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도들이 의존할 능력, 기도(시 115: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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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도들이 의존할 능력, 기도(시 115:9-15)
아이들에게 있어서 훌륭한 아버지는 누굴까요? 결코 말을 많이 하는 아버지가 아닙니다. 아이들이 원하는 것을 다 들어주는 아버지도 아닙니다. 명예나 권세를 가진 유명인 아버지도 아닙니다. 영화배우처럼 멋진 아버지도 아닙니다. 아이들이 원하는 아버지는 아이들이 필요로 할 때 그들 곁에 있어주는 아버지입니다. 그들의 이야기를 그저 들어줄 수 있는 아버지입니다.
1972년 미국 민주당의 대통령 후보였던 조지 맥거번 상원의원에게 테리(Terry)라는 딸이 있었습니다. 똑똑하고 열정과 유머가 넘치는 딸이었습니다. 그런 딸이 마흔다섯이라는 젊은 나이에 알코올 중독으로 세상을 떠나야 했습니다. 그 딸이 유년시절에 쓴 일기장에 이런 글이 있었습니다. “아빠, 저는 아빠가 집에 더 많이 그리고 오래 계셨으면 좋겠어요. 아빠, 저는 아빠가 제가 무엇 때문에 힘들어 하는지 아셨으면 좋겠어요.”
보니 J. 모리스란 이름의 여성 유전자학 전문가가 자신의 아버지에 대해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나는 10대 때 어머니와 사이가 좋지 않았다. 나는 어머니와 심하게 싸우고 난 뒤에는 아버지의 픽업트럭 운전석이나 조수석에 앉았다. 이 때 아버지는 내 옆자리인 조수석이나 운전석에 앉으셨다. 그리고 우리는 대화를 했다. 당시에 나는 내 입장에서 내가 얼마나 힘든지 말했고, 아버지는 묵묵히 내 말을 듣기만 하셨다.... 아버지는 끝까지 내 말을 들어 주셨다. 그것이 나에게 큰 힘이 되었다. 아버지는 자기 아내와 사이가 좋지 않은 10대 소녀의 격한 감정을 인내하기 힘들었을 것임에도 불구하고 내가 내 안의 모든 눈물과 감정을 다 뺄 때까지 그저 고개만 끄덕이시면서 내 말을 들어 주셨다. 아버지는 늘 힘들게 일을 해야 하셨지만, 내가 필요할 때는 언제나 내 곁에 계셨다.”
이런 글들을 담은 팀 루서트의 아버지의 지혜란 책을 읽으면서 아버지 하나님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와 한숨과 울부짖음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별말씀이 없으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앞에서 모든 것을 기도로 토해놓고 나면 근심도 사라지고, 걱정도 물러갑니다. 무겁게 짓눌렸던 마음이 기도하고 나면 신기하게도 평온한 마음으로 바뀝니다. 왜 그럴까요? 하나님께서 우리 곁에서 우리가 토해내는 기도와 한숨과 신음소리를 듣고 계시기 때문이 아닐까요?
시편 기자는 115편 9-11절에서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이스라엘아, 여호와를 의지하라. 그는 너희 도움이시오, 너희 방패시로다. 아론의 집이여, 여호와를 의지하라. 그는 너희 도움이시오, 너희 방패시로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너희는 여호와를 의지하라. 그는 너희 도움이시오, 너희 방패시로다.”
수천 년의 세월 속에서 수없이 많은 사람들에게 “여호와를 의지하라. 그는 너희 도움이시오, 너희 방패시로다.”라는 말씀은 언제나 진리로 받아드려졌습니다. 이 시대의 거짓 선지자 00 김아무개나 무신론자들 몇몇 사람들이 부정한다고 해서 부정되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 의존하고, 하나님 의존하는 사람들이 모두 다 00 김아무개나 교만하기 이를 데 없는 무신론자들보다 어리석거나 덜 똑똑한 것이 아닙니다. 쥐꼬리만 한 지식과 IQ 100 조금 넘는 두뇌를 의존하는 자들은 오만한 자들이 빠지기 쉬운 자기우상을 섬기는 자들입니다. 그런 자들에게 주어질 응보가 어떤 것인가를 말한 책이 아놀드 토인비의 역사의 연구입니다.
