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의 종교(요한복음 4:19-24)
본문
제3의 종교(요한복음 4:19-24)
본문 말씀은 어디서 예배할 것인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무엇으로 어떻게 예배할 것인가가 중요하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북쪽의 사마리아인들은 그리심산이 예배의 적소라고 믿었고, 남쪽의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이 적소라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라고 하시면서 예배하는 자들이 영으로(in spirit) 진리(in truth)로 드리면 된다고 하셨습니다. 사마리아인들이야 유대인들에 예속된 상태고 그리심산의 성전도 유대왕 힐카누스에 의해서 주전 128년에 훼파되었기 때문에 예수님의 이 말씀에 문제가 될 것이 없겠지만, 예루살렘 성전 한곳만을 고집하던 당대의 유대인들에게는 신성모독이자 이스라엘에 도전하는 중대행위로 보였을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경계와 인종의 장벽을 뛰어넘는 제3의 종교인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사마리아인이든 유대인이든 차별하지 않고, 영으로 예배하고, 진리로 예배하는 기독교를 가능케 했다는 것입니다.
종교는 크게 청각종교와 시각종교로 나눠집니다. 고대 지중해 연안세계들, 곧 유럽과 북아프리카와 근동세계를 활동무대로 하는 성서시대에는 대부분이 시각종교들이었습니다. 오감을 즐겁게 하고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종교들이었습니다. 그들의 종교에는 우상이 있고, 성창들이 있고, 여신이 있고, 신화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중해 서안 팔레스타인에 자리 잡은 아주 작은 나라를 이루고 있던 유대인들은 여신도 믿지 않았고, 신화도 우상도 성창도 갖지 않았습니다. 유대인들은 단 하나의 성전만을 예루살렘에 갖고 있었는데, 그나마 성전의 성소나 지성소에는 일반인들이 들어갈 수 없었기 때문에 성전에서 볼 수 있는 것은 성전건물의 벽과 남성들뿐인 제사장들과 레위인들 뿐이었습니다. 제물을 바치는 제단도 제사장들의 뜰에 있었기 때문에 일반인들의 출입이 제한된 곳이었습니다.
유대교는 청각종교였습니다. 그들에게는 귀로 듣고 실천하는 613개의 계명들이 있었고, 랍비들이 제정한 수많은 해석법들과 관습법들이 있었습니다. 유대인들도 보통의 사람들인지라, 청각종교인 유대교보다는 시각종교들인 우상종교들에 더 마음이 끌렸습니다. 성서시대의 선지자들이 끊임없이 외쳤던 것이 바로 시각종교 곧 우상숭배에서 벗어나라는 것이었습니다.
오늘날에는 하나님보다 더 위하는 것이면 그것이 무형이든 유형이든 무엇이든지간에 우상입니다. 돈을 더 위하면, 돈이 우상이고, 자녀를 더 위하면, 자녀가 우상이고, 가정을 더 위하면, 가정이 우상이고, 직장을 더 위하면 직장이 우상입니다.
