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을 뜬다는 것(막 8:17-25)
본문
눈을 뜬다는 것(막 8:17-25)
오늘은 복음서에 실린 소경이 눈을 뜬 사건들에 대해서 살펴보기를 원합니다. 복음서를 보면, 메시아가 하는 일들 중에 소경의 눈을 뜨게 하는 일이 중요 항목으로 포함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11장 5절에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는 말씀이 있는데, 이 일들이 바로 메시아가 하는 일들입니다. 2천 년 전 예수님 시대에 소경이 많았고, 사회적으로 가장 비참한 신세였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소경, 앉은뱅이, 문둥이, 귀머거리, 죽은 자, 가난한 자, 이 여섯 종류의 사람들 가운데 가장 먼저 언급된 것이 소경입니다. 메시아가 오시면 가장 시급하게 해야 할일이 소경을 눈뜨게 하는 것입니다. 복음서에 소경에 대한 언급이 많고, 소경의 눈을 뜨게 한 사건이 많은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소경이 눈을 뜬 사건들에서 우리가 주목해 봐야할 중요한 점이 몇 가지 있습니다.
첫째, 소경들은 눈을 뜨고자 하는 열망이 있었다는 것입니다(마 9:27).
둘째, 예수님이 자기들의 눈을 뜨게 해줄 것이란 확실한 믿음이 있었다는 것입니다(마 9:28). 또 소경의 눈을 뜨게 하는 것이 오실 자 메시아란 표적이다는 것입니다.
셋째, 눈을 뜬 후에 만물을 밝히 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막 8:25). 아무 것도 볼 수 없던 소경이 눈을 뜨게 되면 만물을 밝히 보게 됨으로써 새로운 세계, 곧 빛의 세계를 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플라톤의 동굴의 비유에서처럼, 동굴에 갇혀 있던 죄수가 희미한 불빛에 만들어지는 그림자로만 세상을 파악하다가 자유의 몸이 되어 동굴 밖으로 나왔을 때, 새로운 세계, 빛의 세계를 보게 된 것처럼 눈을 뜬다는 것은 무언가 새로운 세계, 참 세계, 영원한 세계를 만나게 된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넷째, 소경이 눈을 뜨는 것을 지켜본 사람들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는 것입니다(마 15:31). 눈을 뜨는 것은 눈을 뜬 사람만의 축복이 아니라, 주변사람들에게까지도 축복이 된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다섯째,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을 우매한 소경들이라고 질타하시면서 화가 있을 것이라고 저주하셨습니다(마 23:17). 바리새인들의 가치관과 종교에 문제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무엇이 더 중요하고, 덜 중요한지, 무엇이 옳고 그른 것인지를 바르게 구별할 줄 몰랐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의 조상들에게 주신 계명들의 참 뜻이 첫째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것이고, 둘째는 제 몸처럼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인데(마 22:37-40), 사랑은 고사하고, 오히려 사회적 신분이 낮은 사람들이 지키기 어려운 울타리 법들을 수없이 만들어놓고, 그것을 지키지 못하는 사람들을 죄인 취급하였으며, 정작 자기들은 우월감이란 죄에 빠져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육체적인 소경보다도 영적 소경이 훨씬 더 심각한 문제란 점을 지적하신 것입니다. 여기서 바리새인들은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한 자들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어리석고, 우둔하며, 깨닫지 못한 자들입니다. 민중의 지도자란 자들이 이 지경이니, 그들이 이끄는 민중이 구덩이에 빠지지 않는다는 보장이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이런 무책임한 윤리의식과 무지몽매함을 고발한 소설이 1998년에 노벨문학상을 받은 주제 사라마구의 눈먼 자들의 도시입니다. 이 소설은 어느 날 갑자기 멀쩡하던 사람이 눈이 멀고, 눈먼 사람을 만나는 사람도 눈이 멀고, 그래서 나중에는 모든 시민들이 다 눈이 멀어버리는 비극과 눈먼 상황에서 벌어지는 참혹함을 그렸습니다. 보지 못한다는 것, 그것이 육체적 장애이든, 영적 장애이든, 사회적 병폐이든 간에 흑암에 있다는 것은 비참한 것입니다.
