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마 11:7-9)
본문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마 11:7-9)
예수님이 바라본 유대민중의 처지는 목자 잃은 양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이런 저런 세속의 바람에 한없이 흔들리는 상한 갈대들이었습니다. “아~ 으악새(억새) 슬피 우니”라는 노랫말이 있듯이, 바람은 상한 민중의 마음을 더욱 구슬프게 만들었습니다. 그들은 마음이 쓰라린 가난한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정붙일 곳이 없어서 구름처럼 떠도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에게는 믿고 따를만한 지도자가 없었습니다. 그들의 주위를 맴도는 자들은 그들을 착취하는 자들이요, 그들의 짐을 더욱 무겁게 하는 자들이었습니다. 마태복음 9장 36절에서 예수님은 “무리를 보시고 민망히 여기셨다”고 했고, 그 이유는 “저희가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유리하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예수님께서 무리에게 요한에 대해서 묻는 말씀이 나옵니다. “너희는 무엇을 보러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아니면, 무엇을 보러 나갔더냐? 화려한 옷을 입은 사람이냐? 화려한 옷을 입은 사람은 왕궁에 있다. 아니면, 무엇을 보러 나갔더냐? 예언자를 보러 나갔더냐? 그렇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는 예언자보다 더 위대한 인물이다.”
민중이 광야에 나간 것은 위로를 줄 메시아를 보기 위함이었습니다.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를 보려고 나간 것이 아닙니다.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는 오히려 그들의 상한 마음을 더욱 흔들리게 할뿐이었습니다. 화려한 옷을 입은 사람들을 보려고 나간 것도 아닙니다. 화려한 옷을 입은 사람들은 오히려 그들을 괴롭게 하고, 그들의 짐을 더욱 무겁게 할뿐이었습니다. 위로를 구할 곳이 없었던 민중이 보려고 했던 것은 메시아였습니다. 그들은 아주 오랫동안 그들에게 마음의 평화와 위로를 줄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물론 가진 자들이나 통치자들에게는 그 반대였습니다. 그들에게는 메시아가 전혀 달갑지 않은 자였기 때문입니다.
민중이 세례자 요한을 보려고 광야에 나간 것은 그가 과연 메시아인가를 알아보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들 중에는 정보요원들도 섞여 있었습니다. 민중이 본 세례자 요한은 메시아가 아니었습니다. 그 자신도 메시아가 아니라고 했습니다. 그저 오실 자 메시아를 맞이할 준비를 시키는 사환에 불과하다고 했습니다. 그의 말에 기득권자들은 안도의 숨을 내쉬었고, 민중은 땅이 꺼지는 한숨을 내쉬었습니다.
요한이 소개하는 하나님의 이미지는 엄한 아버지였습니다. 진노와 심판의 하나님이었습니다. 그가 소개한 하나님은 준엄하고 에누리 없고, 배신을 용서치 않는 엄부였습니다. 낙타모피를 입고, 허리에 가죽 혁대를 두르고, 메뚜기와 석청을 먹고 사는 요한이 위로와 사랑을 필요로 하는 민중에게는 오히려 마음의 짐이었습니다. 바로 이때에 예수님은 인자한 어머니의 모습을 하고, 깊은 사랑의 메시지를 품고 민중에게 다가서기 시작했습니다.
