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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시대에 적합한 인물: 바나바(행 11:1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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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동호
댓글 0 조회 14,370 2006.10.07 1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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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시대에 적합한 인물: 바나바(행 11:19-26)

바나바는 레위족의 유대인이었습니다. 그가 얼마나 오랫동안 예루살렘에 거주했는지, 그가 실제로 예루살렘 성전에서 제사를 돕는 레위인의 업무를 수행했는지, 그가 소유했던 땅이 어디에 얼마나 있었는지는 알 수 없었습니다. 확실한 것은 그가 유대교의 성전업무를 보는 대신에 기독교복음을 위한 전도자가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바나바는 예루살렘 교회를 위해서 밭을 팔아 바친 사람이었습니다. 교회가 처음 설립되어 뿌리를 내리는 과정에 있던 주후 30년대에는 재산을 팔아 교회에 바치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그 가운 한 사람이 바나바였습니다. 사도행전 4장 37절을 보면, “그가 밭이 있으매, 팔아 값을 가지고 사도들의 발 앞에 두었다”고 되어 있습니다. 레위인이었던 바나바가 밭을 팔아 생긴 돈을 유대교 회당이나 성전에 바치지 않고, 교회를 통해서 하나님께 드렸다는 사실이 주목할 만한 사건입니다(행 4:37). 교회 건물이나 목회자 사례비가 없었던 때인데도 교회에 그토록 많은 돈이 필요했던 것은 구제해야할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바나바를 통해서 배울 수 있는 것은 자기 것에 강한 집착을 보이는 사람은 선교하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바나바는 디아스포라 헬라파 유대인이었습니다. 헬라파 유대인들은 유대민족의 배타주의와 율법주의를 뛰어넘어 이방인을 포용할만한 선교열정과 열린 마음을 갖고 있었습니다. 디아스포라 헬라파 유대인들은 외국에 흩어져 사는 유대인 교포들을 말합니다. 헬라파 유대인들은 디아스포라의 문자적인 뜻인 ‘흩어진’이란 말보다 ‘유배’라는 말을 더 자주 씁니다. 헬라파 유대인들은 자신들을 외국에 유배되어 떠돌이처럼 사는 인생이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들이 예루살렘에 있는 헬라파 유대인 회당에서 스데반의 순교로 촉발된 박해로 인해서 또 다시 흩어지게 되었고, 그들이 페니키아와 키프로스와 안디옥까지 이동하면서 동족인 헬라파 유대인들에게만 복음을 전했는데, 그들 가운데 용기 있는 키프로스와 구레네 사람 몇이 헬라인들에게도 복음을 말하여 예수님을 전했고, 하나님의 손길이 그들과 함께 하시면서 많은 사람들이 믿고 주께 돌아오는 놀라운 역사가 있었습니다(행 11:19-21).
예수님의 제자들인 히브리파 유대인들에 의해서 시작된 복음이 떠돌이 헬라파 유대인들에게 전파되고, 흩어진 헬라파 유대인들에 의해서 그 복음이 이방인들에게 전파되면서 기독교 복음이 온 세계로 뻗어나가기 시작한 것입니다. 선교라는 이름의 복음전도를 처음 시작한 사람들은, 붙박이 히브리파 유대인들이 아니라, 고향을 떠난 떠돌이 헬라파 유대인들이었습니다. 떠돌이 헬라파 유대인들을 통해서 배울 수 있는 것은 붙박이처럼 발걸음을 떼거나 입을 떼기 어려워하는 사람은 전도하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바나바는 안디옥 교회에 파송된 목회자였습니다. 사도행전 11장 22절을 보면, 예루살렘 교회가 안디옥 일대에 복음이 전파되어 믿는 자들이 많다는 소식을 듣고, 바나바를 파송한 사실을 보게 됩니다. 고대 시리아의 수도 안디옥에 교회를 세우고, 목회자로 바나바가 뽑힌 것입니다. 23절을 보면, 바나바가 안디옥에 “이르러 하나님의 은혜를 보고 기뻐하여 모든 사람에게 굳은 마음으로 주께 붙어 있으라.”고 열심히 설교하였습니다.