아테네조지아대학의 에드워드 라르손(Edward Larson)이 1997년에 실시한 여론조사에 의하면, 활동적인 물리학자와 생물학자의 약 40퍼센트가 강한 신앙심을 가지고 있다고 네이쳐지에 발표하였습니다. 노벨상을 수상한 과학자들 가운데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들이 많았습니다. 그들 과학자들이 00 김아무개보다 못한 점이 뭐가 있었겠습니까? 오히려 그들에게 00에게 없는 것이 있었는데, 그것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겸손함이었습니다.
사람이 세상을 살아갈 때, 의지하는 능력에는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습니다. 자기 자신의 능력을 의지할 수도 있고, 남의 능력을 의지할 수도 있습니다. 남의 능력에 의지하기보다는 자신의 능력에 의지해서 살아가는 것이 우리 모두가 생각하는 바람직한 삶의 방법일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그렇게 쉽지만은 않습니다. 세상을 자기 능력만으로 산다고 하는 사람들도 따지고 보면 남의 도움으로 살아가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개인적인 능력과 수완이 좋아서 큰돈을 번 사람일지라도 돈을 벌게 해준 사람들이 없었다면 가능한 일이었겠습니까? 혼자서 북 치고 장구 치고 노래하고 들어주고 봐주고 다 할 수는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북치는 사람, 장구 치는 사람, 노래하는 사람, 들어주는 사람, 봐주는 사람이 있어야 뭐가 되도 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 세상 이치를 깨달은 사람들은 자기가 번 돈을 먹고 쓸 만큼만 남기고 사회에 환원시키고 있습니다.
‘자립’이란 말을 많이 듣고 살아왔고, 자녀들에게 꼭 강조하고 가르쳐야 할 말이기도 합니다만, ‘자립’이란 말이 지나쳐서 오만이나 자만이 돼서는 안 될 것입니다. 무신론자들은 하나님을 의존하는 믿음을 무력하고 무능한 것처럼 떠벌립니다. 18세기 이후 계몽주의자들이나 이신론자들은 인간의 능력을 만능으로 믿게 하는 신앙체계를 세워나갔습니다. 인간의 이성을 하나님만큼이나 높이 평가했고, ‘하나님은 없다. 설사 있다 해도 당신을 위해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그러나 당신은 무슨 일이든지 할 수 있다. 당신에게는 이성이 있지 않는가?'라고 했습니다.
인간의 삶에서 하나님을 제거해 버리고, 그 자리에 인간의 이성을 앉혔는데도 불구하고, 그때부터 인간은 영혼 없는 동물로,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고독한 짐승으로, 죽음을 숙명으로 알고 살아가는 거대한 인간 조직의 톱니바퀴로 추락되고 말았습니다. 인간의 삶에서 하나님이 제거되니까, 인간세계가 동물세계로 추락되고 말았습니다. 텔레비전을 통해서 동물세계에 대한 프로그램을 많이 보셨을 것입니다. 무신론자들은 동물세계와 인간세계를 크게 다르다고 보지 않습니다. 그 결과 인간세계에 동물세계처럼 약육강식이 지배하게 되고, 적자가 되어 생존하기 위해서 폭력과 억압과 착취와 거짓과 기만과 술수가 정당화되고, 인간성의 존엄이나 가치가 사라진 거대한 기계에 속한 부속품처럼 취급되고 말았던 때가 있었고 지금도 마찬가집니다.