민중이 광야에 나갔던 또 다른 이유는 광야의 외치는 소리에게서 표적을 보고 싶어 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표적을 구했던 이유는 앞으로 오실 메시아는 모세나 엘리야처럼 위로부터 내리는 큰 능력을 행함으로써 그가 메시아란 사실을 입증할 표적을 나타내 보일 것이라 믿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선지자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다”(마 12:39)라고 몇 차례에 걸쳐 말씀하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바울도 고린도전서 1장 22-24절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왜 유대인들은 표적을 구했을까요? 왜 헬라인들은 지혜를 찾아 헤맸을까요? 유대인들은 지금으로부터 2,600년 전 바벨론 제국에 나라를 빼앗긴 이후 간절히 바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이 때 이후로 유대인들은 자기 나라를 갖지 못하였습니다. 또 헬라인들 역시 지금으로부터 2,400년 전 살았던 플라톤의 영향으로 간절히 보기를 원하는 것이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은 그들을 배불리 먹이고(요 6:14,26,30; 마 12:38, 16:1 등), 제국들의 압제로부터 해방시켜줄 그리스도, 즉 이스라엘 민족이 이집트를 탈출한 후 광야에서 40년을 지낼 동안에 모세가 만나와 메추라기를 내려 먹게 하고 반석에서 물을 내어 마시게 하였듯이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을 행할 수 있는 그리스도를 찾고 있었습니다. 신명기 18장 15절에서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예언하기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의 중 네 형제 중에서 나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너를 위하여 일으킬 것이다”고 하였습니다. 따라서 유대인들은 나라를 잃고 난 후부터 표적을 구하고 있었습니다. 또 헬라인들은 플라톤 철학의 영향을 받아 그들을 이데아의 참 세계로 인도해줄 지혜를 찾고 있었습니다. 플라톤은 보이는 이 자연세계를 보이지 않은 참 세계의 그림자에 불과하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리고 보이지 않는 세계를 이데아의 세계라고 했습니다. 이 영적 세계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어떤 신비한 지식(gnosis)이 필요하였는데, 헬라인들은 이 지식을 얻을 지혜를 구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것들을 얻지 못했고 보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유대인들이 바랐으나 얻지 못했던 것, 헬라인들이 보기를 원했으나 보지 못했던 것은 다름 아닌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님이었다고 말합니다.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님은 유대인들이 구하던 바로 그 하나님의 능력이요, 헬라인들이 찾았던 바로 그 하나님의 지혜였던 것입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믿음을 정의하여 말하기를,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히 11:1)라 하였습니다. 여기서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란 유대인들이 간절히 바라던 것을 말하고, “보지 못하던 것들의 증거”란 헬라인들이 간절히 보기를 원했던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님을 믿는 것이 유대인들이 바라던 것의 실상이요, 헬라인들이 보지 못하던 것의 증거“라고 말하고, 또한 오늘날 우리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라고 말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님은 유대인들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헬라인들에게는 어리석은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은 그들을 배불리 먹이고(요 6:14,26,30; 마 12:38, 16:1 등), 로마제국의 압제로부터 해방시켜줄 메시아, 즉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을 행하는 그리스도를 찾고 있었기 때문이며, 헬라인들은 그들을 이데아의 참 세계로 인도해줄 지혜를 찾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유대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선지자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느니라”(마 12:39). 여기서 표적이란 앞서 말씀드린 대로 그리스도 됨의 표적을 말하고, 선지자 요나의 표적이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고 무덤에 묻힌 후에 삼일 만에 부활하신 표적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또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요 6:26). 여기서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고 하신 말씀은 당시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뜻을 바로 깨달아 알지 못하고 자신들의 뜻, 즉 세속적인 욕심을 따르고 있었다는 것을 뜻합니다.
오늘날에도 일부 그리스도인들은 유대인들과 비슷한 기적들을 찾고 있고, 비신자들은 그들을 행복하게 만들어줄 세속적인 것들을 구하고 있습니다. 일부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을 믿는 것은 그들의 세속적인 욕망을 채워줄 무엇인가를 위한 것입니다. 그래서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파하는 것은 여전히 일부 그리스도인들에게 거리끼는 것이요, 비신자들에게는 어리석은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은 사람들에게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훗날에 예수님은 우리들에게 물으실 것입니다. “너희가 무엇을 얻으려고 교회에 나갔더냐?”(마 11:7-9).
그렇다면,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가 어떻게 하나님의 능력, 하나님의 지혜가 되는가? 도대체 하나님의 능력과 하나님의 지혜란 무엇인가?
