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앙이 주는 민족사적 의미(출 3: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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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앙이 주는 민족사적 의미(출 3:1-12)
출애굽기 3장 7-10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모세를 부르시고 구국의 사명을 주시는 이유가 설명되고 있습니다. 그것은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님께 부르짖었고, 그들의 부르짖음이 하나님께 도달했기 때문이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의 부르짖음을 듣고 그 고통을 아시고 내려오셔서 그들을 애굽인의 손에서 건져내고 그들을 인도하여 아름답고 광대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인도하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여기에 이스라엘 민족이 당한 재앙이 주는 교훈이 있습니다. 구원의 의미가 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의 구원은 그들이 무엇보다도 먼저 하나님께 부르짖은 데서 비롯되었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광복절 기념주일입니다. 특히 금년은 광복 62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62년이란 세월은 일제의 수탈과 탄압을 경험했던 세대가 역사의 배후로 물러나고 일제의 탄압과 무관한 세대가 역사의 주역으로 활동하는 시대임을 말해 줍니다. 이런 시점에서 광복이 주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지나간 미래(Vergangene Zukunft)의 저자 라인하르트 코젤렉(Reinhart Koselleck, 한철 옮김, 문학동네)은 역사해석의 도구로 ‘지나간 미래’라는 개념을 사용했습니다. 이것은 지나간 사건 속에서 그들이 가졌던 희망, 다짐, 회개, 결단과 같은 것입니다. 예를 들면, 이상화 시인은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라는 시에서 희망과 다짐과 결단을 노래합니다.
지금은 남의 땅 -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나는 온몸에 햇살을 받고, 푸른 하늘 푸른 들이 맞붙은 곳으로 가르마 같은 논길을 따라 꿈속을 가듯 걸어만 간다. . . . 내 손에 호미를 쥐어 다오. 살진 젖가슴과 같은 부드러운 이 흙을 발목이 시도록 밟아도 보고, 좋은 땀조차 흘리고 싶다. . . .
시인은 나라를 빼앗긴 절망적 상황 속에서 끝내 찾아오고야말 미래의 광복을 꿈꾸고 있습니다. 그 날이 오면 밭에 나가 땀 흘려 일해서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복지를 일구겠다는 광복의 꿈을 꾸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지나간 미래’입니다. 여기에 과거의 재앙이 주는 민족사적인 구원의 의미가 있습니다. 회복의 꿈을 꾸는 자만이 회개할 수 있고, 다짐할 수 있고, 결단할 수 있고, 그 꿈을 이룰 수 있기 때문입니다.
유다왕국이 바벨론에 유배된 것은 주전 605년, 597년, 586년 세 차례입니다. 유배지에서 고국에 돌아온 것도 주전 538년, 457년, 432년 세 차례입니다. 최초 유배로부터 각각 67년, 148년, 173년만입니다. 최초 유배로부터 67년 만에 이뤄진 제1차 귀국은 스룹바벨이 주도했고, 귀국 후 성전을 22년에 걸쳐 완공시켰습니다. 최초 유배로부터 148년 만에 이뤄진 제2차 귀국은 에스라가 주도했고, 에스라는 성벽 쌓는 일과 종교개혁을 단행했습니다. 최초 유배로부터 173년 만에 이뤄진 제3차 귀국은 느헤미야가 주도했습니다.
우리가 특별히 주목해야 할 시기는 에스라 때입니다. 스룹바벨은 해방원년 시기의 인물입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1940년대 50년대 60년대 인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에스라는 스룹바벨보다 80년 정도 후의 인물이니까 오늘날로 말하면 대충 해방 후 62년이 지난 오늘 우리 시대의 인물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느헤미야는 한 세대 후의 인물이 되겠습니다.
유다왕국과 우리나라를 비교해 볼 때, 우리나라의 형편이 유다왕국의 형편보다 훨씬 낫습니다. 유다민족은 유배되었지만, 우리 민족은 소수만이 유배되었을 뿐이고 대다수는 자기 집에서 그대로 살았고, 유다민족은 아무리 빨라도 67년 만에 고국에 돌아 올 수 있었지만, 그것도 소수의 인원만이, 우리는 길어야 40년 만에 해방을 맞았고, 반세기만에 경제대국을 이뤘지만, 유다왕국은 해방 후 22년이 걸려서 경우 성전을 재건축했고, 해방 후 81년이 지나서야 성벽축수를 시작할 수 있었을 뿐이니까 그 형편이 얼마나 어려웠었나를 알 수 있습니다. 유다민족에 비하면 우리 민족은 정말 복 받은 민족입니다.
