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이 의존한 능력(마 4:8-10)
본문
예수님이 의존한 능력(마 4:8-10)
금년의 표어가 “성령님의 위로로 진행하여 가는 해”입니다. 우리가 성령님의 위로를 받으며 한 해를 진행시켜 간다는 뜻은 우리가 우리 자신의 능력과 지혜만을 의존하지 않고 성령님의 능력과 지혜에 의존한다는 뜻입니다. 성령님의 능력과 지혜를 의존하지 않고, 자기 자신만의 능력과 지혜를 의존하는 것은 ‘자기’라는 신(神)을 섬기는 우상숭배입니다.
성서에 나타난 예수님의 삶을 보면, 예수님은 참으로 능력과 지혜가 많으셨습니다. 수많은 병자를 고치셨고, 죽은 자들도 살리셨습니다. 내로라하는 학자들과의 대담에서도 예수님의 지혜는 놀랍게 발휘되었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의 권세와 능력에 놀랐고, 그런 권세를 사람에게 주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고 했습니다(마 9:8). 심지어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마 28:18) 가졌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 예수님도 성령님의 능력과 지혜에 의존하셨고, 성경말씀에 의존하셨으며, 자기우상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 부단히 기도하셨습니다. 마태복음 4장을 1절부터 읽어보면, 예수님께서 성령님께 이끌려서 광야로 내려가셨고, 40일 금식기도를 마치신 후에 사단으로부터 물욕과 명예욕과 권세욕에 관한 세 가지 시험을 받으셨는데, 이 세 가지 모두를 성경말씀으로 물리치고 계십니다. 그 가운데 권세욕에 관한 것이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의 내용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진 예수님이, 성령님께 이끌리고 있고, 기도와 말씀에 의존하고 계십니다.
본문 마태복음 4장 8-10절은 우상숭배에 관한 것입니다. 여기서 우상은 세상의 권력과 능력과 지혜를 말합니다. 또 본문은 가치(value)에 관한 것입니다. 우상이란 무가치한 것을 말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무가치한 것에 마음을 빼앗기거나 우상시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세상에는 여러 종류의 사람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처럼 모든 권세와 능력과 지혜와 재물을 가졌으면서도 그것을 섬기지 않고 우상으로 떠받들지 않고, 오히려 그것으로 사람을 살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히틀러처럼 권세와 능력과 지혜와 재물을 우상처럼 떠받들고 섬기면서, 그것들로 사람들을 죽이고, 사회를 병들게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또 이 세상에서 비록 권세와 능력과 지혜와 재물을 갖지는 못했지만, 그것들에 결코 노예가 되지 않고, 오히려 그것들을 다스려 나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것들을 우상처럼 받들고, 그것들을 좇다가 패가망신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한 놀란의 소녀의 눈동자란 소설을 보면, 청년나치단원의 가입식 장면이 나옵니다. 한 여성 가입자에게 묻는 서약내용을 보면, “너는 백인의 우월성과 백인여성의 순결을 신봉하는가; 너는 아리아인의 편에 서서 아리아인을 유일한 신으로 섬기겠는가; 너는 모든 유대인들이 악마의 자손임을 인정하는가; 우리의 궁극적인 목적은 유대인들의 완전한 멸망과 아리아인을 위한 단일 국가건설이다. 우리의 후손을 잉태하고 낳을 사람으로서 다른 인종과 피를 섞지 않을 것이며, 만약 이것을 어겼을 시에는 죽임을 당할 것을 받아드리겠는가; 너는 여성이며, 따라서 결혼으로 맺어질 한 남자의 아랫사람이며 종복임을 인정하는가?” 등의 끔찍한 내용으로 되어 있습니다. 권세와 능력과 지혜와 재물을 악용하는 자들의 사악함이 어디에까지 미칠 수 있는가 라는 심각한 질문을 낳게 하는 서약문입니다.
