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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에게 행하는 일(마 25:3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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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동호
댓글 0 조회 12,162 2007.07.29 0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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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에게 행하는 일(마 25:31-46)

아프가니스탄에 건너간 한국인 의료봉사단원 23명이 지난 19일(2007.7.19)에 탈레반 민병대원들에 납치되었고, 단장인 배형규 목사가 첫 희생자가 되었습니다. 더 이상의 희생자 없이 모두 풀려나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합니다. 어쩌면 이 불행한 일이 과욕으로 인해서 빚어졌을 수 있고, 위험지역임에도 불구하고 치밀하지 못하고, 안전수칙을 지키지 못한데서 빚어졌을 수 있기 때문에, 전국을 휩쓸고 있는 충격과 슬픔위에 더욱 우리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것은 적어도 당분간은 아프간 사람들을 도울 수 없게 되었고, 아프가니스탄에 체류했던 선교사들이나 자원봉사자들이 조속히 귀국하거나 또 다른 선교지를 물색해서 떠나야한다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이번 일에 최대 피해자들은 복음에 목말라하고, 도움의 손길이 절실한 수많은 불행한 아프간 사람들이 될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인질들의 조속한 석방을 위해서도 기도해야 하지만, 또한 복음과 도움의 손길이 절실한 아프간 사람들을 위해서도 기도를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양과 염소 비유로써 예수님의 종말과 심판에 관한 비유들 가운데 하나입니다. 본문 40절과 45절을 보면, 지극히 작은 자라 할지라도 사람에게 행한 것이 곧 하나님에게 행한 것이 되고, 지극히 작은 자라 할지라도 사람에게 행하지 아니한 것이 곧 하나님께 행하지 아니한 것이 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람에게 어떻게 했느냐에 따라서 하나님이 마지막 날에 심판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요한일서 4장 20-21절,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 우리가 이 계명을 주께 받았나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 형제를 사랑할지니라.”고 하신 말씀과 맥을 같이 합니다.
지극히 작은 자나 형제가 결코 멀리 아프가니스탄에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남편과 아내, 부모와 자녀, 시부모와 며느리, 장인장모와 사위, 성도들, 동료들, 이웃들, 가난하고 병들고 각종 시설이나 감옥에 있는 사람들, 심지어 외국인들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다 형제요 자매입니다. 이 모든 사람들이 다 우리가 사랑을 베풀고 배려하고 섬겨야할 대상이지, 사랑을 받고 섬김을 받아야할 대상이 아닙니다. 성도는 남을 배려하고 봉사하고 섬기는 것이 사명이지, 섬김을 받는 것이 사명이 아닙니다. 예수님도 이 땅에 오신 목적이 섬기기 위해서 오셨다고 했습니다. 하물며 우리가 누구이기에 섬기려 하지 않고 섬김을 받으려 하겠습니까? 마태복음 7장 12절에서 예수님은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고 하셨습니다. 또 마태복음 20장 26-28절에서 예수님은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고 했습니다.
인간의 모든 관계는 계약관계입니다. 신과의 관계든, 국가와의 관계든, 인간끼리의 관계든, 혹은 자연과의 관계든 모두 다 계약관계입니다. 싫든 좋든, 원하든 원하지 않던, 의식했던 의식하지 못했던 계약관계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국민은 국가의 시민이 되는 순간부터 자동적으로 국가와 계약관계를 맺습니다. 남녀는 결혼서약을 통해서 부부가 되고, 자녀를 낳고 가정을 이루게 됩니다. 자녀들도 부모와 마찬가지로 사회계약 속에서 가족관계를 형성합니다.