이 소설에서 주제 사라마구는 오늘날 현대인들이 다 실명한 것은 아니지만, 다 실명 상태에 놓여 있다고 말합니다. 볼 수는 있지만, 보지 않는 눈먼 자들이란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눈먼 다수가 지배하는 세상은 참혹하기 그지없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사회는 이런 다수의 눈먼 자들의 횡포와 폭력의 지배아래 있고, 또 그것에 빌붙어 살기를 즐겨한다는 것입니다. 눈먼 자들의 횡포는 정치, 경제, 종교, 교육 어디에서나 이뤄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눈먼 다수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눈뜬 한 사람이 더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눈먼 대중이나 눈먼 ‘대’자 붙은 큰 것들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눈뜬 모세, 눈뜬 엘리야, 눈뜬 예레미야와 같은 한 사람의 예언자가 국가를 살리고 민중을 살리는 것입니다.
이것을 잘 밝혀 주고 있는 소설이 주제 사라마구의 눈먼 자들의 도시입니다. 이 소설에서는 유일하게 눈이 멀지 않은 단 한사람, ‘안과의사의 아내’로 인해서 인간관계가 점차 회복되고, 인간애가 살아나고, 연대의식이 살아나고, 나눔의 정신이 살아나고, 타인에 대한 책임의식이 살아나고, 그런 이들의 희생과 헌신을 통해서 오랫동안 오물구덩이 속에서 헤매던 인간들이 벌거벗고 깨끗하게 물로 씻듯이 망하기 직전에 있던 눈먼 죽음의 도시가 살아나기 시작합니다.
눈먼 자들의 도시에서는 명예와 권세와 물욕에 빠진 우매한 민중,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는 눈먼 지도층이 나라를 망치고 도시를 죽음으로 몰아갑니다. 그런데 후편 눈뜬 자들의 도시에서는 우매한 정권이 전편 눈먼 자들의 도시에서 도시를 죽음에서 건져낸 실명을 피했던 유일한 한 사람, 안과의사의 부인을 선거에서 전체 투표의 70퍼센트 이상의 백지투표를 했던 눈뜬 자들의 주모자로 몰아서 암살을 합니다.
2천 년 전 참 빛, 생명의 빛, 곧 세상의 빛이신 예수님이 이 눈먼 세상에 빛을 비췄지만, 눈먼 세상이 깨닫지 못했다고 했습니다(요 1:4-5). 눈은 있지만 보지 못하는 눈멀고 우매한 사두개인들과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님에게 누명을 씌워서 십자가에 못 박아 죽었습니다. 그러나 비록 눈뜬 자들의 도시에서 눈을 뜬 자들의 대표격인 안과의사의 부인을 암살하지만, 국민의 70퍼센트가 넘는 눈뜬 자들을 결코 어찌해 볼 수 없듯이 눈멀었던 유대의 집권자들이 유일하게 눈을 떴던 한 예언자, 예수님을 죽었지만, 그 어떤 세력도 과거 2천 년 동안 기독교를 말쌀하지는 못했습니다.
‘눈을 뜬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눈을 뜬다’라는 것은 여러 가지 의미가 있을 수 있습니다. 경제에 눈을 뜬다든지, 학문, 지혜, 사랑, 행복, 믿음 또는 영적 세계에 눈뜨는 것을 의미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눈은 어떻게 뜨여지는 것입니까? 타고날 수도 있고, 노력으로도 눈을 뜰 수가 있는데, 배움이나 기도로써 눈을 뜰 수가 있습니다. 구상 시인이 노래했던 것처럼, 두 이레 강아지 눈만큼이라도 눈을 뜰 수 있도록 하나님께 간구하는 것은 매우 가치 있고 소중한 일입니다. 눈을 떠야 보고 있는 것에 대한 진실을 판단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의 이야기로 다시 돌아갑니다. 복음서 9장에서 요한은 소경이 눈을 뜨는 이야기를 통해서 예수님을 우리에게 생명의 빛을 주시는 분으로 소개하였습니다. 그리고 마가는 복음서 8장과 15장에서 우리가 눈을 뜨게 되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던 예수님을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아들로 볼 수 있게 된다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복음서 저자들은 소경이 눈을 뜬 이야기들을 통해서 우리들에게 영적으로 눈을 뜨는 일의 중요성을 교훈하고 있습니다.
