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의 위로로 진행하여 가는 교회(행 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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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의 위로로 진행하여 가는 교회(행 9:31)
금년 교회표어를 ‘성령의 위로로 진행하여 가는 교회’로 정했습니다. 사도행전 9장 31절, “그리하여 온 유대와 갈릴리와 사마리아 교회가 평안하여 든든히 서 가고, 주를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로 진행하여 수가 더 많아지니라.”한 말씀을 근거로 한 것입니다.
2006년 한 해는 작아 보이지만 실상은 큰 변화와 축복을 경험한 해였습니다. 평안했고, 든든히 세워져간 해였습니다. 2006년 후반기에 들어서면서 하나님께서 우리 성도들에게 많은 복을 주셨습니다. 성도님들의 각 가정마다 받은 복을 세어보시기를 바랍니다. 눈에 띄게 복을 많이 받았던 한 해였음을 깨닫게 되실 것입니다.
금년의 표어를 ‘성령의 위로로 진행하여 가는 교회’로 정한 것은 2006년 후반기부터 탄력을 받기 시작한 하나님의 축복을 2007년에도 지속적으로 받고, 더욱 평안하여 든든히 세워져 가기 위해서입니다. 성령의 위로로 진행하여 간다면, 형통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성령의 위로로 진행하여 간다면, 평안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성령의 위로로 진행하여 간다면, 든든히 세워져 가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성령의 위로로 진행하여 간다면, 성도들의 마음속에 소원을 두고 행하시는 하나님께서 성도들의 소원과 간구를 이뤄주시지 않을 리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는 ‘성령의 위로로 진행하여 가는 교회,’ ‘성령의 위로로 진행하여 가는 가정,’ ‘성령의 위로로 진행하여 가는 성도’가 되기 위해서 어떤 자세, 어떤 믿음으로 살아가야 할 것인가를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그리고 성령의 위로로 진행되어진 일의 구체적인 한 예로 이자익 목사와 조덕삼 장로에 대해서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이자익(李自益) 목사는 경남 남해군 이동면 탐정리 섬에서 1882년 가난하게 태어났고, 9살에 아버지, 12살에 어머니를 여의고 친척집을 떠돌다가 17살에 행상에 나셨지만, 실패했고, 김제 금산리의 대지주인 조덕삼의 마방(馬房)에서 마부생활을 시작했습니다. 그의 삶에 대변화가 일어난 것은 23때인 1905년에 예수님을 믿고 같은 해 10월 11일에 주인 조덕삼과 더불어 세례를 받고난 후부터였습니다. 종이 주인과 함께 세례를 받고 동등하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가 된 것은 구한말 시대적 상황에서 볼 때 작지 않은 사건이었습니다.
이후 마부 이자익은 평양신학교를 졸업하게 되고, 나중에 조선야소교장로회 총회장을 세 번이나 역임했을 뿐 아니라, 대전노회, 전북노회, 경남노회를 망라하여 노회장을 여러 차례 지냈으며, 20여개의 교회를 설립하였습니다. 말년에는 대전시 오정동에 교회와 신학교를 세우시고, 대전노회를 신설하여 대전신학교 초대교장, 대전노회 초대 노회장, 오정교회 초대당회장을 역임하였습니다.
이자익 목사는 큰 교회의 청빙을 거절하고 작고 연약한 시골교회를 지켰던 농촌목회자였으며, 입각(入閣)을 권유하는 친구 목사 함태영 부통령의 제의를 거절하고, 목회자로 종신할 것을 선언했던 투철한 소명의식을 가진 목사였으며, 신사참배에 가담하지 않고 창씨개명에도 불참했던 지도자였으며, 정치흥정에 흔들림 없이 교회헌법과 회의규칙에 정통한 깨끗한 교회정치가였습니다.
그런데 이토록 훌륭한 목사 배후에 조덕삼(趙德三)이란 장로가 있어서 소개합니다. 조덕삼 장로는 이자익 목사와 한날한시에 세례를 받았던 마부 이자익의 집주인이었습니다. 조덕삼은 전북 문화재 자료 136호로 지정되어 보존되고 있는 금산ㄱ자 교회를 자기 집에 세우고 건축한 사람입니다. 조덕삼 장로는 주일대사와 국회부의장을 지낸 조세형 장로의 할아버지입니다.