사람이 동식물과 다른 것은 하나님의 임재를 느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자기를 만드시고 세상의 만물을 조성하신 자기보다 큰 능력의 소유자를 생각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만큼 하나님의 존재를 예민하게 느낀 민족이 없을 것입니다. 유대교가 타종교에 비해서 월등하게 위대한 이유는 그들의 종교에 우상이 없다는 점입니다. 심지어 그들은 하나님의 이름조차 입에 올리지 않습니다. 그들이 믿는 하나님은 볼 수도 없고, 만져볼 수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경전인 토라를 민족의 유산으로 갖고 있고, 하나님이 직접 주신 계명으로 믿고 실천하고 있습니다. 비록 그들이 하나님을 보지는 못했지만, 역설적으로 볼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은 참 신이지만,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경청할 수 있는 예민한 귀가 있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스 로마인들은 신을 보지 못할 뿐만 아니라, 볼 수 없다고 믿었으면서도 남녀 인간의 형상들로 신들을 조각하였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그 어떤 신의 형상도 만들지 않았습니다. 비록 그들이 하나님을 볼 수는 없었지만,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임재를 온 몸으로 느낄 수 있는 감각이 발달해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이 모든 분야에 걸쳐 뛰어난 재능을 발휘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유대인들 가운데 뛰어난 인물이 많은 이유는 유대인들에게 탁월한 능력이 있어서가 아니라, 탁월한 능력을 가진 전능하신 하나님을 의존하는 영성이 발달되어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들이 광야에서 40년을 생활할 때 그들을 인도한 것은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성막지성소 위로 솟아있는 구름기둥과 불기둥이었습니다. 그들이 구름기둥과 불기둥이 인도하는 대로 충실하게 따랐을 때, 그들의 희망, 곧 ‘하티크바’의 땅 ‘가나안’에 도달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너무도 자주 우리 자신의 능력과 지혜와 노력에만 의존해왔던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스스로 무엇인가 해보려고 하는 노력이 가상한 것이긴 하지만, 때로는 도움을 받을 줄 알아야 합니다. 아무리 열심히 공부하는 학생이라도 지도해줄 교사가 필요하고, 아무리 똘똘한 아이라도 돌봐줄 부모가 필요하고, 아무리 잘 훈련된 산악인이라도 에베르스트 산의 높은 봉우리들을 정복하려면 셰르파인들의 도움이 필요하듯이, 우리 내 인생살이에도 지도교사가 필요하고, 보살펴줄 부모가 필요하고, 안내해줄 가이드가 필요한 법입니다. 교사의 지도를 받고, 부모의 보살핌을 받고, 안내자의 인도를 받는 것이 창피한 일도 아니고, 어리석은 일도 아닙니다. 오히려 유능하고 재주 있는 사람일수록 웃돈까지 주면서까지 더 체계적이고 더 과학적인 코칭을 받고자 합니다. 하물며 우리의 육체를 컨트롤하는 마음과 정신과 영혼에 하나님의 임재를 바라고, 또 그분의 코칭과 인도를 받기 위해서 열심히 성경 읽고, 기도하고, 예배에 출석하는 것이 얼마나 당연하고 마땅한 일입니까?
우리 자신의 능력의 개발과 자립정신이 아무리 좋은 것이고, 강조되어야할 정신이라 할지라도, 때때로 우리는 우리 자신이 짊어진 무거운 짐들을 주님 앞에 내려놓아야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엎드려 기도를 하다보면, 불가능하게만 느껴졌던 일들, 무거워 감당조차 못하던 일들, 근심과 걱정들이 물거품이 꺼지듯이 사라지는 것을 느껴 보신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우리가 껴안고 살아가는 많은 근심걱정이 하나님 앞에 내려놓고 기도만 해도 아침 안개처럼 사라지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팀 루서트의 아버지의 지혜란 책을 보면, “상자”란 제목의 글이 있습니다. 이 글은 토냐 스탠파라는 이름의 퇴직공무원이 프랭크 스탠파라는 영업사원 출신의 아버지를 회고하면서 쓴 글입니다.