눈이 멀면 어떻게 됩니까? 하나님의 참 예언자 엘리야를 죽이려 했던 이스라엘의 왕 아합과 왕후 이세벨처럼 진실을 죽이고 정의를 죽이게 됩니다. 또 참 예언자 예레미야를 죽이려 했던 유다왕 시드기야와 거짓 예언자 하나냐처럼 국가를 말아먹고, 국민을 외국의 포로가 되게 합니다. 또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았던 사두개인들과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처럼 명예와 권세와 재물 때문에 하나님을 헛되이 섬기게 되고, 하나님의 계명을 어기는 자들이 되며, 결국에는 나라를 망하게 하고 맙니다. 북왕국 이스라엘이 앗수리아제국에 망하고, 남왕국 유다가 바벨론제국에 망하고, 해방 후 이스라엘이 로마제국에 완전히 망하고 만 것이 다 통치자들과 민중의 눈이 멀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눈을 뜨려는 노력이 중요합니다. 눈이 멀었는데도 눈이 멀었는지조차 모르고 사는 것은 비참한 것입니다. 헨렌 켈러는 죽기 전에 3일 동안만이라도 눈을 떠서 이 세상을 보는 것이 유일한 소원이었습니다. 헬렌 켈러는 눈은 뗬지만 정작 눈이 멀었을 수도 있는 친구들에게 이렇게 충고하고 싶다고 했습니다.
이제부터 여러분은 내가 만약 내일 소경이 된다면, 오늘 내가 무엇을 보고 살까 그런 생각으로 인생을 살아가라. 내가 만약 내일 귀머거리가 된다면, 오늘 내가 어떤 음악을 들을까 그런 생각으로 인생을 살아가라. 그러면 결코 여러분의 인생이 허무하게 되지 않을 것이다.
헬렌 켈러의 이 글을 통해서 우리는 과연 헬렌 켈러만큼이라도 눈을 뜨고 있는지, 눈멀고 귀가 먼 그녀보다 더 큰 흑암 속에 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과연 우리가 그녀처럼 눈먼 상태를 알고 눈뜨기를 소원하고 있는지를 자문해 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주보에 실린 그림에서 보시는 대로 서예가 김혜명님은 작품에 물고기와 이크투스(ixthus)라는 문양을 크게 새겨 넣고 다음과 같이 적고 있습니다.
물고기는 잠잘 때 눈을 감지 않는다. 죽을 때도 눈을 뜬다. 사람들은 이런 모습을 물고기 특유의 현상이라고 쉽게 생각한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에게 깊은 교훈을 준다. 초대교회시절 많은 기독교인들이 핍박을 피해 로마외곽에 시체를 매장하는 지하동굴로 도피하여 십대에 걸쳐 삼백년 동안 생활하였다. 이곳이 바로 카타콤이다. 사람들은 카타콤 벽면에 물고기 그림을 새겨 넣었다. 자나 깨나 영적으로 깨어 있으라는 믿음의 언어이다.
눈을 뜬다는 것은 기독교인을 상징하는 이크투스 즉 물고기처럼 자나 깨나 영적으로 깨어 있는 것을 의미한다는 뜻입니다.
심청전의 클라이맥스는 심봉사가 눈을 뜨는 것입니다. 눈을 뜨는 것만큼 더 가치 있고 소중한 것이 없다는 내용의 이야기입니다. 물론 심청이의 효심을 강조하는 이야기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심봉사의 눈을 뜨고자하는 열망일 것입니다.
