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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사 14:1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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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동호
댓글 0 조회 12,289 2005.07.11 0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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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사 14:12-19) 12월은 우리 주님을 기다리는 대강절입니다. 그래서 12월 한 달간은 내려옴의 소중함 또는 낮아짐의 가치에 대해서 살펴보려고 합니다. 올라가는 것 또는 오르는 일은 가치 있고, 소중한 일이며, 즐거운 일이지만, 이 보다 더 소중하고, 더 가치 있는 일이 내려오는 것 또는 낮아지는 것이란 사실을 우리 주님의 강림을 통해서 배웠으면 합니다. 오르는 일보다는 내려오는 일이 항상 더 위험하다는 것을 평소 많이 경험해 보셨을 것입니다. 높은 나무에 올라갔을 때, 지붕에 올라갔을 때, 내려갈 일이 걱정스러웠던 경험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제 아들이 초등학교 2학년 때였을 거예요. 저희 대학 교수들이 겨울에 계룡산 관음봉을 오른 일이 있었습니다. 평소 등산을 잘하지 않았던 탓에 눈길에 대한 대비도 없었고, 미끄러지기 쉬운 신들을 신고 있었는데, 산에 오르는 도중에 눈이 내리기 시작했습니다. 눈 내리는 겨울정취에 흠뻑 빠져서 콧노래를 부르면서 오르다보니까 어느덧 정상에 닿게 되었습니다. 가랑비에 옷 젖는다고 정상에 다 올랐을 때에는 눈이 상당히 쌓였습니다. 내려올 때에는 쌓인 눈 때문에 길을 구별하기가 너무 어려웠습니다. 그리고 어찌나 미끄럽던지, 내려오던 길에 박목사님께서 나무에 부딪쳐 허리를 조금 다치셨고요, 저는 하나밖에 없는 어린 아들이 넘어져 구르지 않도록 하려고 얼마나 조심에 조심을 했던지, 그 때를 생각하면 아찔하기만 합니다. 무작정 오르기보다는 내려올 일을 미리 걱정해 두는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이란 것을 그 때에 다시 한번 깊이 느꼈습니다. 한번 들어가면 나올 수 없는 미궁속이라도, 실타래를 풀면서 들어갔다가 나올 때 실을 따라 나오면 미궁을 탈출할 수가 있다고 합니다. 무작정 들어가거나 무작정 오르기보다는 나올 때나 내려올 때의 일을 걱정해 두는 사람이 자기실타래를 준비하는 지혜로운 사람일 것입니다. 높아지기만을 바라고 낮아질 줄 모르는 사람을 향해서 예수님은 누가복음 14장 11절에서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서 인간의 몸으로 이 땅에 오신 일에서 가장 큰 의미는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내려오셨다는데 있습니다.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내려오는 것, 이것이 순리이고 자연의 법칙입니다. 물은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지 낮은 곳에서 높은 곳으로 흐르지 않습니다.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분수의 물도 오를 수 있는 곳까지 오르면 반드시 추락하고 맙니다. 물체는 받쳐놓거나 붙들어 매놓지 않으면 반드시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추락합니다. 