이 땅에 존재하는 모든 법과 계명들은 악법을 제외하고는 다 계약법입니다. 개개의 인간들이 모여 일정한 질서와 규율 밑에 서로 협력하고 공동의 이익을 추구하며 사회나 국가를 이루는 현상을 계약에 의한 것으로 봅니다. 이것을 일컬어 ‘사회계약’이라고 부릅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다른 민족들과는 달리 그들이 모세오경에서 찾아낸 613개의 계명을 하나님과 시내산에서 맺은 계약법이라고 믿었습니다. 보통의 나라들 같았으면, 사회계약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지만, 이스라엘 민족은 모세오경에서 발견되는 613개의 법들을 하나님과 이스라엘 민족이 시내산에서 체결한 언약에 의한 계약법이라고 믿었고, 하나님의 선민이 되는 대신에 이스라엘 민족이 지키겠다고 약속한 특별한 계명들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들 계명들을 잘 지키기 위해서 각각의 계명들마다에 겹겹으로 울타리를 쳐서 이들 계명들을 침범할 수 없도록 울타리 법들을 수도 없이 많이 만들어냈습니다. 그만큼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과 맺은 계약들을 비중 있게 다뤘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민족만큼 계약법을 철저하고 연구하고 숙지하고 암기하는 민족도 없습니다. 그들은 일 년에 한 차례씩 모세오경을 완독할 뿐 아니라, 트필린이라 불리는 말씀상자를 이마와 팔에 붙들어 매달기도 하고, 메주자라 불리는 말씀상자를 문설주에 매달아 놓고 들어오고 나가면서 세 번씩 입을 맞춥니다. 안식일 예배 중 토라행진 때에도 토라를 만지거나 토라방향으로 뻗었던 손가락에 입을 맞춥니다. 그만큼 하나님과 맺은 계약을 중시하고 그 법들을 철저하게 지킵니다.
같은 맥락에서 기독교인들도 침례나 세례 서약을 통해서 성삼위 하나님과 계약관계를 맺습니다. 성경에서는 하나님과의 계약관계를 결혼서약을 맺고 부부가 된 것에 비교합니다. 따라서 우상숭배는 남편이신 하나님을 버리고 외도를 하는 나쁜 일로 설명됩니다.
부부가 결혼식 때 약속했던 계약을 어기고 외도를 하거나 사랑하지 않을 때 관계가 깨어지듯이 인간들은 사회계약이 됐든, 하나님의 계명이 됐든 법을 어기면, 계명을 어기면, 약속을 어기면 관계가 깨지고 맙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지게 되고, 부부관계가 깨지게 되고, 가족관계가 깨지게 되고, 더불어 모든 인간관계가 깨지게 됩니다.
이 깨진 관계를 성경은 원수된 관계라고 말합니다. 원수된 관계란 말이 암시하듯이 관계가 깨지게 되면, 자연스럽게 수치심이 생기고, 불안해지며, 의심과 미움이 싹트게 됩니다. 수치심은 거리감을 말하는 것이고, 거리감이 생기면 자연스럽게 대화가 단절되고, 불안해 집니다. 불안해지면서 의심을 품게 되고, 의심이 커지면 미움과 증오로 발전하게 됩니다. 따라서 사랑으로 덮어주지 못하고 상대방의 탓으로 돌리며 원망을 하게 됩니다. 죄는 여기서 파생되는 것입니다.
관계가 깨지면 죄가 발생합니다. 인간관계가 깨지면 하나님과의 관계도 깨집니다. 십계명 가운데 하나님과 관계되는 계명은 네 개지만, 인간과 관계되는 계명은 여섯 개나 됩니다. 앞의 네 개의 계명을 어겼을 때에는 그것을 ‘죄’라고 부르고, 사함을 받기 위해서는 속죄제를 바쳐야 합니다. 뒤의 여섯 개의 계명을 어겼을 때에는 그것을 ‘허물’이라 부르고, 사함을 받기 위해서는 속건제를 바쳐야 합니다.
