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을 찢는 절규(막 15:33-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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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을 찢는 절규(막 15:33-34)
예수님께서 골고다에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시간은 유대인들의 기도시간인 오전 9시였습니다. 이 때부터 다음 기도시간인 낮 12시 정오까지 세 시간 동안 예수님은 십자가에 매달린 채 사람들로부터 갖은 모욕과 조롱을 당하셨습니다. 정오가 되자 갑자기 온 땅에 어두움이 내렸고, 저녁 희생제사를 바치는 오후 3시까지 지속되고 있었습니다. 그 때 갑자기 예수님은 캄캄한 하늘을 향해서 절규하시며,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셨습니다. 이를 번역하면,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란 뜻이라고 했습니다.
1.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예수님의 이 절규는 과연 무엇이었을까요?
첫째, 예수님의 절규는 산통으로 괴로워하는 산모의 절규와 같다고 봅니다. 통상적으로 십자가에 처형당하는 사람은 그 고통이 너무 커서 저주의 말을 마구 쏟아 놓는 것이 보통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이 절규를 욕설로 볼 수는 없습니다. 산모들 가운데에는 더러 분만의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원망의 소리를 쏟아내는 경우들이 있다고 하는데요, 예수님의 절규에 이런 산통과 같은 면이 전혀 없었다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산통이 옥동자를 위한 것이듯이 예수님의 절규 또한 인류구원이란 옥동자 분만을 위한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둘째, 예수님의 절규는 어둠의 권세를 향한 선전포고였다고 봅니다. 절규는 어둠과도 무관하지 않습니다. 어둡다는 것은 앞을 내다볼 수 없다는 것과 같습니다. 앞을 내다볼 수 없을 때, 우리는 종종 절규하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절규는 앞을 볼 수 없는 좌절에서 비롯됐다기보다는 인간이 하나님께로 가는 길을 막고 선 어둠의 권세를 향한 선전포고였다고 봅니다. 예수님의 절규에 온 인류가 겪는 아픔을 대표한다는 증거가 있기 때문입니다. 누군가 고뇌에 빠졌다면, 누군가 고독하다면, 누군가 좌절감을 느낀다면, 누군가 무력감을 느낀다면,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님이 바로 그의 아픔과 고뇌와 고독과 좌절과 무력감을 끌어안고 막힌 길을 열어주시려고 그 험한 길을 자원하셨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합니다.
셋째, 예수님의 절규는 세 시간동안이나 지속된 어둠을 찢는 외침이었습니다. 이 절규는 이 땅의 그리스도인들이 종종 경험하는 절망의 하소연이기도 하고, 인류에게 빛과 생명의 축복을 예정하시고, 자기 자신에게는 어둠과 죽음의 저주를 예정하신 하나님의 비명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십자가상에서의 절규는 어둠의 세력을 찢는 소리였습니다. 이 절규는 인간이 하나님의 지성소로 나아가는 길을 가로막는 휘장을 위로부터 아래로 찢어 두 조각을 내듯이 사단의 어둠의 권세를 찢는 승리의 함성이기도 합니다.
2. 유대인의 시간으로 육시부터 구시까지, 우리 시간으로는 정오부터 오후 세시까지 세 시간동안 지속된 어둠은 무엇이었을까요?
