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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전이 이끄는 삶(출 2: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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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동호
댓글 0 조회 12,836 2005.05.29 0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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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전이 이끄는 삶(출 2:1-15)

한동대학교 김영길 총장의 부인 김영애 여사가 쓴 󰡔갈대상자󰡕란 책을 손에 집어 드는 순간 머리에 스치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피압박민족의 서러움을 온 몸으로 부대끼며 살았던 모세의 부모가 3200년 전 이집트 나일 강에 띄었던 작은 갈대상자 하나는 꿈이 가득실린 비전의 상자였다는 거였습니다. 비록 흘러가는 강물에 정처 없이 떠내려가야 할 상자였을지라도, 그 부서지기 쉬운 상자 속엔 굳건한 믿음이 담겨있었고, 이스라엘의 미래가 실려 있었으며, 꿈이 가득실려 있었습니다. 그 갈대상자가 바로 한동대학교를 말한 것이고, 그 속에서 자라가는 한동(韓東) 인들이야말로 장차 이 나라를 구할 모세와 같은 인재들이란 엄청난 뜻이 담긴 제목이란 것을 내용을 보지 않고서도 대번에 눈치 챌 수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후서 4장 7절에서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고 했는데, 보배를 담은 그 질그릇이 바로 갈대상자요, 보배가 바로 인재요, 갈대상자의 그 꿈을 이룰 큰 능력이 하나님께 있다는 것을 연결시켜볼 수 있었습니다.
성도 여러분과 나 또한 갈대상자와 같은 존재입니다. 질그릇과 같은 존재입니다. 문제는 그 속에 무엇이 담겨있는가에 따라서 운명이 달라지고, 어떤 믿음과 비전으로 세월의 강물 위에 이 갈대상자를 띄어 보내는가에 따라서 10년 후가 달라지고, 20년 후가 달라지고, 30년 후가 달라질 것입니다.
모세의 부모는 히브리인들이 출산한 사내아이는 낳는 즉시 죽이라는 바로의 명령을 어기고 모세를 석 달간 숨겨 키웠으나 더 이상은 발각되지 않고 키우는 것이 불가능함을 알고, 갈대상자를 엮어 역청과 나무진을 발라 방수처리 한 다음, 아이를 그 속에 넣어 나일 강에 띄어 보냈던 것입니다. 그들의 행위에서 우리는 몇 가지 교훈을 얻을 수가 있습니다.
첫째, 그들이 모세를 석 달간 숨겨 키운 것은 두려움 없는 믿음의 행위였습니다. 온누리교회 하용조목사님이 설교 중에 “두려움은 미래를 닫는 셔터”라고 했다는데, 과연 옳은 말입니다. 믿음의 선배들은 마땅히 두려워해야할 상황에서도 두려움을 갖지 않았습니다. 두려움이 없는 믿음은 과연 큰 믿음입니다. 마땅히 두려워해야할 상황에서 두려워하지 않는 것은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함께 하신다는 믿음이 없이는 그리할 수 없고, 죽어도 다시 살 것이란 믿음이 없이는 그리 할 수 없고, 영생의 소망이 없이는 그리할 수 없습니다. 계시록의 저자가 예수님의 입을 통해서 우리에게 전한 말씀, “네가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 말라. 볼지어다.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너희가 십 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2:10)고 한 말씀도 믿음이 없이는 그리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믿음의 끈을 놓아서는 안 됩니다.
대둔산 근처 진산에 살았던 윤지충은 고산 윤선도의 6대 손이며, 윤두서의 증손자였습니다. 아버지 윤경과 어머니 안동 권씨의 장남으로 1759년에 태어났습니다. 윤지충은 함께 효수된 권상연 그리고 정약전, 정약종, 정약용과는 고종사촌 간이었고, 1783년 봄 정씨 형제들과 함께 초시(初試)에 합격하였습니다.