바나바는 목회자로서의 자질을 제대로 갖춘 인물이었습니다.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었습니다. 착하다는 말은 하나님의 일에 유익한 인간의 성품이나 사역을 나타내는 데 자주 사용되는 말입니다. 바나바는 착하고 충성된 종으로서 하나님의 선하신 구원계획을 이뤄드리기에 합당한 자였던 것입니다. 또한 그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목회자였습니다. 그로 인해서 안디옥 교회가 크게 부흥하였고, 든든하게 세워져 나갈 수 있었습니다(행 11:24).
바나바는 위로의 아들이었습니다. 바나바에 관한 최초의 언급은 사도행전 4장 36-37절에 나옵니다. “키프로스 태생으로 레위 사람이요, 사도들로부터 바나바 곧 ‘위로의 아들’이란 뜻의 별명을 가진 요셉이, 자기가 가지고 있는 밭을 팔아서 그 돈을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놓았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가 어떤 인품의 사람이었는가를 잘 묘사해 주는 구절입니다. 바나바를 언급한 구절들을 종합해서 정리해 보면, 바나바는 위로의 사람(행 4:36), 착한 사람(행 11:24), 화목케 하는 사람(행 11:27), 긍정적인 사람(행 9:26-27), 행동하는 사람(행 9:27), 인정받는 사람(행 4:36, 행 11:22,25), 협동하는 사람(행 11:25-26),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행 11:24), 기도하는 사람(행 13:1-2), 순종하는 사람(행 11:22, 13:2-4), 신령한 사람(행 11:23, 13:2), 헌신하는 사람(행 4:37), 말씀을 가르치는 사람이었습니다(행 11:26). 이것이 바나바에 대한 성서의 평가입니다.
사도들은 그를 '바나바'로 불렀는데, ‘위로의 아들’(Son of Encouragement)이란 뜻입니다. 사도들이 그를 ‘바나바’라 부른 것은 사람들을 격려하는 그의 성품이 특별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성경 전체를 통해 유일하게 '착한 사람'으로 소개된 자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외에 착한 분이 없다고 하셨는데(막 10:18), 어떻게 해서 바나바는 착한 사람으로 불릴 수 있었을까요? 그 이유는 '위로'의 성품이 곧 하나님의 성품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위로의 하나님(God of Encouragement, 롬 15:5 NRSV)'이시고, 바나바는 '위로의 아들(Son of Encouragement)'이었습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로마서 15장 4절은 '성서의 위로(Encouragement of Scripture)'라는 말을 적고 있는데, 이는 위로가 우리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말씀에서 나오는 것임을 암시합니다. 바나바가 어떻게 위로의 아들이란 좋은 별명을 얻을 수 있었을까요? 그것은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이 자기 말이 아니라, 성서에서 나오는 말씀이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바나바는 바울의 멘토르였습니다. 그는 인물을 볼 줄 아는 사람이었고, 그 인물을 키우고 후원하는 달란트를 가진 멘토르(Mentor)였습니다. 멘토르는 트로이의 목마로 유명한 전쟁영웅 오디세우스(Odysseus)의 친구이자 충실한 조언자로서 오디세우스의 아들 텔레마코스가 장성해 아버지를 구할 때까지 항상 곁에서 그를 가르치고 이끌어 주었던 스승이었습니다. 여기서 유래된 말이 멘토르인데, 현명하고 믿을 만한 의논 상대나 스승, 또는 영향력 있는 후원자를 말할 때 쓰입니다.
바울이 다메섹(다마스쿠스)으로 가던 길에서 주님을 만난 후 그리스도께 헌신을 결심하고 유대인의 회당에 들어가 복음을 전하자 그들이 바울을 죽이려고 달려든 적이 있었습니다. 겨우 피신한 바울은 곧장 예루살렘에 상경하여 사도들을 만나려 했으나 면담의 기회조차 얻질 못했습니다. 이때 사도들을 직접 찾아다니며 바울의 회심과 그의 믿음이 진실한 것임을 알려 바울로 하여금 복음사역의 일원이 되는 전기를 마련한 사람이 바나바였습니다. 사도행전 9장 26-27절을 보면, "사울이 예루살렘에 가서 제자들을 사귀고자 하나 다 두려워하여 그의 제자 됨을 믿지 아니하니, 바나바가 데리고 사도들에게 가서 그가 길에서 어떻게 주를 본 것과 주께서 그에게 말씀하신 일과 다메섹에서 그가 어떻게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히 말하던 것을 말하였다."고 그가 행한 일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여호와는 유대인만의 하나님이라고 믿었던 배타적이고 율법적인 히브리파 유대인 기독교인들에게 바울을 소개하여 높은 유대인의 장벽을 뛰어넘어 세계로 복음을 가져가게 할 위대한 사도를 만든 그 한 가지 공로만으로도 바나바는 중요하기 이를 데 없는 인물입니다.