나름대로 그 이유를 분석해 보면, 우리 민족은 1907년 평양대회개운동이후로 꾸준히 기독교가 발전해 왔고, 그 기독교가 왜정시기에는 독립운동과 계몽운동을 위해서 헌신했고, 재건시기에도 국가발전에 특히 학교교육과 국민계몽에 지대한 공헌을 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과거의 재앙이 주는 민족사적인 구원의 의미가 있습니다. 종교인들의 헌신과 봉사야말로 국가를 살리는 힘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유다민족의 경우 해방 후 80년이 훨씬 지난 후에서야 비로소 에스라에 의해서 회개운동과 개혁운동이 일어났기 때문에 발전의 움직임이 매우 더뎠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주목해야할 시기가 바로 에스라와 느헤미야 시대입니다. 특히 에스라는 율법에 능통한 학사였고, 말씀에로 돌아가 말씀대로 실천할 것을 강조한 종교 개혁가였고, 오늘날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바로 정치 경제 종교 여러 측면에서 기본에로 돌아가야 할 개혁과 회개운동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과거의 재앙이 오늘 우리에게 주는 민족사적인 구원의 의미가 있습니다. 변화와 회개만이 살길이기 때문입니다.
기본으로 돌아가야 할 개혁이란 것이 결코 옛 것에로 돌아가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날 정치권을 바라보면, 역사를 정리하고 새로운 미래를 향해 나아가자고 그럴듯한 명분을 내세우면서 역사 청산이란 이름아래 과거시절의 절망 속으로 국민을 끌어들이고 있고, 책임공방만 일삼으면서 과거 역사의 어두운 터널 속을 헤매고 있습니다.
오늘의 이 시대를 냉철하게 바라보면, 반미, 반기독교, 친북 좌파 민족주의 세력이 사회 곳곳에 침투해서 국민과 종교의 분열을 책동하고 있습니다. 이 나라에 비극적인 재앙을 가져다주었던 조선조말의 특징이 쇄국과 기독교탄압이었고, 그 결과가 일제탄압이었다는 점을 명심할 필요가 있습니다. 여기에 일제탄압과 6.25전쟁을 겪지 않았던 세대들에게 주는 또 다른 민족사적인 경고와 심판의 의미가 있습니다.
물론 기독교우월주의도 금물입니다. 기독교우월주의 또한 종교간 분열을 책동하기 때문입니다. 종교혼합주의적 성격으로 인해서 종교간 분쟁의 불씨가 맥을 못 추던 대한민국에 종교분쟁의 불씨가 되살아나고 있는 것도 종교우월주의 때문입니다.
18세기 후반이후 조선조의 집권층인 북인 벽파는 당쟁과 공리공론으로 소일하였습니다. 당시 왕조는 부패하였고 목민관들의 수탈은 극에 달하여 농민들은 소출의 상당부분을 세금으로 빼앗겼습니다. 농민은 농촌을 떠나 유랑하였으며 민심은 흉흉하였습니다. 당시 남인 시파를 중심으로 한 실학파는 기독교 신앙을 받아드려 평등사상과 다가올 미래세계인 천년왕국을 꿈꾸며 농지개혁을 주장하였고 양반과 중인들의 생산 활동을 권장하였으며 과거제도를 개혁하여 실용과학기술을 발전시키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들의 정당한 요구는 집권층에 의해 말살되었으며, 실학파 학자들은 천주교를 믿는 사학죄인으로 몰려 모두 참형당하거나 귀양을 갔습니다. 세종대왕 이후 400년 만에 나타난 모처럼의 국가발전 방안이 이를 주도해야 할 집권층의 필사적인 방해로 무산되었던 것입니다.