첫째,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는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여 영생에 이르게 하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였습니다.
둘째,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는 우리로 하여금 이 세상에 살면서 참 행복을 맛보게 하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우리를 참 자유케 하는 진리를 알게 하는 하나님의 지혜였습니다.
성경말씀을 통해서 볼 때, 분명한 것은 하나님의 능력과 하나님의 지혜가 이 세상에서 잘 먹고 잘 입고 잘 사는 능력이나 지혜가 아니란 점입니다. 돈 잘 버는 능력도 아니고, 남 잘 속이는 지혜도 아닙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왕으로 삼아 경제대국 군사대국을 만들고자 하였을 때, 그분은 오히려 십자가를 지고 고통 속에서 죽는 죽음의 길을 택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입신출세를 꿈꾸고 있었을 때에도 그분은 십자가를 지고 고통 속에서 죽는 고난의 길을 택하셨습니다. 그 길이야말로 만 인류를 구원코자 하시는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에서 나온 하나님께서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십자가에 죽고, 그 대신에 인류가 사는 길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십자가란 고대 근동에서 시작되어 로마인들이 죄수를 처형하는 데 사용했던 극형이었습니다. 이 극형이 사람을 살리는 더하기 표시가 되었다는 점은 놀라운 하나님의 능력과 하나님의 지혜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수치스런 죽음의 상징이었던 십자가의 방식을 통해서 인간들을 죄로부터 구원하여 영생에 이르게 하는 구원의 능력을 알게 하셨고, 참으로 사람답게 사는 진리가 무엇인가를 깨닫는 지혜를 알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가장 연약한데서 비롯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창조주요, 모든 만물의 주인이시지만, 그 모든 능력이나 주권을 마음대로 쓰지 않으시고, 만물을 지어 인간과 관계를 맺기로 작정하셨고, 그 인간에게 선택의 자유라는 특권을 주심으로써 당신의 권한을 스스로 제한하셨습니다. 그러나 인간들은 그 자유를 선한 곳에 사용도 했지만, 대부분 나쁜 곳에 사용하였고, 하나님을 배신하고 반항하는데 사용하였습니다. 여기서 하나님은 당신의 무한한 능력을 죄범한 인간을 죽이는데 쓰지 않으시고, 오히려 당신을 낮춰 당신의 아들 예수님을 통해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써 우리 인간들이 죽어야할 그 자리를 대신하셨습니다. 한없이 높은 하나님이 한없이 낮아지신 것입니다. 한없이 강한 하나님이 한없이 약해지신 것입니다. 이 낮아지고 약해진 곳에 하나님의 무한한 능력이 나타났던 것입니다. 폭력적인 능력이 아니라, 사랑의 능력, 폭발적인 힘이 아니라, 포근하고, 잔잔한 감동을 주는 능력, 그것이 바로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통해서 나타난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이 능력이 우리 인간들을 구원하여 영생에 이르게 하는 능력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능력이 되는 것은 우리를 구원하여 영생에 이르게 하는 능력, 죄사함의 능력, 구원의 능력, 악의 권세를 이기는 능력, 죽음의 권세를 이기는 능력이 그 속에 있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지혜가 되는 것은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통해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누구이신가를 아는 지혜, 우리와 관계하시고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나님, 우리의 배신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우리에게 찾아와 우리와 교제하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이 누구이신가를 밝히는 지혜가 그 속에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참으로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삶의 방식이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희생과 헌신에 있기에, 또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지는 삶의 참된 지혜가 그 속에 있기에,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지혜가 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아가페의 사랑이라고 합니다. 아가페의 사랑을 조건 없는 사랑이라고 합니다. 조건 없는 사랑은 자기희생에서 비롯됩니다. 