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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말씀: 내가 길이요(요 1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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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동호
댓글 0 조회 12,936 2006.11.08 10: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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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말씀: 내가 길이요(요 14:1-6)

사람들은 길을 묻습니다. 어느 길로 가면 되겠느냐고 묻습니다. 근본주의자들은 오직 ‘한 길’(only way!)뿐이라고 주장하고, 다원주의자들은 ‘다양한 길’(many ways!)이 있다고 주장합니다. 어디로 가는 길을 말하는 것입니까? 궁극적 실재나 근원에 도달하는 길, 또는 어떤 정점에 도달하는 길을 말합니다. 성서에서는 이 길을 하나님께로 나가는 길, 또는 영생에 이르는 길이라고 말합니다.
요한복음 13-14장에 예수님과 제자들이 나눈 대화가운데 ‘길’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제일 먼저 말을 꺼낸 사람은 베드로였습니다. 13장 36절을 보면, 베드로가 예수님께 묻습니다. “도미네 쿠오 바디스,” 곧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이 말은 폴란드 소설가 센키비치(H. Sienkiewicz, 1846-1916)가 라틴어 개역성경(Vulgate)의 구절, “도미네 쿠오 바디스”(Domine quo vadis)라는 말에 착안하여 그리스도교 고대 전승을 토대로 󰡔쿠오바디스󰡕(1895)란 소설을 발표함으로써 유명해진 말입니다. 베드로의 이 질문에 예수님은 우리를 위하여 영원한 처소를 예비하러 간다고 하셨습니다. 14장 3절에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4절에서 ‘내가 가려는 곳에 이르는 길을 너희도 알고 있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내가 가려고 하는 영원한 처소에 이르는 길을 너희가 이미 알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자 도마가 5절에서 반문합니다. “주여,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습니까?” 그러고 나서 빌립이 8절에서 요청합니다.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 가룟 유다와 동명이인(同名異人)인 다른 유다가 22절에서 묻습니다. “주여 어찌하여 자기를 우리에게는 나타내시고 세상에게는 아니하려 하시나이까?”
이들 제자들이 묻는 질문들에 대한 총체적인 예수님의 대답이 6절입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베드로와 도마는 인생의 궁극적인 질문, 곧 영원한 처소 또는 하나님께로 나가는 길에 대해서 물었습니다. 유다는 영생을 얻을 자들에 대해서 물었습니다. 빌립은 아버지 하나님을 보여 달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아버지 하나님을 보고 아는 진리를 가르쳐 달라는 말일 것입니다. 빌립의 이 요청에 예수님은 오히려 9-11절에서 빌립에게 되물으셨습니다. “[9]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10]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이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 [11]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을 인하여 나를 믿으라.” 이 예수님의 말씀은 예수님이야말로 아버지 하나님께로 가는 길이요, 아버지 하나님을 보고 아는 진리란 뜻입니다. 예수님의 정체성을 밝히는 중대한 말씀입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란 말씀은 그 뒤에 이어지는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다.”는 말씀 때문에 더욱 명확해집니다. 예수님은 인류가 아버지 하나님께로 가는 길(the way)이요, 아버지 하나님을 보고 아는 진리(the truth)요, 영생(the life)에로 인도하는 길이란 것을 밝혀 주는 말씀입니다.
오늘날에도 마찬가지지만, 히브리서가 기록될 당시 유대인들은 간절히 “바라는 것들”이 있었습니다. 이 당시 유대인들은 아버지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길을 찾고 있었고, 선지자들의 예언대로 메시아가 나타나서 ‘올람 하바,’ 곧 이스라엘 나라의 회복을 이뤄줄 것을 간절히 바라고 있었습니다. 수많은 자칭 메시아들 가운데서 참 메시아인가를 확증할 표적을 구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유대인들은 선지자들이나 제사장들, 심지어는 천사들로부터 아버지 하나님께 나가는 해답을 얻고자 하였습니다. 그런 유대인들에게 히브리서 저자는 10장 20절에서 유대인들이 그토록 오랫동안 기다리고 기다렸던 메시아가 예수 그리스도시요, 예수 그리스도야말로 하나님께로 나가는 “새롭고 산 길”(the new and living way)이라고 하였습니다. 히브리서 10장 19-22절까지를 보면, “[19]그러므로 교우 여러분, 우리는 예수의 피를 힘입어서 담대하게 지성소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20]예수께서는 휘장을 꿰뚫어서 우리에게 새로운 살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그런데 그 휘장은 곧 그의 육체입니다. [21]그리고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집을 다스리시는 위대한 제사장이 계십니다. [22]그러니 우리는 확고한 믿음을 가지고 참된 마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갑시다. 우리는 마음에다가 예수의 피를 뿌려서 죄책감에서 벗어나고, 맑은 물로 몸을 깨끗이 씻었습니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의 진정한 뜻은 이렇습니다. 성소와 지성소 사이에 곧 우리와 하나님사이를 휘장이 가로막고 있었는데, 여기서 휘장은 죽음의 계곡과 같은 것이어서 하나님께 나아갈 길을 막고 있었는데, 예수님께서 당신의 육체로 그 휘장을 대신하셨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육체는 하나님께 나아가는 ‘새롭고 산 길을 연 다리’란 것입니다. 21절의 ‘위대한 제사장’이란 말은 대제사장이란 뜻으로써 우리와 하나님 사이에 놓인 길이 막혔거나 건너기 어렵던 것을 친히 자기의 육체로 새로운 길, 생명의 길을 개통하신 자란 뜻입니다.