세상의 권력과 능력과 지혜와 재물이란 것이 그것을 누릴 수 있는 자에게는, 예수님의 경우에서 보듯이 죽은 자를 살리고, 병든 자를 고치고, 주린 자를 먹이는 대단히 좋은 것이고, 대단히 가치 있는 것이지만, 그것을 누릴만한 자질을 갖추지 못한 사람에게는 오히려 사람을 죽이는 독이 되고, 병을 주는 해가 됩니다. 그런 점에서 세상의 권력과 능력과 지혜와 재물은 어떤 품성의 사람이 그것을 손에 넣느냐에 따라서 무한히 가치 있는 것이 될 수도 있고, 전혀 무가치한 악마의 것이 될 수도 있습니다.
본문 마태복음 4장 8절의 ‘지극히 높은 산’은 지극히 높은 권력과 능력과 지혜를 말하고, ‘천하만국과 그 영광’은 그 권세와 능력과 지혜가 얼마나 높고 대단한가를 말해 줍니다. 9절의 ‘사단에게 엎드려 경배한다’는 것은 전혀 무가치한 것에 절을 하고 굴복한다는 뜻입니다. 왜냐하면, ‘천하만국과 그 영광’은 본래 사단의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가 그것을 누구에게 주고 말고 할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이 지상에 사단의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다만 사단은 잠시 동안 그것을 마치 제 것인 양 속일 수 있을 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유혹하는 사단에게 10절에서 “물러가라.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처럼 “사단아 물러가라. 주 너의 하나님만 섬기라.”고 말하지 못합니다. 오히려 “나를 섬기라.”는 사단의 유혹에 더 큰 매력을 느낍니다. 그래서 톨스토이는 “악마의 일은 아름답고 신의 일은 까다롭다.”고 말했습니다.
권력에는 작게는 가장의 권력에서부터 크게는 대통령의 권력에까지 다양합니다. 그런데 성서는 이 모든 권력이 다 하나님의 것이고, 인간은 단지 위임을 받아 사용할 뿐이라고 말합니다. 자녀에 대한 부모의 권력도 하나님의 권력을 위임받은 것이고, 국민에 대한 대통령의 권력도 하나님의 권력을 위임받은 것이란 것입니다. 위임권력이란 본래 그것이 자기 것이 아니란 뜻이고, 그것을 사용할 때에는 그것을 위임한 주인의 뜻을 따라 써야한다는 뜻입니다. 그것을 마치 제 것인 양 남용하고 과용하고 악용하는 자를 성서에서는 ‘사단’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사단’은 ‘대항자’란 뜻이고, ‘마귀’는 ‘기만자’란 뜻입니다. 여기서 ‘대항자’와 ‘기만자’란 일차적으로 하나님의 것을 제 것인 양 속이고, 그것을 위임한 하나님의 뜻에 대항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 땅에 존재하는 모든 형태의 폭력은 위임권력에 대한 악용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따라서 폭력은 우리가 버려야할 대표적인 우상인 것입니다.
성경에서는 권력에 의한 폭력을 ‘짐승’으로 묘사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에 무릎 꿇는 것을 우상숭배라고 했습니다. 계시록에서는 ‘첫째 짐승’과 ‘둘째 짐승’이란 표현을 써서, 권력을 가진 폭군을 ‘첫째 짐승’으로, 폭군의 앞잡이들을 ‘둘째 짐승’으로 표현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조종하는 영적 존재를 ‘용’으로 표현했습니다. 이 삼인방이 바로 우리가 의존하지 말고, 절하지 말아야할 우상들이란 것입니다. 같은 맥락에서 가장의 폭력은 가부장우상이요, 시부모의 언어폭력은 시댁우상이요, 학원폭력은 패거리우상이요, 상사나 노조나 독재자의 횡포는 짐승우상입니다. 이것들에 의존하고 절하는 것이 우상숭배입니다. 명예에 끌려 다니면 명예우상, 재물에 끌려 다니면 재물우상, 자녀에 끌려 다니면 자녀우상에 의존하고 절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우상들에 절하고 굴종해서도 안 되겠지만, 우리 스스로가 우상이 되어서도 안 됩니다. 마귀가 예수님을 세 번째로 유혹한 것이 바로 이 자기우상에 빠뜨려 예수님을 패가망신시키려 했던 것입니다.
