월 9일에 연쇄살인범 유영철에게 어머니와 아내와 삼대독자를 잃었고, 자신을 나락으로 떨어뜨렸던 유영철을 용서하고 있었습니다. 고정원씨는 “진정한 용서는 나 자신을 위한 것입니다. 미워할 수밖에 없는 사람일지라도 그에게 동정과 사랑을 베풀면 기쁨을 느낍니다.”라고 했습니다.
당시 67세였던 안중보씨는 개신교 장로로서 학교에서 야간 근무를 하면서 한 달 60만원의 수입으로 근근이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그가 처음부터 돈이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윤택하게 살 수 있었는데도, 당시 9년 전 절친했던 집사이자 10살 아래인 사업가 이준형씨에게 1억5천만 원을 빌려주고 되돌려 받지를 못했기 때문입니다. 이준형씨는 사업이 잘되지 않아 끝내 부도를 내고 말았고, 돈을 빌려간 이후로 단 한 번도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안중보씨는 그를 용서하고 있었습니다. 안중보씨는 “서로 원수지고 살기보다는 피해를 본 내가 먼저 용서 해주고, 분노를 풀어야 마음 편하고 행복하게 살 수 있습니다.”라고 했습니다.
용서의 중요성이 알려지면서 최근에 용서프로젝트를 시행하는 곳이 많다고 합니다. 프로그램에 참가한 사람들 가운데는 용서를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격해진 감정을 누그러뜨릴 수 있다고 말합니다. 용서를 생활화하면 사람에 대한 부정적인 감정을 긍정적인 감정으로 바꿀 수가 있고, 자기 자신에 대해 자신감과 자존감을 갖게 된다고 합니다. 이 말은 자신감과 자존감이 강한 사람일수록 남의 잘못을 쉽게 용서할 수 있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분노와 화는 우리의 몸과 마음을 망가뜨립니다. 그런데 분노를 해결하는 것은 오로지 용서뿐이라는 것이 분노와 화가 건강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서 연구하는 의학자들의 결론입니다. 용서는 기억을 잊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기억을 하면서도 마음을 놓아버리는 것이라고 합니다. 무엇보다도 용서는 사단의 계략을 무너뜨리는 일입니다. 사단은 용서하지 못하게 함으로써 피해를 입힌 사람뿐 아니라, 피해를 당한 사람까지도 파멸로 몰아갑니다. 용서는 사단의 죽임의 일을 멈추게 할 가장 강력한 무기입니다. 용서는 살림의 일이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입니다. 용서는 마귀가 가장 싫어하는 일입니다. 그래서 용서는 마귀를 물리칠 가장 훌륭한 전략입니다. 용서는 성령님의 위로를 풍성케 할 것입니다. 또 성령님의 위로를 받아 진행하시면 금년 한 해가 형통케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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