이 당시 헬라인들은 플라톤 철학의 영향을 받아 땅 위에 있는 모든 것은 하늘 위의 영원한 세계에 있는 이상적인 것의 불완전한 모형에 지나지 않는다고 믿고, 보이지 않는 참 세계를 이데아의 세계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헬라인들은 이 보이는 유한한 그림자의 세계에서 보이지 아니하는 이데아의 영원한 세계, 곧 참 실재의 세계로 옮겨갈 수 있는 길을 찾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철학자들로부터 참 실재에로 나아가는 해답을 찾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히브리서 저자는 예수 그리스도야말로 참 실재에로 나아가는 유일한 길이라고 확신하였습니다. 그러므로 히브리서 저자는 12장 2절에서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고 하였습니다. 영어 성경에는 “우리가 가진 믿음의 창시자요 완성자이신 예수님께 우리의 두 눈을 고정시킵시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히브리서 저자와 마찬가지로 요한도 예수님을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는다고 확신하였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이야말로 영생에로 인도하는 참된 길이기 때문입니다.
인생에는 두 개의 길이 있습니다. 멸망으로 가는 길이 있는가하면, 영생으로 가는 길이 있고, 죽는 길이 있는가 하면, 사는 길이 있고, 어둠의 길이 있는가하면, 빛의 길이 있고, 불의한 길이 있는가하면, 의로운 길이 있고, 잘못된 길이 있는가하면, 옳은 길이 있고, 거짓된 길이 있는가하면, 진실한 길이 있고, 쉬운 길이 있는가하면 어려운 길도 있습니다. 예수님이 인도하는 길이 영생으로 이어지는 길이요, 빛의 길이요, 살림의 길이요, 진리의 길이요, 쉬운 길이란 것이 성서의 주장입니다.
예수님께서 인도하는 길은 모세가 이스라엘 민족을 이집트에서 이끌어 내어 광야로 인도한 길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 길입니다. 조상들이 광야에서 모세가 주는 물을 마셨어도 다시 목말랐지만, 예수님께서 주시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고,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요 4:14)고 하셨습니다. 또 조상들이 광야에서 모세가 준 떡을 먹고도 죽었지만, 예수님께서 주시는 떡을 먹는 자는 영원히 살 것이라고 하셨습니다(요 6:58). 또 예수님은 무리를 하나님께 인도하는 선한 목자로써 무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린다고 하셨습니다(요 10:15). 이런 점에서 예수님은 자기를 희생시켜 영생으로 가는 길이 되셨습니다.
길이 한 길만은 아닐 것입니다. 이 사람 저 사람들이 시도했거나 닦아놓은 길들이 많은 것도 사실입니다. 그런데 성서에서는 이 모든 다양한 길들이 죽음이란 깊은 계곡이나 강이나 바다에서 끊긴다고 봅니다. 출애굽 사건에서 이집트를 탈출한 이스라엘 민족이 홍해바다에 가로막힌 것과 같습니다. 또 사막에서 빠져나온 이스라엘 민족이 가나안 땅을 앞에 두고 요단강에 가로막힌 것과 같이 더 이상 길이 이어지 못한다고 봅니다.