기독교는 본래부터 유대교의 전통을 따른 청각종교였습니다. 그러던 기독교가 이교도들에게 전파되면서 많은 이교도들의 전통이 기독교에 유입되어 시각종교로 변질되었습니다. 그런 변질된 종교가 바로 가톨릭교회와 동방교회였습니다. 그리고 16-17세기에 이르러 마르틴 루터, 츠빙글리, 장 칼뱅, 마르틴 부쳐와 같은 개혁가들이 청각종교였던 기독교의 본래 모습을 되찾으려고 힘썼던 것입니다. 그것이 또 좀 지나쳐서, 목욕물과 함께 아기까지 버린 정신없는 어머니처럼, 가톨릭예배의 미신적인 요소들을 버리는 과정에서 주의 만찬을 예배에서 빼버렸던 것입니다. 이런 문제점들을 보완한 예배, 곧 가톨릭예배도 아니고, 개신교예배도 아닌 제3의 예배가 있는데, 그것이 바로 매주일 예배 때마다 주의 만찬을 짧은 명상의 말씀과 함께 간략하게 행하는 것입니다. 가톨릭의 시각적이고 미신적인 성만찬예배를 청각적인 예배로 바꾸는 동시에 사도들의 전통인 주의 만찬을 예배 속에서 지속시킬 수 있는 성서적인 예배입니다.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의 지대한 관심은 듣고자 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보고자하는데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일찍이 그들이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로부터 듣지 못했던 살아있고 생명력 있는 복음을 많이 들려주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유대인들이 예수님께 원했던 것은 하늘로부터 내리는 표적이었습니다. 그런 그들을 향해서 예수님은 “악하고 음란한 세대”라고 탄식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시각적인 것이 갖는 어떤 특성을 대변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오늘날 우리 현대인들이 보는 것들에는 악하고 음란한 특성을 많이 갖고 있습니다. 눈으로 보는 것들 가운데 선정적이지 아니한 것들이 과연 얼마나 됩니까? 현대인들을 ‘시각중독자’(visual junkies)로 만드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눈을 흡족 시키는 것이면 질적인 내용은 아무래도 상관하지 않습니다. 노래는 못해도 얼짱이고 춤짱이면 인기짱인 젊은 가수들을 얼마든지 볼 수 있는 것이 작금의 현실입니다.
영국의 사회학자 앤소니 기든스가 좌파도 아니고 우파도 아닌, 좌우를 포용한 제3의 길을 가자고 주창한지가 10여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지만, 아직도 제3의 길이란 말이 많이 회자되고 있습니다. 최근 열린우리당의 김근태 당의장은 양극화를 탈출할 수 있는 제3의 길을 모색하고 있다고 말하면서 이 길은 시장근본주의도 아니고, 개발독재도 아니라고 했다고 브레이크뉴스(2006/07/11)가 말했습니다. 또 오마이뉴스는 이것이 미국식 자유주의 시장경제도 아니고, 유럽의 사회민주주의도 아닌 제3의 길이 될 것이라고 소개했습니다(2006/07/09).
예수님이 “이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요나의 표적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다”고 하신 것은 시각적인 것에 매달리는 유대인들에게 제3의 대안으로써 새롭고 산 길을 제시하겠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고 무덤에 장사된 지 3일후에 부활할 것을 말한 것입니다. 이것이 시각종교와 청각종교를 모두 뛰어넘는 기독교의 특징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기독교는 시각에 치우치는 우상종교도 아니고, 청각에 치우치는 유대교도 아닌 제3의 종교 곧 우상이나 율법이 아닌 복음으로 사람들에게 새롭고 산 길을 열어주는 종교입니다.
바울과 히브리서의 저자도 당대의 사람들에게 ‘제3의 종교’를 제안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장 22-24절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믿어야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가르침은 당대의 사람들에게 상식을 뛰어넘는 제3의 어떤 대안이었던 것 같습니다. 극형을 받아 죽은 자를 믿어야 구원받는다는 기독교의 가르침이 그 때나 지금이나 많은 사람들에게는 여전히 싫은 것이고, 어리석은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사람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란 것이 우리 믿는 자들의 확신이자 신앙고백입니다.