1791년 5월 윤지충은 신자였던 어머니 권씨의 유언을 따라 외종형인 권상연과 상의하여 유교의 제사의식대로 음식을 차리거나 부모의 상징적 표현인 신주(神主)를 모시지 않았습니다. 또 돌림병으로 인하여 8월에 가서야 어머니의 장례를 치르게 되었는데, 이것이 와전되어 조문도 받지 않고 어머니의 시체를 버렸다는 말로 비약되었습니다. 이일로 전라감영으로 압송되어 심문과 사건 심리를 받았습니다. 여기서 두 사람은 공술기를 작성하였습니다. 윤지충은 전라도 관찰사 정민시 앞에서 제사를 폐지한 행위를 최종적으로 이렇게 진술했습니다.
천주를 대부모로 받드는 이상 천주의 명을 준행치 않는다면, 결코 흠숭의 도리가 아닙니다. 그런데 사대부가(士大夫家)의 목주(木主)는 천주교에서 금하는 바이므로 차라리 사대부에게 죄를 지을지언정 천주께 죄를 짓는 것은 원치 않습니다....
전라도 관찰사는 고문으로 배교를 강요했지만, 윤지충은 “살아서건 죽어서건 가장 높으신 아버지를 배반하면 아무데도 갈 곳이 없다”며 배교를 거부했습니다. 1791년 11월 7일 전라도 관찰사는 다음과 같이 조정에 보고했습니다.
.... 매를 처가며 자백을 받을 때에도 유혈이 낭자하였지만, 신음하는 소리 한 마디 없이 날마다 천주의 가르침이 지엄하여 군상(君上)의 명령이나 부모의 명령은 어길지라도 천주의 가르침은 비록 극형에 처해질지라도 결코 배반할 수 없다고 하며 칼날에 죽는 것을 영광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권상연의 진술도 윤지충과 마찬가지입니다.
윤지충은 33세 때인 1791년 음력 11월 13일 오후 3시, 예수님께서 운명하신 동일한 시간에 41세의 권상연과 함께 효수에 처해졌습니다.
“천주의 가르침이 지엄하여 군상(君上)의 명령이나 부모의 명령은 어길지라도 천주의 가르침은 비록 극형에 처해질지라도 결코 배반할 수 없다”고 한 윤지충의 신심이 바로 그 어떠한 상황에서도 믿음의 끈을 놓지 않은 두려움이 없는 믿음의 행위인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에 대한 비전이 없이는 가질 수 없는 믿음인 것입니다.
진산 사람 윤지충이 효수된 그다음 해에 출생한 이경언(1792-1827)도 36세 때인 음력 5월 4일 전주 감옥에서 순교하였습니다. 다음의 글은 이경언이 쓴 심문기(審問記)의 중간부입니다.
얼마 안 있어 관찰사가 저를 불러내어 영장(營長)이 어제 했듯이 심문하자 대답하였습니다. 그 위엄 있는 차림이 진영(鎭營)에서보다 열배나 더하였습니다. 관찰사가 물었습니다. “네 뜻에 변함이 없느냐?” “그렇습니다.” “천주가 무엇이냐?” “천주는 하늘과 땅, 천신과 사람, 만물을 만들어내신 대군대부(大君大父)이십니다.” “네가 그것을 어떻게 아느냐?” “가까이로는 우리 몸을 살펴보고, 멀리로는 만물을 보면, 어찌 천지만물을 만들어내신 분이 안 계신다고 하겠습니까?” “네가 천주를 보았느냐?” “어찌 보고서야 믿겠습니까. 사또께서는 이 선화당(宣化堂)을 지은 목수를 보셨습니까? 오관(五官)이라 하는 것은 소리 색깔 냄새 맛이나 분별하지만, 형체를 볼 수 없는 의리(義理)는 마음이 분별합니다.” 한참 저를 보다가 “네가 배운 것을 다 말해 보아라.” “십계(十戒)와 칠극(七克)을 알고, 아침저녁으로 주님께 드리는 기도문을 압니다.” “그런 것은 다 들었다. 너는 끝내 신앙을 버리지 못하겠느냐?” “못합니다. 자식이 아비를 섬기지 않고, 신하가 임금을 섬기지 않으면 불효불충이 되는데, 어찌 사람이라고 일컬으면서 천주를 섬기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너는 죽기가 무섭지 않느냐?” “어찌 무섭지 않겠습니까.” “그런데도 왜 천주학을 버리지 못하겠느냐.” “그 까닭은 아까 아뢰었으니, 다시 묻지 말아 주십시오. 죽을 따름입니다.” 즉시 저를 전주부(全州府)로 돌려보냈습니다.