성경에서 물은 죽음을 상징하기 때문에 물에서 건짐을 받았다는 것이 이스라엘 민족과 초기 기독교인들의 신앙고백입니다. 노아의 여덟 식구가 물에서 건짐을 받았고, 이스라엘 민족이 홍해에서 건짐을 받았으며, 죽음의 강 요단을 건너 가나안 복지에 들어갔으며, 요나도 물에서 건짐을 받았습니다. 같은 맥락에서 예수님의 제자들이 갈릴리 호수에서 수차례 건짐을 받고 있고, 계시록 15장 2-4절에 언급된 하늘 보좌 앞 불이 섞인 유리바다 가에 선 성도들도 홍해 또는 소돔과 고모라를 삼켰던 불바다 또는 박해로 상징되는 죽음의 바다를 건넌 후에 바닷가에 서서 구원을 주신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그리스신화에서도 죽음의 세계인 음부에 이르는 길을 아케론 강으로 표현하고 있고, 지하세계에 도달하기까지 여러 개의 강들을 건너야 하는 것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비통의 강(아케론)을 건너면, 시름의 강이 나오고, 이 시름의 강을 건너면 불의 강이 나오고, 이 불의 강을 건너면, 망각의 강이 나옵니다. 이처럼 물은 흑암과 죽음을 상징합니다. 그 반대로 해변은 빛과 구원을 상징합니다. 해변은 흑암과 죽음의 터널을 벗어나 부활한 자들이 밝고 안전한 곳에 도달한 상태를 상징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문제는 누가 우리를 바다 건너 혹은 강 건너 해변으로 옮겨 줄 것인가라는 것입니다. 누가 우리를 위해서 홍해를 육지처럼 건너게 해주며, 요단강을 육지처럼 건너게 해줄 수 있습니까? 누가 죽음의 계곡에 다리를 놓아 건너게 해줄 수 있습니까? 이 땅에 그 누구도 예수님 말고는 자기를 희생시켜 다리를 놓아 준 사람이 없습니다. 석가모니도 모하메드도 공자도 소크라테스도 그 누구도 우리를 위해서 다리가 되어 준 사람은 없지 않습니까? 사이먼 앤 가펑클(Simon & Garfunkel)의 노래처럼 “성난 물결 위에 놓인 다리처럼 내가 그대를 위해 다리가 되어 주리라.”(Like a bridge over troubled water I'll lay me down.)고 노래할 수 있는 사람, 또 실제로 우리를 위해서 다리가 되어 줄 수 있는 사람이 누굽니까? 당신이 지쳐서 작게 느껴질 때, 당신의 눈에 눈물이 고일 때, “내가 당신의 눈물을 다 닦아 줄게”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누굽니까? 힘들고 어려운 때, 친구들조차 다 떠나버린 때, “내가 네 편이 되어 주리라. 성난 물결 위에 다리처럼 내가 그대를 위해 다리가 되어 주리라.”고 나서 줄 사람이 누굽니까?
죽음의 바닷가까지, 나락의 강가까지, 죽음의 계곡에까지 인도하는 길은 다양합니다. 이곳까지 도달하는 길은 다양하고 많은 길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다음이 문제입니다. 누가 우리로 하여금 죽음의 바다 건너 광명의 해변에로 인도할 것입니까? 누가 나락의 강에 다리가 되어 주며, 죽음의 계곡에 다리가 되어 줄 것입니까? 성서는 그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라고 말합니다. 성서는 하나님이 보내신 독생자 그리스도께서 죽음의 계곡에 인류의 죗값을 위해서 당신께서 짊어지시고 매달려 죽으신 십자가로 튼튼한 다리를 놓으셨다고 말합니다.
인간은 피조물이기 때문에 그 누구라도 죽음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성난 물결 위에 놓인 다리처럼 내가 그대를 위해 다리가 되어 주리라”는 노래가사처럼, 자신의 몸을 희생시켜 인간들의 죽음의 문제를 해결해 주신 분, 십자가로 이생과 영생에 튼튼한 다리를 놓아 주신 분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 어떤 종교적 천재들도 자신의 몸을 희생시켜 이생과 영생에 다리를 놓아준 사람은 없습니다. 석가모니도 모하메드도 공자도 소크라테스도 그 누구도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전서 1장 22-24절에서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가 표적을 구하는 유대인들에게는 싫은 것이고, 지혜를 찾는 헬라인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지만, 십자가로 이생과 영생에 튼튼한 다리를 놓으신 그리스도는 예수님을 믿어 영생을 얻게 된 자들에게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가 된다고 하였던 것입니다. 이 길을 발견하신 여러분들은 행운아들입니다. 이생에서의 복된 삶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영생의 길을 발견하신 성도님들은 이 세상에서는 더 없는 가장 큰 복을 받으신 것입니다. 이 큰 축복을 마음껏 누리시면서 복된 여생을 즐기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하여 드립니다. 도마처럼, “그 길을 어찌 알겠습니까?”라고 말하는 회의론자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빌립처럼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라고 말하는 실증주의자가 되어서도 안 됩니다. 베드로처럼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고 고백하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축원하여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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