사람들은 작은 권력과 능력과 지혜와 재물만 있어도 스스로 우상이 되고픈 유혹을 이기지 못합니다. 그래서 토인비는 인간이 무너지고, 쇠퇴하고, 해체되는 원인을 자기우상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역사학자 토인비는 그것을 ‘네메시스’ 곧 우상숭배에 대한 ‘응보’라고 했습니다. 신학자 하비 콕스는 권력을 신성시하는 것을 우상이라고 했습니다. 콕스는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라.”는 제1계명을 하나님을 자연과 구별시키는 것이고, 인간을 자연의 마력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이며, 만인을 하나님 앞에 평등하게 만드는 것이고, 인간을 모든 권력의 족쇄로부터 해방시키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따라서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라.”는 제1계명은 모든 권세와 능력과 지혜와 재물의 족쇄로부터 해방하라는 말씀입니다. 영원의 근원이신 하나님만을 의존하고, 일시적이고 순간적인 것들에 매이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인간은 아주 작은 권력과 능력과 지혜만 가져도 그것에 자만하고, 그것에 의존하고, 그것으로 남을 짓누르고 억압하려고 합니다. 자기가 가진 능력의 범위 속에 놓인 사람들을 배려하고 독려하고 키워주고 도와주려하기보다는 위계와 질서를 강조하고, 차별과 차등을 강조합니다. 그 반대의 경우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위계와 질서를 교란하고 제 위치를 벗어난 행동을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러한 사람들에게 권력이 주어졌을 때 그들은 십중팔구 횡포를 일삼는 아주 위험한 사람이 됩니다.
사람이 권력을 손에 쥐면 자기에게 못되게 한 사람에게 복수하려는 악한 마음이 생깁니다. 성인군자가 아니면 누구에게나 있을 법한 마음이지만, 그것을 스스로 통제하지 못하면 그 악한 마음을 실천에 옮기고 맙니다. 하물며 일국의 대통령이면 어떻겠습니까? 손에 쥔 권력을 이용하여 평소 손봐주고 싶었던 사람이나 기업체에 마수의 손을 뻗치고 싶은 유혹이 없겠습니까?. 그 대표적인 사람이 히틀러였습니다.
세계 제2차 대전 당시 6백 50만의 유대인들이 아우슈비츠를 비롯한 1천여 개의 집단 수용소에 수감되어 한 줌의 재로 바꿨다는 것을 다 잘 아실 것입니다. 나치가 당시 이들 유대인을 한 곳으로 집합시킨 데는 지금 생각해도 기발했습니다. “유대인들만을 위한 전용(專用)의 땅을 마련해 놨다”고 속인 것입니다. 잘 아시다시피 과거 2천년 동안이나 실향민이었던 유대인들은 땅이라면 사족을 못 썼습니다. 땅은 지금이나 그 때나 유대인들에게 아킬레스 건(腱)입니다.
2천년을 조국 없이 살아온 유대 실향민들에게 땅은 절대적이었습니다. 그 땅이 결국 6백 50만 유대인들을 죽음으로 몰아간 것입니다. 땅이 우상이 되면 그렇게 된다고 말한 사람도 있습니다.
유대인 대학살은 히틀러의 개인적인 증오에서 비롯됐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유년시절의 히틀러가 유대인에 관해 지녔던 프로이트적 증오 때문이었다는 것입니다. 히틀러의 생모가 남편과 사별 후 유대인 간부(姦夫)를 갖게 됐고, 따라서 매일 밤낮으로 어머니와 뒹구는 유대인 사내한테 히틀러가 독을 품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히틀러의 생모 클라라가 남편 알로이스 히틀러와 일찍 사별한 것은 히틀러의 나이 14살 때였습니다. 클라라는 남편과 22세나 나이 차가 있는데다, 실은 남편의 사촌 여동생이기도 했습니다. 그녀가 사촌 오빠와 남녀관계를 맺은 것은 오빠의 둘째 처가 병이 들어 죽기 직전으로, 둘 관계는 그런 의미에서 불륜관계였습니다. 아돌프 히틀러는 그런 범죄 가운데 잉태한 아이였습니다.
