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말씀: 때가 찼고(막 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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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말씀: 때가 찼고(막 1:15)
예수님의 말씀 시리즈를 시작하면서 제일 먼저 말씀드렸던 것이 ‘때가 찼고’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여기서 ‘때’란 하나님의 경륜의 때를 말합니다.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약속하신 구원의 때를 말합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이때를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는” 때,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잡힌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전파하며, 여호와의 은혜의 해와 우리 하나님의 신원의 날을 전파하여 모든 슬픈 자를 위로 하는”(사 61:1-2) 때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이 일을 이루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이 일, 곧 인류구원을 위한 때가 찼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출생 후 대략 31살 경에 예언자의 일을 시작하셨는데, 그 첫 일성이 ‘회개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메시아를 맞을 준비를 하라,’ ‘기름을 준비하라,’ ‘새 술을 담을 새 부대를 준비하라,’ ‘고정관념을 바꾸라,’ ‘패러다임을 바꾸라,’ ‘묵은 누룩을 제거하라,’ ‘묵은 가치관과 세계관을 바꾸라,’ ‘역사관을 바르게 정립하라’는 뜻이었습니다. 물론 과거의 잘못을 뉘우치고 고친다는 뜻도 있습니다. 자기 잘못을 뉘우치지 않고서는 메시아를 맞을 수 없고, 새 시대를 맞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성탄절의 진정한 의미는 자신을 돌아보고 묵은 누룩을 청산하는 것이며, 우리 자신에게 찾아오시는 예수님을 진심으로 영접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맞이하는 것은 우리의 멍에를 가볍게 하는 것이며, 참 평화를 누리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맞이하는 것은 하늘엔 영광, 땅엔 평화를 이루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때는 정치적으로 로마제국이 천하를 호령하던 때였고, 종교적으로는 로마의 속주국인 이스라엘이 종말을 향해 내달리던 때였습니다.
예수님이 출생한 시기는 여러 가지 정황으로 볼 때, B.C. 5년 3-4월 유월절 시기로 봐야한다는 것이 천문학자 마크 키저(Mark Kidger)의 주장입니다. 베들레헴의 별은 신성(nova)이었으며, 한국과 중국에서 동시에 70일 동안 관측되었고, 독수리자리 D0의 별이라고 추정합니다. 이 별이 폭발한 때가 바로 B.C. 5년 3-4월경이었다는 것입니다.
이 시기에 천하를 호령했던 사람은 로마제국의 초대황제 아우구스투스였습니다. 그의 본명은 옥타비아누스입니다. 옥타비아누스는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외증손자이며, 19세 때 카이사르의 재산과 대권을 물려받고, 한 때는 어머니의 연인이었으면서 누나인 옥타비아의 재혼 남편이기도 했던 안토니우스를 물리치고 초대황제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시기 전 반세기, 곧 율리우스 카이사르에서 옥타비아누스 황제에 이르기까지 로마제국의 역사적 정황들은 대략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습니다.
첫째, 카이사르이후 공화정이 몰락하고, 황제시대가 도래했습니다.
둘째, 정치적으로는 이해득실에 따라 '합종연행'(合縱連橫)과 줄 갈아타기가 성행했고, 속임수와 중상과 모략은 말할 것도 없고, 상대방의 부정적인 면을 부각시켜 유포하는 ‘네거티브 전략’이 효과를 보던 때였습니다. 당대에는 신문이나 방송 대신에 벽에 그리는 그림낙서를 통해서 비방선전이 이뤄졌고, 정적을 제거하는 청부암살도 많았습니다.
셋째, 성적인 타락이 극에 달했습니다. 근친상간, 동성애, 매춘이 성행했고, 여성들도 명예와 권세를 얻기 위해서라면 남편이나 연인 갈아타기를 서슴지 않았습니다.
넷째, 끊임없는 전쟁으로 서민들의 삶이 피폐했습니다. 민중의 삶이 고단하고 힘든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전쟁으로 인해서 생긴 수많은 노예들이 시중에서 짐승처럼 매매되었고, 주인들에게 학대를 받았으며, 투기장에 끌려 나가 많은 사람들의 오락꺼리가 되기도 했습니다. 사람의 목숨이 파리만도 못하던 때였던 것입니다.