나는 걱정을 지고 살았다. 결혼을 해서 아이들도 두고 있던 서른 살 무렵의 어느 날, 아버지께서 나무로 만든 상자 하나를 들고 나를 부르셨다. “윌머, 걱정거리가 있으면 이 상자에 든 메모지에다가 걱정거리를 적고 다시 상자에 넣어라. 이걸 앞으로 두 주 동안만 해 봐라. 네가 가지고 있는 모든 걱정거리들을 이 상자 속에 넣어라.” 나는 아버지가 충고하신 대로 따랐다. 그리고 두 주가 지났다. 아버지가 다시 나를 찾아오셨고 우리는 함께 상자를 열고 걱정거리들을 읽어 보았다. 그런데 그 걱정거리들은 하나같이 모두 쓸데없는 걱정이거나 아니면 아무리 걱정을 한다 해도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아버지는 나에게 강력한 가르침을 주셨던 것이다. 그때 이후로 내 걱정은 훨씬 많이 줄었다.
기도는 마치 하나님이란 상자에 든 기도라는 메모지에다 우리의 근심과 걱정거리들을 적어 넣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기도라는 메모지에 모든 근심과 걱정거리들을 적어서 하나님이란 상자에 넣게 되면, 몇 시간 혹은 며칠도 되지 않아서 그것들이 아무 것도 아닌 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를 두렵고 떨게 하는 일들도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에 의존하게 되면, 힘주시는 자 안에서 우리는 모든 것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에게 꼭 있어야할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예민성입니다. 이것을 신학자들은 ‘영성’이라 부르기도 합니다. 일상을 무덤덤하게 산다고 해서 사는데 지장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삶의 깊이를 말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분석심리학자 융은 삶의 경박함, 무덤덤한 인생, 신앙에 대한 무관심과 경시가 현대인들을 과학기술로는 치유할 수 없는 정신적 질병, 정신세계의 황폐를 낳게 할뿐 아니라, 삶의 깊이의 차원을 상실하게 만든다고 했습니다. 정신세계의 공허함은 곧바로 사람을 돈과 향락의 노예로 만들고, 물량적이고 피상적인 삶을 추구하게 만듭니다. 신학자 폴 틸리히도 현대인들이 삶의 의미와 목적과 깊이의 차원을 상실해 가고 있다고 탄식한바 있습니다.
소설가 박완서는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감수성에 대해서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하나님의 침묵에 몸부림치면서, 수없이 겪는 어려움들 속에서, 하나님이 어디에 있느냐고 포악을 떨면서, 그러한 부정의 고비를 수없이 겪으면서, “산중 깊은 곳에 향기 짙은 난이 피어 있을 때, 눈으로 발견하기 전이라도 가까이 갈수록 난의 존재를 확신하며 이끌리게 되듯이,” 점점 더 하나님의 임재를 확신하게 된다고 했습니다. 박완서는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감수성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코의 능력도 천차만별이어서 멀리서도 난향을 맡을 수 있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지척에 가서나 겨우 느낄 수 있는 사람도 있다. 난이 있다가 없다가 하는 것은 아니다.”고 했습니다. 멀리에서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도, 하나님이 없는 것 같고, 침묵하시는 것 같은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임재를 느낄 수 있는 영성의 필요성을 언급한 말입니다. 우리 가운데 하나님이 안 계신 것이 아니라, 우리의 영적 감각이 둔하여 그 하나님을 느끼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침묵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영의 귀가 어두워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보이지 않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영의 눈이 어두워 하나님의 현존을 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세상을 혼자 힘으로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입니까? 얼마나 힘이 들면 우울증에 시달리고 자살충동을 느끼는 사람들이 그렇게 많겠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에게는 우리의 신음과 한숨과 기도를 들어줄 하나님이 계십니다. 비록 그분이 아무 말씀도 하시지 않더라도 그분은 언제나 우리 곁에서 듣고 계시고 말없이 우리의 상한 마음에 위로와 평강을 주십니다. 말씀을 생각하시면서 찬미예수 483번 ‘주만 바라볼지라’를 부르겠습니다.