첫째, 어둠이 지배한 세 시간이 상징하는 바는 흑암의 권세가 오래 지속되지 못한다는 것을 말해 주는 것입니다. 짧은 세 시간 만에 어둠의 세력은 예수님을 절규하도록 만들지만, 그러나 어둠의 세력조차 예상치 못했던 결과가 나타났는데, 그것은 어둠의 권세가 예수님의 절규에 찢기고만 것입니다. 짧은 세 시간 만에 어둠의 권세는 예수님을 절명하도록 만들지만, 그러나 죽음의 권세조차도 예상치 못했던 결과가 나타났는데, 그것은 예수님을 39시간 이상 무덤에 가둬둘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오히려 이 짧은 어둠과 죽음의 시간은 다가오는 빛과 생명의 전조요, 부활의 여명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아마 성도님들께서는 외국영화나 드라마를 통해서 서양인들이 생일 당한 사람을 즐겁게 해주기위해서 가족친지 또는 동료들이 모여서 생일 케이크와 음식상을 준비해 놓고 또 풍선 등으로 축하장식을 해놓고 머리에 작은 원추형 고깔을 쓰고 그리고 집안의 모든 불을 끈 채, 생일당한 주인공이 나타날 때까지 어둠 속에서 숨죽이고 기다렸다가 주인공이 나타나 불을 밝히면 모두가 한목소리로 "해피 버얼스데이!"(Happy Birthday!)를 외치며 축하하는 장면을 보셨을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잠깐 동안의 어둠과 죽음은 부활의 여명과 승리의 함성을 위한 전조에 불과한 것입니다. 시구(詩句)에 “먼동이 트기 직전의 침묵이요, 죽은 자의 침묵”이란 말이 있듯이, 갈보리 언덕의 어둠과 죽음은 먼동이 트기 직전의 침묵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둘째, 어둠은 이 땅의 모든 인간들이 경험하는 절망의 현실이요, 하나님의 외면이자, 하나님의 침묵이었습니다. 온 땅에 어두움이 임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얼굴을 돌리셨다는 것, 즉 외면하셨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어떤 이는 아들의 고통을 차마 볼 수가 없어서 하나님께서 얼굴을 돌리셨다고 말합니다. 그랬을 가능성이 전혀 없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신명기 21장 23절에 보면,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니라"고 쓰여 있습니다. 차마 볼 수가 없어서 얼굴을 돌리는 것은 저주가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이 십자가에 매달린 것은 하나님의 단호하고도 냉혹한 외면이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온 땅에 어두움이 내리자 하나님이 자신을 냉혹하고 무섭게 외면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절감하고 계셨을 것입니다. 시편 22편 24절에서 다윗이 고백한 말씀, “그는 곤고한 자의 곤고를 멸시하거나 싫어하지 아니하시며 그의 얼굴을 그에게서 숨기지 아니하시고 그가 울부짖을 때에 들으셨도다.”고 한 말씀이 적어도 예수님께는 적용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계셨을 것입니다.
셋째, 어둠은 하나님 자신을 향한 외면이었습니다.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님에 대한 하나님의 외면은 하나님 자신을 향한 외면이었던 것입니다. 더불어 어둠을 찢는 예수님의 절규 또한 인류에게 빛과 생명의 축복을 예정하시고 자신에게는 어둠과 죽음의 저주를 예정하신 하나님의 절규였던 것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하나님은 왜 십자가에 매달려 고통을 겪고 계신 예수님을 외면하시고 버리셨을까요? 하나님은 신실한 분이라고 했습니다. 한번 약속한 것은 반드시 지키시는 분이라고 했습니다. 실제로 하나님은 약속한 것을 지키지 아니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으신 분입니다. 우리가 이 사실을 안다면, 하나님이 어둠을 내려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님을 외면한 이유를 하나님 자신을 향한 외면에서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 외면할 대상이 있다면, 그것은 다름 아닌 하나님 자신뿐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에 결코 곤고한 자에게서 얼굴을 돌리실 수 없습니다. 그분이 얼굴을 돌리셨다면, 그것은 오직 자신을 향한 것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부르짖는 예수님에게서 단호하게 그리고 냉혹하게 얼굴을 돌리셨습니다. 그것은 바로 그분의 아들 예수님이 다름 아닌 하나님 자신이었기 때문입니다. 그 처절한 고독, 그 흑암의 절망, 그것은 바로 하나님 자신이 감당하신 고통이었습니다. 그 무서운 어둠 속에서 사람의 아들 예수님은 하나님으로서의 신성을 입증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어둠 속에서 절규하셨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그것은 바로 사람의 아들 예수님의 절규이자, 또한 영으로써 인간과 함께 고통당하신 하나님 자신의 절규였던 것입니다.