클라라가 14살 된 아돌프와 그보다 6살 어린 동생 그리고 앞서 두 명의 전처들이 남긴 소생들까지 홀몸으로 건사하기 위해 남편과 사별 후 어떤 생계의 수단을 썼을지는 익히 짐작이 갑니다. 또 당시 아돌프가 성장했던 비엔나에는 유대인들이 꽤 많았다고 합니다.
히틀러는 청소년기에 반(反) 유대 정서 속에서 자아를 굳혀갔습니다. 히틀러는 나중에 쓴 나의 투쟁(Mein Kampf)에서 유대인에 대해 이렇게 언급했습니다. “수천수만의 순수 독일 피를 이어 받은 소녀들이 이 역겨운 안짱다리 유대인 사생아들의 배 밑에 깔려있는 악몽에 시달렸다.” 이런 표현은 바로 그 당시 유행하던 반 유대 정서와 히틀러 개인이 지닌 성적 강박관념의 합작이라 볼 수 있습니다. 한때 그림에 그토록 소질을 보였던 소년 히틀러를 유대인에 대한 증오와 악령이 삼켜버렸던 것입니다.
아우슈비츠에 집채 더미처럼 쌓여있는 주인 없는 안경테와 신발더미, 방마다 가득 쌓인 유대인 여성들의 머리까락 다발, 시커멓게 그을린 가스실의 콘크리트 벽 등은 인간이 과연 어디까지 잔인해 질 수 있는가를 자문하게 만든다고 합니다. 더 경악스러웠던 일은, 그토록 목불인견의 만행을 자행하는 와중에도 수용소 한편의 별채에서는 나치 장교들이 영화 쉰들러 리스트에서처럼 관현악을 즐겼다는 점입니다. 소녀의 눈동자란 소설에서도 그 부분을 잘 묘사해 놓고 있습니다. 주인공 소녀 ‘샤나’가 바로 바이올린니스트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에게 주어진 권력이 위임된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것인데도 불구하고, 그것을 사람을 죽이고 억압하는 수단으로 쓰지 않고, 사람을 살리고 해방하는 수단으로 쓰셨습니다. 온 우주를 만드시고 소유하신 하나님이 인간의 범죄를 저주하고 벌하는데 당신의 권력을 쓰지 않으시고, 오히려 인간들을 대신해서 친히 저주를 받고 벌을 받으셨습니다. 하나님도, 예수님도 권력의 노예가 되지 않고, 권력을 선용하셨습니다. 그런 점에서 하나님은 한없이 사랑이 많으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당신이 가진 모든 권한과 능력을 제한하시고, 낮아져서 사람이 되셨고, 십자가에 죽기까지 인간을 사랑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권세와 능력과 지혜가 충만한 분이셨음에도 불구하고, 당신의 능력과 지혜를 의존하지 않으셨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부단히 기도하시고 성령님에 이끌림을 받음으로써 자기우상에 빠지지 않고 하나님 한분만을 높이셨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또 예수님은 세상의 권력에 의존하지 않으셨습니다. 대제사장이나 로마총독이나 바리새인들이나 서기관들과 같은 지체 높은 이들의 권세에 눌리지 않으셨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권력우상에 굴복하지 않으시고 성령님의 능력과 지혜에 의존하여 하나님 한분만을 높이셨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기우상에의 유혹에 단호하게 “사단아 물러가라. 주 너의 하나님만 섬기라.”고 외치셨습니다. 이런 외침이 우리 성도들의 삶 속에서도 매 순간 있어야 할줄 압니다. 우리가 가진 것이 무엇이든지 간에, 그것이 아무리 작은 것일지라도, 그것을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알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선용할 줄 아는 사람이 복된 사람입니다. 자기 능력과 지혜에 의존하기보다는 우리 안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에 의존해서 살아갈 때, 우리는 한 번에 하루씩 성령님의 위로를 받으며 진행해 나갈 수 있습니다.
