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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도들이 의존할 능력, 긍정의 언어(창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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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동호
댓글 0 조회 12,411 2007.04.20 1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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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도들이 의존할 능력, 긍정의 언어(창 1:3)

지난주에는 창세기 1장 1-2절을 가지고 ‘창조사관’이란 제목으로 함께 생각해봤습니다. 그리고 화요일 대학채플 때 주식회사 워터스의 회장인 배경석 장로를 모셔서 간증을 듣게 되었는데 그분도 창세기 1장 1-3절을 본문으로 말씀을 하셨습니다. 배경석 장로는 사업실패로 모든 것을 잃고 난 1981년 이웃 아주머니의 손에 이끌려 부인과 함께 금요철야에 참석했다가 은혜를 받고 예수님을 믿게 되었으며, 그 후 창세기 1장 1-3절의 말씀이 좋아서 반복해서 읽던 중에 물에 대한 비전을 발견하고, 주식회사 ‘워터스’를 세우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특히 2절의 말씀에서 영감을 받고, 성령님이 운행하셨던 물 곧 생명의 모체가 된 태초의 물을 만들어 사람들의 건강을 회복시키고, 이것을 모체로 선교를 하겠다는 결심으로 주식회사 '워터스'를 세웠다고 합니다. 여러분들도 이 말씀에서 큰 깨달음을 얻게 되기를 바랍니다.
오늘은 창세기 1장 3절 한 절에서 ‘하나님이 가라사대’에 대해서 살펴보려고 합니다. 경향교회의 담임목회자이고, 고려신학교의 교장인 석원태 목사는 18살에 “하나님이 가라사대”란 이 말씀에 충격적인 은혜를 받고 평생 그 감격을 맛보며 살아왔다고 합니다. 그만큼 이 “하나님이 가라사대”는 의미가 깊은 말씀입니다.
“가라사대”는 히브리어로 ‘와요메르’의 번역입니다. ‘와요메르’는 ‘아마르’의 3인칭 남성 단수 미완료형으로써 ‘말씀하셨다’는 뜻이고, 천지창조의 주체와 방법을 설명하는 말입니다. 이 말, ‘가라사대’는 하나님의 절대적이며 최종적인 권세를 시사하는 말입니다. 이 ‘가라사대’는 몇 가지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첫째, “하나님이 가라사대”는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보여줍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말씀하시는 하나님, 인격적인 하나님, 생명을 주시는 하나님, 창조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 인간처럼 이성과 인격을 갖고 계시고, 생각하고 판단하시며 성자 하나님과 성령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는 물론이고 피조물인 우리 인간들과도 인격적인 관계를 맺고 계십니다.
둘째, “하나님이 가라사대”는 하나님의 뜻을 명백하게 밝히는 그리고 반드시 그대로 이뤄져야하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전지하시고 전능하시기 때문에 한번 말씀하신 것은 완전한 지식가운데서 하신 말씀이고 또 그대로 이룰 수 있는 완전한 능력가운데서 하신 말씀이기 때문에 반드시 그대로 이뤄질 말씀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가라사대”는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매우 무섭고 두렵기 조차한 말씀입니다.
셋째, “하나님이 가라사대”는 반드시 지켜져야 할 법이요 명령이며, 윤리요, 규범입니다. 하나님께서 ‘하라’와 ‘하지 말라’고 명령하신 것은 반드시 지켜야합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명령은 대부분 관계 속에서 이뤄지는 일종의 하나님과의 약속을 의미합니다. 예를 들어서, “선악과를 먹지 말라”는 말씀이나 613개의 계명들은 모두가 일방적인 명령이기보다는 쌍방 간의 약속으로 이해될 필요가 있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이 명령을 하셨더라도 그 명령을 이행하고 안하는 결정은 인간이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명령을 어긴 것은 약속을 어긴 것과 동일한 것입니다.
넷째, “하나님이 가라사대”는 설교와 강론입니다. 마태가 복음서에서 예수님을 가장 크게 부각시킨 부분이 바로 ‘예수님의 말씀의 권세’입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한테서 좀처럼 찾아보기 힘든 위엄과 권세가 예수님의 말씀, ‘가라사대’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가라사대’를 통해서 귀신도 내쫓으셨고, 병도 고치셨고, 대적하는 무리들도 물리치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의 권세는 그분의 살림과 긍정의 언어에서 비롯되었습니다. 마태복음 5-7장에 실린 주옥같은 산상수훈, 13장에 실린 8개의 천국비유, 19-25장에 실린 많은 말씀들을 “무리가 듣고 가르치심에 놀랐다”(마 7:28; 22:33)고 마태는 민중의 반응을 소개하였으며, 마가도 “다 놀라 서로 물어 가로되, 이는 어찜이뇨? 권세 있는 새 교훈이로다.”(막 1:27)라고 무리의 놀람을 소개하였고, 누가도 “저희가 그 가르치심에 놀라니, 이는 그 말씀이 권세가 있음이라.”(눅 4:32)고 민중의 충격을 소개하였습니다. 모세의 율법밖에는 아는 것이 없었던 민중들이 모세의 가르침보다 더 권세 있는 예수님의 가르침에 ‘놀라워’했고, ‘새로운 교훈’이고 ‘권세’가 있다고 이구동성으로 이야기했습니다.
