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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께 드릴 것은 사모하는 이 마음뿐(마 25:1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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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동호
댓글 0 조회 12,907 2005.07.11 08: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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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께 드릴 것은 사모하는 이 마음뿐(마 25:14-30)

금년 표어가 ‘마음을 같이 하는 해’였습니다. 출석목표를 40명으로 잡았습니다. 11월까지를 결산했을 때, 모든 것이 순조로운 듯 보였습니다. 연초에 세운 예산도 채워지는 듯싶었고, 주일학생들까지 합치면 출석인원 40명에 거의 육박하였습니다. 그러나 한 달을 남긴 12월에 와서 우리들은 여러 가지 면에서 좌절을 맛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스위스의 내과 의사 폴 투르니에(Paul Tournier)가 한 말을 저는 틀림없는 진리라고 믿습니다. 그분은 “슬픔이 크면 클수록 슬픔이 생산하는 창조적 에너지도 커진다”고 했고, “시련만이 신체적, 정신적 습관의 굳은 껍질을 깨뜨린다”고 했습니다. 바울도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다”(롬 8:18)고 했고,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한다”(고후 4:17)고 했습니다. 멀리 뛰기 위해서는 뒤로 많이 물러서야 하듯이, 또 먼 바다를 나가기 위해서는 배를 잘 정비해야하듯이 우리가 겪은 시련들을 우리 교회의 발전을 위한 성장통으로 받아드리고 싶습니다.
제게는 금년이 나름대로 의미 있고 열심히 일했던 한 해였습니다. 여생이 10년이 될지, 20년이 될지, 30년이 될지 알 수는 없지만, 무언가 열매를 거둬야겠다. 열매를 거둬서 하나님께 드려야겠다. 살아온 지난 세월이 못내 아쉽기도 하고, 하나님께서 제게 주신 은혜가 너무 크고 또 투자하신 금액으로 말하자면 최소한 두 달란트에서 다섯 달란트가 넘을 텐데, 주님께 열매로 되돌려 드린 것이 별로 없는 듯싶어서 뭔가를 되돌려 드려야 한다는 생각에 몰두했던 한 해였습니다. 한 달란트 받은 무익하고 게으른 종처럼은 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다섯 달란트까지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두 달란트를 받은 종처럼 “착하고 신실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신실하였으니, 내가 네게 큰일을 맡기겠다.”는 칭찬을 듣고 싶었습니다.
돌이켜 생각해 볼 때, 우리는 한 달란트 받은 사람의 생각으로 살아왔는지 모릅니다. “나는 그분께 받은 게 없어. 나는 그분께 되돌려 줄 빚이 없어.”라고 불평하면서 하나님께 받은 은혜를 땅에 묻어둔 채, 복지부동의 자세로 살아왔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는 최소한 두 달란트에서 다섯 달란트까지, 아니면 그 이상의 달란트를 받았는지 모릅니다. 문제는 우리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우리의 인생을 꾸려 왔느냐에 있습니다.
다섯 달란트를 남긴 사람이 한 달란트의 보너스를 받게 된 것은 분명히 두 달란트를 남긴 사람과 차별이 되는 무언가가 뛰어난 부분이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공평하시고 정의로우실 뿐 아니라, 양보다는 질로 평가하시는 하나님께서 차별을 하셨을 리가 없습니다.
저는 이 달란트 비유에서 달란트를 물려받은 재산이나 타고난 인간의 재능으로 보기보다는 하나님의 일을 맡은 사람들의 마인드라고 생각합니다.
첫 번째 사람은 자신이 하나님께 받은 은혜가 다섯 달란트라고 생각했던 사람입니다. 그는 자신이 느끼고 있는 만큼의 은혜를 염두에 두고서 받은 만큼 그분께 돌려드리기 위해서 최선을 다했던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자신의 삶에 대해서 긍정적으로 생각했고, 열심히 일했으며, 하나님과 부모님과 이웃들에게 많은 것을 받았고, 또 그 은혜를 갚아야한다는 생각으로 살았던 사람입니다.
