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말씀: 감사와 구원(눅 17:11-19)
본문
예수님의 말씀: 감사와 구원(눅 17:11-19)
본문 누가복음 17장 11-19절에서 긍휼을 원할 때는 열 사람이 한 목소리로 입을 모아 큰소리로 외쳤지만, 나음을 입고 난 후에 하나님께 영광 돌리며 예수님께 돌아와 감사표시한 사람은 한 사람 사마리아인뿐이었습니다. 감사표시를 잊지 않았던 그 한 사람에게 주어진 큰 축복은 그가 예수님을 제대로 만났다는 것입니다. 겉으로 드러난 현상보다는 근원적인 문제에 접근하기를 좋아하시는 예수님을 제대로 만난 것입니다. 따라서 그는 몸에 난 나병을 벌써 고침 받고 기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을 뿐 아니라, 더 큰 보너스로 영혼구원까지 받아 누리게 되었던 것입니다. 은혜를 베풀어주신 예수님께 표시한 감사, 하나님께 돌린 영광이 그의 육체건강은 물론이고, 영혼과 정신건강까지 전인적으로 치유 받게 하였던 것입니다. 단언하건데 작은 감사표시가 그의 삶의 방향과 목표와 방법까지 바꿔놓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 사마리아인은 이전과는 상당히 다른 새로운 인생을 시작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건강한 육체와 건강한 정신과 건강한 영혼까지 얻었으니, 하루하루가 새롭고 즐겁고 감사와 기쁨이 넘치는 삶을 영위해 나갈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나머지 아홉 사람은 육신의 병만 고침 받았지, 영혼구원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인간의 근원적인 문제들을 여전히 껴안고 살아가야 했을 것입니다. 사람들 가운데는 육체적으로는 건강하지만, 정신과 영혼이 병들어 사는 불행한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긍휼을 입은 사람은 열 사람이었지만, 예수님께 돌아와 사례한 사람은 한 사람 뿐이었습니다. 전 세계 65억이 넘는 사람들이 하나같이 하나님의 긍휼을 입고 살지만,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하나님께 돌아와 영광을 돌리며 그분을 섬기는 사람이 전 세계 인구의 십분의 일도 되지 않을 것입니다. 열 사람 가운데 한 사람 정도가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하나님께 돌아와 영광을 돌리는 신앙인들일 것입니다. 또 그 신앙인 열 명 가운데 한 사람 정도가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받으실만한 기독교 신앙으로 사는 사람이 아닐까 추측해 봅니다. 그보다 더 되기를 바라지만, 수많은 개척교회들이 성도들이 없어서 문을 닫는 오늘의 현실을 감안한다면 생각보다 훨씬 더 비관적일 수도 있습니다.
기독교인들은 이미 감사할 줄 아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도 없이 신앙인이 될 수 있겠습니까? 집회 때마다 참석해서 은혜를 사모하고 하나님께 감사예물을 드리는 신앙인이라면 이미 겸손을 알고 감사를 아는 사람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기독교인이 생활 속에서 감사를 실천하고 있을까요? 예수님께 나병을 고침 받았던 나머지 아홉 사람 모두가 유대인들이었는데 그들이 신앙인들이 아니었겠습니까? 당연히 신앙인들이었습니다. 예수님께 고침을 받고서도 돌아와 감사하지 아니한 아홉 명의 나환자들은 모두 다 신앙인들이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열 사람 가운데 아홉 사람이 감사할 줄을 몰랐거나 잊어버린 사람들이었습니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라도 진정으로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은 어쩌면 십분의 일에 불과할지도 모릅니다.