예수님의 권세는 그 분의 행동 속에서도 잘 나타나 있습니다. 예수님의 행동의 권세 역시 그분의 살림과 긍정의 행동에서 비롯되었습니다. 마태와 누가는 각각 20개씩의 예수님의 기적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서 마태복음 8장 27절과 누가복음 8장 25절에는 바람과 바다가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을 본 제자들의 반응이 아주 잘 나타나 있습니다. “그 사람들이 기이히 여겨 가로되, 이 어떠한 사람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고 하더라.”(마 8:25), 또 “저희가 두려워하고 기이히 여겨 서로 말하되, 저가 뉘기에 바람과 물을 명하매 순종하는고 하더라”(눅 8:25). 이토록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의 권세와 행동의 권세에 다 놀라며 기이히 여겼습니다. 이를 두고 누가는 9장 43절에서 “사람들이 다 하나님의 위엄에 놀랐다.”고 했고, “저희가 다 그 행하시는 모든 일을 기이히 여겼다.”고 적고 있습니다. 그만큼 예수님의 말씀과 행동에서 나타난 권세는 일찍이 다른 사람에게서 찾아볼 수 없었던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과 행동에 권세가 있었던 것은 예수님의 말씀과 행동이 플러스가 되는 살림의 언어요 행동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믿지만 성도들의 삶에 권세가 없는 것은 말과 행동이 마이너스가 되는 죽임의 말이요 행동이기 때문입니다. 남에게 보탬이 되는 말과 행동, 살림이 되는 말과 행동에는 사람을 살리는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가 담겨 있어서 권세가 있는 것입니다. 그분의 말씀에 따라서 병자가 고침을 받게 되고, 귀신이 떨며 꼬꾸라져 떠나고, 죄와 억압과 고통 속에 사는 민중들에게 따뜻한 위로의 말로 어루만져 주신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예수님의 말씀의 권세는 살림의 일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비록 우리가 예수님처럼 병자를 고치지는 못하고, 귀신을 떨며 꼬꾸라져 떠나가게는 못한다 해도, 살림의 말, 칭찬의 말, 위로의 말, 감사의 말, 믿음의 말, 소망의 말, 창조의 말, 긍정의 말, 할 수 있다는 말을 한다면, 우리의 그와 같은 말들 속에는 엄청난 권세와 위력이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이 말의 권세에 따라서 존재의 가치와 의미와 목적도 달라질 수 있습니다.
다섯째, “하나님이 가라사대”는 하나님의 창조와 살림의 능력이요 언어의 권세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의 서신서들에서 하나님을 소개할 때마다 “죽은 자를 살리시는 분”으로 강조하였습니다. 따라서 이 ‘가라사대’는 살림의 말이요 창조의 언어입니다. 없음을 있음으로, 죽음을 생명으로, 어둠을 빛으로, 무질서를 질서로, 넘어진 것을 바로, 더럽혀진 것을 깨끗하게, 타락한 것을 거듭나게 하며, 병든 것을 고치며, 불의를 정의로, 분쟁을 평화로, 분열을 일치로, 거짓을 진실로, 악을 선으로, 미움을 사랑으로, 의심을 믿음으로, 절망을 희망으로, 슬픔을 기쁨으로, 모순을 조화로, 불가능을 가능으로, 부정을 긍정으로, 수동을 능동으로, 닫힘을 열림으로, 파괴를 건설로 바꾸는 살림의 언어입니다.
여섯째, “하나님이 가라사대”는 강력한 리더십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가라사대”란 이 선언적 한 마디에 온 우주와 삼라만상이 하나님의 강력한 주권과 리더십아래 놓이게 되고 통치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일곱째, “하나님이 가라사대”는 하나님을 믿는 종교가 눈으로 보는 종교가 아니라, 귀로 듣는 종교임을 시사해 줍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눈으로 보는 신(神)이 아니라, 말씀으로 듣는 신(神)입니다. 다른 종교들에는 신화도 있고, 여신도 있고, 우상이나 형상이 있어서,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져 보고, 엎드려 절하고, 제사도 바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에게는 이런 것들이 없습니다. 모습도 없고 보이지도 않고 볼 수도 없습니다. 돌과 나무를 깎아 만든 우상이나 동과 철을 녹여 만든 형상도 없습니다. 그런데 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 하나님이 사람의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점 때문에 오랜 신앙생활에도 불구하고 갈등과 혼란에 빠지는 때가 많고, 마치 “보이는 것은 존재하는 것이고, 보이지 않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는 식으로 행동하기가 일쑤입니다.