아이들에게 있어서 훌륭한 아버지는 누굴까요? 결코 말을 많이 하는 아버지가 아닙니다. 아이들이 원하는 것을 다 들어주는 아버지도 아닙니다. 명예나 권세를 가진 유명인 아버지도 아닙니다. 영화배우처럼 멋진 아버지도 아닙니다. 아이들이 원하는 아버지는 아이들이 필요로 할 때 그들 곁에 있어주는 아버지입니다. 그들의 이야기를 그저 들어줄 수 있는 아버지입니다.
1972년 미국 민주당의 대통령 후보였던 조지 맥거번 상원의원에게 테리(Terry)라는 딸이 있었습니다. 똑똑하고 열정과 유머가 넘치는 딸이었습니다. 그런 딸이 마흔다섯이라는 젊은 나이에 알코올 중독으로 세상을 떠나야 했습니다. 그 딸이 유년시절에 쓴 일기장에 이런 글이 있었습니다. “아빠, 저는 아빠가 집에 더 많이 그리고 오래 계셨으면 좋겠어요. 아빠, 저는 아빠가 제가 무엇 때문에 힘들어 하는지 아셨으면 좋겠어요.”
보니 J. 모리스란 이름의 여성 유전자학 전문가가 자신의 아버지에 대해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나는 10대 때 어머니와 사이가 좋지 않았다. 나는 어머니와 심하게 싸우고 난 뒤에는 아버지의 픽업트럭 운전석이나 조수석에 앉았다. 이 때 아버지는 내 옆자리인 조수석이나 운전석에 앉으셨다. 그리고 우리는 대화를 했다. 당시에 나는 내 입장에서 내가 얼마나 힘든지 말했고, 아버지는 묵묵히 내 말을 듣기만 하셨다.... 아버지는 끝까지 내 말을 들어 주셨다. 그것이 나에게 큰 힘이 되었다. 아버지는 자기 아내와 사이가 좋지 않은 10대 소녀의 격한 감정을 인내하기 힘들었을 것임에도 불구하고 내가 내 안의 모든 눈물과 감정을 다 뺄 때까지 그저 고개만 끄덕이시면서 내 말을 들어 주셨다. 아버지는 늘 힘들게 일을 해야 하셨지만, 내가 필요할 때는 언제나 내 곁에 계셨다.”
이런 글들을 담은 팀 루서트의 아버지의 지혜란 책을 읽으면서 아버지 하나님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와 한숨과 울부짖음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별말씀이 없으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앞에서 모든 것을 기도로 토해놓고 나면 근심도 사라지고, 걱정도 물러갑니다. 무겁게 짓눌렸던 마음이 기도하고 나면 신기하게도 평온한 마음으로 바뀝니다. 왜 그럴까요? 하나님께서 우리 곁에서 우리가 토해내는 기도와 한숨과 신음소리를 듣고 계시기 때문이 아닐까요?
시편 기자는 115편 9-11절에서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이스라엘아, 여호와를 의지하라. 그는 너희 도움이시오, 너희 방패시로다. 아론의 집이여, 여호와를 의지하라. 그는 너희 도움이시오, 너희 방패시로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너희는 여호와를 의지하라. 그는 너희 도움이시오, 너희 방패시로다.”
수천 년의 세월 속에서 수없이 많은 사람들에게 “여호와를 의지하라. 그는 너희 도움이시오, 너희 방패시로다.”라는 말씀은 언제나 진리로 받아드려졌습니다. 이 시대의 거짓 선지자 00 김아무개나 무신론자들 몇몇 사람들이 부정한다고 해서 부정되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 의존하고, 하나님 의존하는 사람들이 모두 다 00 김아무개나 교만하기 이를 데 없는 무신론자들보다 어리석거나 덜 똑똑한 것이 아닙니다. 쥐꼬리만 한 지식과 IQ 100 조금 넘는 두뇌를 의존하는 자들은 오만한 자들이 빠지기 쉬운 자기우상을 섬기는 자들입니다. 그런 자들에게 주어질 응보가 어떤 것인가를 말한 책이 아놀드 토인비의 역사의 연구입니다.