모악산 기슭인 김제 금산에 복음이 유입된 것은 1905년이었습니다. 모악산 일대는 예로부터 내세지향의 미륵신앙이 결집된 곳이요, 600년(백제 법왕 2년)에 미륵불교의 총본산이랄 수 있는 금산사가 들어섰고, 조선후기 모악산이 정감록에 나오는 ‘십승지지’(十勝之地), 곧 난세에 생명을 보전할 수 있다는 열군데 피난처 가운데 하나로 알려지면서 힘없고 가난한 백성들이 몰려들었습니다. 그래서 이곳엔 ‘외지’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주인 조덕삼과 머슴 이자익이 예수님을 믿고 세례를 받았던 1905년 즈음에 여기서 도를 닦던 강일순이 ‘미륵의 화신’을 자처하며 “후천개벽 때 모악산에 들어온 자만 살아남는다.”며 증산교를 시작한 곳이며, 이곳 일대에 지금도 40여개의 증산교 분파가 자리 잡고 있는 종교성이 강한 지역입니다. 한때 100개가 넘는 다양한 교단이 몰려들었고, 지금도 이 지역 인구의 70퍼센트 이상이 불교나 증산교를 비롯한 민족종교와 신흥종교를 신봉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금산리는 모악산 아래 새터, 용화, 팟정이(두정리) 세 개의 작은 마을로 구성되었는데 그 첫 동네가 팟정이여서 팟정이 혹은 두정리라고 불리기도 했습니다. 그런 마을 한복판에 금산ㄱ자 교회가 세워졌던 것입니다.
이 팟정이 마을에 금산교회가 들어선 것은 미국 남장로회 개척 선교단원으로 내한한 테이트(L.B. Tate/최의덕) 선교사의 전도에 따른 것이었습니다. 테이트 목사는 안식년을 맞아 미국에 귀국한 아펜젤러 목사의 설교에 감화를 받고 한국에 건너온 선교사였습니다.
테이트 선교사는 호남지역 선교책임자로서 전주와 정읍을 말을 타고 전도하던 중에 1905년 팟정이에서 마방을 운영하던 이 지역 부호 조덕삼(1870- 1919)에게 전도하였고, 포목장수로 큰돈을 벌었던 조덕삼은 선뜻 자신의 사랑채를 예배당으로 제공하였습니다. 3년 후인 1908년 4월 신도가 30여명으로 늘자 마을 사람들과 함께 27평짜리 ㄱ자 예배당을 짓게 되었는데, 그 예배당이 오늘날 전북 문화재 자료 136호로 지정되어 보존되고 있습니다.
교회의 전체적인 골격은 모악산 너머 배재(梨峴)에 있던 전주 이씨의 재실(齋室)을 옮겼다고 합니다. 양반 집에서 조상제사를 지내던 재실을 뜯어다 ‘하나님의 성전’을 지었으니, 남다른 의미가 있었을 것입니다. 건물을 ㄱ자형으로 지은 것은 ‘남녀칠세부동석’이라는 당시의 유교전통이 반영된 것입니다. 그 때문인지 내부는 특이한 모양을 하고 있습니다. 남북방향의 강당 끝 모서리에 강대상이 있고, 그 강대상에서 예배를 인도하는 목사만 남녀 석을 볼 수 있게 하였습니다. 강단의 좌측에는 여신도들이, 정면에는 남자들이 앉도록 구분해 남신도 석과 여신도 석 사이에 흰 포장을 쳐서 서로 볼 수 없게 하였습니다. 포장이 철거된 때는 1930년대였다고 합니다. 그 때까지 목사라 할지라도 여자 신도들을 보지 못하도록 하였다고 합니다. 출입문도 남쪽과 동쪽에 각각 따로 내어 남녀 신자들의 출입을 구별했습니다.