사마리아인 문둥병자는 가던 길을 되돌아오는 수고를 아끼지 않았습니다. 나머지 아홉 사람은 제 몸이 나은 것을 알고서 제사장에게 제 몸을 보이고 완치증서를 받은 후에 한시바삐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 재회의 기쁨을 나눌 뿐 아니라 정상적인 사회생활에 대한 기대에 부풀어 정신이 없었을 것입니다. 이런 이기적이고 자신만 아는 아홉 사람들 외에 그것도 이방인으로 취급된 사마리아 사람만이 제 정신을 차렸고, 제사장에게 제 몸을 보이고 받는 완치증서도 좋고, 한시 바삐 돌아가고픈 가족의 품도 좋고, 정상적인 사회생활도 다 좋은 것이겠지만, 무엇보다도 제 몸을 낫게 해준 고마운 분에게 최우선적으로 감사부터 하겠다는 생각을 가졌던 이 사람, 나머지 아홉 명의 유대인들이 천하게 여겼던 사마리아인은 가든 길을 되돌아오는 수고를 아끼지 않았습니다. 감사에는 수고가 따릅니다. 작은 선물하나에도 정성이 따르고, 시간과 돈의 투자가 따릅니다. 희생이 없이는 감사할 수 없다는 것을 우리는 너무나 잘 압니다. 하나님께 감사하는 생활, 여기에는 부득이 희생이 따르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그 희생은 투자가 되어 옥토에 뿌려진 씨앗처럼 백배, 육십 배, 삼십 배의 결실로 되돌아옵니다. 예수님께 되돌아와서 사례했던 사마리아 사람은 육체구원은 물론이고, 보너스로 영혼구원까지 받고, 복된 여생을 약속받지 않았습니까?
사마리아인 나환자는 제 몸의 변화에, 주변 환경의 변화에,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감사하고 찬양하고 기도한 사람들 가운데 한 사람입니다. 우리 신앙인들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에 민감하게 느끼고 반응하고 감사할 줄 알아야 합니다. 이웃의 작은 사랑과 도움에도 감사할 줄 알아야 합니다. 이렇게 하면 비단 하나님한테 뿐 아니라, 대인관계에서도 큰 유익이 찾아옵니다. 작은 일 하나하나에 감사를 잊지 않는 사람은 결과적으로 자신의 삶을 윤택하게 만듭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17-18절)는 탄식은 먼저 믿는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큽니다. 종교적인 우월감에 사로잡혀 사마리아 사람들을 개 취급하며 멸시하던 유대인들은 정작 하나님께 영광도 돌리지 않았고, 예수님을 믿지도 않았습니다. 그들이 믿었던 예수님은 병이나 고쳐주는 사람 정도였을 것입니다. 만일 그들이 예수님께 대한 뚜렷한 신앙이 있었다면, 당연히 예수님께 찾아와 믿음을 고백하고 구원을 받았을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깊이 생각해 볼 것은 종교적인 우월감, 곧 기독교 가문에서 태어났고, 오래 믿었고, 성경지식이 많고, 큰 교회에 다니는 것 등이 다 무익하다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 곧 감사의 마음을 품고 주님께로 돌아온 사마리아인처럼, 비록 종교적인 큰 전통이나 자랑거리가 없는 사람일지라도, 자신과 하나님과의 유대관계가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 있는 사람이 복을 받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언제나 감사의 마음과 감사의 행위가 나에게 있는지 살펴보고, 내가 어디에 서 있는지, 어디를 향해 달려가는지를 민감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은혜를 입고서도 감사치 아니한 다수의 무리 속에 내가 휩쓸러 가고 있지는 않는지, 아주 민감하게 느낄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께 영육의 고침을 받은 사마리아 사람이 아니더라도 믿음을 가지고 범사에 감사하며 긍정적으로 살게 되면 정신과 육체적으로 매우 건강하고 장수하게 됩니다. 미국 위스콘신-메디슨 대학 연구진에 의하면, 비관론자들은 오른쪽 뇌의 전두엽 대뇌피질 부분의 활동이 활성화되고, 긍정론자들은 왼쪽 뇌의 전두엽 대뇌피질 부분의 활동이 왕성해진다고 합니다. 따라서 비관론자들은 오른쪽 뇌의 전두엽 대뇌피질 부분의 활성화로 인해서 면역시스템에 활성화가 감소되어 몸에 질환이 생길 가능성이 높아지고, 긍정론자들은 왼쪽 뇌의 전두엽 대뇌피질 부분의 활동이 왕성해지고 면역력이 높아진다는 실험결과를 미국 PNAS 학술지(Proceedings of National Academy of Sciences)에 발표하였습니다.
학자들은 신앙이 인체에 미치는 연구를 꾸준히 진행시켜 왔는데, 2000년도 이전까지만 해도 1200편 이상의 연구발표가 있었고, 최근에는 더 과학적이고 완벽하게 데이터를 처리한 연구들이 속속 보고되고 있다고 합니다.
