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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도록 충성하라(계 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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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동호
댓글 0 조회 13,038 2005.03.16 14:52

본문

죽도록 충성하라(계 2:10)

지난주에는 우리의 영안을 밝히 떠서 풍랑을 잔잔케 하실 예수님을 바라보자는 주제의 말씀을 드렸습니다. 불황의 풍랑이 되었든지, 가정문제의 풍랑이 되었든지, 개인문제의 풍랑이 되었든지 간에 이 풍랑을 잔잔케 하실 분은 예수님뿐입니다. 그래서 먹구름이 몰려오는 바다를 항해하는 젊은 항해사의 배후에 서서 그를 돕고 계신 예수님을 그린 화가 샐만이나 박해라는 무서운 폭풍을 만난 교회들을 건져내실 인자의 서신 모습을 본 계시록의 저자 요한처럼, 또 갈릴리 호수에 불어 닥친 강한 돌풍과 폭풍을 향해서 “잔잔 하라. 고요 하라”고 명령하시고 호수에 평온을 되찾게 하신 예수님을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자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무엇을 본다는 것은 비전이 있다는 것이고, 비전이 있어야 믿을 수 있고, 또 믿어야 신실할 수가 있어서 풍랑을 극복할 수가 있습니다. 구약에서는 선지자를 ‘나비’라고 불렀는데, 이 말은 ‘보는 자’란 뜻입니다. 따라서 ‘나비’란 앞을 내다보는 자, 환상을 보는 자, 비전을 품은 자를 의미합니다. 이 분들은 풍랑을 잔잔케 하실 능력의 주님을 믿음의 눈으로 보기 때문에 강한 풍랑을 만나 믿음의 끈을 놓으려고 하는 성도들을 향해서 끝까지 믿음을 지키라, 목숨을 바쳐서라도 하나님의 신실함을 신뢰하라고 말합니다.
오늘의 본문, 계시록 2장 10절, “죽도록 충성하라”는 말씀은 1장에서 J장군 예수님의 강한 모습을 보여주고 난 다음에 주신 말씀입니다. “죽도록 충성하라”는 말씀은 목숨을 바쳐서라도 J장군 예수님이 풍랑을 잔잔케 하실 분이시고, 그 약속을 반드시 지킬 분이시라는 것을 굳게 신뢰하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충성’이란 말은 ‘신실’이란 뜻입니다. 또 ‘신실’은 약속을 지킨다는 뜻입니다.
계시록 1장에 따르면, 우리를 폭풍 중에서 건지실 예수님은 부활승천하시고 영광을 받으신 인자이십니다. 이 인자께서 발에 끌리는 옷을 입고, 가슴에 금띠를 띠고, 그 머리와 털의 희기가 흰 양털 같고, 흰눈 같으며, 그의 눈은 불꽃같고, 그의 발은 풀무에 단련한 빛난 주석 같고, 그의 음성은 많은 물소리와 같으며, 그 오른손에 일곱 교회의 목회자를 상징하는 별을 쥐시고, 그 입에 좌우에 날선 로마 검이 있고, 그 얼굴은 해가 힘 있게 비취는 것 같은 찬란한 모습으로 폭풍만난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들 배후에 버티고 서서 지키고 계십니다.
이 인자의 모습을 우리는 우리의 고달픈 삶 속에서 볼 수 있어야 하고, 아무리 크고 강한 폭풍이 우리 앞에 닥친다 해도 그분에 대한 신뢰의 끊을 놓아서는 안 됩니다. 그 길만이 우리가 승리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요 복 받는 길입니다.
인자와 같은 모습이 다른 종교에도 없는 것은 아닙니다. 우연인지 모방인지는 알 수 없지만, 불교 가운데는 미륵을 섬기는 민중신앙이 있습니다. 미륵신앙은 당나라 때에 성행하였고, 이 때에 기독교의 한 교파였던 경교(Nestorianism)가 당나라에 전해졌던 터라, 기독교의 메시아신앙이 불교의 미륵신앙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여러 가지 점에서 미륵신앙은 메시아신앙을 닮고 있습니다.