물체를 치솟게 할 수는 있지만, 높이 오른 물체일수록 내려올 때에는 가속도가 붙게 되어 점점 빨라지고 중량도 커져서 추락의 정도가 심해집니다. 땅바닥에 발을 붙이고 사는 것이 자연스럽고 순리적인 것인데, 인위적으로 높이 오르려고 하면, 반드시 추락하여 상처를 입습니다. 그러나 스스로 낮추는 자는 높임을 받습니다. 우리 예수님께서는 하늘 보좌방에서 낮고 천한 이 땅에 내려오셨습니다. 우리 예수님은 모든 인위적인 신분들을 버리고, 낮고 천한 우리 인간들과 친구가 되셨고, 그들과 어울리셨습니다. 우리 예수님은 스승이었지만,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셨습니다. 우리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요 구세주였지만, 십자가에 죽기까지 당신을 낮추시고 하나님께 순종하셨습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그런 예수님을 높이 들어 하늘 우편 보좌에 앉히셨고, 모든 인간들로 하여금 그분 앞에 무릎을 꿇고 경배하게 하셨습니다. ‘오만’은 인간을 파멸의 구덩이로 몰아갈 가공할 내면의 적이란 사실을 눈치 채는 사람만이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역사가 토인비는 로마제국의 멸망을 '로마병' 때문이었다고 했습니다. 그는 조직이 붕괴되고 나라가 망하는 이유를 그 조직이나 국가의 내부의 적인 사회적 병폐에서 찾고 있습니다. 사람으로 말하자면, 힘센 사람에게 맞아 죽거나 차에 치어 죽기보다는 몸이 병들고 속이 썩어서 죽는 경우입니다. 토인비는 지구상에서 한 때 찬란한 꽃을 피웠지만, 시들고 멸망해 버린 21개의 문명들을 연구한 끝에 결론내리기를, 21개의 문명들 가운데 19개 문명이 외부의 적이 아닌 내부의 적, 곧 내적인 문제로 말미암아 멸망했다고 하였습니다. 이 ‘내부의 적’이 바로 ‘오만’입니다. 토인비는 ‘오만’을 ‘자기우상’이란 말로 표현했습니다. 그리고 이로 인해서 인간의 문명이 쇠퇴되고 해체되는 것을 토인비는 ‘네메시스’ 곧 ‘응보’라고 불렀습니다. 프랑스 출신 엔지니어 레셉스는 1859년부터 1869년까지 10년간의 대역사를 통해 홍해와 지중해를 관통하는 수에즈운하를 성공적으로 건설하였고, 젊은 나이에 이미 ‘운하공사의 대가’로 불렸습니다. 그로부터 12년 만인 1881년에 레셉스는 파나마운하 건설을 위한 책임자로 또 한번 뽑히게 되었습니다. 수에즈운하 공사에 자금을 대주고 이용료를 받아 챙기는 유럽의 금융업자들이 또 한번의 대박을 터트리기 위해서 파나마운하를 건설키로 하고 레셉스에게 이 일을 맡겼던 것입니다. 과거의 성공에 고무된 레셉스는 수에즈와 파나마지역의 지형과 기후 등 자연환경이 매우 다르다는 점을 고려하지 않은 채, 모든 공사를 수에즈운하를 만들 때 써먹은 방식으로 진행시켰습니다. 수에즈지역의 경우 건조한 사막기후인데다가 평균 높이가 해발 15m에 불과했지만, 파나마지역은 열대우림지역인데다가 전체 길이가 82km이고, 해발 150m나 되었는데도 레셉스는 바다높이와 동일한 높이의 운하를 만들기 위해서 땅을 파내려가도록 지시했습니다. 말라리아가 창궐하는 열대우림지역에서 150m를 파내려가는 공사방법은 자살행위나 다름없었다고 합니다. 8년간 무려 2만2000명이나 말라리아에 걸려 사망하는 등 공사현장은 전쟁터와 같았다고 합니다. 레셉스가 사장으로 취임한 파나마운하회사는 결국 1889년 파산하고 말았고, 파산 이후에는 정신착란증으로 평생고생하며 살았다고 합니다. 파나마운하는 그로부터 17년 후에 수로에 3단계 갑문을 설치하여 물을 담고, 갑문을 여닫으며 수위를 조절하는 방식으로 선박을 통과시키는 공사방식을 채택하여 1914년 개통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갑문식운하 아이디어는 레셉스가 공사를 시작하기 2년 전에 이미 프랑스출신의 한 엔지니어가 열대우림기후에다 지대가 높은 파나마지역에 운하를 건설하려면 이 방식밖에 사용할 수 없다고 제안한 바 있었다고 합니다. 