하나님을 “하늘과 땅, 천신과 사람, 만물을 만들어내신 대군대부(大君大父)”로 알았던 이경언, “자식이 아비를 섬기지 않고, 신하가 임금을 섬기지 않으면 불효불충이 되는데, 어찌 사람이라고 일컬으면서 천주를 섬기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고 죽기를 무릅쓰고 신앙을 지켰던 이경언의 숭고하고 아름다운 신앙이 바로 그 어떠한 상황에서도 믿음의 끈을 놓지 않았던 두려움이 없는 믿음의 행위입니다. 영생에 대한 비전이 없이는 가질 수 없는 믿음인 것입니다.
둘째, 모세의 부모가 갈대상자에 어린 모세를 담아 강물에 떠내려 보낸 것은 희망을 실어 보낸 것입니다. 모세가 이집트에서 구출하여 낸 이스라엘 회중도 희망을 실은 갈대상자였습니다. 비록 부서지기 쉬운 튼튼하지 못한 여린 국가임에도 불구하고 그 어떤 타민족이 경험하지 못했던 구원의 경험들을 갖게 된 희망의 상자였습니다. 여러분이 실린 갈대상자는 어떻습니까? 희망의 갈대상자입니까? 그 속에 비전이 실려 있습니까? 우리가 몸담고 있는 이 빛과 생명교회는 희망이 실린 갈대상자입니까? 그 속에 비전이 실려 있습니까? 우리 모두는 비전이 이끄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희망을 버리면 안 됩니다. 꿈을 포기하면 안 됩니다. 우리에게 남아 있는 삶이 얼마가 되든지 간에 마지막 숨을 거두는 순간까지 비전을 버리면 안 됩니다. 모세는 마지막 숨을 거두는 순간에도 120세의 노구를 이끌고 느보산 정상에 올라 요단강 건너편에 펼쳐진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을 바라보았습니다. 모세는 숨을 거두는 순간까지도 그가 붙들었던 희망의 끈을 결코 놓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리스신화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지중해의 섬나라 크레타에 미노스란 왕이 있었습니다. 이 왕은 손재주 좋은 아테나이 출신 다이달로스에게 미궁(labyrinth) 을 만들도록 하였습니다. 다 아시다시피 미궁이란 한번 들어가면 빠져나올 수 없도록 복잡하게 만들어놓은 감옥입니다. 어떤 사건이 잘 해결되지 않을 때 우리는 ‘미궁에 빠졌다’고 말합니다.
미노스 왕은 이 미궁에 자기의 친 자식인 미노타우로스를 가둬두었습니다. 미노타우로스는 황소머리를 한 사람으로써 사람을 먹이로 삼는 괴물이었습니다. 미노스는 약소국이었던 아테나이 왕을 협박해서 해마다 12명의 젊은 남녀를 바치게 하여 미궁에 갇혀 사는 미노타우로스에게 먹이로 주었습니다.
아테나이에는 테세우스란 왕자가 있었는데 영웅이었습니다. 그는 자국의 젊은이들을 구하기 위해서 12명의 제물의 한 사람으로 끼어들어 크레타로 건너갔습니다. 그는 자신이 직접 미궁 속에 들어가 그 괴물을 죽일 셈이었습니다.