19세기 중엽에 이르러 천주학쟁이들에 대한 박해가 절정에 달했고, 수많은 기독교인들이 순교를 당하자 최제우는 기독교의 천년왕국사상과 미륵신앙에 바탕을 두고 동학을 일으켰습니다. 이후 탐관오리의 폭정을 견디지 못한 농민들이 동학혁명을 일으켜 국가개혁을 시도하였습니다. 그러나 전라도 고부에 설치되었던 이들의 집강소는 일 년이 채 못 되어 폐쇄 되었고, 녹두장군 전봉준을 비롯한 동학군은 그들의 꿈을 이루지 못하고 참형을 당하였습니다.
같은 시절 흥선대원군은 서양 강대국이 우리나라에 들어오는 것을 철저히 막는 쇄국정책을 폈습니다. 1866년 대동강에서 수교를 요구하는 미국 선박 제너럴셔먼호를 불태웠고, 같은 해에 천주교 탄압을 항의하기 위해 강화도에 들어온 프랑스 함대를 물리쳤습니다. 쇄국정책과 함께 천주교 탄압도 심화되었습니다. 하지만 쇄국정책으로 철저히 외국과의 교류를 막아 진보된 문물을 받아들이지 못해 근대화의 기회를 놓치는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그 후 조선조는 쇠락의 길을 걸었고 대한제국을 거쳐 한일합병으로 이어졌습니다. 결국 한일합당이란 비극적인 재앙은 조선조말의 쇄국과 기독교탄압정책 때문이었던 것입니다. 여기에 과거의 재앙이 주는 민족사적인 경고와 심판의 의미가 있습니다.
한편 16세기 중반에 일본과 중국은 기독교 복음과 서양문물을 받아드려 국가를 발전시켰고, 그 힘으로 결국 조선을 지배하고 능욕하는 데 활용했습니다.
일본에서는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가 1549년 7월에 일본 큐우슈우(九州)에 상륙한 예수회 신부 프란시스 사비에르(Francis Xavier)의 전도를 받고 기독교와 함께 서양문명을 받아들여 변화를 꾀하였습니다. 일본은 1854년 미국과 화친조약을 맺은 이후, 영국, 프랑스, 러시아, 네덜란드 등 서양 제국과 차례로 통상조약을 맺고 메이지유신(明治維新)을 이룩하였습니다.
중국도 당나라 때에 이미 한차례 기독교(景敎)를 수용한 경험이 있고, 또 1583년 9월, 중국 광동성에 도착한 예수회 신부 마테오 리치(Matteo Ricci)의 전도를 받고 기독교와 함께 서양문명을 받아들여 변화를 꾀하였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떠했습니까? 유럽의 각종 문물과 번역서들이 해마다 북경에 파견되는 사절들에 의해서 유입되었지만, 조선의 유학자들은 이들을 접하고도 배척하기에 급급했습니다. 그들은 천주교인들을 '사학죄인'으로 몰아 1만여 명이나 죽었는가하면, 쇄국정책을 펼쳐 서양학문이 들어오는 것을 차단하였고, 실학자들을 정치적으로 크게 탄압하였습니다.
이 당시 성리학에 바탕을 둔 양반세력들은 평등사상에 바탕을 둔 기독교 정신에 위기의식을 느껴 변화를 거부했습니다. 특히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 이하응(李昰應)은 청(淸)나라를 제외한 다른 외국과의 통상 및 교류를 꺼려 강경한 쇄국정책을 실시하였습니다. 그 결과 조선은 근세 들어 겪게 되는 엄청난 외세에 대응할 만한 적극적 대책을 마련하지 못한 채, 국제무대에서 고립되는 불행을 자초했습니다. 여기에 과거의 재앙이 주는 민족사적인 경고와 심판의 의미가 있습니다.