바울시대에 유대인들은 표적을, 헬라인들은 지혜를 찾고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이 표적을 구했던 이유는 하늘로써 내리는 표적을 행하는 메시아가 유대인들에게 장차 세계를 지배할 이상국가(理想國家)를 세워줄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이 시각적이고 물질적인 세계에 매달려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헬라인들이 지혜를 찾았던 이유는 그들이 이데아라 불리는 영적세계로 그들을 인도해줄 지식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유대인들과는 달리 오히려 보이는 세계를 부정했고, 눈에 보이지 않는 어떤 참 세계를 갈망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은 그런 그들에게 제3의 종교를 제안했는데, 그것이 바로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었습니다. 유대인들처럼 이상적인 현실세계를 기약 없이 기다리는 것도 아니고, 헬라인들처럼 현실세계를 부정하면서 눈에 보이지 않는 어떤 영적세계를 끝없이 찾아 해매는 것도 아닌 성령님이 인도하는 하나님의 나라를 대안으로 제시했습니다. 이 하나님의 나라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이면 누구에게나 차별 없이 값없이 은혜로 주어지는 것인데, 살아서는 이 하나님의 나라가 성령님의 능력으로 지금 여기서 내 안에 영적으로 이뤄지는 동시에, 죽어서는 부활하여 하나님의 나라에서 영원토록 살게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인간의 노력이나 기대로 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로 되는 것이고, 하나님의 자발적이고 솔선적인 은총으로 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님이 이미 우리 안에 하나님의 나라가 이뤄지게 하시고 또 우리를 하나님의 나라로 인도해 줄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요 빛이요, 우리가 담대하게 하나님의 보좌에로 나갈 수 있는 새롭고 산 길이라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11장 1절에서 예수님을 믿는 것이 유대인들이 그토록 원했지만 얻지 못했던 것들의 실상이요, 헬라인들이 그토록 보고자 했지만 보지 못했던 것들의 증거라고 하였습니다. 유대인들은 율법의 약속을 문자적으로 믿으면서 메시아의 등장을 기다렸고, 그 메시아가 세울 하나님의 나라가 유대인들로 하여금 세계를 지배하게 할 유대인 국가라고 믿었습니다. 또 헬라인들은 이 육신의 세계를 벗고 이데아의 세계로 옮겨갈 수 있는 어떤 신비한 지식을 찾고 있었고, 그 세계는 그런 어떤 신비한 지식을 소유한 자들만이 갈 수 있는 세계라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지금까지도 그들은 그들이 그토록 원했던 바를 얻지 못했고, 찾았던 바를 찾지 못했습니다. 그런 그들에게 히브리서 저자는 그리스도야말로 그들 모두를 영존하신 하나님께와 그분의 나라에로 인도해줄 “새롭고 산 길”임을 강조하였습니다.
히브리서 저자의 믿음은 명백합니다. 유대인들이 구했던 율법의 길도 아니오, 헬라인들이 찾았던 철학의 길도 아니란 것입니다. 인류에게 열린 제3의 길, 곧 “새롭고 산 길”이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란 것입니다.
단순한 것 같지만, 이 진리가 하나님의 은혜의 경륜을 따라 다른 세대의 사람들에게는 감춰졌던 비밀이라는 것이 사도 바울의 생각입니다. 바울은 이 단순한 복음을 성령님을 통해서 밝혀진 하나님의 비밀 또는 그리스도의 비밀이라고 했습니다.
단순한 것 같지만, 이 진리를 깨달은 자가 눈을 뜬 자요, 귀가 열린 자인 것입니다. 아무리 학식이 많고, 아무리 재산이 많아도, 아무리 권세가 높아도, 이 사실을 믿지 못하는 자들은 소경이요, 귀머거리인 것입니다. 비록 깨지기 쉬운 질그릇 같은 존재일지라도 우리가 담고 있는 것이 바로 이 진리인데, 바울은 이것을 보배라고 했습니다. 이 진리가 보배인 것을 아는 사람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배를 발견한 사람처럼, 또 진주를 찾다가 정말 값진 것을 발견한 사람처럼 그것에 모든 것을 투자하는 사람이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이제까지의 말씀을 정리해 보겠습니다.
첫째,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경계와 인종의 장벽을 뛰어넘는 제3의 종교인 기독교를 가능하게 했습니다.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사마리아인이든 유대인이든 차별하지 않고, 영으로 예배하고, 진리로 예배하는 기독교를 가능케 한 것입니다.
둘째, 가톨릭예배도 아니고, 개신교예배도 아닌 제3의 예배가 있는데, 그것이 바로 매주일 예배 때마다 주의 만찬을 짧은 명상의 말씀과 함께 간략하게 행하는 것입니다. 가톨릭의 시각적이고 미신적인 성만찬예배를 청각적인 예배로 바꾸는 동시에 사도들의 전통인 주의 만찬을 예배 속에서 지속시킬 수 있는 성서적인 예배입니다.