남녀 좌석을 구별하는 전통은 유대교에도 있어왔습니다. 유대교인들은 13세 이상의 남성만 본당에 앉고 여성들과 어린아이들은 따로 마련된 옆방에 앉았습니다. 금산ㄱ자 예배당이 지어질 당시인 1800년대 말 1900년대 초 미국을 보면 예배당이 ㄱ자 구조는 아니더라도, 지역에 따라서 출입문을 두 개씩 만들어 한쪽 문은 여성들의 전용출입문으로, 다른 쪽 문은 남성들의 전용출입문으로 삼았는가하면, 회중석 가운데에 커튼을 쳐서 서로 볼 수 없고, 오갈 수 없게 하였으며, 또 다른 지역에서는 회중석에 앉았을 때 가슴높이만큼 올라오는 칸막이로 막아 가족단위로 앉게 하였습니다. 이런 점에서는 금산ㄱ자 예배당과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금산ㄱ자 교회가 동시대의 미국의 교회보다 좋은 점이 있습니다. 미국은 1960년대에 마르틴 루터 킹 목사가 흑인운동을 펼칠 때까지도 흑인과 백인이 동석하는 경우가 드물었습니다. 남북전쟁이전에 지어진 교회당을 보면, 흑인들은 본당에 들어가지 못하고 발코니에 올라가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물론 발코니에 올라가는 입구도 따로 있었습니다. 그러나 금산ㄱ자 교회의 경우는 남녀석만 나눠져 있었지, 양반과 상놈석이 나눠져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그런 점에서 볼 때, 금산ㄱ자 교회가 미국교회보다도 훨씬 복음적인 교회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뿐 아니라, 상놈이 혹은 종이 주인보다 혹은 양반보다 먼저 장로가 되고, 목사가 되는 경우는 동시대에 미국에서도 찾아보기 어려운 일이었을 것입니다.
주인과 머슴이 함께 세운 금산ㄱ자 예배당은 처음 그대로 보존되고 있습니다. 흥미를 끄는 것은 예배당 상량문입니다. 보통 상량문은 한 곳에 건축 시기와 건축주 이름을 적는데 여기 상량문은 두 개나 되고 그 내용과 형식이 특이합니다. 남성 신자 석 상량문은 고린도후서 5장 1-6절을 순한문으로 적었습니다. 반면 여성 신자 석 상량문은 고린도전서 3장 16-17절을 순한글로 썼습니다. 상량문의 내용인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느니라.”는 남성 신자 석 상량문이나 고린도전서 3장 16-17절에 이어서 적은 “주여 당신 오실 때까지 늘 거룩하게 하소서.”라는 여성 신자 석 상량문은 모두 내세 지향적 종말신앙을 담고 있습니다. 본래 모악산 자락은 말세에 불안한 민중들이 생명을 보전하러 몰려들던 곳이었습니다. 그런 식으로 금산리에 들어와 살다가 예수님을 믿게 된 교인들은 예배당을 지으면서 그곳을 영원한 하늘장막에 들어가기까지 한시적으로 머물 거룩한 공간으로 삼았을 것입니다. 그들은 현실보다 미래에 소망을 두었습니다. 보다 나은 미래에 대한 꿈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교회를 통해 그 꿈을 이루었습니다. 살 길이 막막해 고향을 떠나 이 마을에 마부로 들어왔다가 예수님을 믿은 후 총회장까지 된 이자익 목사가 그런 성취된 꿈의 소유자였던 것입니다.
소학교도 변변히 다니지 못한 학력의 마부 이자익과 양반주인 조덕삼이 테이트 선교사의 전도를 받고 비슷한 시기에 나란히 예수님을 믿게 되어 두 사람이 같은 날인 1905년 10월 11일에 나란히 세례를 받고 동시에 성찬예식을 가졌는데 이 의식이 바로 금산ㄱ자 교회가 공식으로 출발하는 시간이었습니다. 양반 주인 조덕삼과 상놈 종인 이자익이 같은 날짜에 같이 세례 받고, 같이 주의 만찬에 참여하고, 같이 교회창립멤버가 되고 있고, 합심하여 교회를 세워갔던 것입니다.