스트로우브릿지(Strawbridge)라는 의학자가 28년간 신앙과 건강에 관해서 연구한 결과에 의하면, 매주 교회에 출석한 신앙인과 불신자를 비교 분석한 결과, 매주 교회에 출석한 신앙인의 사망위험률이 무려 28퍼센트나 줄어들었다고 했습니다. 또 여성 성도들의 경우 골초가 담배를 끊었을 때 나타나는 긍정효과만큼 건강이 좋아진다고 했습니다. 4000명을 6년간 관찰해서 얻는 또 다른 연구결과도 위와 동일했다고 합니다. 또 하나의 논문에서는 2만 명을 상대로 비교 연구한 결과, 신앙생활을 잘했던 사람 중 백인이 7년, 흑인이 14년을 더 오래 살았으며, 사망위험률이 50퍼센트나 줄어들었다고 했습니다.
루트겐도르프(Lutgendorf)의 조사에 의하면, 557명을 6년간 조사했더니, 교회를 열심히 다닌 사람은 인체의 면역을 높여주고 수명을 연장시켜주는 interleukin-6(IL-6)의 량이 혈중에 훨씬 많았고 동시에 사망 할 확률도 78퍼센트가 줄어들었다고 했습니다.
건강한 인생을 살려면 범사에 감사해야 합니다. 남아프리카의 전 흑인 대통령 넬슨 만델라는 백인정부에 의해 26년간 감옥살이를 했습니다. 그가 출옥할 때 사람들은 그가 아주 허약한 상태로 나올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나이가 70세가 넘었는데도 불구하고 건강하고 씩씩한 모습으로 걸어 나왔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5년 만 감옥살이를 해도 건강을 잃는데 어떻게 26년 동안 옥살이를 했는데도 불구하고 그렇게 건강한 상태로 출옥할 수 있었느냐고 사람들이 물었습니다. 그는 “나는 감옥에서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 하늘을 보고 감사하고, 땅을 보고 감사하고, 강제노동을 할 때도 감사하고, 늘 감사했기 때문에 건강을 지킬 수 있었습니다.”고 말했습니다. 그 후 그는 노벨 평화상을 받았고, 대통령에도 당선되었습니다. 감사하는 사람은 건강을 지킵니다. 감사하는 사람은 사업에도 성공합니다. 어려운 위기도 극복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감사하는 사람을 통해서 기적을 허락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자녀교육에도 감사가 넘쳐나고, 직장, 사업장이 어렵다 할지라도 하나님께 감사하고, 또 교회생활, 신앙생활에도 감사하고, 이 나라와 이 민족의 장래를 바라보고 하나님께 감사하면 반드시 하나님께서 더 큰 감사를 허락하여 주십니다.
그리스 신화에 보면, 돌로 빚어졌던 갈라테이아가 피그말리온의 신에 대한 경건한 믿음과 감사 덕분에 사람으로 변하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고대세계에서 여신을 섬기는 신전이 있는 곳이면 십중팔구 성적으로 문란하였습니다. 아세라 목신(木神)이나 아스다롯 여신을 섬겼던 팔레스타인 지역도 그랬고, 아프로디테 여신을 모셨던 고린도와 키프로스 섬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피그말리온은 키프로스 섬사람으로서 아프로디테 여신을 섬겼던 조각가였습니다. 키프로스는 고린도에 못지않게 성적으로 문란한 도시였기 때문에 피그말리온은 결혼도 하지 않은 채 독신으로 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혼자 산 것은 아니고, 정교한 솜씨로 조각한 눈같이 흰 여인의 석상과 함께 살고 있었습니다. 그는 이 석상을 사랑하고 있었습니다. 아니 석상을 사랑했다기보다는 석상 같은 여성을 아내로 맞기를 염원했다고 말하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그러던 그가 아프로디테 축제 때, 제 몫의 제물을 바치고 나서 제단 앞에서 더듬거리며 기도했습니다. “신들이시여, 기도하면 만사를 순조롭게 하신다는 신들이시여, 바라건대 제 아내가 되게 하소서. 저 처녀의 석상을.....” 하려다가 차마 그럴 용기가 없어서 “석상 같은 여자를.....”, 하고선 기도를 마쳤습니다. 때마침 제단으로 내려와 제물을 흠향하고 있던 아프로디테 여신은 그 기도의 참 뜻을 알아차리고, 그 기도를 알아들었다는 표적으로 제단의 불길이 세 번 하늘로 치솟게 하였습니다. 집으로 돌아온 피그말리온은 예전과 같이 석상을 대상으로 혼자말도하고, 어루만지기도 하였는데, 예전과는 달리 석상 처녀의 몸에서 온기를 느낄 수가 있었습니다. 석상 처녀가 아프로디테의 축복을 받고 생명을 얻어 인간의 몸으로 변해 있었던 것입니다. 피그말리온은 아프로디테 여신에게 감사예배를 드린 후에 여신의 축복을 받으며 돌이 변해서 사람이 된 여성(갈라테이아)과 결혼하여 아기(파포스)를 낳아 잘 살았다는 이야기입니다.