금년의 표어가 “성령님의 위로로 진행하여 가는 해”입니다. 우리가 성령님의 위로를 받으며 한 해를 진행시켜 간다는 뜻은 우리가 우리 자신의 능력과 지혜만을 의존하지 않고 성령님의 능력과 지혜에 의존한다는 뜻입니다. 성령님의 능력과 지혜를 의존하지 않고, 자기 자신만의 능력과 지혜를 의존하는 것은 ‘자기’라는 신(神)을 섬기는 우상숭배입니다.
성서에 나타난 예수님의 삶을 보면, 예수님은 참으로 능력과 지혜가 많으셨습니다. 수많은 병자를 고치셨고, 죽은 자들도 살리셨습니다. 내로라하는 학자들과의 대담에서도 예수님의 지혜는 놀랍게 발휘되었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의 권세와 능력에 놀랐고, 그런 권세를 사람에게 주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고 했습니다(마 9:8). 심지어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마 28:18) 가졌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 예수님도 성령님의 능력과 지혜에 의존하셨고, 성경말씀에 의존하셨으며, 자기우상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 부단히 기도하셨습니다. 마태복음 4장을 1절부터 읽어보면, 예수님께서 성령님께 이끌려서 광야로 내려가셨고, 40일 금식기도를 마치신 후에 사단으로부터 물욕과 명예욕과 권세욕에 관한 세 가지 시험을 받으셨는데, 이 세 가지 모두를 성경말씀으로 물리치고 계십니다. 그 가운데 권세욕에 관한 것이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의 내용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진 예수님이, 성령님께 이끌리고 있고, 기도와 말씀에 의존하고 계십니다.
본문 마태복음 4장 8-10절은 우상숭배에 관한 것입니다. 여기서 우상은 세상의 권력과 능력과 지혜를 말합니다. 또 본문은 가치(value)에 관한 것입니다. 우상이란 무가치한 것을 말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무가치한 것에 마음을 빼앗기거나 우상시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세상에는 여러 종류의 사람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처럼 모든 권세와 능력과 지혜와 재물을 가졌으면서도 그것을 섬기지 않고 우상으로 떠받들지 않고, 오히려 그것으로 사람을 살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히틀러처럼 권세와 능력과 지혜와 재물을 우상처럼 떠받들고 섬기면서, 그것들로 사람들을 죽이고, 사회를 병들게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또 이 세상에서 비록 권세와 능력과 지혜와 재물을 갖지는 못했지만, 그것들에 결코 노예가 되지 않고, 오히려 그것들을 다스려 나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것들을 우상처럼 받들고, 그것들을 좇다가 패가망신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한 놀란의 소녀의 눈동자란 소설을 보면, 청년나치단원의 가입식 장면이 나옵니다. 한 여성 가입자에게 묻는 서약내용을 보면, “너는 백인의 우월성과 백인여성의 순결을 신봉하는가; 너는 아리아인의 편에 서서 아리아인을 유일한 신으로 섬기겠는가; 너는 모든 유대인들이 악마의 자손임을 인정하는가; 우리의 궁극적인 목적은 유대인들의 완전한 멸망과 아리아인을 위한 단일 국가건설이다. 우리의 후손을 잉태하고 낳을 사람으로서 다른 인종과 피를 섞지 않을 것이며, 만약 이것을 어겼을 시에는 죽임을 당할 것을 받아드리겠는가; 너는 여성이며, 따라서 결혼으로 맺어질 한 남자의 아랫사람이며 종복임을 인정하는가?” 등의 끔찍한 내용으로 되어 있습니다. 권세와 능력과 지혜와 재물을 악용하는 자들의 사악함이 어디에까지 미칠 수 있는가 라는 심각한 질문을 낳게 하는 서약문입니다.