심청전에서 심봉사가 눈을 뜨고는 “깜깜한 우리 눈이 부모 얼굴 모르더니 밝고 밝은 이 세상에 오색 분간하겠구나. 일월성신 보겠구나, 산천초목 보겠구나. 용루봉각(용의 누각과 봉황의 대궐) 보겠구나. 의관문물 보겠구나. 얼씨구 지화자”하고 노래합니다. 여기서 ‘의관물문’이란 것은 당시로써는 삼강오륜과 기타 문물제도라 할 수 있고, 오늘날로 말하자면 도덕과 법률, 문화 및 문명을 말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눈을 뜬다는 것은 최근 세례를 받고 기독교에 귀의한 이어령 전 장관이 지적한 것처럼 낡은 세계를 상징하는 눈 먼 소경의 세계를 새로운 눈뜬 세계로 개혁한다는 의미를 갖습니다.
마가복음 8장에서 소경이 눈을 뜬다는 것의 의미는 만물을 밝히 보는 것입니다. 여기서 만물을 밝히 본다는 것은 예수님에 대해서 희미하게 알던 것을 명확하고 분명하게 아는 것을 의미합니다. 만물을 밝히 보게 될 때, 29절에서 베드로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하듯이, 또 15장 39절에서 백부장이 십자가에 못 박혀 운명하시는 예수님을 향해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하듯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분의 제자가 되어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하나님의 일과 복음의 일을 위해서 헌신하는 자임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눈을 뜬다’라는 것은 결국 옳은 가치를 아는 것이고, 옳은 삶의 목적을 갖는 것이며, 육신의 눈에 보이는 세계를 뛰어넘어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 세계까지를 볼 수 있는, 그래서 하나님을 인정하고, 예수님을 인정하고, 성령님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나라의 정의와 평화를 위해서 헌신하고 봉사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눈을 뜨고자 하는 절박한 노력들을 하시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오늘은 복음서에 실린 소경이 눈을 뜬 사건들에 대해서 살펴보기를 원합니다. 복음서를 보면, 메시아가 하는 일들 중에 소경의 눈을 뜨게 하는 일이 중요 항목으로 포함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11장 5절에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는 말씀이 있는데, 이 일들이 바로 메시아가 하는 일들입니다. 2천 년 전 예수님 시대에 소경이 많았고, 사회적으로 가장 비참한 신세였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소경, 앉은뱅이, 문둥이, 귀머거리, 죽은 자, 가난한 자, 이 여섯 종류의 사람들 가운데 가장 먼저 언급된 것이 소경입니다. 메시아가 오시면 가장 시급하게 해야 할일이 소경을 눈뜨게 하는 것입니다. 복음서에 소경에 대한 언급이 많고, 소경의 눈을 뜨게 한 사건이 많은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소경이 눈을 뜬 사건들에서 우리가 주목해 봐야할 중요한 점이 몇 가지 있습니다.
첫째, 소경들은 눈을 뜨고자 하는 열망이 있었다는 것입니다(마 9:27).
둘째, 예수님이 자기들의 눈을 뜨게 해줄 것이란 확실한 믿음이 있었다는 것입니다(마 9:28). 또 소경의 눈을 뜨게 하는 것이 오실 자 메시아란 표적이다는 것입니다.