다섯째, 종교적으로는 신화에 바탕을 두고 3만이 넘는 잡신들을 섬겼습니다. 사실 이들 신들은 모두가 사물의 이름에 불과한 것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로마제국에 공화정이 끝나고 최초의 황제가 등극한 때에 이 땅의 진정한 평강의 왕(Prince of Peace)로 오셨습니다.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고,”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잡힌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전파하며, 여호와의 은혜의 해와 우리 하나님의 신원의 날을 전파하여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하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이런 위로가 성도님들에게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하여 드립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시기 전인 주전 50년 정도의 로마역사를 보면, 이스라엘과 이집트를 제국에 편입시켰던 폼페이우스의 몰락과 더불어 로마에서 공화정이 몰락하고,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일인 통치가 시작됩니다. 공화정을 지키려했던 케시우스, 키케로, 블루투스 등은 카이사르를 살해하는데 성공하지만, 그 후 마케도니아전투에서 카이사르의 오른팔인 안토니우스와 카이사르의 조카이자 후계자인 옥타비아누스에게 패배하게 되고, 케시우스와 블루투스는 자살을 합니다. 또 카이사르 암살에 책임 있는 자들에 대한 살생부가 발표되고 공화정파들이 처형되었습니다. 이 때 63세의 철학자 키케로도 목과 오른 손이 잘려 로마로 보내졌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공화정파들이 생각한 ‘조국’이란 것이 본국에서 태어난 로마인, 그중에서도 엘리트인 원로원 계급이 주도권을 쥐고 통치하는 국가였습니다. 이런 생각을 가진 대표적인 인물이 키케로였는데, 그에게 있어서 ‘조국’은 속주국들을 뺀 북쪽의 루비콘 강과 남쪽의 메시나 해협 안쪽만을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반면에 공화정의 파괴자요, 독재자로 지목되어 공화정파로부터 암살을 당했던 카이사르가 생각한 ‘조국’은 방어선은 있지만 국경은 없었습니다. 본국에서 태어난 로마인, 그중에서도 원로원 계급으로 태어난 자만이 국정을 독점해야 한다고도 생각지 않았습니다. 피정복 민족의 대표에게 원로원 의석을 주어 공화정파인 키케로와 브루투스 같은 로마 순혈주의자들의 반발을 샀을 정도였습니다. 카이사르에게는 국가를 위해 애쓰는 사람이라면 갈리아인이든 에스퍄냐인이든 그리스인이든 아무 상관이 없었습니다. 카이사르의 ‘조국’은 로마 문명의 우산 밑에서 다인종, 다민족, 다종교, 다문화가 공존 공영하는 제국이었던 것입니다.
키케로와 카이사르는 동시대의 인물이었고, 서로 친한 사이였습니다. 그런데 왜 서로 다른 길을 걸었을까요? 헬라인이 생각한 '시민권'은 자신들과 피를 공유하는 것이었고, 로마인이 생각한 '시민권'은 자신들과 정신을 공유하는 것이었다고 하지만, 로마인이라고 해서 모두가 정신의 공유가 '로마시민권'을 의미 한다고 생각한 것은 아닙니다. 공화정파였던 키케로와 같은 이들은 아이러니하게도 ‘로마시민권’의 개념을 그리스인들처럼 혈통의 공유에서 찾았고, 공화정을 파괴하고 일인 체제를 구축하기 시작한 카이사르는 ‘로마시민권’의 개념을 정신의 공유에서 찾았던 것입니다. 카이사르는 자기를 반대하는 키케로와 블루투스의 반역까지도 이해하고 용서했습니다. 비록 ‘조국’의 개념은 달라도 카이사르는 키케로와 블루투스의 조국애를 이해하고 존중했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이 곤경에 빠질 때마다 그들을 구해주었고, 그때마다 자신의 대업에 협력해달라고 요청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키케로와 블루투스는 카이사르를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이 가지고 있었던 ‘조국’이란 개념이 그들의 사고를 제한하는 족쇄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때가 정치적으로는 로마제국이 천하를 호령하던 때였고, 다신숭배와 도덕적 타락과 민중의 고단함이 극에 도달하던 때었다면, 예수님이 오셨던 때의 유대왕국은 폼페이우스의 침략으로 하스몬왕가가 몰락하고, 로마총독의 지배를 받던 때였습니다. 가난한 유대인들은 성전세와 인두세가 버거운 짐이었고, 세리들을 가장 죄악시하던 때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무리를 보시고 민망히 여기시니, 이는 저희가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유리함이라”(마 9:36)고 했듯이 서민들의 삶은 심히 고단했습니다. 비록 이스라엘 민족이 거룩한 하나님의 선민이요, 토라 곧 율법을 가진 매우 종교적인 민족이었다 할지라도, 그들 상당수는 율법의 본질에서 벗어나 외식에 치우쳤고, 그들의 지나친 선민의식과 민족주의로 인해서 그들 자신의 종말을 재촉하던 자들이었습니다. 선민의식과 민족주의가 그들을 파멸로 몰아가는 무덤이었던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두 가지 점에서 하나님을 독점하려고 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을 자기 민족만의 하나님으로 독점하려고 했습니다. 