셋째, 기독교는 시각에 치우치는 우상종교도 아니고, 청각에 치우치는 유대교도 아닌 제3의 종교 곧 우상이나 율법이 아닌 복음으로 사람들에게 새롭고 산 길을 열어주는 종교입니다.
넷째, 바울은 유대인과 헬라인들에게 제3의 종교를 제안했는데, 그것이 바로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처럼 이상적인 현실세계를 기약 없이 기다리는 것도 아니고, 헬라인들처럼 현실세계를 부정하면서 눈에 보이지 않는 어떤 영적세계를 끝없이 찾아 해매는 것도 아닌 성령님이 인도하는 하나님의 나라를 대안으로 제시했습니다. 이 하나님의 나라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이면 누구에게나 차별 없이 값없이 은혜로 주어지는 것인데, 살아서는 이 하나님의 나라가 성령님의 능력으로 지금 여기서 내 안에 영적으로 이뤄지는 동시에, 죽어서는 부활하여 하나님의 나라에서 영원토록 살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의 노력이나 기대로 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로 되는 것이고, 하나님의 자발적이고 솔선적인 은총으로 되는 것입니다.
다섯째, 히브리서를 쓴 저자도 유대인들이 구했던 율법의 길도 아니오, 헬라인들이 찾았던 철학의 길도 아닌 인류에게 열린 제3의 길을 제안했는데, 그것이 바로 “새롭고 산 길”을 열어주신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란 것입니다.
여섯째, 이 단순한 복음이 하나님의 은혜의 경륜을 따라 다른 세대의 사람들에게는 감춰졌던 하나님의 비밀이었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실을 깨달은 자가 눈을 뜬 자요, 귀가 열린 자입니다. 비록 깨지기 쉬운 질그릇 같은 존재일지라도 깨달은 자들이 담고 있는 것은 보배입니다. 이 보배의 가치를 아는 사람은 그것에 모든 것을 투자한다는 것이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본문 말씀은 어디서 예배할 것인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무엇으로 어떻게 예배할 것인가가 중요하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북쪽의 사마리아인들은 그리심산이 예배의 적소라고 믿었고, 남쪽의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이 적소라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라고 하시면서 예배하는 자들이 영으로(in spirit) 진리(in truth)로 드리면 된다고 하셨습니다. 사마리아인들이야 유대인들에 예속된 상태고 그리심산의 성전도 유대왕 힐카누스에 의해서 주전 128년에 훼파되었기 때문에 예수님의 이 말씀에 문제가 될 것이 없겠지만, 예루살렘 성전 한곳만을 고집하던 당대의 유대인들에게는 신성모독이자 이스라엘에 도전하는 중대행위로 보였을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경계와 인종의 장벽을 뛰어넘는 제3의 종교인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사마리아인이든 유대인이든 차별하지 않고, 영으로 예배하고, 진리로 예배하는 기독교를 가능케 했다는 것입니다.
종교는 크게 청각종교와 시각종교로 나눠집니다. 고대 지중해 연안세계들, 곧 유럽과 북아프리카와 근동세계를 활동무대로 하는 성서시대에는 대부분이 시각종교들이었습니다. 오감을 즐겁게 하고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종교들이었습니다. 그들의 종교에는 우상이 있고, 성창들이 있고, 여신이 있고, 신화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중해 서안 팔레스타인에 자리 잡은 아주 작은 나라를 이루고 있던 유대인들은 여신도 믿지 않았고, 신화도 우상도 성창도 갖지 않았습니다. 유대인들은 단 하나의 성전만을 예루살렘에 갖고 있었는데, 그나마 성전의 성소나 지성소에는 일반인들이 들어갈 수 없었기 때문에 성전에서 볼 수 있는 것은 성전건물의 벽과 남성들뿐인 제사장들과 레위인들 뿐이었습니다. 제물을 바치는 제단도 제사장들의 뜰에 있었기 때문에 일반인들의 출입이 제한된 곳이었습니다.