자기희생이 가장 극명하게 나타난 곳이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에게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자기를 부정하고,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신 삶의 본을 따라 살라고 말합니다. 이 십자가는 하나님이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매달려 죽은 자기 부정의 십자가요, 자기 제한의 십자가요, 자기 낮춤의 십자가요, 자기희생의 십자가요, 남을 구원하는 십자가요, 남을 축복하는 십자가요, 남을 높이는 십자가요, 겉으로 보기에는 죽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자기도 살고 남도 살리는 십자가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 보여주신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보이지 않는 광선이 물체에 반사되어 빛을 발하고, 굴절되어 열을 발하듯이, 보이지 않는 하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통해서 죄로 어두워진 이 땅에 구원의 빛을 발하시고, 성령님을 통해서 뜨겁게 역사 하십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서는, 누구도 하나님이 누구이신가를 알 수 없고, 또한 영생에 이르는 구원의 길을 알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는 우리를 구원하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우리들로 하여금 하나님이 누구이신가를 알게 하는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본문말씀에서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물었습니다. “너희는 무엇을 보러 광야에 나갔더냐?” 유대인들은 메시아를 기다렸기 때문에 세례자 요한이 혹시 메시아인가해서 광야에 나갔던 것입니다. 바람에 흔들리는 상한 갈대 같았던 민중뿐 아니라, 지배층의 사람들까지도 정보원들을 보내어 세례자 요한이 메시아인가를 확인하고 싶어 했습니다(요 1:19-28). 그러나 3년 후 그들은 그들이 그토록 고대했던 메시아이신 예수님을 죽입니다. 예수님이 그들이 원했던 맞춤 메시아, 곧 그들의 세속적인 욕망을 채워줄 그리스도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훗날 우리가 주님 앞에 서게 될 때에 그분이 우리에게 물으실 것입니다. “너희가 무엇을 얻으려고 교회에 나갔더냐?” 혹 우리가 믿는 예수님이 우리들의 욕망에 맞춰진 맞춤예수는 아닌지 반성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자기 자신을 예수님의 뜻에 맞추는 성도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예수님이 바라본 유대민중의 처지는 목자 잃은 양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이런 저런 세속의 바람에 한없이 흔들리는 상한 갈대들이었습니다. “아~ 으악새(억새) 슬피 우니”라는 노랫말이 있듯이, 바람은 상한 민중의 마음을 더욱 구슬프게 만들었습니다. 그들은 마음이 쓰라린 가난한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정붙일 곳이 없어서 구름처럼 떠도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에게는 믿고 따를만한 지도자가 없었습니다. 그들의 주위를 맴도는 자들은 그들을 착취하는 자들이요, 그들의 짐을 더욱 무겁게 하는 자들이었습니다. 마태복음 9장 36절에서 예수님은 “무리를 보시고 민망히 여기셨다”고 했고, 그 이유는 “저희가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유리하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예수님께서 무리에게 요한에 대해서 묻는 말씀이 나옵니다. “너희는 무엇을 보러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아니면, 무엇을 보러 나갔더냐? 화려한 옷을 입은 사람이냐? 화려한 옷을 입은 사람은 왕궁에 있다. 아니면, 무엇을 보러 나갔더냐? 예언자를 보러 나갔더냐? 그렇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는 예언자보다 더 위대한 인물이다.”
민중이 광야에 나간 것은 위로를 줄 메시아를 보기 위함이었습니다.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를 보려고 나간 것이 아닙니다.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는 오히려 그들의 상한 마음을 더욱 흔들리게 할뿐이었습니다. 화려한 옷을 입은 사람들을 보려고 나간 것도 아닙니다. 화려한 옷을 입은 사람들은 오히려 그들을 괴롭게 하고, 그들의 짐을 더욱 무겁게 할뿐이었습니다. 위로를 구할 곳이 없었던 민중이 보려고 했던 것은 메시아였습니다. 그들은 아주 오랫동안 그들에게 마음의 평화와 위로를 줄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물론 가진 자들이나 통치자들에게는 그 반대였습니다. 그들에게는 메시아가 전혀 달갑지 않은 자였기 때문입니다.