넷째, 어둠과 침묵은 닮은꼴입니다. 여기서 침묵은 하나님의 침묵을 말합니다. 부르짖는 이들의 소리에 대답이 없는 하나님의 침묵은 고통당하는 이들의 아픔을 가중시키곤 합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침묵에 대해서 설명을 시도했고 그 속에서 하나님의 섭리와 은총을 깨닫고자 애썼습니다. 구약성경 욥기서가 그 대표적인 글입니다. 성경을 연구하는 수많은 신학자들은 이 욥기서를 근거로 현존하는 고통의 의미들에 대해서 여러 가지로 설명해 놓고 있습니다. 소설가들도 마찬가집니다. 톨스토이는 하나님은 진실을 아시나 침묵하신다.는 민화를 발표했고, 일본인 작가 엔도 슈사쿠는 침묵이란 소설을 써서 유명해졌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침묵은 고통당하는 사람들에게는 너무나 무거운 멍에입니다. 그래서 박해를 통해서, 질병을 통해서, 또는 각종 재해들을 통해서 불행을 당한 사람들이 하나님을 부정하기도 하고 교회를 떠나기도 합니다. 우리는 그들의 아픔과 고통을 가볍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그들의 배교를 너무 쉽게 정죄해서도 안 됩니다. 순교사를 공부하다보면, 박해라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럽고 저주스럽고 잔인한 것인가를 알게 됩니다. 따라서 우리가 감히 배교자를 향해서 돌을 던질 수 있겠는가라는 물음을 묻게 됩니다. 박해가 아니더라도 여러 가지 불행을 만나 고통당하고 있는 사람들을 향해서도 마찬가집니다. 우리가 그들의 위치에 놓인다면, 우리는 과연 어떨 것인가? 그 부분에 있어서 감히 아무도 장담할 수 없다는 것이 역사의 가르침입니다.
성경은 박해나 시련을 용광로에 비교합니다. ‘불같은 시험’이란 말은 용광로에 들어가 녹아지고 태워지는 것을 말합니다. 진정한 믿음이란 이 용광로의 뜨거운 불을 통과하고서도 지푸라기나 나무처럼 타서 재가 되어버리지 않고 금이나 은같이 무엇인가 값진 물건으로 걸려져 나올 때를 말한 것입니다. 그러나 수많은 경우들에 있어서는 금이나 은처럼 값진 믿음의 소유자로 불을 통과하지 못하고 지푸라기나 나무처럼 타버리고 맙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금이나 은 같은 믿음이란 죽음의 위협과 고문에 직면해서조차 끝까지 믿음을 저버리지 않고 죽기까지 견디는 신앙을 말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어디 말처럼 쉽습니까? 이유는 우리가 용광로의 시험을 통과할 때, 하나님이 자주 침묵하시고 외면하시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만일에 우리가 용광로를 통과하지 못하도록 하나님이 매번 간여 하시게 되면, 우리는 결코 우리의 믿음을 증거 받지 못하고 말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시련의 용광로를 통과할 때, 하나님이 침묵가운데서 우리와 함께 그 고통을 겪고 계신다는 사실, 그 고통이 나만의 고통이 아니라 하나님 당신의 고통이란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것을 깨닫지 못하는 한, 어쩌면 우리는 영원히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을 수 없을지도 모릅니다.
성경이 우리에게 십자가를 지라고 권한 것은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죽어 장사되신지 삼일 만에 부활하시고 승천하시어 하나님 우편에 앉아 영광과 권세를 누리고 계신다는 전제하에 말한 것이며, 따라서 십자가를 진 자들에게는 예수님이 누리시는 영광과 같은 복을 누리게 될 것을 전제하고 말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시련을 만날 때에 이 약속에 대한 비전과 하나님이 말없이 그 시련 속에 나와 함께 계시면서 나와 함께 고통을 당하고 계신다는 확신이 없이는 또 시련의 강도가 강해지면 강해질수록 그 시련을 이길 가능성은 희박해지는 것입니다.