함석헌 선생이 뜻으로 본 한국역사에서 피력한 것처럼, 우리나라는 중국을 섬기고 중국이 되려한 사대주의 모화사상에다 변화를 거부한 쇄국주의와 현상유지주의로 인해서 당나라의 엎누름을 당했고, 거란의 도둑질을 당했고, 몽고의 짓밟음을 당했고, 여진의 시달림을 당했고, 임진란, 병자란을 거쳐 일제에 강점당하는 수치를 당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과거의 재앙이 우리 민족에게 주는 경고의 의미입니다. 개혁을 거부하면 망한다는 경고입니다. 개혁을 거부해서 망하는 것이 국가만은 아닙니다. 개인도 마찬가집니다. 개혁의 시대를 맞아서 개혁의 도전에 적절하게 응전하여 발전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잘못된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토인비가 말한 것처럼, 자기만족, 자기도취에 빠지면 그 보응으로 반드시 침몰하고 말기 때문입니다.
기독교가 16세기 중반에 일본과 중국에 큰 발전을 가져다 준 것처럼 우리나라 발전에도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18세기 남인 시파들을 중심으로 받아드린 천주학은 비록 103년에 걸친 극심한 박해로 인해서 국가 발전에 기여한 바가 크지 않지만, 천국신앙으로 사회개혁을 꾀하고, 서로를 교우라고 부르며, 양반과 상놈의 신분을 타파했다는 점에서는 나름대로 국가발전에 기여를 했습니다.
한편 개신교가 이 땅에 들어온 때는 일본이 조선을 삼키려는 야욕을 들어내기 시작하던 때였습니다. 막 조선 땅에 복음의 씨를 뿌려 싹을 내던 단계였지만, 분연히 일어서 민족운동과 애국운동을 일으켰고, 민중을 계몽하며, 항일투쟁과 구국운동에 앞장섰습니다. 조선의 개신교 신자들이 남긴 업적은 크게 세 가지입니다.
첫째, 이 땅에서 외세를 물리치고 자주독립국가를 이룩하는데 헌신했습니다. 이런 일을 행한 사람들 중의 대표적인 사람이 월남 이상재 선생입니다.
둘째, 곳곳에 신학문을 가르치는 학교를 세워 민족계몽운동에 헌신하였습니다. 이들 가운데 대표적인 사람이 오산학교를 세운 남강 이승훈 선생입니다.
셋째, 민족독립운동에 헌신하였습니다. 1919년 3월 1일에 있었던 독립만세운동은 우리 민족사에 있어서 영원히 잊을 수 없는 거국적인 민족운동이었습니다. 그런데 독립선언문의 기초자인 육당 최남선을 비롯해서 서명자 33인 가운데 16명이 기독교인이었습니다. 여기에 과거의 재앙이 주는 민족사적인 구원의 의미가 있습니다. 기독교가 바로 서서 제 역할에 충실할 때 국가의 미래가 보장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8.15직후 겪게 된 6.25전쟁은 민족분열을 책동하고 사회주의 혁명을 꾀한 좌파들에게 그 책임이 큽니다. 남북의 엄연한 현실 앞에서조차 오늘날 좌파들은 민족분열의 책임과 전쟁의 책임을 전적으로 우파와 미국에 돌리고 있습니다.
62번째 광복절을 맞은 오늘 우리는 20세기 초의 상황과 비슷한 상황 속에 놓여 있습니다. 오히려 그 때보다 더 못한 것은 우리 민족이 남북으로 나누어져 있는 현실이고, 더 나은 것은 남쪽이 경제적인 성공을 이뤘다는 점입니다. 그러나 여전히 정치 군사적으로는 미국, 일본, 중국, 러시아 등 강대국들의 틈바구니에 끼어있고, 눈치를 봐야합니다. 금년에 대통령 선거가 있습니다만, 누가 대통령이 되느냐에 따라서 대한민국의 국제정치적 자리매김이 달라질 것입니다. 국제적으로는 한쪽에 치우치는 경향을 지양하고, 균형을 유지하는 것이 바람직하며, 국내적으로는 국력을 신장하고, 분열을 촉발시키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여기에 과거의 재앙이 주는 민족사적인 구원의 의미가 있습니다.
기독교인들의 꿈과 희망, 헌신과 봉사, 변화와 회개만이 기독교를 살리고, 민족을 살릴 수 있습니다. 기독교인들이 바로 서서 제 역할에 충실할 때 기독교를 살리고, 민족을 살릴 수 있습니다. 이것이 광복의 달을 맞이한 우리 성도들에게 우리의 민족사가 주는 교훈입니다. 이 교훈을 마음에 잘 새기도록 합시다.