민중이 세례자 요한을 보려고 광야에 나간 것은 그가 과연 메시아인가를 알아보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들 중에는 정보요원들도 섞여 있었습니다. 민중이 본 세례자 요한은 메시아가 아니었습니다. 그 자신도 메시아가 아니라고 했습니다. 그저 오실 자 메시아를 맞이할 준비를 시키는 사환에 불과하다고 했습니다. 그의 말에 기득권자들은 안도의 숨을 내쉬었고, 민중은 땅이 꺼지는 한숨을 내쉬었습니다.
요한이 소개하는 하나님의 이미지는 엄한 아버지였습니다. 진노와 심판의 하나님이었습니다. 그가 소개한 하나님은 준엄하고 에누리 없고, 배신을 용서치 않는 엄부였습니다. 낙타모피를 입고, 허리에 가죽 혁대를 두르고, 메뚜기와 석청을 먹고 사는 요한이 위로와 사랑을 필요로 하는 민중에게는 오히려 마음의 짐이었습니다. 바로 이때에 예수님은 인자한 어머니의 모습을 하고, 깊은 사랑의 메시지를 품고 민중에게 다가서기 시작했습니다.
민중이 광야에 나갔던 또 다른 이유는 광야의 외치는 소리에게서 표적을 보고 싶어 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표적을 구했던 이유는 앞으로 오실 메시아는 모세나 엘리야처럼 위로부터 내리는 큰 능력을 행함으로써 그가 메시아란 사실을 입증할 표적을 나타내 보일 것이라 믿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선지자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다”(마 12:39)라고 몇 차례에 걸쳐 말씀하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바울도 고린도전서 1장 22-24절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왜 유대인들은 표적을 구했을까요? 왜 헬라인들은 지혜를 찾아 헤맸을까요? 유대인들은 지금으로부터 2,600년 전 바벨론 제국에 나라를 빼앗긴 이후 간절히 바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이 때 이후로 유대인들은 자기 나라를 갖지 못하였습니다. 또 헬라인들 역시 지금으로부터 2,400년 전 살았던 플라톤의 영향으로 간절히 보기를 원하는 것이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은 그들을 배불리 먹이고(요 6:14,26,30; 마 12:38, 16:1 등), 제국들의 압제로부터 해방시켜줄 그리스도, 즉 이스라엘 민족이 이집트를 탈출한 후 광야에서 40년을 지낼 동안에 모세가 만나와 메추라기를 내려 먹게 하고 반석에서 물을 내어 마시게 하였듯이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을 행할 수 있는 그리스도를 찾고 있었습니다. 신명기 18장 15절에서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예언하기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의 중 네 형제 중에서 나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너를 위하여 일으킬 것이다”고 하였습니다. 따라서 유대인들은 나라를 잃고 난 후부터 표적을 구하고 있었습니다. 또 헬라인들은 플라톤 철학의 영향을 받아 그들을 이데아의 참 세계로 인도해줄 지혜를 찾고 있었습니다. 플라톤은 보이는 이 자연세계를 보이지 않은 참 세계의 그림자에 불과하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리고 보이지 않는 세계를 이데아의 세계라고 했습니다. 이 영적 세계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어떤 신비한 지식(gnosis)이 필요하였는데, 헬라인들은 이 지식을 얻을 지혜를 구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것들을 얻지 못했고 보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유대인들이 바랐으나 얻지 못했던 것, 헬라인들이 보기를 원했으나 보지 못했던 것은 다름 아닌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님이었다고 말합니다.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님은 유대인들이 구하던 바로 그 하나님의 능력이요, 헬라인들이 찾았던 바로 그 하나님의 지혜였던 것입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믿음을 정의하여 말하기를,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히 11:1)라 하였습니다. 여기서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란 유대인들이 간절히 바라던 것을 말하고, “보지 못하던 것들의 증거”란 헬라인들이 간절히 보기를 원했던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님을 믿는 것이 유대인들이 바라던 것의 실상이요, 헬라인들이 보지 못하던 것의 증거“라고 말하고, 또한 오늘날 우리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라고 말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님은 유대인들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헬라인들에게는 어리석은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은 그들을 배불리 먹이고(요 6:14,26,30; 마 12:38, 16:1 등), 로마제국의 압제로부터 해방시켜줄 메시아, 즉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을 행하는 그리스도를 찾고 있었기 때문이며, 헬라인들은 그들을 이데아의 참 세계로 인도해줄 지혜를 찾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유대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선지자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느니라”(마 12:39). 