유대교는 청각종교였습니다. 그들에게는 귀로 듣고 실천하는 613개의 계명들이 있었고, 랍비들이 제정한 수많은 해석법들과 관습법들이 있었습니다. 유대인들도 보통의 사람들인지라, 청각종교인 유대교보다는 시각종교들인 우상종교들에 더 마음이 끌렸습니다. 성서시대의 선지자들이 끊임없이 외쳤던 것이 바로 시각종교 곧 우상숭배에서 벗어나라는 것이었습니다.
오늘날에는 하나님보다 더 위하는 것이면 그것이 무형이든 유형이든 무엇이든지간에 우상입니다. 돈을 더 위하면, 돈이 우상이고, 자녀를 더 위하면, 자녀가 우상이고, 가정을 더 위하면, 가정이 우상이고, 직장을 더 위하면 직장이 우상입니다.
기독교는 본래부터 유대교의 전통을 따른 청각종교였습니다. 그러던 기독교가 이교도들에게 전파되면서 많은 이교도들의 전통이 기독교에 유입되어 시각종교로 변질되었습니다. 그런 변질된 종교가 바로 가톨릭교회와 동방교회였습니다. 그리고 16-17세기에 이르러 마르틴 루터, 츠빙글리, 장 칼뱅, 마르틴 부쳐와 같은 개혁가들이 청각종교였던 기독교의 본래 모습을 되찾으려고 힘썼던 것입니다. 그것이 또 좀 지나쳐서, 목욕물과 함께 아기까지 버린 정신없는 어머니처럼, 가톨릭예배의 미신적인 요소들을 버리는 과정에서 주의 만찬을 예배에서 빼버렸던 것입니다. 이런 문제점들을 보완한 예배, 곧 가톨릭예배도 아니고, 개신교예배도 아닌 제3의 예배가 있는데, 그것이 바로 매주일 예배 때마다 주의 만찬을 짧은 명상의 말씀과 함께 간략하게 행하는 것입니다. 가톨릭의 시각적이고 미신적인 성만찬예배를 청각적인 예배로 바꾸는 동시에 사도들의 전통인 주의 만찬을 예배 속에서 지속시킬 수 있는 성서적인 예배입니다.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의 지대한 관심은 듣고자 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보고자하는데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일찍이 그들이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로부터 듣지 못했던 살아있고 생명력 있는 복음을 많이 들려주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유대인들이 예수님께 원했던 것은 하늘로부터 내리는 표적이었습니다. 그런 그들을 향해서 예수님은 “악하고 음란한 세대”라고 탄식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시각적인 것이 갖는 어떤 특성을 대변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오늘날 우리 현대인들이 보는 것들에는 악하고 음란한 특성을 많이 갖고 있습니다. 눈으로 보는 것들 가운데 선정적이지 아니한 것들이 과연 얼마나 됩니까? 현대인들을 ‘시각중독자’(visual junkies)로 만드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눈을 흡족 시키는 것이면 질적인 내용은 아무래도 상관하지 않습니다. 노래는 못해도 얼짱이고 춤짱이면 인기짱인 젊은 가수들을 얼마든지 볼 수 있는 것이 작금의 현실입니다.
영국의 사회학자 앤소니 기든스가 좌파도 아니고 우파도 아닌, 좌우를 포용한 제3의 길을 가자고 주창한지가 10여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지만, 아직도 제3의 길이란 말이 많이 회자되고 있습니다. 최근 열린우리당의 김근태 당의장은 양극화를 탈출할 수 있는 제3의 길을 모색하고 있다고 말하면서 이 길은 시장근본주의도 아니고, 개발독재도 아니라고 했다고 브레이크뉴스(2006/07/11)가 말했습니다. 또 오마이뉴스는 이것이 미국식 자유주의 시장경제도 아니고, 유럽의 사회민주주의도 아닌 제3의 길이 될 것이라고 소개했습니다(2006/07/09).