바울 곁에 바나바가 있었던 것은 크나큰 행운이요 은혜였습니다. 사도들이 바울의 과거만을 회상하며 의심하고 두려워하며 그와의 대면을 꺼려 할 때에 바나바는 바울에게서 사도들이 보지 못하는 무한한 가능성을 보았고, 마치 땅 속에 묻힌 보물을 발견하고 기뻐하여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산 사람처럼(마 13:44), 또 매우 값진 진주를 발견한 후에 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귀한 진주를 산 사람처럼(마 13:46) 바울이 위대한 사도로 성장하는 일에 혼신의 힘을 쏟은 멘토르였습니다. 예수님은 이와 같은 “의인들은 자기 아버지 나라에서 해와 같이 빛나리라”(마 13:43)고 하셨습니다.
또 바나바는 바울에게 자신과 동역해줄 것을 처음으로 요청한 사람입니다. 스데반이 순교하던 날 살벌한 박해를 피해 헬라파 유대인들이 흩어져 고대 시리아의 수도 안디옥에까지 이르렀습니다. 예루살렘교회는 그곳으로 바나바를 파송했습니다. 바나바는 부흥하는 안디옥 교회를 섬기면서 협력 목회자의 필요성을 절감하였습니다. 일찍이 바울 안에 감춰진 무한한 가능성의 보물을 발견했던 바나바는 바울이 칩거하던 터키 남단에 위치한 다소에까지 가서 그를 찾아내 데려와서 안디옥 교회에 중책을 맡겼으며, 그를 돕고 협력하는 후원자의 역할을 자진해서 맡아했습니다. 처음에 바나바는 바울을 그의 협력자로 불러왔지만, 그의 가능성의 보물이 밖으로 돌출되면서 바나바는 기꺼이 그를 자신의 주연 자리에 서게 하였고, 자신은 그를 돕는 조연이 되기를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해서 바나바는 불세출의 인물, 바울을 키워냈던 것입니다. 바나바는 기꺼이 기득권을 버리고 자신보다 뛰어난 바울을 앞장 세웠으며, 함께 협력했던 착한 사람이었습니다. 이 두 사람은 합심해서 일 년 동안 안디옥 교회를 섬겼고, 또 함께 선교여행을 구상하고 실행에 옮겼습니다. 이들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Christian)이란 고유명사가 생겨나게 되었습니다(행 11:25-26).
바나바는 마가의 멘토르였습니다. 바나바는 크게 실수한 자일지라도 가능성이 보이면 그에게 재기할 기회를 주는 일을 꺼리지 않았습니다. 그런 방식으로 바나바는 미숙하고 경솔한 행동을 마다않던 그래서 바울로부터 외면을 당했던 마가 요한을 위로의 사도답게 용기를 북돋아 다시 전도자로 세워 큰 일군이 되게 하였습니다.