미륵은 기독교의 천년왕국 개념과 비슷한 희망의 나라인 정토(pure land) 또는 용화세계를 세울 구세주불(佛)로써 그 모습이 사금같이 빛나고, 키가 어마어마하게 크며, 서른두 가지 거룩한 얼굴형태와 여든 가지 미묘한 모습을 갖추고 있으며, 머리털은 검붉은 유리빛깔이며, 머리에는 온 세상을 두루 비추는 여의주와 보석으로 만든 하늘관을 쓰고 있다고 합니다.
미륵신앙은 당나라 때에 신라에 유입되어 백제문화권에서 크게 융성했던 민중신앙입니다. 충청남북도와 전라북도 일대에서는 사찰 마당에 세워진 미륵들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미륵의 특징은 전라북도 정읍에 있는 미륵사찰인 금산사, 청주의 용화사, 연산의 계태사 등의 몇몇 사찰을 제외하고는 다 마당에 세워져 있습니다.
계시록 1장의 인자와 불교의 미륵의 공통점은 서있다는 점과 태평천국을 세운다는 점이고, 인자는 머리에 면류관이 없는 반면, 미륵은 면류관을 쓰고 있고, 인자는 자기 피로 인간을 구원하는 반면, 미륵은 세 번의 설법으로 구원합니다.
평소에 예수님은 하나님의 우편보좌에 앉아 계십니다. 그런데 스데반이 돌에 맞아 순교하기 직전에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행 7:55)을 본 것과 요한이 인자가 소아시아에 산재한 일곱 교회의 배후에 서 계신 것을 본 모습은 마치 어미 새가 매의 습격으로부터 새끼를 보호하려고 바짝 긴장하는 모습을 연상케 합니다. 다시 말씀드리자면, 하나님의 자녀들이 위급한 상황에 처하게 될 때에 도움을 주시려고 다급하게 벌떡 일어선 그런 긴장된 모습을 표현한 것입니다. 그러나 사찰에 선 미륵은 생명이 없는 돌에 지나지 않을 뿐 아니라, 인간의 고뇌와 고통을 아는지 모르는지 태평한 모습을 하고 있어서 아픔으로 일그러진 인간들에게 전혀 도움이 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계시록의 면류관은 승리를 상징하는 월계관이며, 예수는 우리에게 이 월계관을 씌워주시려고 다시 오실 분으로 소개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보석으로 장식된 면류관을 쓴 미륵은 인간의 수고를 보상하겠다는 말을 하지 않습니다.
예수는 우리 인간이 죄의 삯으로 죽어야할 그 자리에 대신 죽음으로써 우리를 하나님의 징계로부터 구원하십니다. 그런데 미륵은 단 세 번의 설교만으로 무한 중생을 구원한다고 합니다. 단 세 번의 설교만 듣고도 구원을 받을 수 있다면 그보다 더 쉬운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나 문제는 인간의 죄입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라고 했습니다. 따라서 죄의 삯을 지불하지 않고서는 아무라도 구원에 도달할 자가 없습니다. 그런데도 미륵은 인간의 죄 사함을 위해서 아무 것도 하지 않았고, 또 할 수도 없었습니다. 미륵은 인간의 아들로서 스스로 득도하여 보처보살이 된 인물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의 큰 뜻을 이루기 위해서 인간으로 오셨고, 인간들을 대신해서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려움을 당할 때에 우리를 구원할 구세주를 바로 알아야 합니다. 미륵을 바라봐서도 안 되고, 인간을 의지해서도 안 되고, 오직 예수만을 바라봐야 합니다. 예수만이 우리의 구세주이기 때문입니다.
계시록 2-3장을 보면, 예수님께서 소아시아에 산재한 일곱 교회에 말씀을 주실 때에 1장에서 소개한 인자의 특징을 한 가지씩 적용하여 말씀하시고, 귀 있는 자가 들어야 할 칭찬과 책망과 또 끝까지 견디고 이기는 자가 받게 될 상급을 말씀하십니다. 풍랑을 잔잔케 할 그리스도가 계신데, “어찌하여 무서워하느냐? 어찌 믿음이 없느냐? 왜 그토록 더디 믿느냐?”라고 꾸짖기도 하십니다. “네가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 말라. 볼지어다.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너희가 십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계 2:10)고 서머나 교회에 말씀하십니다. 그 이유는 한결같이 우리가 다 믿음의 눈을 떠서 능력의 구세주이신 예수님을 바라보고,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성삼위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믿고 의심치 말며, 죽기로 믿음을 지킬 것을 당부키 위한 것입니다.