예수님이 “이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요나의 표적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다”고 하신 것은 시각적인 것에 매달리는 유대인들에게 제3의 대안으로써 새롭고 산 길을 제시하겠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고 무덤에 장사된 지 3일후에 부활할 것을 말한 것입니다. 이것이 시각종교와 청각종교를 모두 뛰어넘는 기독교의 특징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기독교는 시각에 치우치는 우상종교도 아니고, 청각에 치우치는 유대교도 아닌 제3의 종교 곧 우상이나 율법이 아닌 복음으로 사람들에게 새롭고 산 길을 열어주는 종교입니다.
바울과 히브리서의 저자도 당대의 사람들에게 ‘제3의 종교’를 제안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장 22-24절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믿어야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가르침은 당대의 사람들에게 상식을 뛰어넘는 제3의 어떤 대안이었던 것 같습니다. 극형을 받아 죽은 자를 믿어야 구원받는다는 기독교의 가르침이 그 때나 지금이나 많은 사람들에게는 여전히 싫은 것이고, 어리석은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사람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란 것이 우리 믿는 자들의 확신이자 신앙고백입니다.
바울시대에 유대인들은 표적을, 헬라인들은 지혜를 찾고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이 표적을 구했던 이유는 하늘로써 내리는 표적을 행하는 메시아가 유대인들에게 장차 세계를 지배할 이상국가(理想國家)를 세워줄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이 시각적이고 물질적인 세계에 매달려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헬라인들이 지혜를 찾았던 이유는 그들이 이데아라 불리는 영적세계로 그들을 인도해줄 지식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유대인들과는 달리 오히려 보이는 세계를 부정했고, 눈에 보이지 않는 어떤 참 세계를 갈망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은 그런 그들에게 제3의 종교를 제안했는데, 그것이 바로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었습니다. 유대인들처럼 이상적인 현실세계를 기약 없이 기다리는 것도 아니고, 헬라인들처럼 현실세계를 부정하면서 눈에 보이지 않는 어떤 영적세계를 끝없이 찾아 해매는 것도 아닌 성령님이 인도하는 하나님의 나라를 대안으로 제시했습니다. 이 하나님의 나라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이면 누구에게나 차별 없이 값없이 은혜로 주어지는 것인데, 살아서는 이 하나님의 나라가 성령님의 능력으로 지금 여기서 내 안에 영적으로 이뤄지는 동시에, 죽어서는 부활하여 하나님의 나라에서 영원토록 살게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인간의 노력이나 기대로 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로 되는 것이고, 하나님의 자발적이고 솔선적인 은총으로 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님이 이미 우리 안에 하나님의 나라가 이뤄지게 하시고 또 우리를 하나님의 나라로 인도해 줄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요 빛이요, 우리가 담대하게 하나님의 보좌에로 나갈 수 있는 새롭고 산 길이라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11장 1절에서 예수님을 믿는 것이 유대인들이 그토록 원했지만 얻지 못했던 것들의 실상이요, 헬라인들이 그토록 보고자 했지만 보지 못했던 것들의 증거라고 하였습니다. 유대인들은 율법의 약속을 문자적으로 믿으면서 메시아의 등장을 기다렸고, 그 메시아가 세울 하나님의 나라가 유대인들로 하여금 세계를 지배하게 할 유대인 국가라고 믿었습니다. 또 헬라인들은 이 육신의 세계를 벗고 이데아의 세계로 옮겨갈 수 있는 어떤 신비한 지식을 찾고 있었고, 그 세계는 그런 어떤 신비한 지식을 소유한 자들만이 갈 수 있는 세계라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지금까지도 그들은 그들이 그토록 원했던 바를 얻지 못했고, 찾았던 바를 찾지 못했습니다. 그런 그들에게 히브리서 저자는 그리스도야말로 그들 모두를 영존하신 하나님께와 그분의 나라에로 인도해줄 “새롭고 산 길”임을 강조하였습니다.
히브리서 저자의 믿음은 명백합니다. 유대인들이 구했던 율법의 길도 아니오, 헬라인들이 찾았던 철학의 길도 아니란 것입니다. 인류에게 열린 제3의 길, 곧 “새롭고 산 길”이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란 것입니다.