세상의 권력과 능력과 지혜와 재물이란 것이 그것을 누릴 수 있는 자에게는, 예수님의 경우에서 보듯이 죽은 자를 살리고, 병든 자를 고치고, 주린 자를 먹이는 대단히 좋은 것이고, 대단히 가치 있는 것이지만, 그것을 누릴만한 자질을 갖추지 못한 사람에게는 오히려 사람을 죽이는 독이 되고, 병을 주는 해가 됩니다. 그런 점에서 세상의 권력과 능력과 지혜와 재물은 어떤 품성의 사람이 그것을 손에 넣느냐에 따라서 무한히 가치 있는 것이 될 수도 있고, 전혀 무가치한 악마의 것이 될 수도 있습니다.
본문 마태복음 4장 8절의 ‘지극히 높은 산’은 지극히 높은 권력과 능력과 지혜를 말하고, ‘천하만국과 그 영광’은 그 권세와 능력과 지혜가 얼마나 높고 대단한가를 말해 줍니다. 9절의 ‘사단에게 엎드려 경배한다’는 것은 전혀 무가치한 것에 절을 하고 굴복한다는 뜻입니다. 왜냐하면, ‘천하만국과 그 영광’은 본래 사단의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가 그것을 누구에게 주고 말고 할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이 지상에 사단의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다만 사단은 잠시 동안 그것을 마치 제 것인 양 속일 수 있을 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유혹하는 사단에게 10절에서 “물러가라.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처럼 “사단아 물러가라. 주 너의 하나님만 섬기라.”고 말하지 못합니다. 오히려 “나를 섬기라.”는 사단의 유혹에 더 큰 매력을 느낍니다. 그래서 톨스토이는 “악마의 일은 아름답고 신의 일은 까다롭다.”고 말했습니다.
권력에는 작게는 가장의 권력에서부터 크게는 대통령의 권력에까지 다양합니다. 그런데 성서는 이 모든 권력이 다 하나님의 것이고, 인간은 단지 위임을 받아 사용할 뿐이라고 말합니다. 자녀에 대한 부모의 권력도 하나님의 권력을 위임받은 것이고, 국민에 대한 대통령의 권력도 하나님의 권력을 위임받은 것이란 것입니다. 위임권력이란 본래 그것이 자기 것이 아니란 뜻이고, 그것을 사용할 때에는 그것을 위임한 주인의 뜻을 따라 써야한다는 뜻입니다. 그것을 마치 제 것인 양 남용하고 과용하고 악용하는 자를 성서에서는 ‘사단’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사단’은 ‘대항자’란 뜻이고, ‘마귀’는 ‘기만자’란 뜻입니다. 여기서 ‘대항자’와 ‘기만자’란 일차적으로 하나님의 것을 제 것인 양 속이고, 그것을 위임한 하나님의 뜻에 대항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 땅에 존재하는 모든 형태의 폭력은 위임권력에 대한 악용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따라서 폭력은 우리가 버려야할 대표적인 우상인 것입니다.
성경에서는 권력에 의한 폭력을 ‘짐승’으로 묘사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에 무릎 꿇는 것을 우상숭배라고 했습니다. 계시록에서는 ‘첫째 짐승’과 ‘둘째 짐승’이란 표현을 써서, 권력을 가진 폭군을 ‘첫째 짐승’으로, 폭군의 앞잡이들을 ‘둘째 짐승’으로 표현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조종하는 영적 존재를 ‘용’으로 표현했습니다. 이 삼인방이 바로 우리가 의존하지 말고, 절하지 말아야할 우상들이란 것입니다. 같은 맥락에서 가장의 폭력은 가부장우상이요, 시부모의 언어폭력은 시댁우상이요, 학원폭력은 패거리우상이요, 상사나 노조나 독재자의 횡포는 짐승우상입니다. 이것들에 의존하고 절하는 것이 우상숭배입니다. 명예에 끌려 다니면 명예우상, 재물에 끌려 다니면 재물우상, 자녀에 끌려 다니면 자녀우상에 의존하고 절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우상들에 절하고 굴종해서도 안 되겠지만, 우리 스스로가 우상이 되어서도 안 됩니다. 마귀가 예수님을 세 번째로 유혹한 것이 바로 이 자기우상에 빠뜨려 예수님을 패가망신시키려 했던 것입니다.