셋째, 눈을 뜬 후에 만물을 밝히 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막 8:25). 아무 것도 볼 수 없던 소경이 눈을 뜨게 되면 만물을 밝히 보게 됨으로써 새로운 세계, 곧 빛의 세계를 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플라톤의 동굴의 비유에서처럼, 동굴에 갇혀 있던 죄수가 희미한 불빛에 만들어지는 그림자로만 세상을 파악하다가 자유의 몸이 되어 동굴 밖으로 나왔을 때, 새로운 세계, 빛의 세계를 보게 된 것처럼 눈을 뜬다는 것은 무언가 새로운 세계, 참 세계, 영원한 세계를 만나게 된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넷째, 소경이 눈을 뜨는 것을 지켜본 사람들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는 것입니다(마 15:31). 눈을 뜨는 것은 눈을 뜬 사람만의 축복이 아니라, 주변사람들에게까지도 축복이 된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다섯째,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을 우매한 소경들이라고 질타하시면서 화가 있을 것이라고 저주하셨습니다(마 23:17). 바리새인들의 가치관과 종교에 문제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무엇이 더 중요하고, 덜 중요한지, 무엇이 옳고 그른 것인지를 바르게 구별할 줄 몰랐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의 조상들에게 주신 계명들의 참 뜻이 첫째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것이고, 둘째는 제 몸처럼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인데(마 22:37-40), 사랑은 고사하고, 오히려 사회적 신분이 낮은 사람들이 지키기 어려운 울타리 법들을 수없이 만들어놓고, 그것을 지키지 못하는 사람들을 죄인 취급하였으며, 정작 자기들은 우월감이란 죄에 빠져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육체적인 소경보다도 영적 소경이 훨씬 더 심각한 문제란 점을 지적하신 것입니다. 여기서 바리새인들은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한 자들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어리석고, 우둔하며, 깨닫지 못한 자들입니다. 민중의 지도자란 자들이 이 지경이니, 그들이 이끄는 민중이 구덩이에 빠지지 않는다는 보장이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이런 무책임한 윤리의식과 무지몽매함을 고발한 소설이 1998년에 노벨문학상을 받은 주제 사라마구의 눈먼 자들의 도시입니다. 이 소설은 어느 날 갑자기 멀쩡하던 사람이 눈이 멀고, 눈먼 사람을 만나는 사람도 눈이 멀고, 그래서 나중에는 모든 시민들이 다 눈이 멀어버리는 비극과 눈먼 상황에서 벌어지는 참혹함을 그렸습니다. 보지 못한다는 것, 그것이 육체적 장애이든, 영적 장애이든, 사회적 병폐이든 간에 흑암에 있다는 것은 비참한 것입니다.
이 소설에서 주제 사라마구는 오늘날 현대인들이 다 실명한 것은 아니지만, 다 실명 상태에 놓여 있다고 말합니다. 볼 수는 있지만, 보지 않는 눈먼 자들이란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눈먼 다수가 지배하는 세상은 참혹하기 그지없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사회는 이런 다수의 눈먼 자들의 횡포와 폭력의 지배아래 있고, 또 그것에 빌붙어 살기를 즐겨한다는 것입니다. 눈먼 자들의 횡포는 정치, 경제, 종교, 교육 어디에서나 이뤄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눈먼 다수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눈뜬 한 사람이 더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눈먼 대중이나 눈먼 ‘대’자 붙은 큰 것들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눈뜬 모세, 눈뜬 엘리야, 눈뜬 예레미야와 같은 한 사람의 예언자가 국가를 살리고 민중을 살리는 것입니다.
이것을 잘 밝혀 주고 있는 소설이 주제 사라마구의 눈먼 자들의 도시입니다. 이 소설에서는 유일하게 눈이 멀지 않은 단 한사람, ‘안과의사의 아내’로 인해서 인간관계가 점차 회복되고, 인간애가 살아나고, 연대의식이 살아나고, 나눔의 정신이 살아나고, 타인에 대한 책임의식이 살아나고, 그런 이들의 희생과 헌신을 통해서 오랫동안 오물구덩이 속에서 헤매던 인간들이 벌거벗고 깨끗하게 물로 씻듯이 망하기 직전에 있던 눈먼 죽음의 도시가 살아나기 시작합니다.