이 점에 대해서 엔도 슈사쿠는 침묵이란 책에서 잘 묘사해 놓고 있습니다. 프랑스 파리에 외방선교회본부가 있는데, 그 곳의 작은 유물 전시관에는 다 닳은 성모상이 새겨진 작은 성화판(聖畵板) 하나가 전시되어있다고 합니다. 엔도 슈사쿠가 침묵을 쓰게 된 것도 1960년대 초 나가사키에서 그와 같은 성화판을 보고난 다음이었다고 합니다. 이 성화판은 1637년부터 1644년까지 일본에서 자행된 천주교 대박해 때에 신자들을 색출할 목적으로 에도시대 막부(쇼군)가 고안한 것으로써 성모상이나 예수 십자가상을 동판이나 목판에 새겨 사람들로 하여금 발로 밟고 지나가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색출된 기독교인들은 그 악명 높은 ‘구멍 매달기’란 방법의 고문을 통해서 신앙을 포기토록 하였습니다. 이런 극한 상황에 처한 성도들이 고통 중에 울부짖으며 죽어가고 있을 때, 왜 하나님은 침묵하셨는가를 다룬 책이 슈사쿠의 침묵입니다.
이 소설에 페레이라와 로드리고란 이름의 포르투갈 예수회 신부들이 등장하는데, 학문과 신앙과 열정과 헌신에 있어서 모두 다 뛰어난 선교사들이었습니다. 그러나 두 사람 다 박해를 견디지 못하고 배교자가 됩니다.
일본인 관리들은 믿음이 강한 이들 신부들을 배교시키기 위해서 이미 몇 번씩이나 주님을 저주하고 성화를 밟고 배교한 농민들을 놓아주지 않고 그들을 묶은 채로 거적에 말아서 좁은 구멍에 거꾸로 매답니다. 그렇게 두면 금방 죽기 때문에 양쪽 귓바퀴에 구멍을 뚫어 한 방울씩 피가 흐르게 합니다. 그러면 입과 코와 귀에서 피를 흘리고 심하게 코고는 소리를 내면서 서서히 고통 중에 죽어가게 됩니다. 그러면서 저 불쌍한 농민 신도들의 고통을 면해 주고 싶으면 배교하라고 말합니다. 저 불쌍한 농민 신도들이 죽느냐 사느냐는 신부에게 달려 있다고 말합니다. "당신이 진정한 신부라면 저 신도들을 불쌍하게 생각해야 할 것이다"고 말합니다. "당신의 이기적인 신앙 때문에 저 불쌍한 사람들이 당하는 고통이 얼마나 극심한지를 아느냐?“고 말합니다.
일본인 관리들은 성화를 발로 밟고 배교해버린 또 다른 신부들과 신도들을 묶은 채로 거적에 맙니다. 그들을 작은 배에 태워서 먼 바다로 보내어 죽게 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당신이 배교하겠노라고 한 마디만 한다면, 그 사람들을 모두 살려 주겠다고 말합니다. 이미 성화를 밟고 배교한 사람들에게 그토록 무자비한 행동을 할 수 있느냐고 물으면, 그들은 말합니다. "우리가 배교시키고 싶은 자들은 저런 보잘것없는 자들이 아니오. 아직도 우리나라의 여러 섬들에는 당신의 종교를 믿는 농민들이 많이 있소. 그들의 마음을 되돌리기 위해서는 당신과 같은 신부들이 먼저 배교하지 않으면 안되오"라고 말합니다. 결국 신부들은 불쌍한 신도들이 엄청난 고통을 겪게 되는 현실을 감당할 수 없어서 그들의 고통을 면해주기 위해서 배교의 길을 택하고 맙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의 성화판을 발로 밟고 지나갑니다. 그것은 지금까지 자신의 전 생애를 통해서 가장 아름답다고 생각해 온 것, 가장 맑고 깨끗하다고 믿었던 것, 인간의 이상과 꿈이 담겨있다고 믿었던 것을 밟는 것입니다. 이 발의 아픔. 그 때, 밟아도 좋다고 동판에 새겨진 예수님이 말합니다. “밟아도 좋다. 네 발의 아픔을 내가 제일 잘 알고 있다. 밟아도 좋다. 나는 너희들에게 밟히기 위해 이 땅에 태어났고, 너희들의 아픔을 나누기 위해 십자가를 짊어진 것이다.“
예수님께서 골고다에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시간은 유대인들의 기도시간인 오전 9시였습니다. 이 때부터 다음 기도시간인 낮 12시 정오까지 세 시간 동안 예수님은 십자가에 매달린 채 사람들로부터 갖은 모욕과 조롱을 당하셨습니다. 정오가 되자 갑자기 온 땅에 어두움이 내렸고, 저녁 희생제사를 바치는 오후 3시까지 지속되고 있었습니다. 그 때 갑자기 예수님은 캄캄한 하늘을 향해서 절규하시며,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셨습니다. 이를 번역하면,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란 뜻이라고 했습니다.