출애굽기 3장 7-10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모세를 부르시고 구국의 사명을 주시는 이유가 설명되고 있습니다. 그것은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님께 부르짖었고, 그들의 부르짖음이 하나님께 도달했기 때문이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의 부르짖음을 듣고 그 고통을 아시고 내려오셔서 그들을 애굽인의 손에서 건져내고 그들을 인도하여 아름답고 광대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인도하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여기에 이스라엘 민족이 당한 재앙이 주는 교훈이 있습니다. 구원의 의미가 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의 구원은 그들이 무엇보다도 먼저 하나님께 부르짖은 데서 비롯되었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광복절 기념주일입니다. 특히 금년은 광복 62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62년이란 세월은 일제의 수탈과 탄압을 경험했던 세대가 역사의 배후로 물러나고 일제의 탄압과 무관한 세대가 역사의 주역으로 활동하는 시대임을 말해 줍니다. 이런 시점에서 광복이 주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지나간 미래(Vergangene Zukunft)의 저자 라인하르트 코젤렉(Reinhart Koselleck, 한철 옮김, 문학동네)은 역사해석의 도구로 ‘지나간 미래’라는 개념을 사용했습니다. 이것은 지나간 사건 속에서 그들이 가졌던 희망, 다짐, 회개, 결단과 같은 것입니다. 예를 들면, 이상화 시인은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라는 시에서 희망과 다짐과 결단을 노래합니다.
지금은 남의 땅 -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나는 온몸에 햇살을 받고, 푸른 하늘 푸른 들이 맞붙은 곳으로 가르마 같은 논길을 따라 꿈속을 가듯 걸어만 간다. . . . 내 손에 호미를 쥐어 다오. 살진 젖가슴과 같은 부드러운 이 흙을 발목이 시도록 밟아도 보고, 좋은 땀조차 흘리고 싶다. . . .
시인은 나라를 빼앗긴 절망적 상황 속에서 끝내 찾아오고야말 미래의 광복을 꿈꾸고 있습니다. 그 날이 오면 밭에 나가 땀 흘려 일해서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복지를 일구겠다는 광복의 꿈을 꾸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지나간 미래’입니다. 여기에 과거의 재앙이 주는 민족사적인 구원의 의미가 있습니다. 회복의 꿈을 꾸는 자만이 회개할 수 있고, 다짐할 수 있고, 결단할 수 있고, 그 꿈을 이룰 수 있기 때문입니다.
유다왕국이 바벨론에 유배된 것은 주전 605년, 597년, 586년 세 차례입니다. 유배지에서 고국에 돌아온 것도 주전 538년, 457년, 432년 세 차례입니다. 최초 유배로부터 각각 67년, 148년, 173년만입니다. 최초 유배로부터 67년 만에 이뤄진 제1차 귀국은 스룹바벨이 주도했고, 귀국 후 성전을 22년에 걸쳐 완공시켰습니다. 최초 유배로부터 148년 만에 이뤄진 제2차 귀국은 에스라가 주도했고, 에스라는 성벽 쌓는 일과 종교개혁을 단행했습니다. 최초 유배로부터 173년 만에 이뤄진 제3차 귀국은 느헤미야가 주도했습니다.
우리가 특별히 주목해야 할 시기는 에스라 때입니다. 스룹바벨은 해방원년 시기의 인물입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1940년대 50년대 60년대 인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에스라는 스룹바벨보다 80년 정도 후의 인물이니까 오늘날로 말하면 대충 해방 후 62년이 지난 오늘 우리 시대의 인물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느헤미야는 한 세대 후의 인물이 되겠습니다.
유다왕국과 우리나라를 비교해 볼 때, 우리나라의 형편이 유다왕국의 형편보다 훨씬 낫습니다. 유다민족은 유배되었지만, 우리 민족은 소수만이 유배되었을 뿐이고 대다수는 자기 집에서 그대로 살았고, 유다민족은 아무리 빨라도 67년 만에 고국에 돌아 올 수 있었지만, 그것도 소수의 인원만이, 우리는 길어야 40년 만에 해방을 맞았고, 반세기만에 경제대국을 이뤘지만, 유다왕국은 해방 후 22년이 걸려서 경우 성전을 재건축했고, 해방 후 81년이 지나서야 성벽축수를 시작할 수 있었을 뿐이니까 그 형편이 얼마나 어려웠었나를 알 수 있습니다. 유다민족에 비하면 우리 민족은 정말 복 받은 민족입니다.