눈먼 자들의 도시에서는 명예와 권세와 물욕에 빠진 우매한 민중,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는 눈먼 지도층이 나라를 망치고 도시를 죽음으로 몰아갑니다. 그런데 후편 눈뜬 자들의 도시에서는 우매한 정권이 전편 눈먼 자들의 도시에서 도시를 죽음에서 건져낸 실명을 피했던 유일한 한 사람, 안과의사의 부인을 선거에서 전체 투표의 70퍼센트 이상의 백지투표를 했던 눈뜬 자들의 주모자로 몰아서 암살을 합니다.
2천 년 전 참 빛, 생명의 빛, 곧 세상의 빛이신 예수님이 이 눈먼 세상에 빛을 비췄지만, 눈먼 세상이 깨닫지 못했다고 했습니다(요 1:4-5). 눈은 있지만 보지 못하는 눈멀고 우매한 사두개인들과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님에게 누명을 씌워서 십자가에 못 박아 죽었습니다. 그러나 비록 눈뜬 자들의 도시에서 눈을 뜬 자들의 대표격인 안과의사의 부인을 암살하지만, 국민의 70퍼센트가 넘는 눈뜬 자들을 결코 어찌해 볼 수 없듯이 눈멀었던 유대의 집권자들이 유일하게 눈을 떴던 한 예언자, 예수님을 죽었지만, 그 어떤 세력도 과거 2천 년 동안 기독교를 말쌀하지는 못했습니다.
‘눈을 뜬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눈을 뜬다’라는 것은 여러 가지 의미가 있을 수 있습니다. 경제에 눈을 뜬다든지, 학문, 지혜, 사랑, 행복, 믿음 또는 영적 세계에 눈뜨는 것을 의미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눈은 어떻게 뜨여지는 것입니까? 타고날 수도 있고, 노력으로도 눈을 뜰 수가 있는데, 배움이나 기도로써 눈을 뜰 수가 있습니다. 구상 시인이 노래했던 것처럼, 두 이레 강아지 눈만큼이라도 눈을 뜰 수 있도록 하나님께 간구하는 것은 매우 가치 있고 소중한 일입니다. 눈을 떠야 보고 있는 것에 대한 진실을 판단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의 이야기로 다시 돌아갑니다. 복음서 9장에서 요한은 소경이 눈을 뜨는 이야기를 통해서 예수님을 우리에게 생명의 빛을 주시는 분으로 소개하였습니다. 그리고 마가는 복음서 8장과 15장에서 우리가 눈을 뜨게 되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던 예수님을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아들로 볼 수 있게 된다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복음서 저자들은 소경이 눈을 뜬 이야기들을 통해서 우리들에게 영적으로 눈을 뜨는 일의 중요성을 교훈하고 있습니다.
눈이 멀면 어떻게 됩니까? 하나님의 참 예언자 엘리야를 죽이려 했던 이스라엘의 왕 아합과 왕후 이세벨처럼 진실을 죽이고 정의를 죽이게 됩니다. 또 참 예언자 예레미야를 죽이려 했던 유다왕 시드기야와 거짓 예언자 하나냐처럼 국가를 말아먹고, 국민을 외국의 포로가 되게 합니다. 또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았던 사두개인들과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처럼 명예와 권세와 재물 때문에 하나님을 헛되이 섬기게 되고, 하나님의 계명을 어기는 자들이 되며, 결국에는 나라를 망하게 하고 맙니다. 북왕국 이스라엘이 앗수리아제국에 망하고, 남왕국 유다가 바벨론제국에 망하고, 해방 후 이스라엘이 로마제국에 완전히 망하고 만 것이 다 통치자들과 민중의 눈이 멀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눈을 뜨려는 노력이 중요합니다. 눈이 멀었는데도 눈이 멀었는지조차 모르고 사는 것은 비참한 것입니다. 헨렌 켈러는 죽기 전에 3일 동안만이라도 눈을 떠서 이 세상을 보는 것이 유일한 소원이었습니다. 헬렌 켈러는 눈은 뗬지만 정작 눈이 멀었을 수도 있는 친구들에게 이렇게 충고하고 싶다고 했습니다.