그 결과 그는 다섯 달란트만큼의 감사의 예물을 주인에게 되돌려 드릴 수 있었습니다. 그는 그가 받은 것을 빚으로 생각하지 않고 은혜로 생각했으므로 의무로 하지 않고 감사함과 즐거움으로 했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받으실만한 향기로운 예물입니다. 그런데 더 중요한 것은 그가 주신 분들에게 그가 남긴 것을 환원시키려했을 때, 되돌려주려고 했던 것보다 오히려 더 많은 것을 받게 된다는 데 있습니다. 한 달란트의 보너스까지 합쳐서 열한 달란트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의 기쁨이 충만했을 것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두 번째 사람은 자신이 하나님께 받은 은혜가 두 달란트라고 생각했던 사람이고, 그는 자신이 느끼고 있는 만큼의 은혜를 염두에 두고서 받은 만큼 그분께 돌려드리기 위해서 노력했던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자신의 삶에 대해서 나름대로 긍정적으로 생각했고, 나름대로 열심히 일했으며, 하나님과 부모님과 이웃들에게 받은 것이 많고, 또 그 은혜를 갚아야 된다는 생각으로 살았던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는 두 달란트만큼의 감사예물을 주인에게 되돌려 드릴 수가 있었습니다. 그는 그가 받은 것을 빚으로 생각하지 않고 은혜로 생각했으므로 의무로 하지 않고 감사함과 즐거움으로 했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받으실만한 향기로운 예물입니다. 그런데 더 중요한 것은 그가 주신 분들에게 그가 남긴 것을 환원시키려했을 때, 되돌려주려고 했던 것을 되받게 된다는 데 있습니다. 두 달란트를 더 받아 네 달란트를 소유했기 때문입니다. 그의 기쁨이 충만했을 것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마지막 사람은 자신이 하나님께 받은 은혜가 한 달란트라고 생각했던 사람이고, 그는 받은 것이 많지 않다고 느끼고 있었기 때문에 자신의 삶에 최선을 다하지 않았던 사람입니다. 자신의 삶에 대해서 부정적으로 생각했고, 불평으로 세월을 보냈으며, 하나님과 부모님과 이웃들에게 고마움을 갖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들로부터 불평등한 대우를 받고 있다고 생각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는 한 푼도 주인에게 되돌려 드릴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그가 받은 것을 빚으로 생각했고 은혜로 생각지 않았으므로 모든 일을 마지못해서 했고, 불평으로 일관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의 마음속에 감사함이 없었기 때문에 그에게 주어졌던 한 달란트마저도 빼앗기고 말았다는 사실입니다. 그의 삶이 슬피 울며 이를 갈며 사는 불행한 삶이었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29절에서 “무릇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는 주님의 말씀을 저는 감사의 마음으로 보고 싶습니다. ‘무릇 감사의 마음이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 감사의 마음이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 이 무익한 종은 바깥 어두운 데로 내어 쫓기어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듯이 불행에 불행을 더하면서 살아갈 것이다’라고 바꿔서 생각해 보고 싶습니다.
최원순 작사 작곡의 「똑바로 보고 싶어요, 주님」이란 복음성가가 있습니다.

똑바로 보고 싶어요, 주님. 온전한 눈짓으로.
똑바로 보고 싶어요, 주님. 곁눈질 하긴 싫어요.
하지만, 내 모습은 온전치 않아 세상이 보는 눈은
마치 날 죄인처럼 멀리하며 외면을 하네요.
주님, 이 낮은 자를 통하여 어디에 쓰시려고,
이렇게 초라한 모습으로 만들어 놓으셨나요?
당신께 드릴 것은 사모하는 이 마음뿐,
이 생명도 달라시면 십자가에 놓겠으니,
허울뿐인 육신 속에 참 빛을 심게 하시고,
가식뿐인 세상 속에 밀알로 썩게 하소서.

똑바로 걷고 싶어요, 주님. 온전한 몸짓으로.
똑바로 걷고 싶어요, 주님. 기우뚱하긴 싫어요.
하지만 내 모습은 온전치 않아 세상이 보는 눈은,
마치 날 죄인처럼 멀리하며 외면을 하네요.
주님, 이 낮은 자를 통하여 어디에 쓰시려고,
이렇게 초라한 모습으로 만들어 놓으셨나요?
당신께 드릴 것은 사모하는 이 마음뿐,
이 생명도 달라시면 십자가에 놓겠으니,
허울뿐인 육신 속에 참 빛을 심게 하시고,
가식뿐인 세상 속에 밀알로 썩게 하소서.

한 해를 정리하면서 회한을 품고 주님 앞에 고백할 수밖에 없는 말은 “당신께 드릴 것은 사모하는 이 마음뿐입니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것을 느꼈습니다. 사랑하는 주님께 받은 은혜를 열심히 일해서 많은 열매로 돌려드리려 했지만, 한 해를 마무리 짓는 이 시점에서 또 아무 것도 거둔 것이 없는 이 시점에서 주님께 드릴 것은 주님을 사모하는 내 마음뿐이란 것을 말입니다. 어쩌면 주님도 제게 이 마음을 요구하고 계실는지 모르겠습니다. 두 달란트는 고사하고 단 한 달란트조차도 주님 앞에 내놓지 못한 이 낮고 초라한 모습, 허울뿐인 육신이지만, 오히려 우리 주님은 이 가식뿐인 이 세상에서 밀알로 썩기를 바라고 계신지 모르겠습니다.
주님 앞에 내 놓을 것은 없지만, 사모하는 마음, 감사하는 마음이 있다는 것 때문에 받은 한 달란트를 땅속에 묻어둔 무익한 종과는 분명히 구별이 된다고 믿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기도하고 싶습니다.