1세기말 도미티아누스 황제 당시, 기독교는 엄청난 위기를 만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 믿는 것 자체가 죽음과 수치를 의미했습니다. 그러므로 기독교인들은 예수님을 믿는 순간부터 큰 고난과 죽음을 각오하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조롱을 당하고, 채찍과 몽둥이로 매를 맞고, 감옥에 갇히고, 사나운 짐승에 찢기고 할퀴며,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많은 사람들이 눈에 보이지 않는 예수를 버리고 눈에 보이는 로마황제를 섬겼습니다. 그것은 마치 바다에서 폭풍을 만난 사람이 바람과 바다가 무섭다고 배를 버리고 바다에 뛰어든 것과 같았습니다. 배 안에 능력의 주님이 계신데, 그것을 보지 못하고, 잠시 어렵다고 배를 버린 사람은 결코 살지를 못했습니다. 배 안에 예수님 계셨기 때문에 배는 결코 좌초되지 않았고, 인내로 끝까지 믿음을 지킨 사람들은 살아남았고 포상까지 받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계시록을 통해서 오늘도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처음행위를 가지라”(2:5). “죽도록 충성하라”(2:10). “회개하라”(2:16). “굳게 잡으라”(2:25). “네가 어떻게 받았으며 어떻게 들었는지 생각하고 지키어 회개하라”(3:3). “네 가진 것을 굳게 잡아 아무나 네 면류관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3:11). “네가 열심을 내라”(3:19). 그리고 끝까지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과실을 줘서 먹게 하리라”(2:7). “이기는 자는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아니하리라”(2:11).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감추었던 만나를 주고 또 흰 돌을 주겠다”(2:17). “새벽별을 주리라”(2:28). “이기는 자는 . . . 흰옷을 입을 것이요, 내가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반드시 흐리지 아니하고 그 이름을 내 아버지 앞과 그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리라”(3:5). “이기는 자는 내 하나님 성전에 기둥이 되게 하리라”(3:12).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 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3:21).
바울도 로마서 8장 17-18절에서 이와 비슷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고린도후서 4장 16-18절에서도 동일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겉 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 우리의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간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 그러므로 우리 신앙인들은 현실에 안주하지 말고, 세상과 타협하지 말고, 끝까지 예수님만을 바라보고,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을 믿으면서 끝까지 믿음으로 승리하시기를 바랍니다.
예수께서 계시록을 통해서 교회에 주는 경고 가운데 니골라당의 행위라는 것이 있습니다. 이는 이단의 무리로서 이교 사회와의 타협을 추구했던 집단입니다. 그들은 영적으로 자유 함을 얻으면, 우상숭배나 음행을 해도 좋다고 믿었습니다.
발람의 교훈에 대한 경고도 있습니다. 민수기 25장에 보면, 이스라엘 민족이 광야생활 40년을 마치고 약속의 땅에 진입하기 위하여 여리고성 맞는 편 요단강 건너편 모압평지에 진을 쳤습니다. 이 때 모압의 왕 발락이 발람을 초대하여 바알의 신전이 있는 브올산에 올라가 이스라엘을 저주토록 하였습니다. 싯딤이란 곳에서 이스라엘 사람들이 모압 사람들과 알고 지내면서 바알브올을 섬기자, 하나님의 진노로 염병이 퍼져 2만 4천명이 죽는 엄한 벌을 받게 됩니다.
염병이 번진 싯딤은 사막문화권이 끝나고 농경문화권이 시작되는 관문과 같은 곳입니다. 예로부터 항구도시에는 홍등가가 발달했습니다. 마찬가지로 광야에서 40년을 유랑하던 이스라엘의 남성들이 농경문화권의 첫 관문인 이곳 싯딤에서 바알종교에 접하게 되었습니다. 바알은 농사의 신이기 때문에 농사가 잘되기 위해서는 비로써 상징되는 하늘의 남신과 밭으로 상징되는 땅의 여신 사이의 만남으로 이루어진다고 보았으며, 실제로 바알종교의식은 바알신전의 남녀 사제들과 예배자들 사이에서 만나 이루어지는 행위에서 절정을 이루었습니다.