물론 우리는 이 신화가 진실이라고 믿지 않습니다. 그리스인들도 믿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믿어야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피그말리온의 믿음과 감사, 그리고 그의 믿음이 가져다준 변화의 능력만은 믿어야 합니다. 우리들의 믿음과 감사, 그리고 정성과 희망과 기대에 따라서는 돌이 변해서 사람도 되게 할 수 있다는 진실만은 믿어야 합니다.
우리는 오늘 추수감사예배로 드리고 있습니다. 추호라도 내게는 하나님께 감사할 이유가 없다는 생각을 하지 말았으면 합니다. 자만과 오만은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는 것들입니다. 조용히 뒤돌아보면, 하나님께 감사해야할 조건들이 아주 많을 것입니다. 나는 우리 성도님들이 피그말리온과 같은 경건한 믿음으로 얻어지는 놀라운 결과들에 대한 감사가 많아지기를 바랍니다. 믿음과 감사로 육신의 병도 낫고 영혼까지 구원받는 사마리아인처럼, 작은 겨자씨가 자라서 새들이 둥지를 틀만큼 큰 나무가 되는 경험, 작은 누룩덩이가 온 가루반죽을 부풀게 하는 긍정적 변화의 경험, 이런 경험들에 대한 감사가 많아지기를 바랍니다. 이런 경험적인 감사가 값나가는 감사가 아닐까요?
본문 누가복음 17장 11-19절에서 긍휼을 원할 때는 열 사람이 한 목소리로 입을 모아 큰소리로 외쳤지만, 나음을 입고 난 후에 하나님께 영광 돌리며 예수님께 돌아와 감사표시한 사람은 한 사람 사마리아인뿐이었습니다. 감사표시를 잊지 않았던 그 한 사람에게 주어진 큰 축복은 그가 예수님을 제대로 만났다는 것입니다. 겉으로 드러난 현상보다는 근원적인 문제에 접근하기를 좋아하시는 예수님을 제대로 만난 것입니다. 따라서 그는 몸에 난 나병을 벌써 고침 받고 기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을 뿐 아니라, 더 큰 보너스로 영혼구원까지 받아 누리게 되었던 것입니다. 은혜를 베풀어주신 예수님께 표시한 감사, 하나님께 돌린 영광이 그의 육체건강은 물론이고, 영혼과 정신건강까지 전인적으로 치유 받게 하였던 것입니다. 단언하건데 작은 감사표시가 그의 삶의 방향과 목표와 방법까지 바꿔놓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 사마리아인은 이전과는 상당히 다른 새로운 인생을 시작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건강한 육체와 건강한 정신과 건강한 영혼까지 얻었으니, 하루하루가 새롭고 즐겁고 감사와 기쁨이 넘치는 삶을 영위해 나갈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나머지 아홉 사람은 육신의 병만 고침 받았지, 영혼구원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인간의 근원적인 문제들을 여전히 껴안고 살아가야 했을 것입니다. 사람들 가운데는 육체적으로는 건강하지만, 정신과 영혼이 병들어 사는 불행한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긍휼을 입은 사람은 열 사람이었지만, 예수님께 돌아와 사례한 사람은 한 사람 뿐이었습니다. 전 세계 65억이 넘는 사람들이 하나같이 하나님의 긍휼을 입고 살지만,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하나님께 돌아와 영광을 돌리며 그분을 섬기는 사람이 전 세계 인구의 십분의 일도 되지 않을 것입니다. 열 사람 가운데 한 사람 정도가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하나님께 돌아와 영광을 돌리는 신앙인들일 것입니다. 또 그 신앙인 열 명 가운데 한 사람 정도가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받으실만한 기독교 신앙으로 사는 사람이 아닐까 추측해 봅니다. 그보다 더 되기를 바라지만, 수많은 개척교회들이 성도들이 없어서 문을 닫는 오늘의 현실을 감안한다면 생각보다 훨씬 더 비관적일 수도 있습니다.