그리고 1907년에는 두 사람이 함께 금산ㄱ자 교회의 영수로 임명되었고, 교회를 건축하고 난 다음 해인 1909년에 장로를 선출하는 투표를 실시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교인들과 마을사람들은 당연히 조덕삼 영수가 먼저 장로가 되리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결과는 너무 뜻밖이었습니다. 마을의 지주였던 조덕삼 영수를 제치고 그의 마부 이자익 영수가 장로로 추천된 것입니다. 반상의 신분을 철저히 따지던 시대에 이것은 충격적인 사건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그러니 여기저기서 수군거리는 소리가 날 것은 뻔했습니다. 이에 조덕삼 영수는 그 자리에서 발언권을 얻고 교인들에게 인사를 하였습니다. “이 결정은 하나님이 내리신 결정입니다. 우리 금산교회 교인들은 참으로 훌륭한 일을 해냈습니다. 저희 집에서 일하고 있는 이자익 영수는 저보다 신앙의 열의가 대단합니다. 나는 교회의 결정에 순종하고, 이자익 장로를 받들어 열심히 교회를 섬기겠습니다.” 이 말을 들은 금산교회 교인들은 조덕삼 영수에게 큰 박수를 보내었습니다.
실제로 조덕삼 영수는 약속대로 이자익 장로를 잘 섬겼다고 합니다. 당시는 교역자들이 부족할 때라서 이자익 장로가 예배를 인도하고 설교하는 일이 많았습니다. 그때에도 조덕삼 영수는 앞자리에 앉아 겸손하게 예배하며 이자익 장로의 설교에 집중하였습니다. 집에 돌아와서는 주인과 종의 관계로, 교회에 가서는 반대로 장로와 영수의 관계로 서로를 향한 자신들의 직분을 다하였던 것입니다. 교인들 뿐 아니라, 마을사람들은 조덕삼 장로의 이런 모습에 찬사를 아끼지 않았습니다. 당시만 해도 소작농이나 종은 비천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들을 멸시한다고 해도 내놓고 뭐라고 말할 사람이 없을 때였습니다. 하지만 조덕삼 영수는 진실한 기독교인의 모습으로 하나님과 교회를 섬겼습니다.
조덕삼은 자신보다 아홉 살이나 어리고, 자기 집의 종인 이자익이 초대 장로로 선출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기꺼이 받아들였으며, 이자익이 평양신학교에 입학하여 공부하는 일을 후원하였을 뿐 아니라, 신학교를 졸업하고 1915년 금산ㄱ자 교회의 담임목사로 부임해 내려올 때에도 그를 당회장 목사로 정중히 모셨다고 합니다.
그 후 조덕삼 장로는 ‘유광학교’를 설립하여 금산의 청소년들에게 꿈과 희망을 심어주었습니다. 비록 조덕삼은 49세의 나이로 요절하였지만, 그의 아들 조영호가 금산ㄱ자 교회의 장로가 되어 아버지가 설립한 유광학교를 중심으로 민족교육을 실시하였습니다. 조덕삼 장로의 아들 조영호 장로 또한 신앙이 돈독하여 신사참배와 동방요배를 거부하다가 감옥에 갇혀 시련을 겪었던 훌륭한 신앙인이었고, 조영호 장로의 아들 조세형 장로는 주일대사와 국회부의장을 지냈습니다.
이것이 어찌 성령의 위로로 진행하여 가는 교회의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이것이 어찌 평안하여 든든히 세워져가는 교회의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조덕삼 장로의 삶에서 볼 수 있듯이 그리스도 안에서는 높고 낮음이 없으며, 있는 자와 없는 자의 차별이 없고, 그 자체로 함께 어울려 사는 신앙의 공동체임을 여실히 보여주는 훌륭한 사례입니다.
이자익 목사의 삶에서 볼 수 있듯이, 성령의 위로는 흑암상황에서 빛을 보게 하는 것, 죽음상황에서 생명을 보게 하는 것, 혼돈상황에서 질서를 보게 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성도들이 삶 속에서 만나는 캄캄한 현실에서 한 줄기 빛을 보게 하시고, 절망과 좌절의 상황, 살아 있지만 실상은 죽은 것이나 다름없는 상황에서 희망과 용기로 일어설 수 있는 생명의 길을 보여 주시고, 엉킨 실타래처럼 혼돈한 삶의 상황에서 “영원한 위로와 선한 소망을 주시고,” 또 “마음을 위로하시고 모든 선한 일과 말에 굳게 하시는” 분은 위로의 성령님이십니다. 우리 교회가 금년에 평안하여 든든히 세워져 가고 주를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로 진행하여 수가 더 많아지고, 성도들의 가정들이 평안하여 든든히 세워져 가고, 주를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로 진행하여 영혼이 잘되며, 범사에 잘되고, 더욱 강건하여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금년 교회표어를 ‘성령의 위로로 진행하여 가는 교회’로 정했습니다. 사도행전 9장 31절, “그리하여 온 유대와 갈릴리와 사마리아 교회가 평안하여 든든히 서 가고, 주를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로 진행하여 수가 더 많아지니라.”한 말씀을 근거로 한 것입니다.