인간에게 지은 죄라도 하나님께 용서받아야 합니다. 인간에게 죄를 짓는 것이 곧 하나님께 죄를 짓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인간에게 범한 죄에 대해서 피해자가 용서할만한 행동을 취하고 피해자로부터 용서를 받고 또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여 하나님께 용서를 받아야 진정으로 용서를 받은 것이 됩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민족에게 주신 613개의 계명들에는 하나님과 관계된 계명들보다도 인간들에 관계된 계명들이 훨씬 많습니다. 하나님에 관계된 계명들 뿐 아니라, 인간들에 관계된 계명들을 어기면 그것이 곧바로 하나님의 계명을 어기는 중대한 범죄가 됩니다. 사람에게 행하는 것이 하나님에게 행하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또 반대로 하나님께 행하는 일이 또한 사람에게 행하는 일이 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인간에게 지은 죄라도 하나님께 용서를 받아야 하고, 피해자에게도 용서를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의 주제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범하기 쉬운 잘못에 대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무엇이 하나님을 위한 것인지를 잘 알고 행동하는 사람들이 많지 않다는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이웃에게 거짓말을 하거나 이웃의 것을 착취하거나 남용하거나 악용하거나 함부로 하는 것이야말로 하나님을 실망시키는 중대한 범죄가 된다는 사실을 모른다는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습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성도들을 속인 일이 곧 성령님을 속인 일이 되어 저주를 받았던 사실을 상기할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말씀에 따라 지극히 작은 자에게 행한 사소한 일들이 하나님께 행한 일들이 되어 의인이란 칭호를 받고 영생에 들어가게 되고, 지극히 작은 자에게 행하지 아니한 사소한 일들이 하나님께 행하지 아니한 일들이 되어 악인이란 칭호를 받고 영멸에 들어갈 것이라는 준엄한 심판의 말씀을 명심할 필요가 있습니다. 따라서 그동안 잘못 살아왔다면 하나님께 회개하고 주변의 이웃들에게도 회개해야 합니다.
정당하고 올바른 인간관계가 깨지면, 하나님과의 관계도 깨집니다. 이런 맥락에서 사람에게 욕을 하거나 속이거나 악행을 행하는 것은 곧 하나님에게 욕하고 속이고 악행을 행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회개하면 깨진 관계를 복원시킬 수 있습니다. 깨진 관계를 내 탓으로 돌리고 회개하는 일만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고, 화목관계를 만들어낼 수 있습니다.
사람에게 행하는 것이 하나님에게 행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던 성인들이 있습니다. 테레사 수녀는 부량인들 속에 계신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부량인들을 섬기는 것이 곧 예수님을 섬기는 것이란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톨스토이는 「사랑이 있는 곳에 하나님이 계신다.」는 제목의 민화에서 가난하고 또 혼자되어 외롭게 살지만 정직하고 성실하고 신앙심이 깊은 구두 수선공 마르틴이 가난하고 늙은 스쩨빠니치에게 따뜻한 차를 여러 잔 대접한 일, 배고파 우는 아이를 가슴에 안고 추위에 떨고 있는 애기 엄마에게 빵과 수프를 대접한 일, 할머니에게서 사과를 훔친 사내아이를 달래서 용서를 구하게 하고 화해를 시킨 일이 마르틴에게 그날 나타나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바로 그 주님께 행한 일이었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마르틴이 날이 어두워져 등에 불을 켜고 일감을 치우고 정리한 다음에 벽장에서 성경을 꺼내어 읽던 중에 컴컴한 구석에 어떤 사람이 서서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마르틴, 마르틴, 너는 나를 알아보지 못했지?”라고 그 사람이 말했습니다. “누구를요?”라고 마르틴이 물었습니다. “날 말이다. 아까 네가 만났던 노인은 나였어.” 목소리가 말했습니다. 그러자 어두운 한구석에서 스쩨빠니치가 앞으로 나오더니 빙그레 웃으면서 형체도 그림자도 없이 사라졌습니다. “이들도 나였어.” 하고 목소리가 말했습니다. 그러자 어두운 한구석에서 아기를 안은 여자가 나타났습니다. 여자가 미소를 짓고 아기가 빙그레 웃었다고 생각하자 곧 사라졌습니다. “이들도 바로 나였어.” 하고 목소리가 말했습니다. 그러자 할머니와 사과를 가진 사내아이가 나와서 둘이 같이 빙그레 웃으며 사라졌습니다.
마르틴은 몹시 기뻤습니다. 안경을 끼고 성경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아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마 25:35-37).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마 25:40).
마르틴은 깨달았습니다. 꿈은 헛되지 않아 이날 어김없이 그리스도께서 마르틴에게 찾아오셨고 그가 부지중에 예수님을 대접했다는 것을 말입니다.
사람에게 행하는 일이 곧 하나님에게 행하는 일입니다.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사람에게 행하는 일에, 특히 가깝게 있는 사람들에게, 자주 눈을 마주치는 사람들에게 더욱 조심해서 말하고, 관심과 사랑을 갖고, 섬기고 봉사하는 성도들이 되셨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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