1.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예수님의 이 절규는 과연 무엇이었을까요?
첫째, 예수님의 절규는 산통으로 괴로워하는 산모의 절규와 같다고 봅니다. 통상적으로 십자가에 처형당하는 사람은 그 고통이 너무 커서 저주의 말을 마구 쏟아 놓는 것이 보통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이 절규를 욕설로 볼 수는 없습니다. 산모들 가운데에는 더러 분만의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원망의 소리를 쏟아내는 경우들이 있다고 하는데요, 예수님의 절규에 이런 산통과 같은 면이 전혀 없었다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산통이 옥동자를 위한 것이듯이 예수님의 절규 또한 인류구원이란 옥동자 분만을 위한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둘째, 예수님의 절규는 어둠의 권세를 향한 선전포고였다고 봅니다. 절규는 어둠과도 무관하지 않습니다. 어둡다는 것은 앞을 내다볼 수 없다는 것과 같습니다. 앞을 내다볼 수 없을 때, 우리는 종종 절규하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절규는 앞을 볼 수 없는 좌절에서 비롯됐다기보다는 인간이 하나님께로 가는 길을 막고 선 어둠의 권세를 향한 선전포고였다고 봅니다. 예수님의 절규에 온 인류가 겪는 아픔을 대표한다는 증거가 있기 때문입니다. 누군가 고뇌에 빠졌다면, 누군가 고독하다면, 누군가 좌절감을 느낀다면, 누군가 무력감을 느낀다면,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님이 바로 그의 아픔과 고뇌와 고독과 좌절과 무력감을 끌어안고 막힌 길을 열어주시려고 그 험한 길을 자원하셨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합니다.
셋째, 예수님의 절규는 세 시간동안이나 지속된 어둠을 찢는 외침이었습니다. 이 절규는 이 땅의 그리스도인들이 종종 경험하는 절망의 하소연이기도 하고, 인류에게 빛과 생명의 축복을 예정하시고, 자기 자신에게는 어둠과 죽음의 저주를 예정하신 하나님의 비명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십자가상에서의 절규는 어둠의 세력을 찢는 소리였습니다. 이 절규는 인간이 하나님의 지성소로 나아가는 길을 가로막는 휘장을 위로부터 아래로 찢어 두 조각을 내듯이 사단의 어둠의 권세를 찢는 승리의 함성이기도 합니다.
2. 유대인의 시간으로 육시부터 구시까지, 우리 시간으로는 정오부터 오후 세시까지 세 시간동안 지속된 어둠은 무엇이었을까요?