수에즈운하의 영웅 레셉스가 파나마에서 실패한 이유는 과거의 성공에 집착했기 때문입니다. 자기능력과 방식을 고집하는 오만과 자기우상숭배에 빠지면서 갑문식운하라는 시대적 기술을 거부하였고, 그 결과 수만 명의 사람들이 목숨을 잃고 천문학적인 돈을 날림으로써 파산하였고, 정신병까지 얻어 여생을 불행하게 보내었다고 하니까, 이것이 레셉스가 받은 네메시스 곧 오만에 대한 응보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사도행전 27장 5절에 보면, 지금의 터키 땅 남쪽 해안에 루기아 도가 나옵니다. 옛날, 이곳 왕국에서는 나라를 쑥대밭으로 만드는 ‘키마이라’라는 괴물이 있었는데, 왕은 그 괴물을 퇴치할 용사를 찾고 있었습니다. 키마이라는 머리가 사자와 산양을 합친 듯했고, 꼬리는 용과 비슷했는데, 입으로는 불을 뿜어내기 때문에 이 괴물을 물리치고 살아 돌아온 용사가 아무도 없었습니다. 난공불락의 요새가 있으면 그것을 무너뜨리는 영웅이 나타나듯이, 이 키마이라를 물리친 용사가 있었는데, 그의 이름이 벨레로폰입니다. 벨레로폰이 괴물을 물리칠 수 있었던 이유가 몇 가지 있었는데요, 첫째는, 그가 괴물을 퇴치하러 가기 전에 제일 먼저 예언자(폴뤼이도스)를 찾아가 자문을 구한 일입니다. 예언자는 키마이라를 죽이려면 하늘을 나는 말인 페가소스가 있어야 가능하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벨레로폰이 말했습니다. “페가소스는 하늘을 나는 천마가 아닙니까? 천마는 지혜의 여신 아테나의 황금고삐에만 복종한다는데, 내가 무슨 수로 그 고삐를 구하겠습니까?” 예언자는 신에게 간절하게 간구하면 뜻을 이룰 수 있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둘째는, 벨레로폰의 경건한 신앙심 때문이었습니다. 길을 떠난 벨레로폰이 한 도시에 이르러서보니, 동쪽에는 지혜의 여신 아테나의 신전이 있고, 서쪽에는 애욕의 여신 아프로디테의 신전이 있었습니다. 두 신전 중 한 곳에서 하룻밤을 묵어가야하는데, 벨레로폰은 지혜의 신 아테나 신전을 선택했습니다. 애욕의 여신 아프로디테 신전의 여사제들은 나그네들에게 웃음을 파는 성창들이었기 때문에 벨레로폰으로써도 여간 마음이 쓰이고 끌리는 것이 아니었지만, 예언자의 충고를 잊지 않았던 것입니다. 밤에 아테나 여신이 꿈에 나타났습니다. “저 애욕의 신전에 들지 않고 이 지혜의 신전에 든 너의 선택이 기특하다. 너에게 황금고삐를 내릴 것인즉, 페가소스를 붙잡아 뜻하던 바를 이루라.”고 하였습니다. 벨레로폰이 꿈을 깨어보니, 과연 황금고삐가 옆자리에 놓여 있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벨레로폰은 예정대로 천마 페가소스를 붙잡아 탔고 키마이라를 죽이는데 성공하였습니다. 한낱 인간에 불과한 벨레로폰이 그의 작은 믿음 때문에 날개 달린 천마 페가소스를 얻어 탈수가 있었고, 천마 페가소스의 날개 덕분에 괴물을 물리치고 영웅의 자리에 오를 수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만 벨레로폰의 마음에 ‘오만’(Hybris)이란 이름의 ‘죽음에 이르는 병’이 도지고 말았습니다. 이 오만은 사람의 마음속에 만들어지기 쉬운 ‘자기우상’인데요, 자기우상숭배에 빠지게 되면 여기에 상응하는 네메시스, 곧 업보를 받게 되는데요, 벨레로폰도 이 업보로 인해서 추락하고 맙니다. 벨레로폰은 천마 페가소스를 타고 신들의 보좌에까지 오르고 싶어졌습니다. 신들의 보좌에까지 오르고자한 오만함이 주변 사람들에게는 또 어떻게 나타났을지 충분히 짐작이 가고 남으실 것입니다. 벨레로폰은 페가소스를 타고 하늘궁전을 향해서 오르고 또 올랐습니다. 