2006년 한 해는 작아 보이지만 실상은 큰 변화와 축복을 경험한 해였습니다. 평안했고, 든든히 세워져간 해였습니다. 2006년 후반기에 들어서면서 하나님께서 우리 성도들에게 많은 복을 주셨습니다. 성도님들의 각 가정마다 받은 복을 세어보시기를 바랍니다. 눈에 띄게 복을 많이 받았던 한 해였음을 깨닫게 되실 것입니다.
금년의 표어를 ‘성령의 위로로 진행하여 가는 교회’로 정한 것은 2006년 후반기부터 탄력을 받기 시작한 하나님의 축복을 2007년에도 지속적으로 받고, 더욱 평안하여 든든히 세워져 가기 위해서입니다. 성령의 위로로 진행하여 간다면, 형통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성령의 위로로 진행하여 간다면, 평안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성령의 위로로 진행하여 간다면, 든든히 세워져 가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성령의 위로로 진행하여 간다면, 성도들의 마음속에 소원을 두고 행하시는 하나님께서 성도들의 소원과 간구를 이뤄주시지 않을 리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는 ‘성령의 위로로 진행하여 가는 교회,’ ‘성령의 위로로 진행하여 가는 가정,’ ‘성령의 위로로 진행하여 가는 성도’가 되기 위해서 어떤 자세, 어떤 믿음으로 살아가야 할 것인가를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그리고 성령의 위로로 진행되어진 일의 구체적인 한 예로 이자익 목사와 조덕삼 장로에 대해서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이자익(李自益) 목사는 경남 남해군 이동면 탐정리 섬에서 1882년 가난하게 태어났고, 9살에 아버지, 12살에 어머니를 여의고 친척집을 떠돌다가 17살에 행상에 나셨지만, 실패했고, 김제 금산리의 대지주인 조덕삼의 마방(馬房)에서 마부생활을 시작했습니다. 그의 삶에 대변화가 일어난 것은 23때인 1905년에 예수님을 믿고 같은 해 10월 11일에 주인 조덕삼과 더불어 세례를 받고난 후부터였습니다. 종이 주인과 함께 세례를 받고 동등하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가 된 것은 구한말 시대적 상황에서 볼 때 작지 않은 사건이었습니다.
이후 마부 이자익은 평양신학교를 졸업하게 되고, 나중에 조선야소교장로회 총회장을 세 번이나 역임했을 뿐 아니라, 대전노회, 전북노회, 경남노회를 망라하여 노회장을 여러 차례 지냈으며, 20여개의 교회를 설립하였습니다. 말년에는 대전시 오정동에 교회와 신학교를 세우시고, 대전노회를 신설하여 대전신학교 초대교장, 대전노회 초대 노회장, 오정교회 초대당회장을 역임하였습니다.
이자익 목사는 큰 교회의 청빙을 거절하고 작고 연약한 시골교회를 지켰던 농촌목회자였으며, 입각(入閣)을 권유하는 친구 목사 함태영 부통령의 제의를 거절하고, 목회자로 종신할 것을 선언했던 투철한 소명의식을 가진 목사였으며, 신사참배에 가담하지 않고 창씨개명에도 불참했던 지도자였으며, 정치흥정에 흔들림 없이 교회헌법과 회의규칙에 정통한 깨끗한 교회정치가였습니다.
그런데 이토록 훌륭한 목사 배후에 조덕삼(趙德三)이란 장로가 있어서 소개합니다. 조덕삼 장로는 이자익 목사와 한날한시에 세례를 받았던 마부 이자익의 집주인이었습니다. 조덕삼은 전북 문화재 자료 136호로 지정되어 보존되고 있는 금산ㄱ자 교회를 자기 집에 세우고 건축한 사람입니다. 조덕삼 장로는 주일대사와 국회부의장을 지낸 조세형 장로의 할아버지입니다.