첫째, 어둠이 지배한 세 시간이 상징하는 바는 흑암의 권세가 오래 지속되지 못한다는 것을 말해 주는 것입니다. 짧은 세 시간 만에 어둠의 세력은 예수님을 절규하도록 만들지만, 그러나 어둠의 세력조차 예상치 못했던 결과가 나타났는데, 그것은 어둠의 권세가 예수님의 절규에 찢기고만 것입니다. 짧은 세 시간 만에 어둠의 권세는 예수님을 절명하도록 만들지만, 그러나 죽음의 권세조차도 예상치 못했던 결과가 나타났는데, 그것은 예수님을 39시간 이상 무덤에 가둬둘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오히려 이 짧은 어둠과 죽음의 시간은 다가오는 빛과 생명의 전조요, 부활의 여명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아마 성도님들께서는 외국영화나 드라마를 통해서 서양인들이 생일 당한 사람을 즐겁게 해주기위해서 가족친지 또는 동료들이 모여서 생일 케이크와 음식상을 준비해 놓고 또 풍선 등으로 축하장식을 해놓고 머리에 작은 원추형 고깔을 쓰고 그리고 집안의 모든 불을 끈 채, 생일당한 주인공이 나타날 때까지 어둠 속에서 숨죽이고 기다렸다가 주인공이 나타나 불을 밝히면 모두가 한목소리로 "해피 버얼스데이!"(Happy Birthday!)를 외치며 축하하는 장면을 보셨을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잠깐 동안의 어둠과 죽음은 부활의 여명과 승리의 함성을 위한 전조에 불과한 것입니다. 시구(詩句)에 “먼동이 트기 직전의 침묵이요, 죽은 자의 침묵”이란 말이 있듯이, 갈보리 언덕의 어둠과 죽음은 먼동이 트기 직전의 침묵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둘째, 어둠은 이 땅의 모든 인간들이 경험하는 절망의 현실이요, 하나님의 외면이자, 하나님의 침묵이었습니다. 온 땅에 어두움이 임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얼굴을 돌리셨다는 것, 즉 외면하셨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어떤 이는 아들의 고통을 차마 볼 수가 없어서 하나님께서 얼굴을 돌리셨다고 말합니다. 그랬을 가능성이 전혀 없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신명기 21장 23절에 보면,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니라"고 쓰여 있습니다. 차마 볼 수가 없어서 얼굴을 돌리는 것은 저주가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이 십자가에 매달린 것은 하나님의 단호하고도 냉혹한 외면이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온 땅에 어두움이 내리자 하나님이 자신을 냉혹하고 무섭게 외면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절감하고 계셨을 것입니다. 시편 22편 24절에서 다윗이 고백한 말씀, “그는 곤고한 자의 곤고를 멸시하거나 싫어하지 아니하시며 그의 얼굴을 그에게서 숨기지 아니하시고 그가 울부짖을 때에 들으셨도다.”고 한 말씀이 적어도 예수님께는 적용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계셨을 것입니다.
셋째, 어둠은 하나님 자신을 향한 외면이었습니다.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님에 대한 하나님의 외면은 하나님 자신을 향한 외면이었던 것입니다. 더불어 어둠을 찢는 예수님의 절규 또한 인류에게 빛과 생명의 축복을 예정하시고 자신에게는 어둠과 죽음의 저주를 예정하신 하나님의 절규였던 것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하나님은 왜 십자가에 매달려 고통을 겪고 계신 예수님을 외면하시고 버리셨을까요? 하나님은 신실한 분이라고 했습니다. 한번 약속한 것은 반드시 지키시는 분이라고 했습니다. 실제로 하나님은 약속한 것을 지키지 아니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으신 분입니다. 우리가 이 사실을 안다면, 하나님이 어둠을 내려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님을 외면한 이유를 하나님 자신을 향한 외면에서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 외면할 대상이 있다면, 그것은 다름 아닌 하나님 자신뿐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에 결코 곤고한 자에게서 얼굴을 돌리실 수 없습니다. 그분이 얼굴을 돌리셨다면, 그것은 오직 자신을 향한 것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부르짖는 예수님에게서 단호하게 그리고 냉혹하게 얼굴을 돌리셨습니다. 그것은 바로 그분의 아들 예수님이 다름 아닌 하나님 자신이었기 때문입니다. 그 처절한 고독, 그 흑암의 절망, 그것은 바로 하나님 자신이 감당하신 고통이었습니다. 그 무서운 어둠 속에서 사람의 아들 예수님은 하나님으로서의 신성을 입증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어둠 속에서 절규하셨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그것은 바로 사람의 아들 예수님의 절규이자, 또한 영으로써 인간과 함께 고통당하신 하나님 자신의 절규였던 것입니다.