나름대로 그 이유를 분석해 보면, 우리 민족은 1907년 평양대회개운동이후로 꾸준히 기독교가 발전해 왔고, 그 기독교가 왜정시기에는 독립운동과 계몽운동을 위해서 헌신했고, 재건시기에도 국가발전에 특히 학교교육과 국민계몽에 지대한 공헌을 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과거의 재앙이 주는 민족사적인 구원의 의미가 있습니다. 종교인들의 헌신과 봉사야말로 국가를 살리는 힘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유다민족의 경우 해방 후 80년이 훨씬 지난 후에서야 비로소 에스라에 의해서 회개운동과 개혁운동이 일어났기 때문에 발전의 움직임이 매우 더뎠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주목해야할 시기가 바로 에스라와 느헤미야 시대입니다. 특히 에스라는 율법에 능통한 학사였고, 말씀에로 돌아가 말씀대로 실천할 것을 강조한 종교 개혁가였고, 오늘날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바로 정치 경제 종교 여러 측면에서 기본에로 돌아가야 할 개혁과 회개운동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과거의 재앙이 오늘 우리에게 주는 민족사적인 구원의 의미가 있습니다. 변화와 회개만이 살길이기 때문입니다.
기본으로 돌아가야 할 개혁이란 것이 결코 옛 것에로 돌아가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날 정치권을 바라보면, 역사를 정리하고 새로운 미래를 향해 나아가자고 그럴듯한 명분을 내세우면서 역사 청산이란 이름아래 과거시절의 절망 속으로 국민을 끌어들이고 있고, 책임공방만 일삼으면서 과거 역사의 어두운 터널 속을 헤매고 있습니다.
오늘의 이 시대를 냉철하게 바라보면, 반미, 반기독교, 친북 좌파 민족주의 세력이 사회 곳곳에 침투해서 국민과 종교의 분열을 책동하고 있습니다. 이 나라에 비극적인 재앙을 가져다주었던 조선조말의 특징이 쇄국과 기독교탄압이었고, 그 결과가 일제탄압이었다는 점을 명심할 필요가 있습니다. 여기에 일제탄압과 6.25전쟁을 겪지 않았던 세대들에게 주는 또 다른 민족사적인 경고와 심판의 의미가 있습니다.
물론 기독교우월주의도 금물입니다. 기독교우월주의 또한 종교간 분열을 책동하기 때문입니다. 종교혼합주의적 성격으로 인해서 종교간 분쟁의 불씨가 맥을 못 추던 대한민국에 종교분쟁의 불씨가 되살아나고 있는 것도 종교우월주의 때문입니다.
18세기 후반이후 조선조의 집권층인 북인 벽파는 당쟁과 공리공론으로 소일하였습니다. 당시 왕조는 부패하였고 목민관들의 수탈은 극에 달하여 농민들은 소출의 상당부분을 세금으로 빼앗겼습니다. 농민은 농촌을 떠나 유랑하였으며 민심은 흉흉하였습니다. 당시 남인 시파를 중심으로 한 실학파는 기독교 신앙을 받아드려 평등사상과 다가올 미래세계인 천년왕국을 꿈꾸며 농지개혁을 주장하였고 양반과 중인들의 생산 활동을 권장하였으며 과거제도를 개혁하여 실용과학기술을 발전시키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들의 정당한 요구는 집권층에 의해 말살되었으며, 실학파 학자들은 천주교를 믿는 사학죄인으로 몰려 모두 참형당하거나 귀양을 갔습니다. 세종대왕 이후 400년 만에 나타난 모처럼의 국가발전 방안이 이를 주도해야 할 집권층의 필사적인 방해로 무산되었던 것입니다.