모악산 기슭인 김제 금산에 복음이 유입된 것은 1905년이었습니다. 모악산 일대는 예로부터 내세지향의 미륵신앙이 결집된 곳이요, 600년(백제 법왕 2년)에 미륵불교의 총본산이랄 수 있는 금산사가 들어섰고, 조선후기 모악산이 정감록에 나오는 ‘십승지지’(十勝之地), 곧 난세에 생명을 보전할 수 있다는 열군데 피난처 가운데 하나로 알려지면서 힘없고 가난한 백성들이 몰려들었습니다. 그래서 이곳엔 ‘외지’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주인 조덕삼과 머슴 이자익이 예수님을 믿고 세례를 받았던 1905년 즈음에 여기서 도를 닦던 강일순이 ‘미륵의 화신’을 자처하며 “후천개벽 때 모악산에 들어온 자만 살아남는다.”며 증산교를 시작한 곳이며, 이곳 일대에 지금도 40여개의 증산교 분파가 자리 잡고 있는 종교성이 강한 지역입니다. 한때 100개가 넘는 다양한 교단이 몰려들었고, 지금도 이 지역 인구의 70퍼센트 이상이 불교나 증산교를 비롯한 민족종교와 신흥종교를 신봉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금산리는 모악산 아래 새터, 용화, 팟정이(두정리) 세 개의 작은 마을로 구성되었는데 그 첫 동네가 팟정이여서 팟정이 혹은 두정리라고 불리기도 했습니다. 그런 마을 한복판에 금산ㄱ자 교회가 세워졌던 것입니다.
이 팟정이 마을에 금산교회가 들어선 것은 미국 남장로회 개척 선교단원으로 내한한 테이트(L.B. Tate/최의덕) 선교사의 전도에 따른 것이었습니다. 테이트 목사는 안식년을 맞아 미국에 귀국한 아펜젤러 목사의 설교에 감화를 받고 한국에 건너온 선교사였습니다.
테이트 선교사는 호남지역 선교책임자로서 전주와 정읍을 말을 타고 전도하던 중에 1905년 팟정이에서 마방을 운영하던 이 지역 부호 조덕삼(1870- 1919)에게 전도하였고, 포목장수로 큰돈을 벌었던 조덕삼은 선뜻 자신의 사랑채를 예배당으로 제공하였습니다. 3년 후인 1908년 4월 신도가 30여명으로 늘자 마을 사람들과 함께 27평짜리 ㄱ자 예배당을 짓게 되었는데, 그 예배당이 오늘날 전북 문화재 자료 136호로 지정되어 보존되고 있습니다.
교회의 전체적인 골격은 모악산 너머 배재(梨峴)에 있던 전주 이씨의 재실(齋室)을 옮겼다고 합니다. 양반 집에서 조상제사를 지내던 재실을 뜯어다 ‘하나님의 성전’을 지었으니, 남다른 의미가 있었을 것입니다. 건물을 ㄱ자형으로 지은 것은 ‘남녀칠세부동석’이라는 당시의 유교전통이 반영된 것입니다. 그 때문인지 내부는 특이한 모양을 하고 있습니다. 남북방향의 강당 끝 모서리에 강대상이 있고, 그 강대상에서 예배를 인도하는 목사만 남녀 석을 볼 수 있게 하였습니다. 강단의 좌측에는 여신도들이, 정면에는 남자들이 앉도록 구분해 남신도 석과 여신도 석 사이에 흰 포장을 쳐서 서로 볼 수 없게 하였습니다. 포장이 철거된 때는 1930년대였다고 합니다. 그 때까지 목사라 할지라도 여자 신도들을 보지 못하도록 하였다고 합니다. 출입문도 남쪽과 동쪽에 각각 따로 내어 남녀 신자들의 출입을 구별했습니다.