바울조차도 마가의 가능성을 보지 못했습니다. 바울은 제1차 선교여행 때 일행을 버리고 중도에서 귀향해 버린 마가를 용서하려 하지 않았고(행 13:13), 끝까지 바울은 제2차 여행에 마가를 대동하지 않으려 했습니다. 바울의 고집이 너무 완고하여 꺾을 수 없다는 것을 안 바나바는 한 젊은 일군을 위해서 기꺼이 사랑하는 동역자 바울과 갈라섰습니다. 사도들이 바울의 단점을 보았다면, 바나바가 바울의 장점을 보고 그를 픽업하여 위대한 이방인 사도가 되게 하였듯이, 바울이 마가의 단점을 보았다면, 바나바는 마가의 장점을 보고 그가 성장하는 것을 기꺼이 도왔던 것입니다. 바나바의 처신이 얼마나 훌륭한 것이었는지는 바울의 글들에 마가가 자주 언급되고 있는 것을 보아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은 마가를 단호히 배제했지만 바나바는 그를 힘껏 품었습니다. 마가가 일시적인 경거망동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성장하여 바울의 사역에 없어서는 아니 될 큰 인물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바나바가 그의 곁을 지켜주었기 때문에 가능할 수 있었습니다. 바나바는 바울과 “심히 다투어 피차 갈라서기”까지(행 15:39) 하면서 마가를 자신의 선교여행에 동행시켰던 뛰어난 멘토르였습니다. 후에 바울은 마가가 자신과 함께 복음을 위해서 옥에 갇혔던 동역자로 교회가 영접할 것을 명하였고(골 4:10), 자기 일에 유익하니 마가를 데려오라고 디모데에게 지시하였으며(딤후 4:11), 빌레몬서 1장 24절에서는 “나의 동역자 마가”로 부르고 있습니다. 후에 마가는 베드로의 통역관으로 로마에서 사역하였고(벧전 5:13), 베드로 사후에는 그의 설교를 회상하여 최초의 복음서인 마가복음을 저술하였습니다. 마가가 이만큼 성장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바나바가 곁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나중에 깨달은 마가의 진면목을 바나바는 훨씬 이전부터에 발견했던 것입니다. 바울은 마가를 미숙한 자로 보았지만, 바나바는 그에게 숨겨진 무한한 가능성의 보물을 보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바나바는 그 보물을 얻기 위해서 바울에게 했던 것처럼 마가에게도 똑같이 멘토르의 역할을 했던 것입니다. 바나바는 한때의 실수로 평생 배신자의 멍에를 짊어지고 패배의 쓴 잔을 마셔야했을 마가를 극적으로 회생시킨 것입니다. 사도들이 왜 요셉인 그에게 ‘바나바’란 새로운 이름을 지어 주었는지 알 수 있게 해주는 대목들입니다. 그래서였을까요? 마가는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유대인 건축에 주춧돌과 같은 중요한 모퉁이돌이 되었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잊지 않고 소개하고 있습니다(막 12:10).
바나바는 해외에 파송된 선교사였습니다. 사도행전 11장 24절은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자라. 이에 큰 무리가 주께 더하더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가 착하고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자였기 때문에 성령께서 바나바와 바울을 따로 세워 이방의 선교사로 파송하라고 말씀했을 때 즉시 순종하여 선교사로 떠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선교기간에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수많은 고난과 박해를 당했습니다. 선교사는 자기 자신에 애착이 강한 사람은 될 수 없습니다. 선교사는 자기 자신을 내어 던질 수 없는 사람은 될 수 없습니다. 선교사는 남에게 희생을 가르치면서 자신은 도무지 희생할 수 없는 사람은 될 수 없습니다. 바나바는 자신에 대한 애착을 버리고 자기 몸을 고난과 박해의 현장에 내어 던진 참으로 착한 선교사였습니다.
바나바는 훌륭한 인품을 가진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 신약성서에는 바나바의 이름으로 된 책이 한 권도 없지만, 그가 도왔던 바울이 쓴 서신들이 13권, 마가가 쓴 복음서가 한 권이나 있습니다. 학자들 가운데는 히브리서를 바나바가 썼을 가능성에 무게를 두는 자들도 있습니다. 바나바의 성공 또는 위대한 공헌은 바울과 마가란 인물을 만들어낸데 있습니다. 이것만으로도 그가 얼마나 훌륭한 인품을 지녔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 14장 12절에 보면, 디모데의 고향 루스드라 사람들이 바나바를 올림포스의 최고의 신(神)인 ‘제우스’로, 바울을 ‘헤르메스’로 생각하여 그들에게 제사를 바치려고 했던 장면이 나오는데, 바나바를 제우스로 생각한 것은 그의 외모에서 풍기는 인품과도 무관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어느 곳에나 격려를 필요로 하는 사람은 있습니다. 다소에는 아무도 인정해 주지 않는 바울이 있었고, 예루살렘에는 홀로 소외되어버린 마가가 있었습니다. 바나바는 그들을 찾아내어 격려와 위로를 아끼지 않았고, 그들이 큰 인물이 될 수 있도록 스스로 그들의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나바가 세운 위대한 공적입니다. 유대인들에 의해서 매몰될 번한 기독교를 유대인들이 상종을 꺼려하던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가져간 일, 그 일에 사도임을 자처한 바울을 발굴하여 격려하고 위로하고 협력한 일이 그가 행한 일 가운데 가장 위대한 일이었습니다. 바나바가 없이는 바울도 마가도 없었을 것이고, 그들이 없었다면, 오늘의 기독교도 없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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