온 인류의 하나님을 자기 민족의 하나님으로 묶어버리고, 소수 유대민족의 신으로 제한하려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결코 소수 유대인들만의 하나님으로 제한될 수 없는 이 우주에 한분밖에 없는 유일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 점에 있어서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오심을 재촉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둘째는 하나님을 자신들이 지은 성막이나 성전에 가둬두고 독점하려 했습니다. 하나님이 현존하시는 곳을 성막이나 성전의 지성소라는 특정 장소에 국한하려고 한 것은 성전을 장악하여 백성을 통치하려는 수단에 불과했을 것입니다. 대제사장만이 일 년에 단 한차례만 지성소에 접근할 수 있게 한 것도 그 때문일 것입니다. 더욱이 성전시대에 들어서면, 성소를 둘러싼 뜰과 담이 접근을 겹겹으로 제한하고 있었습니다. 성소가 들어선 뜰을 제사장의 뜰이라 하여 제사장들만 출입할 수 있었고, 그 바깥뜰을 이스라엘의 뜰이라 하여 13세 이상의 유대인 남성들에게만 허용되었으며, 그 바깥뜰을 여성의 뜰이라 하여 유대인 여성들까지만 허용되었습니다. 이방인들은 여성의 뜰 바깥에 있는 넓은 이방인의 뜰만 허용되어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현존하시는 성소로부터 가장 가까운 영역에 자리를 차지한 사람들이 제사장들이고,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들이 이방인들이었습니다. 이런 점에서 성전의 뜰들을 구별하는 담들은 하나님께 접근하는 것을 가로막는 일종의 차단막, 곧 휘장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 차단막을 없애버리기 위해서 이 땅에 오신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그 차단막이 없어진 곳이 기독교예배당입니다. 그렇다고 하나님께로 가까이 가는 것을 가로막는 휘장이 다 없어진 것은 아닙니다. 아직도 사제와 평신도 사이에 휘장이 남아 있는 곳이 있고, 남자와 여자 사이에 휘장이 남아 있는 곳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수가성의 부정한 여인에게 장소에 관계없이 신령과 진정으로 하나님께 예배하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현존의 상징인 성전이 되시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모인 곳은 그리스도의 몸이기 때문에 참된 성전이 됩니다. 따라서 눈에 보이는 성전이 참 성전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들이 모여 예배하는 그곳이 성전인 것입니다.
시민권의 개념도 마찬가집니다. 키케로가 생각한 시민권은 혈통의 공유였고, 카이사르가 생각한 '시민권'은 정신의 공유였지만, 예수님이 생각한 시민권은 복음의 공유였습니다. 기독교복음은 인류가 다 하나님의 자녀요, 형제자매라는 박애정신, 인류의 죗값을 치르신 그리스도의 희생정신, 하나님의 구원의 선물에는 값도 없고, 차별도 없고, 은혜로 거저 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복음을 선포하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혈통을 중시했던 헬라제국은 지중해 연안 세계를 250년 정도 지배했고, 정신의 공유를 중시했던 로마제국은 500년 정도 지배했습니다. 그러나 복음의 정신으로 무장한 기독교는 유럽세계를 무려 1,500년간이나 지배했고, 지금도 인류 최고의 종교로 자리매김하고 있습니다. 기독교를 싫어하는 시오노 나나미는 로마시민과 속주민과의 차별을 없애고, 제국내의 모든 자유민에게 동등하게 로마시민권을 준 카라칼라 황제의 212년 ‘안토니누스 칙령’을 로마제국의 붕괴의 원인으로 보았지만, 아이러니컬하게도 인류가 다 하나님의 자녀요, 형제자매라는 박애정신, 하나님의 나라의 시민권을 얻는 데는 값도 없고, 차별도 없고, 은혜로 거저 준다는 기독교복음의 선포는 2000년이 넘도록 세계의 정신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선민인 것을 자랑삼고, 그 대열에 끼기 위해서는 할례와 개종침례를 받고, 613개의 율법과 39가지 범주의 안식일 법과 랍비들이 만든 수많은 율법들을 모두 지킬 것을 서약합니다. 그러나 그 결과가 무엇입니까? 오늘날 유대교를 믿는 사람들은 전 세계적으로 5백만 명도 되지 않습니다. 소수 민족 유대인들만의 종교, 그것조차도 유대인들의 3-40퍼센트만이 믿는 민족종교로 쪼그라들고 있습니다.
혈통을 중시하여 양부모가 다 아테네 시민이 아니면 시민권을 주지 않던 아테네도 역사에서 사라졌습니다. 정신의 공유를 중시하였고, 212년에는 로마시민권을 모든 자유인들에게 주었던 로마제국도 역사에서 사라졌습니다. 그러나 때가 차서 이 땅에 오셨고,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파하시고,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시며, 잡힌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전파하며, 여호와의 은혜의 해와 우리 하나님의 신원의 날을 전파하여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하기 위해서 오셨던 예수님의 나라는 2천년이 넘게 지금도 지속되고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영원한 것이 무엇인가를 깨닫게 해줍니다. 썩지 않는 것이 무엇인가를 알게 해줍니다. 가장 값지고 소중한 것이 무엇인가를 일깨워줍니다. 이것이 크리스마스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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