남녀 좌석을 구별하는 전통은 유대교에도 있어왔습니다. 유대교인들은 13세 이상의 남성만 본당에 앉고 여성들과 어린아이들은 따로 마련된 옆방에 앉았습니다. 금산ㄱ자 예배당이 지어질 당시인 1800년대 말 1900년대 초 미국을 보면 예배당이 ㄱ자 구조는 아니더라도, 지역에 따라서 출입문을 두 개씩 만들어 한쪽 문은 여성들의 전용출입문으로, 다른 쪽 문은 남성들의 전용출입문으로 삼았는가하면, 회중석 가운데에 커튼을 쳐서 서로 볼 수 없고, 오갈 수 없게 하였으며, 또 다른 지역에서는 회중석에 앉았을 때 가슴높이만큼 올라오는 칸막이로 막아 가족단위로 앉게 하였습니다. 이런 점에서는 금산ㄱ자 예배당과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금산ㄱ자 교회가 동시대의 미국의 교회보다 좋은 점이 있습니다. 미국은 1960년대에 마르틴 루터 킹 목사가 흑인운동을 펼칠 때까지도 흑인과 백인이 동석하는 경우가 드물었습니다. 남북전쟁이전에 지어진 교회당을 보면, 흑인들은 본당에 들어가지 못하고 발코니에 올라가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물론 발코니에 올라가는 입구도 따로 있었습니다. 그러나 금산ㄱ자 교회의 경우는 남녀석만 나눠져 있었지, 양반과 상놈석이 나눠져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그런 점에서 볼 때, 금산ㄱ자 교회가 미국교회보다도 훨씬 복음적인 교회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뿐 아니라, 상놈이 혹은 종이 주인보다 혹은 양반보다 먼저 장로가 되고, 목사가 되는 경우는 동시대에 미국에서도 찾아보기 어려운 일이었을 것입니다.
주인과 머슴이 함께 세운 금산ㄱ자 예배당은 처음 그대로 보존되고 있습니다. 흥미를 끄는 것은 예배당 상량문입니다. 보통 상량문은 한 곳에 건축 시기와 건축주 이름을 적는데 여기 상량문은 두 개나 되고 그 내용과 형식이 특이합니다. 남성 신자 석 상량문은 고린도후서 5장 1-6절을 순한문으로 적었습니다. 반면 여성 신자 석 상량문은 고린도전서 3장 16-17절을 순한글로 썼습니다. 상량문의 내용인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느니라.”는 남성 신자 석 상량문이나 고린도전서 3장 16-17절에 이어서 적은 “주여 당신 오실 때까지 늘 거룩하게 하소서.”라는 여성 신자 석 상량문은 모두 내세 지향적 종말신앙을 담고 있습니다. 본래 모악산 자락은 말세에 불안한 민중들이 생명을 보전하러 몰려들던 곳이었습니다. 그런 식으로 금산리에 들어와 살다가 예수님을 믿게 된 교인들은 예배당을 지으면서 그곳을 영원한 하늘장막에 들어가기까지 한시적으로 머물 거룩한 공간으로 삼았을 것입니다. 그들은 현실보다 미래에 소망을 두었습니다. 보다 나은 미래에 대한 꿈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교회를 통해 그 꿈을 이루었습니다. 살 길이 막막해 고향을 떠나 이 마을에 마부로 들어왔다가 예수님을 믿은 후 총회장까지 된 이자익 목사가 그런 성취된 꿈의 소유자였던 것입니다.
소학교도 변변히 다니지 못한 학력의 마부 이자익과 양반주인 조덕삼이 테이트 선교사의 전도를 받고 비슷한 시기에 나란히 예수님을 믿게 되어 두 사람이 같은 날인 1905년 10월 11일에 나란히 세례를 받고 동시에 성찬예식을 가졌는데 이 의식이 바로 금산ㄱ자 교회가 공식으로 출발하는 시간이었습니다. 양반 주인 조덕삼과 상놈 종인 이자익이 같은 날짜에 같이 세례 받고, 같이 주의 만찬에 참여하고, 같이 교회창립멤버가 되고 있고, 합심하여 교회를 세워갔던 것입니다.