제우스가 가만히 내려다보고 있으려니까, 벨레로폰이 하는 짓이 우습기도 하고 괘씸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날벼락을 던져 태워버릴까 하다가 생각을 바꿔서 말의 몸에 붙어서 피를 빨아먹는 강력한 ‘등에’ 한 마리를 만들어 페가소스의 꼬리 밑에 붙어 피를 빨게 하였습니다. 페가소스가 괴로움을 참지 못하고 몸부림을 치는 바람에 벨레로폰은 천마의 등에서 튕겨 나와 지상으로 추락하고 말았습니다. 날개 달린 페가소스가 몸을 날려 벨레로폰을 받아 줄만도 했지만, 그는 이미 신의 노여움을 받은 터라 페가소스로써도 그런 너그러운 자비를 벨레로폰에게 베풀 수가 없었습니다. 결국 벨레로폰은 ‘방황의 들’이라고 불리는 알레이온 벌판에 떨어졌는데요, 갈대숲덕분에 목숨만은 잃지를 않았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는 절름발이에 장님까지 되어 사람들의 발길이 뜸한 길만 골라 세상을 ‘방황‘하다가 쓸쓸하게 죽었다고 합니다. 날개가 있다고 하는 것은 크나큰 행운이요 축복일 수 있지만, 경건성을 잃고 자만하는 순간 추락하게 된다는 귀중한 교훈을 주는 이야기입니다. 아담과 이브가 선악과를 먹고 천벌을 받은 이유가 무엇입니까? 시날 평지에서 바벨탑을 쌓던 사람들에게 언어에 혼잡이 오고된 이유가 무엇입니까? 아침의 아들 계명성이 땅으로 추락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들이 한결같이 하나님처럼 높아지려고 한 때문이 아닙니까? 본문말씀 이사야 14장 12-19절을 보면, “[12]너 아침의 아들 계명성이여, 어찌 그리 하늘에서 떨어졌으며, 너 열국을 엎은 자여, 어찌 그리 땅에 찍혔는고? [13]네가 네 마음에 이르기를, ‘내가 하늘에 올라 하나님의 뭇별 위에 나의 보좌를 높이리라. 내가 북극 집회의 산 위에 좌정하리라. [14]가장 높은 구름에 올라 지극히 높은 자와 비기리라’ 하도다. [15]그러나 이제 네가 음부 곧 구덩이의 맨 밑에 빠치우리로다. [16]너를 보는 자가 주목하여 너를 자세히 살펴보며 말하기를, ‘이 사람이 땅을 진동시키며 열국을 경동시키며, [17]세계를 황무케 하며, 성읍을 파괴하며, 사로잡힌 자를 그 집으로 놓아 보내지 않던 자가 아니뇨?’ 하리로다. [18]열방의 왕들은 모두 각각 자기 집에서 영광 중에 자건마는 [19]오직 너는 자기 무덤에서 내어쫓겼으니, 가증한 나뭇가지 같고 칼에 찔려 돌구덩이에 빠진 주검에 둘러싸였으니, 밟힌 시체와 같도다.”고 하였습니다. 한 때 그 영광이 새벽별처럼 빛났던 자가 하나님의 보좌를 넘보는 오만과 자기우상숭배로 인해서 무덤에조차 묻히지 못하고, 음부 곧 깊은 웅덩이에 빠져, 버려진 나뭇가지처럼, 칼에 찔려 돌구덩이에 버려진 시체들에 짓눌리고, 발에 짓밟힌 시체와 같은 처량한 신세가 되고 말았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우리 예수님은 반대로 자기를 낮추시고 십자가에 죽기까지 복종하셨고, 하나님께서는 그런 예수님을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시고, 모든 이들로 예수의 이름에 무릎을 꿇게 하시고, 또 모든 입으로 예수님을 그리스도와 주로 시인하게 하셨습니다. 만일 우리가 예수님을 본받고 하나님 앞과 사람들 앞에서 우리 자신을 낮출 뿐 아니라,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리는 겸손한 자의 삶을 산다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을 높이시고 영광을 받게 하여 주실 것입니다. 이런 영광과 축복이 성도님들에게 있기를 주님으로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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