여기서 표적이란 앞서 말씀드린 대로 그리스도 됨의 표적을 말하고, 선지자 요나의 표적이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고 무덤에 묻힌 후에 삼일 만에 부활하신 표적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또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요 6:26). 여기서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고 하신 말씀은 당시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뜻을 바로 깨달아 알지 못하고 자신들의 뜻, 즉 세속적인 욕심을 따르고 있었다는 것을 뜻합니다.
오늘날에도 일부 그리스도인들은 유대인들과 비슷한 기적들을 찾고 있고, 비신자들은 그들을 행복하게 만들어줄 세속적인 것들을 구하고 있습니다. 일부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을 믿는 것은 그들의 세속적인 욕망을 채워줄 무엇인가를 위한 것입니다. 그래서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파하는 것은 여전히 일부 그리스도인들에게 거리끼는 것이요, 비신자들에게는 어리석은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은 사람들에게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훗날에 예수님은 우리들에게 물으실 것입니다. “너희가 무엇을 얻으려고 교회에 나갔더냐?”(마 11:7-9).
그렇다면,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가 어떻게 하나님의 능력, 하나님의 지혜가 되는가? 도대체 하나님의 능력과 하나님의 지혜란 무엇인가?
첫째,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는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여 영생에 이르게 하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였습니다.
둘째,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는 우리로 하여금 이 세상에 살면서 참 행복을 맛보게 하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우리를 참 자유케 하는 진리를 알게 하는 하나님의 지혜였습니다.
성경말씀을 통해서 볼 때, 분명한 것은 하나님의 능력과 하나님의 지혜가 이 세상에서 잘 먹고 잘 입고 잘 사는 능력이나 지혜가 아니란 점입니다. 돈 잘 버는 능력도 아니고, 남 잘 속이는 지혜도 아닙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왕으로 삼아 경제대국 군사대국을 만들고자 하였을 때, 그분은 오히려 십자가를 지고 고통 속에서 죽는 죽음의 길을 택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입신출세를 꿈꾸고 있었을 때에도 그분은 십자가를 지고 고통 속에서 죽는 고난의 길을 택하셨습니다. 그 길이야말로 만 인류를 구원코자 하시는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에서 나온 하나님께서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십자가에 죽고, 그 대신에 인류가 사는 길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십자가란 고대 근동에서 시작되어 로마인들이 죄수를 처형하는 데 사용했던 극형이었습니다. 이 극형이 사람을 살리는 더하기 표시가 되었다는 점은 놀라운 하나님의 능력과 하나님의 지혜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수치스런 죽음의 상징이었던 십자가의 방식을 통해서 인간들을 죄로부터 구원하여 영생에 이르게 하는 구원의 능력을 알게 하셨고, 참으로 사람답게 사는 진리가 무엇인가를 깨닫는 지혜를 알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가장 연약한데서 비롯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창조주요, 모든 만물의 주인이시지만, 그 모든 능력이나 주권을 마음대로 쓰지 않으시고, 만물을 지어 인간과 관계를 맺기로 작정하셨고, 그 인간에게 선택의 자유라는 특권을 주심으로써 당신의 권한을 스스로 제한하셨습니다. 그러나 인간들은 그 자유를 선한 곳에 사용도 했지만, 대부분 나쁜 곳에 사용하였고, 하나님을 배신하고 반항하는데 사용하였습니다. 여기서 하나님은 당신의 무한한 능력을 죄범한 인간을 죽이는데 쓰지 않으시고, 오히려 당신을 낮춰 당신의 아들 예수님을 통해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써 우리 인간들이 죽어야할 그 자리를 대신하셨습니다. 