아테네조지아대학의 에드워드 라르손(Edward Larson)이 1997년에 실시한 여론조사에 의하면, 활동적인 물리학자와 생물학자의 약 40퍼센트가 강한 신앙심을 가지고 있다고 네이쳐지에 발표하였습니다. 노벨상을 수상한 과학자들 가운데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들이 많았습니다. 그들 과학자들이 00 김아무개보다 못한 점이 뭐가 있었겠습니까? 오히려 그들에게 00에게 없는 것이 있었는데, 그것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겸손함이었습니다.
사람이 세상을 살아갈 때, 의지하는 능력에는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습니다. 자기 자신의 능력을 의지할 수도 있고, 남의 능력을 의지할 수도 있습니다. 남의 능력에 의지하기보다는 자신의 능력에 의지해서 살아가는 것이 우리 모두가 생각하는 바람직한 삶의 방법일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그렇게 쉽지만은 않습니다. 세상을 자기 능력만으로 산다고 하는 사람들도 따지고 보면 남의 도움으로 살아가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개인적인 능력과 수완이 좋아서 큰돈을 번 사람일지라도 돈을 벌게 해준 사람들이 없었다면 가능한 일이었겠습니까? 혼자서 북 치고 장구 치고 노래하고 들어주고 봐주고 다 할 수는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북치는 사람, 장구 치는 사람, 노래하는 사람, 들어주는 사람, 봐주는 사람이 있어야 뭐가 되도 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 세상 이치를 깨달은 사람들은 자기가 번 돈을 먹고 쓸 만큼만 남기고 사회에 환원시키고 있습니다.
‘자립’이란 말을 많이 듣고 살아왔고, 자녀들에게 꼭 강조하고 가르쳐야 할 말이기도 합니다만, ‘자립’이란 말이 지나쳐서 오만이나 자만이 돼서는 안 될 것입니다. 무신론자들은 하나님을 의존하는 믿음을 무력하고 무능한 것처럼 떠벌립니다. 18세기 이후 계몽주의자들이나 이신론자들은 인간의 능력을 만능으로 믿게 하는 신앙체계를 세워나갔습니다. 인간의 이성을 하나님만큼이나 높이 평가했고, ‘하나님은 없다. 설사 있다 해도 당신을 위해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그러나 당신은 무슨 일이든지 할 수 있다. 당신에게는 이성이 있지 않는가?'라고 했습니다.
인간의 삶에서 하나님을 제거해 버리고, 그 자리에 인간의 이성을 앉혔는데도 불구하고, 그때부터 인간은 영혼 없는 동물로,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고독한 짐승으로, 죽음을 숙명으로 알고 살아가는 거대한 인간 조직의 톱니바퀴로 추락되고 말았습니다. 인간의 삶에서 하나님이 제거되니까, 인간세계가 동물세계로 추락되고 말았습니다. 텔레비전을 통해서 동물세계에 대한 프로그램을 많이 보셨을 것입니다. 무신론자들은 동물세계와 인간세계를 크게 다르다고 보지 않습니다. 그 결과 인간세계에 동물세계처럼 약육강식이 지배하게 되고, 적자가 되어 생존하기 위해서 폭력과 억압과 착취와 거짓과 기만과 술수가 정당화되고, 인간성의 존엄이나 가치가 사라진 거대한 기계에 속한 부속품처럼 취급되고 말았던 때가 있었고 지금도 마찬가집니다.