이제부터 여러분은 내가 만약 내일 소경이 된다면, 오늘 내가 무엇을 보고 살까 그런 생각으로 인생을 살아가라. 내가 만약 내일 귀머거리가 된다면, 오늘 내가 어떤 음악을 들을까 그런 생각으로 인생을 살아가라. 그러면 결코 여러분의 인생이 허무하게 되지 않을 것이다.
헬렌 켈러의 이 글을 통해서 우리는 과연 헬렌 켈러만큼이라도 눈을 뜨고 있는지, 눈멀고 귀가 먼 그녀보다 더 큰 흑암 속에 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과연 우리가 그녀처럼 눈먼 상태를 알고 눈뜨기를 소원하고 있는지를 자문해 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주보에 실린 그림에서 보시는 대로 서예가 김혜명님은 작품에 물고기와 이크투스(ixthus)라는 문양을 크게 새겨 넣고 다음과 같이 적고 있습니다.
물고기는 잠잘 때 눈을 감지 않는다. 죽을 때도 눈을 뜬다. 사람들은 이런 모습을 물고기 특유의 현상이라고 쉽게 생각한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에게 깊은 교훈을 준다. 초대교회시절 많은 기독교인들이 핍박을 피해 로마외곽에 시체를 매장하는 지하동굴로 도피하여 십대에 걸쳐 삼백년 동안 생활하였다. 이곳이 바로 카타콤이다. 사람들은 카타콤 벽면에 물고기 그림을 새겨 넣었다. 자나 깨나 영적으로 깨어 있으라는 믿음의 언어이다.
눈을 뜬다는 것은 기독교인을 상징하는 이크투스 즉 물고기처럼 자나 깨나 영적으로 깨어 있는 것을 의미한다는 뜻입니다.
심청전의 클라이맥스는 심봉사가 눈을 뜨는 것입니다. 눈을 뜨는 것만큼 더 가치 있고 소중한 것이 없다는 내용의 이야기입니다. 물론 심청이의 효심을 강조하는 이야기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심봉사의 눈을 뜨고자하는 열망일 것입니다.
심청전에서 심봉사가 눈을 뜨고는 “깜깜한 우리 눈이 부모 얼굴 모르더니 밝고 밝은 이 세상에 오색 분간하겠구나. 일월성신 보겠구나, 산천초목 보겠구나. 용루봉각(용의 누각과 봉황의 대궐) 보겠구나. 의관문물 보겠구나. 얼씨구 지화자”하고 노래합니다. 여기서 ‘의관물문’이란 것은 당시로써는 삼강오륜과 기타 문물제도라 할 수 있고, 오늘날로 말하자면 도덕과 법률, 문화 및 문명을 말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눈을 뜬다는 것은 최근 세례를 받고 기독교에 귀의한 이어령 전 장관이 지적한 것처럼 낡은 세계를 상징하는 눈 먼 소경의 세계를 새로운 눈뜬 세계로 개혁한다는 의미를 갖습니다.
마가복음 8장에서 소경이 눈을 뜬다는 것의 의미는 만물을 밝히 보는 것입니다. 여기서 만물을 밝히 본다는 것은 예수님에 대해서 희미하게 알던 것을 명확하고 분명하게 아는 것을 의미합니다. 만물을 밝히 보게 될 때, 29절에서 베드로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하듯이, 또 15장 39절에서 백부장이 십자가에 못 박혀 운명하시는 예수님을 향해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하듯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분의 제자가 되어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하나님의 일과 복음의 일을 위해서 헌신하는 자임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눈을 뜬다’라는 것은 결국 옳은 가치를 아는 것이고, 옳은 삶의 목적을 갖는 것이며, 육신의 눈에 보이는 세계를 뛰어넘어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 세계까지를 볼 수 있는, 그래서 하나님을 인정하고, 예수님을 인정하고, 성령님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나라의 정의와 평화를 위해서 헌신하고 봉사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눈을 뜨고자 하는 절박한 노력들을 하시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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