한없이 높은 하나님이 한없이 낮아지신 것입니다. 한없이 강한 하나님이 한없이 약해지신 것입니다. 이 낮아지고 약해진 곳에 하나님의 무한한 능력이 나타났던 것입니다. 폭력적인 능력이 아니라, 사랑의 능력, 폭발적인 힘이 아니라, 포근하고, 잔잔한 감동을 주는 능력, 그것이 바로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통해서 나타난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이 능력이 우리 인간들을 구원하여 영생에 이르게 하는 능력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능력이 되는 것은 우리를 구원하여 영생에 이르게 하는 능력, 죄사함의 능력, 구원의 능력, 악의 권세를 이기는 능력, 죽음의 권세를 이기는 능력이 그 속에 있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지혜가 되는 것은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통해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누구이신가를 아는 지혜, 우리와 관계하시고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나님, 우리의 배신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우리에게 찾아와 우리와 교제하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이 누구이신가를 밝히는 지혜가 그 속에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참으로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삶의 방식이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희생과 헌신에 있기에, 또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지는 삶의 참된 지혜가 그 속에 있기에,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지혜가 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아가페의 사랑이라고 합니다. 아가페의 사랑을 조건 없는 사랑이라고 합니다. 조건 없는 사랑은 자기희생에서 비롯됩니다. 자기희생이 가장 극명하게 나타난 곳이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에게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자기를 부정하고,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신 삶의 본을 따라 살라고 말합니다. 이 십자가는 하나님이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매달려 죽은 자기 부정의 십자가요, 자기 제한의 십자가요, 자기 낮춤의 십자가요, 자기희생의 십자가요, 남을 구원하는 십자가요, 남을 축복하는 십자가요, 남을 높이는 십자가요, 겉으로 보기에는 죽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자기도 살고 남도 살리는 십자가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 보여주신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보이지 않는 광선이 물체에 반사되어 빛을 발하고, 굴절되어 열을 발하듯이, 보이지 않는 하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통해서 죄로 어두워진 이 땅에 구원의 빛을 발하시고, 성령님을 통해서 뜨겁게 역사 하십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서는, 누구도 하나님이 누구이신가를 알 수 없고, 또한 영생에 이르는 구원의 길을 알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는 우리를 구원하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우리들로 하여금 하나님이 누구이신가를 알게 하는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본문말씀에서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물었습니다. “너희는 무엇을 보러 광야에 나갔더냐?” 유대인들은 메시아를 기다렸기 때문에 세례자 요한이 혹시 메시아인가해서 광야에 나갔던 것입니다. 바람에 흔들리는 상한 갈대 같았던 민중뿐 아니라, 지배층의 사람들까지도 정보원들을 보내어 세례자 요한이 메시아인가를 확인하고 싶어 했습니다(요 1:19-28). 그러나 3년 후 그들은 그들이 그토록 고대했던 메시아이신 예수님을 죽입니다. 예수님이 그들이 원했던 맞춤 메시아, 곧 그들의 세속적인 욕망을 채워줄 그리스도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훗날 우리가 주님 앞에 서게 될 때에 그분이 우리에게 물으실 것입니다. “너희가 무엇을 얻으려고 교회에 나갔더냐?” 혹 우리가 믿는 예수님이 우리들의 욕망에 맞춰진 맞춤예수는 아닌지 반성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자기 자신을 예수님의 뜻에 맞추는 성도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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