한편 크레타에는 아리아드네란 공주가 있었는데, 영웅 테세우스를 보는 순간 한눈에 반해버리고 말았습니다. 아리아드네는 아무리 뛰어난 영웅이라도 한번 미궁에 들어가면 다시는 빠져나올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자기가 사모하는 영웅을 위해서 실타래를 하나 건네주었습니다. 테세우스는 실 끝을 미궁의 문설주에 묶은 뒤 그 실을 슬슬 풀면서 미궁 속으로 들어갔습니다. 그가 미노타우로스를 죽인 후에 그 복잡한 미궁을 빠져나올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아리아드네의 실타래 덕분이었습니다. 우리가 믿음의 끈을 놓지 말아야하는 이유가 이런 이유 때문일 것입니다. 우리가 희망의 끈을 놓지 말아야하는 이유도 마찬가집니다. 믿음의 끈은 아리아드네의 실타래처럼 미궁에서 우리를 구원해 낼 것입니다. 희망의 끈은 아리아드네의 실타래처럼 절망에서 우리를 구원해 낼 것입니다. 아무리 복잡한 문제라할지라도, 우리가 믿음의 끈을 놓지 않는 한, 우리가 희망의 끈을 놓지않는 한, 해결의 실마리는 반드시 주어질 것입니다.
이사야와 에스겔과 같은 선지자들도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던 사람들입니다. 이사야는 잘린 후에 죽어버린 그루터기에서 새싹이 돋는 비전을 보았고, 에스겔은 죽음의 골짜기에서 해골과 뼈들이 살아나는 비전을 보았습니다. 계시록의 저자는 대로마제국의 탄압과 박해 속에서도 '하나님을 대항하여 이길 자가 없다'는 것과 '오직 하나님만이 우리 구원의 유일한 근원이시다'는 믿음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계시록의 저자 요한은 박해라는 무서운 폭풍 속에서 그 폭풍을 잔잔케 할 능력의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지진, 전쟁, 기근, 순교, 천재지변과 같은 악순환이 거듭되는 비극적인 역사의 중심 속에서도 굴절된 역사를 바로 잡아줄 능력의 하나님을 보았습니다. 칠흑처럼 어두운 현실에서 빛을 보았고, 혼돈 속에서 질서를 보았으며, 죽음에서 생명을 보았습니다. 이런 믿음의 비전이 우리 성도님들에게도 있기를 바랍니다.
셋째, 인간의 뜻을 이루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모세를 물에서 건지시고, 모세를 바로의 공주의 품에서 양육 받게 하시고, 그를 들어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에서 이끌어낼 지도자로 삼으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이란 말이 있듯이, 자기가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착실하게 다한 후에 그 결과를 하나님께 맡기는 행위는 믿음의 행위입니다. 꿈을 실현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빌립보서 1장 6절은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고 했습니다. 또 데살로니가전서 5장 24절은 “너희를 부르시는 이는 미쁘시니, 그가 또한 이루시리라.”고 했습니다. 믿음의 끈을 놓지만 않는다면, 희망의 끈을 놓지만 않는다면, 하나님께서 반드시 우리들의 소원을 이루실 것입니다. 빌립보서 2장 13절은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신다.”고 했습니다.
여러분은 갈대상자에 어떤 꿈을 담고 계십니까? 세월의 강물 속에 빈껍데기 상자만 흘러 보내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능력 있는 분에게 발견이 되고 그가 그 상자를 열었을 때, 그 속에서 아무 것도 발견이 되지 않는다면, 그 실망이 얼마나 크겠습니까? 어린 모세는 희망이었습니다. 그는 장차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의 억압에서 구원할 자였습니다. 결국 모세는 물에서 건짐을 받았습니다. 그로 인해서 이스라엘 백성도 물에서 건짐을 받았습니다. 물에서 건짐을 받았다는 것은 갈대상자의 꿈이 이뤄졌다는 뜻입니다. 그 꿈을 이루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절망의 상황에서라도 믿음의 끈을 놓지 마시기 바랍니다. 희망의 끈을 놓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세월의 강물 속에 희망을 한 아름 실은 갈대상자를 띄워 보내시길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반드시 그 상자를 열어보실 것입니다. 그리고 그 상자의 꿈을 이루실 것입니다. 비전이 이끄는 삶을 살게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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