똑바로 보고 싶습니다. 온전한 눈짓으로. 똑바로 보고 싶습니다. 곁눈질하긴 싫습니다. 하지만, 내 모습은 온전치 않습니다.
똑바로 걷고 싶습니다. 온전한 몸짓으로. 똑바로 걷고 싶습니다. 기우뚱하긴 싫습니다. 하지만 내 모습은 온전치 않습니다.
주님께 드릴 것은 사모하는 이 마음뿐입니다. 이 생명도 달라시면 십자가에 놓겠습니다. 허울뿐인 육신 속에 참 빛을 심게 하시고, 가식뿐인 세상 속에 밀알로 썩어지게 하옵소서.
우리 모두가 비록 주님 앞에 아무 것도 내놓을 것이 없다할지라도, 우리는 여전히 우리의 마음을 주님 앞에 내어 드릴 수 있습니다. 마음을 얻는 자는 왕국을 얻는 것입니다. 에자르트 샤퍼가 󰡔위대한 여행: 별을 따라간 네 번째 왕의 전설󰡕이란 책에서 우리에게 교훈하는 것이 바로 우리가 주님 앞에 빈손으로 나올 수밖에 없다할지라도 우리는 여전히 우리의 마음을 주님께 드릴 수 있다는 이야기가 아닙니까? 마음을 얻는 것은 천하를 얻는 것입니다. 이 말은 우리가 주님께 우리의 마음을 드리지 못한다면, 우리가 그분께 아무리 많은 것을 드린다 해도 그것들이 아무 것도 아닌 게 된다는 뜻입니다. 또 우리가 그분으로부터 마음을 얻지 못한다면, 우리들이 하는 모든 수고가 다 허사가 되고 만다는 뜻입니다. 마음을 주고 마음을 얻는다는 것은 그만큼 소중하고 가치 있는 것입니다.
앙투안 드 생텍쥐페리(Antoine de Saint-Exupery)의 󰡔어린 왕자󰡕를 보면,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이 사람의 마음을 얻는 일이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각각의 얼굴만큼 다양한 각양각색의 마음을, 한 순간에도 수만 가지의 생각이 떠오르는 것이 마음인데, 그 바람 같은 마음을 머물게 한다는 건 정말 어려운 것이라고 말합니다.
시저는 “사람은 자기가 보고 싶은 현실만을 본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생텍쥐페리는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별이 저렇게 아름다운 것도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는 꽃이 있기 때문이다.... 사막이 아름다운 건 어딘가에 우물을 숨기고 있기 때문이다.”고 어린 왕자의 입을 통해서 말합니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마음으로 봐야 한답니다. “지금 네 눈에 보이는 것은 인간의 껍질뿐이다. 가장 소중한 것은 내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눈으로는 보이지 않아요. 마음의 눈으로 찾지 않으면 안 돼요.... 소중한 것은 우리 눈에 보이지 않아요.“라고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주님 앞에 드려야할 가장 소중한 것은 어쩌면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우리 주님께서 기쁘게 받으실만한 것은 눈으로 보이지 않는 우리의 마음뿐일 수도 있고, 우리 주님과의 진정한 사귐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생텍쥐페리의 글에서, 어린 왕자가 살던 별에는 장미 한 송이가 있었습니다. 지구에도 오천 송이의 장미꽃이 있었고, 어린 왕자도 보았습니다. 그러나 어린 왕자는 오천 송이의 장미꽃보다 자기가 살던 별의 한 송이 장미꽃이 소중하다면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너희들은 아름답지만, 그저 피어 있을 뿐이야. 너희들을 위해서 죽을 생각 따위는 생기지도 않아. 물론 내 장미꽃을 바라보며 지나가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 사람들도 나와 같은 생각을 할 테지. 그렇지만 나에게 있어서는 그 한 송이의 장미꽃이 너희들 전부보다도 더 소중해. 왜냐하면 내가 물을 주어서 키운 꽃이니까. 유리덮개도 씌워 주었고, 바람막이도 세워 주었거든. 애벌레도 잡아 주었지만, 애벌레 두세 마리는 나비가 되도록 그냥 내버려 두었지. 불평하는 소리도 들어주었고 제 자랑하는 말도 들어 주었어. 잠자코 있으면 잠자코 있게 놓아두었고. 때로는 걱정이 되어서 무슨 일이 있느냐고 꽃에게 물어 보기도 했지. 그건 나의 꽃이었으니까 말이야.”
이것이 우리 주님께서 우리들을 향한 마음이고, 왜 시련이 우리들로 하여금 주님의 마음을 얻게 하고, 또 주님은 우리를 다른 그 무엇보다도 더 소중하게 여기시는가에 대한 설명입니다. 이런 소중한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합니다. 오직 마음의 눈으로만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주님께 드릴 것은 결국 주님을 사모하는 마음뿐이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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