사람들은 작은 권력과 능력과 지혜와 재물만 있어도 스스로 우상이 되고픈 유혹을 이기지 못합니다. 그래서 토인비는 인간이 무너지고, 쇠퇴하고, 해체되는 원인을 자기우상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역사학자 토인비는 그것을 ‘네메시스’ 곧 우상숭배에 대한 ‘응보’라고 했습니다. 신학자 하비 콕스는 권력을 신성시하는 것을 우상이라고 했습니다. 콕스는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라.”는 제1계명을 하나님을 자연과 구별시키는 것이고, 인간을 자연의 마력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이며, 만인을 하나님 앞에 평등하게 만드는 것이고, 인간을 모든 권력의 족쇄로부터 해방시키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따라서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라.”는 제1계명은 모든 권세와 능력과 지혜와 재물의 족쇄로부터 해방하라는 말씀입니다. 영원의 근원이신 하나님만을 의존하고, 일시적이고 순간적인 것들에 매이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인간은 아주 작은 권력과 능력과 지혜만 가져도 그것에 자만하고, 그것에 의존하고, 그것으로 남을 짓누르고 억압하려고 합니다. 자기가 가진 능력의 범위 속에 놓인 사람들을 배려하고 독려하고 키워주고 도와주려하기보다는 위계와 질서를 강조하고, 차별과 차등을 강조합니다. 그 반대의 경우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위계와 질서를 교란하고 제 위치를 벗어난 행동을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러한 사람들에게 권력이 주어졌을 때 그들은 십중팔구 횡포를 일삼는 아주 위험한 사람이 됩니다.
사람이 권력을 손에 쥐면 자기에게 못되게 한 사람에게 복수하려는 악한 마음이 생깁니다. 성인군자가 아니면 누구에게나 있을 법한 마음이지만, 그것을 스스로 통제하지 못하면 그 악한 마음을 실천에 옮기고 맙니다. 하물며 일국의 대통령이면 어떻겠습니까? 손에 쥔 권력을 이용하여 평소 손봐주고 싶었던 사람이나 기업체에 마수의 손을 뻗치고 싶은 유혹이 없겠습니까?. 그 대표적인 사람이 히틀러였습니다.
세계 제2차 대전 당시 6백 50만의 유대인들이 아우슈비츠를 비롯한 1천여 개의 집단 수용소에 수감되어 한 줌의 재로 바꿨다는 것을 다 잘 아실 것입니다. 나치가 당시 이들 유대인을 한 곳으로 집합시킨 데는 지금 생각해도 기발했습니다. “유대인들만을 위한 전용(專用)의 땅을 마련해 놨다”고 속인 것입니다. 잘 아시다시피 과거 2천년 동안이나 실향민이었던 유대인들은 땅이라면 사족을 못 썼습니다. 땅은 지금이나 그 때나 유대인들에게 아킬레스 건(腱)입니다.
2천년을 조국 없이 살아온 유대 실향민들에게 땅은 절대적이었습니다. 그 땅이 결국 6백 50만 유대인들을 죽음으로 몰아간 것입니다. 땅이 우상이 되면 그렇게 된다고 말한 사람도 있습니다.
유대인 대학살은 히틀러의 개인적인 증오에서 비롯됐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유년시절의 히틀러가 유대인에 관해 지녔던 프로이트적 증오 때문이었다는 것입니다. 히틀러의 생모가 남편과 사별 후 유대인 간부(姦夫)를 갖게 됐고, 따라서 매일 밤낮으로 어머니와 뒹구는 유대인 사내한테 히틀러가 독을 품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히틀러의 생모 클라라가 남편 알로이스 히틀러와 일찍 사별한 것은 히틀러의 나이 14살 때였습니다. 클라라는 남편과 22세나 나이 차가 있는데다, 실은 남편의 사촌 여동생이기도 했습니다. 그녀가 사촌 오빠와 남녀관계를 맺은 것은 오빠의 둘째 처가 병이 들어 죽기 직전으로, 둘 관계는 그런 의미에서 불륜관계였습니다. 아돌프 히틀러는 그런 범죄 가운데 잉태한 아이였습니다.