기독교인들은 이미 감사할 줄 아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도 없이 신앙인이 될 수 있겠습니까? 집회 때마다 참석해서 은혜를 사모하고 하나님께 감사예물을 드리는 신앙인이라면 이미 겸손을 알고 감사를 아는 사람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기독교인이 생활 속에서 감사를 실천하고 있을까요? 예수님께 나병을 고침 받았던 나머지 아홉 사람 모두가 유대인들이었는데 그들이 신앙인들이 아니었겠습니까? 당연히 신앙인들이었습니다. 예수님께 고침을 받고서도 돌아와 감사하지 아니한 아홉 명의 나환자들은 모두 다 신앙인들이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열 사람 가운데 아홉 사람이 감사할 줄을 몰랐거나 잊어버린 사람들이었습니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라도 진정으로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은 어쩌면 십분의 일에 불과할지도 모릅니다.
사마리아인 문둥병자는 가던 길을 되돌아오는 수고를 아끼지 않았습니다. 나머지 아홉 사람은 제 몸이 나은 것을 알고서 제사장에게 제 몸을 보이고 완치증서를 받은 후에 한시바삐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 재회의 기쁨을 나눌 뿐 아니라 정상적인 사회생활에 대한 기대에 부풀어 정신이 없었을 것입니다. 이런 이기적이고 자신만 아는 아홉 사람들 외에 그것도 이방인으로 취급된 사마리아 사람만이 제 정신을 차렸고, 제사장에게 제 몸을 보이고 받는 완치증서도 좋고, 한시 바삐 돌아가고픈 가족의 품도 좋고, 정상적인 사회생활도 다 좋은 것이겠지만, 무엇보다도 제 몸을 낫게 해준 고마운 분에게 최우선적으로 감사부터 하겠다는 생각을 가졌던 이 사람, 나머지 아홉 명의 유대인들이 천하게 여겼던 사마리아인은 가든 길을 되돌아오는 수고를 아끼지 않았습니다. 감사에는 수고가 따릅니다. 작은 선물하나에도 정성이 따르고, 시간과 돈의 투자가 따릅니다. 희생이 없이는 감사할 수 없다는 것을 우리는 너무나 잘 압니다. 하나님께 감사하는 생활, 여기에는 부득이 희생이 따르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그 희생은 투자가 되어 옥토에 뿌려진 씨앗처럼 백배, 육십 배, 삼십 배의 결실로 되돌아옵니다. 예수님께 되돌아와서 사례했던 사마리아 사람은 육체구원은 물론이고, 보너스로 영혼구원까지 받고, 복된 여생을 약속받지 않았습니까?