사람이 동식물과 다른 것은 하나님의 임재를 느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자기를 만드시고 세상의 만물을 조성하신 자기보다 큰 능력의 소유자를 생각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만큼 하나님의 존재를 예민하게 느낀 민족이 없을 것입니다. 유대교가 타종교에 비해서 월등하게 위대한 이유는 그들의 종교에 우상이 없다는 점입니다. 심지어 그들은 하나님의 이름조차 입에 올리지 않습니다. 그들이 믿는 하나님은 볼 수도 없고, 만져볼 수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경전인 토라를 민족의 유산으로 갖고 있고, 하나님이 직접 주신 계명으로 믿고 실천하고 있습니다. 비록 그들이 하나님을 보지는 못했지만, 역설적으로 볼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은 참 신이지만,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경청할 수 있는 예민한 귀가 있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스 로마인들은 신을 보지 못할 뿐만 아니라, 볼 수 없다고 믿었으면서도 남녀 인간의 형상들로 신들을 조각하였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그 어떤 신의 형상도 만들지 않았습니다. 비록 그들이 하나님을 볼 수는 없었지만,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임재를 온 몸으로 느낄 수 있는 감각이 발달해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이 모든 분야에 걸쳐 뛰어난 재능을 발휘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유대인들 가운데 뛰어난 인물이 많은 이유는 유대인들에게 탁월한 능력이 있어서가 아니라, 탁월한 능력을 가진 전능하신 하나님을 의존하는 영성이 발달되어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들이 광야에서 40년을 생활할 때 그들을 인도한 것은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성막지성소 위로 솟아있는 구름기둥과 불기둥이었습니다. 그들이 구름기둥과 불기둥이 인도하는 대로 충실하게 따랐을 때, 그들의 희망, 곧 ‘하티크바’의 땅 ‘가나안’에 도달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너무도 자주 우리 자신의 능력과 지혜와 노력에만 의존해왔던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스스로 무엇인가 해보려고 하는 노력이 가상한 것이긴 하지만, 때로는 도움을 받을 줄 알아야 합니다. 아무리 열심히 공부하는 학생이라도 지도해줄 교사가 필요하고, 아무리 똘똘한 아이라도 돌봐줄 부모가 필요하고, 아무리 잘 훈련된 산악인이라도 에베르스트 산의 높은 봉우리들을 정복하려면 셰르파인들의 도움이 필요하듯이, 우리 내 인생살이에도 지도교사가 필요하고, 보살펴줄 부모가 필요하고, 안내해줄 가이드가 필요한 법입니다. 교사의 지도를 받고, 부모의 보살핌을 받고, 안내자의 인도를 받는 것이 창피한 일도 아니고, 어리석은 일도 아닙니다. 오히려 유능하고 재주 있는 사람일수록 웃돈까지 주면서까지 더 체계적이고 더 과학적인 코칭을 받고자 합니다. 하물며 우리의 육체를 컨트롤하는 마음과 정신과 영혼에 하나님의 임재를 바라고, 또 그분의 코칭과 인도를 받기 위해서 열심히 성경 읽고, 기도하고, 예배에 출석하는 것이 얼마나 당연하고 마땅한 일입니까?
우리 자신의 능력의 개발과 자립정신이 아무리 좋은 것이고, 강조되어야할 정신이라 할지라도, 때때로 우리는 우리 자신이 짊어진 무거운 짐들을 주님 앞에 내려놓아야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엎드려 기도를 하다보면, 불가능하게만 느껴졌던 일들, 무거워 감당조차 못하던 일들, 근심과 걱정들이 물거품이 꺼지듯이 사라지는 것을 느껴 보신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우리가 껴안고 살아가는 많은 근심걱정이 하나님 앞에 내려놓고 기도만 해도 아침 안개처럼 사라지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팀 루서트의 아버지의 지혜란 책을 보면, “상자”란 제목의 글이 있습니다. 이 글은 토냐 스탠파라는 이름의 퇴직공무원이 프랭크 스탠파라는 영업사원 출신의 아버지를 회고하면서 쓴 글입니다.