넷째, 어둠과 침묵은 닮은꼴입니다. 여기서 침묵은 하나님의 침묵을 말합니다. 부르짖는 이들의 소리에 대답이 없는 하나님의 침묵은 고통당하는 이들의 아픔을 가중시키곤 합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침묵에 대해서 설명을 시도했고 그 속에서 하나님의 섭리와 은총을 깨닫고자 애썼습니다. 구약성경 욥기서가 그 대표적인 글입니다. 성경을 연구하는 수많은 신학자들은 이 욥기서를 근거로 현존하는 고통의 의미들에 대해서 여러 가지로 설명해 놓고 있습니다. 소설가들도 마찬가집니다. 톨스토이는 하나님은 진실을 아시나 침묵하신다.는 민화를 발표했고, 일본인 작가 엔도 슈사쿠는 침묵이란 소설을 써서 유명해졌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침묵은 고통당하는 사람들에게는 너무나 무거운 멍에입니다. 그래서 박해를 통해서, 질병을 통해서, 또는 각종 재해들을 통해서 불행을 당한 사람들이 하나님을 부정하기도 하고 교회를 떠나기도 합니다. 우리는 그들의 아픔과 고통을 가볍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그들의 배교를 너무 쉽게 정죄해서도 안 됩니다. 순교사를 공부하다보면, 박해라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럽고 저주스럽고 잔인한 것인가를 알게 됩니다. 따라서 우리가 감히 배교자를 향해서 돌을 던질 수 있겠는가라는 물음을 묻게 됩니다. 박해가 아니더라도 여러 가지 불행을 만나 고통당하고 있는 사람들을 향해서도 마찬가집니다. 우리가 그들의 위치에 놓인다면, 우리는 과연 어떨 것인가? 그 부분에 있어서 감히 아무도 장담할 수 없다는 것이 역사의 가르침입니다.
성경은 박해나 시련을 용광로에 비교합니다. ‘불같은 시험’이란 말은 용광로에 들어가 녹아지고 태워지는 것을 말합니다. 진정한 믿음이란 이 용광로의 뜨거운 불을 통과하고서도 지푸라기나 나무처럼 타서 재가 되어버리지 않고 금이나 은같이 무엇인가 값진 물건으로 걸려져 나올 때를 말한 것입니다. 그러나 수많은 경우들에 있어서는 금이나 은처럼 값진 믿음의 소유자로 불을 통과하지 못하고 지푸라기나 나무처럼 타버리고 맙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금이나 은 같은 믿음이란 죽음의 위협과 고문에 직면해서조차 끝까지 믿음을 저버리지 않고 죽기까지 견디는 신앙을 말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어디 말처럼 쉽습니까? 이유는 우리가 용광로의 시험을 통과할 때, 하나님이 자주 침묵하시고 외면하시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만일에 우리가 용광로를 통과하지 못하도록 하나님이 매번 간여 하시게 되면, 우리는 결코 우리의 믿음을 증거 받지 못하고 말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시련의 용광로를 통과할 때, 하나님이 침묵가운데서 우리와 함께 그 고통을 겪고 계신다는 사실, 그 고통이 나만의 고통이 아니라 하나님 당신의 고통이란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것을 깨닫지 못하는 한, 어쩌면 우리는 영원히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을 수 없을지도 모릅니다.
성경이 우리에게 십자가를 지라고 권한 것은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죽어 장사되신지 삼일 만에 부활하시고 승천하시어 하나님 우편에 앉아 영광과 권세를 누리고 계신다는 전제하에 말한 것이며, 따라서 십자가를 진 자들에게는 예수님이 누리시는 영광과 같은 복을 누리게 될 것을 전제하고 말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시련을 만날 때에 이 약속에 대한 비전과 하나님이 말없이 그 시련 속에 나와 함께 계시면서 나와 함께 고통을 당하고 계신다는 확신이 없이는 또 시련의 강도가 강해지면 강해질수록 그 시련을 이길 가능성은 희박해지는 것입니다.