이러한 예배행위는 광야에서 오랜 텐트생활을 했던 이스라엘 민족에게 매혹적인 것으로 받아드려졌을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섬기는 야훼는 모습도 없고, 모습을 만들어서도 안 되고, 볼 수도 없었습니다. 신화도 없고, 여신도 없고, 여사제도 없었습니다. 성막에서 봉사하는 제사장들은 모두가 남성들뿐이었습니다. 이런 메마른 종교의식에 식상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알숭배에 빠지는 것은 시간문제였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가나안에 정착한 이후에도 끝없이 받았던 유혹이 바로 바알숭배였습니다. 아무튼 이스라엘사람들의 일부가 싯딤에서 성창과의 행위들을 경험했을 것이고, 그 결과 성적으로 깨끗했던 그들 대부분이 성병에 감염되어 죽었을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이것이 발람의 유혹에 의해서 이루어진 일이라고 계시록은 말하고 있습니다.
이세벨에 대한 경고도 자주 언급되고 있습니다. 이세벨은 레바논(시돈) 사람의 왕 옛바알의 아리따운 딸로서 아합의 선왕인 오므리가 정략적으로 아합 왕과 결혼을 시킴으로써 이스라엘에 들어온 이방여인입니다. 솔로몬 왕이 종교적으로 타락을 금치 못했던 원인도 이 정략결혼에 의해서 많은 이방여인들이 궁전에 입성한 때문입니다. 그들이 올 때에는 반드시 자신들의 신과 제사장들과 몸종들을 동반합니다. 그러면, 그들을 위해서 이스라엘은 사당을 지어주고, 궁전을 지어 줘야 합니다. 아합 왕도 이세벨을 위해서 바알신전을 지어주고, 자신도 바알을 숭배했습니다. 이는 아합이 이세벨의 유혹에 넘어간 때문입니다. 이 이세벨이 아합의 권세를 이용해서 온 이스라엘 백성에게 야훼를 버리고 바알을 숭배토록 탄압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계시록에서 이세벨은 로마제국이 황제숭배를 강요하면서 교회를 탄압했던 당시의 상황에 비추어 볼 때, 반드시 제거돼야할 악녀의 상징으로 부각된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구약성경 열왕기상에 보면, 바알과 아세라신의 선지자 850명이 엘리야의 손에 의해서 기손 강의 물귀신이 되었고, 아합왕은 전투에서 피 흘려 죽음으로써 그 피를 개들이 핥았으며, 이세벨은 높은 건물의 창 밖으로 던져져 그 피가 담과 말에 튀었고, 그 시체는 짓밟히고 말았습니다. 이것이 박해세력과 그들을 따랐던 자들의 최후였다는 점을 계시록은 우리에게 암시적으로 경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계시록에서의 음행과 우상숭배는 같은 뜻으로 쓰인 말입니다. 우상숭배는 신랑이신 예수를 버리고 바알과 같은 다른 신을 찾아가는 것이기 때문에 음행에 해당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행위가 호세아 선지자 시대에 심하게 일어났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야훼를 버리고 바알을 숭배했던 것입니다. 바알종교는 그만큼 이스라엘 민족에게 매혹적인 종교였던 것입니다.
오늘날에는 돈과 성, money와 sex를 섬기는 현대문화를 바알종교문화라 부릅니다. 니골라당의 행위를 금할 것과 발람의 교훈을 따르지 말 것과, 이세벨을 멀리하라는 하나님의 엄중한 경고를 들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경고는 우리 신앙인들에게 주어진 사랑의 메시지입니다. 어렵다고 신앙의 정조를 팔지 마시고, 어려움에 처할 때에 그 난관에 맞서 도움을 주실 예수님을 믿음의 눈으로 보시고, 죽기로 신실한 믿음을 지켜, 반드시 승리자가 되시어 월계관을 받아쓰시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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