나는 걱정을 지고 살았다. 결혼을 해서 아이들도 두고 있던 서른 살 무렵의 어느 날, 아버지께서 나무로 만든 상자 하나를 들고 나를 부르셨다. “윌머, 걱정거리가 있으면 이 상자에 든 메모지에다가 걱정거리를 적고 다시 상자에 넣어라. 이걸 앞으로 두 주 동안만 해 봐라. 네가 가지고 있는 모든 걱정거리들을 이 상자 속에 넣어라.” 나는 아버지가 충고하신 대로 따랐다. 그리고 두 주가 지났다. 아버지가 다시 나를 찾아오셨고 우리는 함께 상자를 열고 걱정거리들을 읽어 보았다. 그런데 그 걱정거리들은 하나같이 모두 쓸데없는 걱정이거나 아니면 아무리 걱정을 한다 해도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아버지는 나에게 강력한 가르침을 주셨던 것이다. 그때 이후로 내 걱정은 훨씬 많이 줄었다.
기도는 마치 하나님이란 상자에 든 기도라는 메모지에다 우리의 근심과 걱정거리들을 적어 넣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기도라는 메모지에 모든 근심과 걱정거리들을 적어서 하나님이란 상자에 넣게 되면, 몇 시간 혹은 며칠도 되지 않아서 그것들이 아무 것도 아닌 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를 두렵고 떨게 하는 일들도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에 의존하게 되면, 힘주시는 자 안에서 우리는 모든 것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에게 꼭 있어야할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예민성입니다. 이것을 신학자들은 ‘영성’이라 부르기도 합니다. 일상을 무덤덤하게 산다고 해서 사는데 지장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삶의 깊이를 말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분석심리학자 융은 삶의 경박함, 무덤덤한 인생, 신앙에 대한 무관심과 경시가 현대인들을 과학기술로는 치유할 수 없는 정신적 질병, 정신세계의 황폐를 낳게 할뿐 아니라, 삶의 깊이의 차원을 상실하게 만든다고 했습니다. 정신세계의 공허함은 곧바로 사람을 돈과 향락의 노예로 만들고, 물량적이고 피상적인 삶을 추구하게 만듭니다. 신학자 폴 틸리히도 현대인들이 삶의 의미와 목적과 깊이의 차원을 상실해 가고 있다고 탄식한바 있습니다.
소설가 박완서는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감수성에 대해서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하나님의 침묵에 몸부림치면서, 수없이 겪는 어려움들 속에서, 하나님이 어디에 있느냐고 포악을 떨면서, 그러한 부정의 고비를 수없이 겪으면서, “산중 깊은 곳에 향기 짙은 난이 피어 있을 때, 눈으로 발견하기 전이라도 가까이 갈수록 난의 존재를 확신하며 이끌리게 되듯이,” 점점 더 하나님의 임재를 확신하게 된다고 했습니다. 박완서는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감수성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코의 능력도 천차만별이어서 멀리서도 난향을 맡을 수 있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지척에 가서나 겨우 느낄 수 있는 사람도 있다. 난이 있다가 없다가 하는 것은 아니다.”고 했습니다. 멀리에서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도, 하나님이 없는 것 같고, 침묵하시는 것 같은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임재를 느낄 수 있는 영성의 필요성을 언급한 말입니다. 우리 가운데 하나님이 안 계신 것이 아니라, 우리의 영적 감각이 둔하여 그 하나님을 느끼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침묵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영의 귀가 어두워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보이지 않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영의 눈이 어두워 하나님의 현존을 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세상을 혼자 힘으로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입니까? 얼마나 힘이 들면 우울증에 시달리고 자살충동을 느끼는 사람들이 그렇게 많겠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에게는 우리의 신음과 한숨과 기도를 들어줄 하나님이 계십니다. 비록 그분이 아무 말씀도 하시지 않더라도 그분은 언제나 우리 곁에서 듣고 계시고 말없이 우리의 상한 마음에 위로와 평강을 주십니다. 말씀을 생각하시면서 찬미예수 483번 ‘주만 바라볼지라’를 부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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