이 점에 대해서 엔도 슈사쿠는 침묵이란 책에서 잘 묘사해 놓고 있습니다. 프랑스 파리에 외방선교회본부가 있는데, 그 곳의 작은 유물 전시관에는 다 닳은 성모상이 새겨진 작은 성화판(聖畵板) 하나가 전시되어있다고 합니다. 엔도 슈사쿠가 침묵을 쓰게 된 것도 1960년대 초 나가사키에서 그와 같은 성화판을 보고난 다음이었다고 합니다. 이 성화판은 1637년부터 1644년까지 일본에서 자행된 천주교 대박해 때에 신자들을 색출할 목적으로 에도시대 막부(쇼군)가 고안한 것으로써 성모상이나 예수 십자가상을 동판이나 목판에 새겨 사람들로 하여금 발로 밟고 지나가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색출된 기독교인들은 그 악명 높은 ‘구멍 매달기’란 방법의 고문을 통해서 신앙을 포기토록 하였습니다. 이런 극한 상황에 처한 성도들이 고통 중에 울부짖으며 죽어가고 있을 때, 왜 하나님은 침묵하셨는가를 다룬 책이 슈사쿠의 침묵입니다.
이 소설에 페레이라와 로드리고란 이름의 포르투갈 예수회 신부들이 등장하는데, 학문과 신앙과 열정과 헌신에 있어서 모두 다 뛰어난 선교사들이었습니다. 그러나 두 사람 다 박해를 견디지 못하고 배교자가 됩니다.
일본인 관리들은 믿음이 강한 이들 신부들을 배교시키기 위해서 이미 몇 번씩이나 주님을 저주하고 성화를 밟고 배교한 농민들을 놓아주지 않고 그들을 묶은 채로 거적에 말아서 좁은 구멍에 거꾸로 매답니다. 그렇게 두면 금방 죽기 때문에 양쪽 귓바퀴에 구멍을 뚫어 한 방울씩 피가 흐르게 합니다. 그러면 입과 코와 귀에서 피를 흘리고 심하게 코고는 소리를 내면서 서서히 고통 중에 죽어가게 됩니다. 그러면서 저 불쌍한 농민 신도들의 고통을 면해 주고 싶으면 배교하라고 말합니다. 저 불쌍한 농민 신도들이 죽느냐 사느냐는 신부에게 달려 있다고 말합니다. "당신이 진정한 신부라면 저 신도들을 불쌍하게 생각해야 할 것이다"고 말합니다. "당신의 이기적인 신앙 때문에 저 불쌍한 사람들이 당하는 고통이 얼마나 극심한지를 아느냐?“고 말합니다.
일본인 관리들은 성화를 발로 밟고 배교해버린 또 다른 신부들과 신도들을 묶은 채로 거적에 맙니다. 그들을 작은 배에 태워서 먼 바다로 보내어 죽게 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당신이 배교하겠노라고 한 마디만 한다면, 그 사람들을 모두 살려 주겠다고 말합니다. 이미 성화를 밟고 배교한 사람들에게 그토록 무자비한 행동을 할 수 있느냐고 물으면, 그들은 말합니다. "우리가 배교시키고 싶은 자들은 저런 보잘것없는 자들이 아니오. 아직도 우리나라의 여러 섬들에는 당신의 종교를 믿는 농민들이 많이 있소. 그들의 마음을 되돌리기 위해서는 당신과 같은 신부들이 먼저 배교하지 않으면 안되오"라고 말합니다. 결국 신부들은 불쌍한 신도들이 엄청난 고통을 겪게 되는 현실을 감당할 수 없어서 그들의 고통을 면해주기 위해서 배교의 길을 택하고 맙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의 성화판을 발로 밟고 지나갑니다. 그것은 지금까지 자신의 전 생애를 통해서 가장 아름답다고 생각해 온 것, 가장 맑고 깨끗하다고 믿었던 것, 인간의 이상과 꿈이 담겨있다고 믿었던 것을 밟는 것입니다. 이 발의 아픔. 그 때, 밟아도 좋다고 동판에 새겨진 예수님이 말합니다. “밟아도 좋다. 네 발의 아픔을 내가 제일 잘 알고 있다. 밟아도 좋다. 나는 너희들에게 밟히기 위해 이 땅에 태어났고, 너희들의 아픔을 나누기 위해 십자가를 짊어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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