사마리아인 나환자는 제 몸의 변화에, 주변 환경의 변화에,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감사하고 찬양하고 기도한 사람들 가운데 한 사람입니다. 우리 신앙인들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에 민감하게 느끼고 반응하고 감사할 줄 알아야 합니다. 이웃의 작은 사랑과 도움에도 감사할 줄 알아야 합니다. 이렇게 하면 비단 하나님한테 뿐 아니라, 대인관계에서도 큰 유익이 찾아옵니다. 작은 일 하나하나에 감사를 잊지 않는 사람은 결과적으로 자신의 삶을 윤택하게 만듭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17-18절)는 탄식은 먼저 믿는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큽니다. 종교적인 우월감에 사로잡혀 사마리아 사람들을 개 취급하며 멸시하던 유대인들은 정작 하나님께 영광도 돌리지 않았고, 예수님을 믿지도 않았습니다. 그들이 믿었던 예수님은 병이나 고쳐주는 사람 정도였을 것입니다. 만일 그들이 예수님께 대한 뚜렷한 신앙이 있었다면, 당연히 예수님께 찾아와 믿음을 고백하고 구원을 받았을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깊이 생각해 볼 것은 종교적인 우월감, 곧 기독교 가문에서 태어났고, 오래 믿었고, 성경지식이 많고, 큰 교회에 다니는 것 등이 다 무익하다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 곧 감사의 마음을 품고 주님께로 돌아온 사마리아인처럼, 비록 종교적인 큰 전통이나 자랑거리가 없는 사람일지라도, 자신과 하나님과의 유대관계가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 있는 사람이 복을 받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언제나 감사의 마음과 감사의 행위가 나에게 있는지 살펴보고, 내가 어디에 서 있는지, 어디를 향해 달려가는지를 민감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은혜를 입고서도 감사치 아니한 다수의 무리 속에 내가 휩쓸러 가고 있지는 않는지, 아주 민감하게 느낄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께 영육의 고침을 받은 사마리아 사람이 아니더라도 믿음을 가지고 범사에 감사하며 긍정적으로 살게 되면 정신과 육체적으로 매우 건강하고 장수하게 됩니다. 미국 위스콘신-메디슨 대학 연구진에 의하면, 비관론자들은 오른쪽 뇌의 전두엽 대뇌피질 부분의 활동이 활성화되고, 긍정론자들은 왼쪽 뇌의 전두엽 대뇌피질 부분의 활동이 왕성해진다고 합니다. 따라서 비관론자들은 오른쪽 뇌의 전두엽 대뇌피질 부분의 활성화로 인해서 면역시스템에 활성화가 감소되어 몸에 질환이 생길 가능성이 높아지고, 긍정론자들은 왼쪽 뇌의 전두엽 대뇌피질 부분의 활동이 왕성해지고 면역력이 높아진다는 실험결과를 미국 PNAS 학술지(Proceedings of National Academy of Sciences)에 발표하였습니다.
학자들은 신앙이 인체에 미치는 연구를 꾸준히 진행시켜 왔는데, 2000년도 이전까지만 해도 1200편 이상의 연구발표가 있었고, 최근에는 더 과학적이고 완벽하게 데이터를 처리한 연구들이 속속 보고되고 있다고 합니다.
스트로우브릿지(Strawbridge)라는 의학자가 28년간 신앙과 건강에 관해서 연구한 결과에 의하면, 매주 교회에 출석한 신앙인과 불신자를 비교 분석한 결과, 매주 교회에 출석한 신앙인의 사망위험률이 무려 28퍼센트나 줄어들었다고 했습니다. 또 여성 성도들의 경우 골초가 담배를 끊었을 때 나타나는 긍정효과만큼 건강이 좋아진다고 했습니다. 4000명을 6년간 관찰해서 얻는 또 다른 연구결과도 위와 동일했다고 합니다. 또 하나의 논문에서는 2만 명을 상대로 비교 연구한 결과, 신앙생활을 잘했던 사람 중 백인이 7년, 흑인이 14년을 더 오래 살았으며, 사망위험률이 50퍼센트나 줄어들었다고 했습니다.
루트겐도르프(Lutgendorf)의 조사에 의하면, 557명을 6년간 조사했더니, 교회를 열심히 다닌 사람은 인체의 면역을 높여주고 수명을 연장시켜주는 interleukin-6(IL-6)의 량이 혈중에 훨씬 많았고 동시에 사망 할 확률도 78퍼센트가 줄어들었다고 했습니다.
건강한 인생을 살려면 범사에 감사해야 합니다. 남아프리카의 전 흑인 대통령 넬슨 만델라는 백인정부에 의해 26년간 감옥살이를 했습니다. 그가 출옥할 때 사람들은 그가 아주 허약한 상태로 나올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나이가 70세가 넘었는데도 불구하고 건강하고 씩씩한 모습으로 걸어 나왔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5년 만 감옥살이를 해도 건강을 잃는데 어떻게 26년 동안 옥살이를 했는데도 불구하고 그렇게 건강한 상태로 출옥할 수 있었느냐고 사람들이 물었습니다. 그는 “나는 감옥에서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 하늘을 보고 감사하고, 땅을 보고 감사하고, 강제노동을 할 때도 감사하고, 늘 감사했기 때문에 건강을 지킬 수 있었습니다.”고 말했습니다. 그 후 그는 노벨 평화상을 받았고, 대통령에도 당선되었습니다. 감사하는 사람은 건강을 지킵니다. 감사하는 사람은 사업에도 성공합니다. 어려운 위기도 극복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감사하는 사람을 통해서 기적을 허락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자녀교육에도 감사가 넘쳐나고, 직장, 사업장이 어렵다 할지라도 하나님께 감사하고, 또 교회생활, 신앙생활에도 감사하고, 이 나라와 이 민족의 장래를 바라보고 하나님께 감사하면 반드시 하나님께서 더 큰 감사를 허락하여 주십니다.