19세기 중엽에 이르러 천주학쟁이들에 대한 박해가 절정에 달했고, 수많은 기독교인들이 순교를 당하자 최제우는 기독교의 천년왕국사상과 미륵신앙에 바탕을 두고 동학을 일으켰습니다. 이후 탐관오리의 폭정을 견디지 못한 농민들이 동학혁명을 일으켜 국가개혁을 시도하였습니다. 그러나 전라도 고부에 설치되었던 이들의 집강소는 일 년이 채 못 되어 폐쇄 되었고, 녹두장군 전봉준을 비롯한 동학군은 그들의 꿈을 이루지 못하고 참형을 당하였습니다.
같은 시절 흥선대원군은 서양 강대국이 우리나라에 들어오는 것을 철저히 막는 쇄국정책을 폈습니다. 1866년 대동강에서 수교를 요구하는 미국 선박 제너럴셔먼호를 불태웠고, 같은 해에 천주교 탄압을 항의하기 위해 강화도에 들어온 프랑스 함대를 물리쳤습니다. 쇄국정책과 함께 천주교 탄압도 심화되었습니다. 하지만 쇄국정책으로 철저히 외국과의 교류를 막아 진보된 문물을 받아들이지 못해 근대화의 기회를 놓치는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그 후 조선조는 쇠락의 길을 걸었고 대한제국을 거쳐 한일합병으로 이어졌습니다. 결국 한일합당이란 비극적인 재앙은 조선조말의 쇄국과 기독교탄압정책 때문이었던 것입니다. 여기에 과거의 재앙이 주는 민족사적인 경고와 심판의 의미가 있습니다.
한편 16세기 중반에 일본과 중국은 기독교 복음과 서양문물을 받아드려 국가를 발전시켰고, 그 힘으로 결국 조선을 지배하고 능욕하는 데 활용했습니다.
일본에서는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가 1549년 7월에 일본 큐우슈우(九州)에 상륙한 예수회 신부 프란시스 사비에르(Francis Xavier)의 전도를 받고 기독교와 함께 서양문명을 받아들여 변화를 꾀하였습니다. 일본은 1854년 미국과 화친조약을 맺은 이후, 영국, 프랑스, 러시아, 네덜란드 등 서양 제국과 차례로 통상조약을 맺고 메이지유신(明治維新)을 이룩하였습니다.
중국도 당나라 때에 이미 한차례 기독교(景敎)를 수용한 경험이 있고, 또 1583년 9월, 중국 광동성에 도착한 예수회 신부 마테오 리치(Matteo Ricci)의 전도를 받고 기독교와 함께 서양문명을 받아들여 변화를 꾀하였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떠했습니까? 유럽의 각종 문물과 번역서들이 해마다 북경에 파견되는 사절들에 의해서 유입되었지만, 조선의 유학자들은 이들을 접하고도 배척하기에 급급했습니다. 그들은 천주교인들을 '사학죄인'으로 몰아 1만여 명이나 죽었는가하면, 쇄국정책을 펼쳐 서양학문이 들어오는 것을 차단하였고, 실학자들을 정치적으로 크게 탄압하였습니다.
이 당시 성리학에 바탕을 둔 양반세력들은 평등사상에 바탕을 둔 기독교 정신에 위기의식을 느껴 변화를 거부했습니다. 특히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 이하응(李昰應)은 청(淸)나라를 제외한 다른 외국과의 통상 및 교류를 꺼려 강경한 쇄국정책을 실시하였습니다. 그 결과 조선은 근세 들어 겪게 되는 엄청난 외세에 대응할 만한 적극적 대책을 마련하지 못한 채, 국제무대에서 고립되는 불행을 자초했습니다. 여기에 과거의 재앙이 주는 민족사적인 경고와 심판의 의미가 있습니다.
함석헌 선생이 뜻으로 본 한국역사에서 피력한 것처럼, 우리나라는 중국을 섬기고 중국이 되려한 사대주의 모화사상에다 변화를 거부한 쇄국주의와 현상유지주의로 인해서 당나라의 엎누름을 당했고, 거란의 도둑질을 당했고, 몽고의 짓밟음을 당했고, 여진의 시달림을 당했고, 임진란, 병자란을 거쳐 일제에 강점당하는 수치를 당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과거의 재앙이 우리 민족에게 주는 경고의 의미입니다. 개혁을 거부하면 망한다는 경고입니다. 개혁을 거부해서 망하는 것이 국가만은 아닙니다. 개인도 마찬가집니다. 개혁의 시대를 맞아서 개혁의 도전에 적절하게 응전하여 발전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잘못된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토인비가 말한 것처럼, 자기만족, 자기도취에 빠지면 그 보응으로 반드시 침몰하고 말기 때문입니다.