그러나 사람의 눈에 보이지 않지만 산소나 태양광선과 같이 생존에 필수적인 것이 얼마나 많습니까? 인간은 아주 오래전부터 보이는 것보다는 보이지 않는 것이 더 소중하다는 생각을 품어왔습니다. 2,400여 년 전 플라톤은 눈에 보이는 것들은 보이지 않는 어떤 실체가 만들어내는 그림자에 불과하다고 했습니다. 이 실체는 육체의 감각으로는 파악될 수 없고, 오직 영혼의 눈(目)으로만 관찰된다고 했습니다. 또 안셀름의 존재론으로 볼 때, 인간이 만들어낸 신화나 우상들 또는 각가지 신의 형상들은 실제로 신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이는 플라톤의 생각과도 일치하는 것으로 보이는 것은 보이지 않는 실체가 만들어내는 그림자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그림자에 불과한 우상을 만들지 못하게 하고 보이지 않는 참 실체이신 하나님을 믿도록 한 것이 유대교와 기독교입니다.
기독교는 눈으로 보는 감각적인 종교가 아니라 말씀의 종교입니다. 기독교의 하나님은 다른 종교들과는 달리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져 볼 수 있는 나무나 돌을 깎아 만든 신이 아니라 살아 계셔서 말씀하시는 인격신(人格神)입니다. 하나님은 성경을 읽을 때 또는 설교말씀을 들을 때 또는 조용히 명상하거나 기도하는 중에 세미한 음성으로 마음에 말씀해 주십니다.
다른 종교들은 눈으로 보는 종교인데 반해서, 기독교는 귀로 듣는 종교입니다. 먼 옛날 이스라엘 민족은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것의 아무 형상이든지 만들지 말며,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는 계명을 잘 지키겠다고 하나님께 약속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기가 믿는 하나님이 보이지 않는다는 답답한 현실 때문에 마음의 문을 활짝 열고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기보다는 나무나 돌로 새긴 우상을 만들거나 금과 은을 입힌 동물이나 사람의 형상을 만들어 거기에 음식도 차리고 촛불도 켜놓고 절도하고 빌기도 했습니다. 오늘날에도 많은 수의 신앙인들이 마음에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경청하기보다는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히는 감각적인 것을 찾아 여기저기를 기웃거리곤 합니다.
오늘날은 영상미디어시대가 아닙니까? 귀로 듣는 것만으로는 만족하지 못하는 시대입니다. 눈으로 보는 재미가 클수록 거기에 빠져드는 시간이 늘어나고 분주해져서 하나님이 현대인들의 삶 속에 비집고 들어갈 공간이나 그들과 만날 시간이 없습니다. 대화가 끊기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뿐이 아닙니다. 가족과도 끊기고 교우들과도 끊기고 친구들과도 끊깁니다. 오프라인에서의 만남의 시간이나 대화가 줄어들고 혼자서 가상현실에서 보내는 시간이 늘어날수록 현실과 가상을 혼동하게 되고, 자신이 남잔지 여잔지를 혼동하게 되며, 다중인격을 갖게 될 확률이 그만큼 높아집니다.
지난주 미국 버지니아 공과대학교에서 발생한 끔찍한 총기사건을 일으킨 조승희의 추모석에 ‘바버라’라는 이름의 여성이 올린 메모의 내용은 이 엄청난 사건에서 발견되는 문제의 핵심이 무엇인지를 정확히 집어냈다고 볼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 내용은 이렇습니다. “네가 그토록 필사적으로 필요로 했던 도움을 받지 못했다는 걸을 알고 가슴이 아팠단다. 머지않아 너의 가족이 평온을 찾아 치유될 수 있기를 바란다. 하나님의 축복을 빈다. 바버라.”(I feel bad in knowing that you did not get help that you so desperately needed. I hope in time that your family will find comfort and healing. God bless. Barvara).
하나님과의 단절이나 가족 또는 교우들과의 단절은 내면세계의 공허함을 가져올 뿐 아니라, 습관상 모든 일을 혼자서 해결하려하기 때문에 사소한 문제조차도 해결이 어려운 지경으로 끌고 갈 가능성이 높고, 작은 어려움에도 쉽게 무너져버릴 확률이 매우 높습니다. 근래에 자살사건이 많고, 이혼율이 높고, 신용불량자가 많고, 정신이상자가 많아지는 원인이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대화가 없거나 하나님께 다가 가고자한 일이 없는 사람일수록 문제해결능력이 부족하기 때문에 사소한 일에도 쉽게 무너져버립니다.
마지막 여덟 번째, “하나님이 가라사대”는 하나님이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셨고 말씀과 함께 존재하셨으며, 말씀으로 우리 인간들을 구원하고 계심을 의미합니다. 바울이 로마서 10장 17절에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는다.”고 했듯이, 하나님의 말씀 또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logos)이 설교를 통해서 듣는 자들에게 전달되어지고 전달된 말씀이 진실로 깨달아지고 깨달아진 말씀이 생명이 될 때, 이 생명의 말씀을 ‘르헤마’(rhema) 혹은 ‘레마’라 부릅니다. 이 르헤마라는 말씀위에 세워진 것이 여러분과 나 곧 교회인 것입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말씀의 종교입니다. 말만 풍성한 종교, 귀로 듣기만하는 종교가 아니라, 마음으로 깨달아져서 생명을 잉태하는 종교, 빛을 비추고 살림의 일을 하는 종교가 기독교입니다. 이 “하나님이 가라사대”의 능력, 곧 살림과 창조의 언어 능력이 성도님의 삶 속에 충만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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