단순한 것 같지만, 이 진리가 하나님의 은혜의 경륜을 따라 다른 세대의 사람들에게는 감춰졌던 비밀이라는 것이 사도 바울의 생각입니다. 바울은 이 단순한 복음을 성령님을 통해서 밝혀진 하나님의 비밀 또는 그리스도의 비밀이라고 했습니다.
단순한 것 같지만, 이 진리를 깨달은 자가 눈을 뜬 자요, 귀가 열린 자인 것입니다. 아무리 학식이 많고, 아무리 재산이 많아도, 아무리 권세가 높아도, 이 사실을 믿지 못하는 자들은 소경이요, 귀머거리인 것입니다. 비록 깨지기 쉬운 질그릇 같은 존재일지라도 우리가 담고 있는 것이 바로 이 진리인데, 바울은 이것을 보배라고 했습니다. 이 진리가 보배인 것을 아는 사람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배를 발견한 사람처럼, 또 진주를 찾다가 정말 값진 것을 발견한 사람처럼 그것에 모든 것을 투자하는 사람이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이제까지의 말씀을 정리해 보겠습니다.
첫째,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경계와 인종의 장벽을 뛰어넘는 제3의 종교인 기독교를 가능하게 했습니다.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사마리아인이든 유대인이든 차별하지 않고, 영으로 예배하고, 진리로 예배하는 기독교를 가능케 한 것입니다.
둘째, 가톨릭예배도 아니고, 개신교예배도 아닌 제3의 예배가 있는데, 그것이 바로 매주일 예배 때마다 주의 만찬을 짧은 명상의 말씀과 함께 간략하게 행하는 것입니다. 가톨릭의 시각적이고 미신적인 성만찬예배를 청각적인 예배로 바꾸는 동시에 사도들의 전통인 주의 만찬을 예배 속에서 지속시킬 수 있는 성서적인 예배입니다.
셋째, 기독교는 시각에 치우치는 우상종교도 아니고, 청각에 치우치는 유대교도 아닌 제3의 종교 곧 우상이나 율법이 아닌 복음으로 사람들에게 새롭고 산 길을 열어주는 종교입니다.
넷째, 바울은 유대인과 헬라인들에게 제3의 종교를 제안했는데, 그것이 바로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처럼 이상적인 현실세계를 기약 없이 기다리는 것도 아니고, 헬라인들처럼 현실세계를 부정하면서 눈에 보이지 않는 어떤 영적세계를 끝없이 찾아 해매는 것도 아닌 성령님이 인도하는 하나님의 나라를 대안으로 제시했습니다. 이 하나님의 나라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이면 누구에게나 차별 없이 값없이 은혜로 주어지는 것인데, 살아서는 이 하나님의 나라가 성령님의 능력으로 지금 여기서 내 안에 영적으로 이뤄지는 동시에, 죽어서는 부활하여 하나님의 나라에서 영원토록 살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의 노력이나 기대로 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로 되는 것이고, 하나님의 자발적이고 솔선적인 은총으로 되는 것입니다.
다섯째, 히브리서를 쓴 저자도 유대인들이 구했던 율법의 길도 아니오, 헬라인들이 찾았던 철학의 길도 아닌 인류에게 열린 제3의 길을 제안했는데, 그것이 바로 “새롭고 산 길”을 열어주신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란 것입니다.
여섯째, 이 단순한 복음이 하나님의 은혜의 경륜을 따라 다른 세대의 사람들에게는 감춰졌던 하나님의 비밀이었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실을 깨달은 자가 눈을 뜬 자요, 귀가 열린 자입니다. 비록 깨지기 쉬운 질그릇 같은 존재일지라도 깨달은 자들이 담고 있는 것은 보배입니다. 이 보배의 가치를 아는 사람은 그것에 모든 것을 투자한다는 것이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 이전글 하나님의 비밀, 그리스도(골 2:1-3, 엡 3:5-12) 06.07.19
- 다음글 진품과 명품(딤후 2:20-21) 06.07.07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