기독교가 16세기 중반에 일본과 중국에 큰 발전을 가져다 준 것처럼 우리나라 발전에도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18세기 남인 시파들을 중심으로 받아드린 천주학은 비록 103년에 걸친 극심한 박해로 인해서 국가 발전에 기여한 바가 크지 않지만, 천국신앙으로 사회개혁을 꾀하고, 서로를 교우라고 부르며, 양반과 상놈의 신분을 타파했다는 점에서는 나름대로 국가발전에 기여를 했습니다.
한편 개신교가 이 땅에 들어온 때는 일본이 조선을 삼키려는 야욕을 들어내기 시작하던 때였습니다. 막 조선 땅에 복음의 씨를 뿌려 싹을 내던 단계였지만, 분연히 일어서 민족운동과 애국운동을 일으켰고, 민중을 계몽하며, 항일투쟁과 구국운동에 앞장섰습니다. 조선의 개신교 신자들이 남긴 업적은 크게 세 가지입니다.
첫째, 이 땅에서 외세를 물리치고 자주독립국가를 이룩하는데 헌신했습니다. 이런 일을 행한 사람들 중의 대표적인 사람이 월남 이상재 선생입니다.
둘째, 곳곳에 신학문을 가르치는 학교를 세워 민족계몽운동에 헌신하였습니다. 이들 가운데 대표적인 사람이 오산학교를 세운 남강 이승훈 선생입니다.
셋째, 민족독립운동에 헌신하였습니다. 1919년 3월 1일에 있었던 독립만세운동은 우리 민족사에 있어서 영원히 잊을 수 없는 거국적인 민족운동이었습니다. 그런데 독립선언문의 기초자인 육당 최남선을 비롯해서 서명자 33인 가운데 16명이 기독교인이었습니다. 여기에 과거의 재앙이 주는 민족사적인 구원의 의미가 있습니다. 기독교가 바로 서서 제 역할에 충실할 때 국가의 미래가 보장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8.15직후 겪게 된 6.25전쟁은 민족분열을 책동하고 사회주의 혁명을 꾀한 좌파들에게 그 책임이 큽니다. 남북의 엄연한 현실 앞에서조차 오늘날 좌파들은 민족분열의 책임과 전쟁의 책임을 전적으로 우파와 미국에 돌리고 있습니다.
62번째 광복절을 맞은 오늘 우리는 20세기 초의 상황과 비슷한 상황 속에 놓여 있습니다. 오히려 그 때보다 더 못한 것은 우리 민족이 남북으로 나누어져 있는 현실이고, 더 나은 것은 남쪽이 경제적인 성공을 이뤘다는 점입니다. 그러나 여전히 정치 군사적으로는 미국, 일본, 중국, 러시아 등 강대국들의 틈바구니에 끼어있고, 눈치를 봐야합니다. 금년에 대통령 선거가 있습니다만, 누가 대통령이 되느냐에 따라서 대한민국의 국제정치적 자리매김이 달라질 것입니다. 국제적으로는 한쪽에 치우치는 경향을 지양하고, 균형을 유지하는 것이 바람직하며, 국내적으로는 국력을 신장하고, 분열을 촉발시키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여기에 과거의 재앙이 주는 민족사적인 구원의 의미가 있습니다.
기독교인들의 꿈과 희망, 헌신과 봉사, 변화와 회개만이 기독교를 살리고, 민족을 살릴 수 있습니다. 기독교인들이 바로 서서 제 역할에 충실할 때 기독교를 살리고, 민족을 살릴 수 있습니다. 이것이 광복의 달을 맞이한 우리 성도들에게 우리의 민족사가 주는 교훈입니다. 이 교훈을 마음에 잘 새기도록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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