클라라가 14살 된 아돌프와 그보다 6살 어린 동생 그리고 앞서 두 명의 전처들이 남긴 소생들까지 홀몸으로 건사하기 위해 남편과 사별 후 어떤 생계의 수단을 썼을지는 익히 짐작이 갑니다. 또 당시 아돌프가 성장했던 비엔나에는 유대인들이 꽤 많았다고 합니다.
히틀러는 청소년기에 반(反) 유대 정서 속에서 자아를 굳혀갔습니다. 히틀러는 나중에 쓴 나의 투쟁(Mein Kampf)에서 유대인에 대해 이렇게 언급했습니다. “수천수만의 순수 독일 피를 이어 받은 소녀들이 이 역겨운 안짱다리 유대인 사생아들의 배 밑에 깔려있는 악몽에 시달렸다.” 이런 표현은 바로 그 당시 유행하던 반 유대 정서와 히틀러 개인이 지닌 성적 강박관념의 합작이라 볼 수 있습니다. 한때 그림에 그토록 소질을 보였던 소년 히틀러를 유대인에 대한 증오와 악령이 삼켜버렸던 것입니다.
아우슈비츠에 집채 더미처럼 쌓여있는 주인 없는 안경테와 신발더미, 방마다 가득 쌓인 유대인 여성들의 머리까락 다발, 시커멓게 그을린 가스실의 콘크리트 벽 등은 인간이 과연 어디까지 잔인해 질 수 있는가를 자문하게 만든다고 합니다. 더 경악스러웠던 일은, 그토록 목불인견의 만행을 자행하는 와중에도 수용소 한편의 별채에서는 나치 장교들이 영화 쉰들러 리스트에서처럼 관현악을 즐겼다는 점입니다. 소녀의 눈동자란 소설에서도 그 부분을 잘 묘사해 놓고 있습니다. 주인공 소녀 ‘샤나’가 바로 바이올린니스트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에게 주어진 권력이 위임된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것인데도 불구하고, 그것을 사람을 죽이고 억압하는 수단으로 쓰지 않고, 사람을 살리고 해방하는 수단으로 쓰셨습니다. 온 우주를 만드시고 소유하신 하나님이 인간의 범죄를 저주하고 벌하는데 당신의 권력을 쓰지 않으시고, 오히려 인간들을 대신해서 친히 저주를 받고 벌을 받으셨습니다. 하나님도, 예수님도 권력의 노예가 되지 않고, 권력을 선용하셨습니다. 그런 점에서 하나님은 한없이 사랑이 많으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당신이 가진 모든 권한과 능력을 제한하시고, 낮아져서 사람이 되셨고, 십자가에 죽기까지 인간을 사랑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권세와 능력과 지혜가 충만한 분이셨음에도 불구하고, 당신의 능력과 지혜를 의존하지 않으셨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부단히 기도하시고 성령님에 이끌림을 받음으로써 자기우상에 빠지지 않고 하나님 한분만을 높이셨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또 예수님은 세상의 권력에 의존하지 않으셨습니다. 대제사장이나 로마총독이나 바리새인들이나 서기관들과 같은 지체 높은 이들의 권세에 눌리지 않으셨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권력우상에 굴복하지 않으시고 성령님의 능력과 지혜에 의존하여 하나님 한분만을 높이셨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기우상에의 유혹에 단호하게 “사단아 물러가라. 주 너의 하나님만 섬기라.”고 외치셨습니다. 이런 외침이 우리 성도들의 삶 속에서도 매 순간 있어야 할줄 압니다. 우리가 가진 것이 무엇이든지 간에, 그것이 아무리 작은 것일지라도, 그것을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알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선용할 줄 아는 사람이 복된 사람입니다. 자기 능력과 지혜에 의존하기보다는 우리 안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에 의존해서 살아갈 때, 우리는 한 번에 하루씩 성령님의 위로를 받으며 진행해 나갈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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