그리스 신화에 보면, 돌로 빚어졌던 갈라테이아가 피그말리온의 신에 대한 경건한 믿음과 감사 덕분에 사람으로 변하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고대세계에서 여신을 섬기는 신전이 있는 곳이면 십중팔구 성적으로 문란하였습니다. 아세라 목신(木神)이나 아스다롯 여신을 섬겼던 팔레스타인 지역도 그랬고, 아프로디테 여신을 모셨던 고린도와 키프로스 섬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피그말리온은 키프로스 섬사람으로서 아프로디테 여신을 섬겼던 조각가였습니다. 키프로스는 고린도에 못지않게 성적으로 문란한 도시였기 때문에 피그말리온은 결혼도 하지 않은 채 독신으로 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혼자 산 것은 아니고, 정교한 솜씨로 조각한 눈같이 흰 여인의 석상과 함께 살고 있었습니다. 그는 이 석상을 사랑하고 있었습니다. 아니 석상을 사랑했다기보다는 석상 같은 여성을 아내로 맞기를 염원했다고 말하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그러던 그가 아프로디테 축제 때, 제 몫의 제물을 바치고 나서 제단 앞에서 더듬거리며 기도했습니다. “신들이시여, 기도하면 만사를 순조롭게 하신다는 신들이시여, 바라건대 제 아내가 되게 하소서. 저 처녀의 석상을.....” 하려다가 차마 그럴 용기가 없어서 “석상 같은 여자를.....”, 하고선 기도를 마쳤습니다. 때마침 제단으로 내려와 제물을 흠향하고 있던 아프로디테 여신은 그 기도의 참 뜻을 알아차리고, 그 기도를 알아들었다는 표적으로 제단의 불길이 세 번 하늘로 치솟게 하였습니다. 집으로 돌아온 피그말리온은 예전과 같이 석상을 대상으로 혼자말도하고, 어루만지기도 하였는데, 예전과는 달리 석상 처녀의 몸에서 온기를 느낄 수가 있었습니다. 석상 처녀가 아프로디테의 축복을 받고 생명을 얻어 인간의 몸으로 변해 있었던 것입니다. 피그말리온은 아프로디테 여신에게 감사예배를 드린 후에 여신의 축복을 받으며 돌이 변해서 사람이 된 여성(갈라테이아)과 결혼하여 아기(파포스)를 낳아 잘 살았다는 이야기입니다.
물론 우리는 이 신화가 진실이라고 믿지 않습니다. 그리스인들도 믿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믿어야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피그말리온의 믿음과 감사, 그리고 그의 믿음이 가져다준 변화의 능력만은 믿어야 합니다. 우리들의 믿음과 감사, 그리고 정성과 희망과 기대에 따라서는 돌이 변해서 사람도 되게 할 수 있다는 진실만은 믿어야 합니다.
우리는 오늘 추수감사예배로 드리고 있습니다. 추호라도 내게는 하나님께 감사할 이유가 없다는 생각을 하지 말았으면 합니다. 자만과 오만은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는 것들입니다. 조용히 뒤돌아보면, 하나님께 감사해야할 조건들이 아주 많을 것입니다. 나는 우리 성도님들이 피그말리온과 같은 경건한 믿음으로 얻어지는 놀라운 결과들에 대한 감사가 많아지기를 바랍니다. 믿음과 감사로 육신의 병도 낫고 영혼까지 구원받는 사마리아인처럼, 작은 겨자씨가 자라서 새들이 둥지를 틀만큼 큰 나무가 되는 경험, 작은 누룩덩이가 온 가루반죽을 부풀게 하는 긍정적 변화의 경험, 이런 경험들에 대한 감사가 많아지기를 바랍니다. 이런 경험적인 감사가 값나가는 감사가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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