그리고 1907년에는 두 사람이 함께 금산ㄱ자 교회의 영수로 임명되었고, 교회를 건축하고 난 다음 해인 1909년에 장로를 선출하는 투표를 실시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교인들과 마을사람들은 당연히 조덕삼 영수가 먼저 장로가 되리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결과는 너무 뜻밖이었습니다. 마을의 지주였던 조덕삼 영수를 제치고 그의 마부 이자익 영수가 장로로 추천된 것입니다. 반상의 신분을 철저히 따지던 시대에 이것은 충격적인 사건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그러니 여기저기서 수군거리는 소리가 날 것은 뻔했습니다. 이에 조덕삼 영수는 그 자리에서 발언권을 얻고 교인들에게 인사를 하였습니다. “이 결정은 하나님이 내리신 결정입니다. 우리 금산교회 교인들은 참으로 훌륭한 일을 해냈습니다. 저희 집에서 일하고 있는 이자익 영수는 저보다 신앙의 열의가 대단합니다. 나는 교회의 결정에 순종하고, 이자익 장로를 받들어 열심히 교회를 섬기겠습니다.” 이 말을 들은 금산교회 교인들은 조덕삼 영수에게 큰 박수를 보내었습니다.
실제로 조덕삼 영수는 약속대로 이자익 장로를 잘 섬겼다고 합니다. 당시는 교역자들이 부족할 때라서 이자익 장로가 예배를 인도하고 설교하는 일이 많았습니다. 그때에도 조덕삼 영수는 앞자리에 앉아 겸손하게 예배하며 이자익 장로의 설교에 집중하였습니다. 집에 돌아와서는 주인과 종의 관계로, 교회에 가서는 반대로 장로와 영수의 관계로 서로를 향한 자신들의 직분을 다하였던 것입니다. 교인들 뿐 아니라, 마을사람들은 조덕삼 장로의 이런 모습에 찬사를 아끼지 않았습니다. 당시만 해도 소작농이나 종은 비천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들을 멸시한다고 해도 내놓고 뭐라고 말할 사람이 없을 때였습니다. 하지만 조덕삼 영수는 진실한 기독교인의 모습으로 하나님과 교회를 섬겼습니다.
조덕삼은 자신보다 아홉 살이나 어리고, 자기 집의 종인 이자익이 초대 장로로 선출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기꺼이 받아들였으며, 이자익이 평양신학교에 입학하여 공부하는 일을 후원하였을 뿐 아니라, 신학교를 졸업하고 1915년 금산ㄱ자 교회의 담임목사로 부임해 내려올 때에도 그를 당회장 목사로 정중히 모셨다고 합니다.
그 후 조덕삼 장로는 ‘유광학교’를 설립하여 금산의 청소년들에게 꿈과 희망을 심어주었습니다. 비록 조덕삼은 49세의 나이로 요절하였지만, 그의 아들 조영호가 금산ㄱ자 교회의 장로가 되어 아버지가 설립한 유광학교를 중심으로 민족교육을 실시하였습니다. 조덕삼 장로의 아들 조영호 장로 또한 신앙이 돈독하여 신사참배와 동방요배를 거부하다가 감옥에 갇혀 시련을 겪었던 훌륭한 신앙인이었고, 조영호 장로의 아들 조세형 장로는 주일대사와 국회부의장을 지냈습니다.
이것이 어찌 성령의 위로로 진행하여 가는 교회의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이것이 어찌 평안하여 든든히 세워져가는 교회의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조덕삼 장로의 삶에서 볼 수 있듯이 그리스도 안에서는 높고 낮음이 없으며, 있는 자와 없는 자의 차별이 없고, 그 자체로 함께 어울려 사는 신앙의 공동체임을 여실히 보여주는 훌륭한 사례입니다.
이자익 목사의 삶에서 볼 수 있듯이, 성령의 위로는 흑암상황에서 빛을 보게 하는 것, 죽음상황에서 생명을 보게 하는 것, 혼돈상황에서 질서를 보게 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성도들이 삶 속에서 만나는 캄캄한 현실에서 한 줄기 빛을 보게 하시고, 절망과 좌절의 상황, 살아 있지만 실상은 죽은 것이나 다름없는 상황에서 희망과 용기로 일어설 수 있는 생명의 길을 보여 주시고, 엉킨 실타래처럼 혼돈한 삶의 상황에서 “영원한 위로와 선한 소망을 주시고,” 또 “마음을 위로하시고 모든 선한 일과 말에 굳게 하시는” 분은 위로의 성령님이십니다. 우리 교회가 금년에 평안하여 든든히 세워져 가고 주를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로 진행하여 수가 더 많아지고, 성도들의 가정들이 평안하여 든든히 세워져 가고, 주를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로 진행하여 영혼이 잘되며, 범사에 잘되고, 더욱 강건하여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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