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의 바다 건너편 해변(계 15:2-4)
본문
죽음의 바다 건너편 해변(계 15:2-4) 자연은 죽었다가 살고 또 살다가 죽는 변화의 연속입니다. 그러면서 일부는 진보하고 일부는 쇠퇴합니다. 아놀드 토인비(Anold Toynbee)가 문명의 발생과 성장과 쇠퇴와 해체를 위기에서 찾았듯이, 자연만물도 위기를 만나 진보의 길을 갈 수도 있고 해체의 운명을 맞이할 수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봄의 부활이 겨울의 혹독한 추위란 고난을 이겼을 때 가능해진다는 것입니다. 이 자연의 섭리를 보면서 고대인들은 죽음과 부활을 모티브로 하여 신화를 만들기도 했습니다. 죽은 오시리스와 이시스 사이에서 호루스가 태어나는 이집트신화가 그렇고, 제우스와 곡물의 신인 데메테르(Demeter) 사이에서 태어난 딸 페르세포네(Persepone)가 사철의 신이 되는 그리스신화가 그렇습니다. 페르세포네는 음부의 신이자 제우스의 형제인 하데스(Hades)에게 납치되어 그의 부인이 된 후에 데메테르가 딸을 돌려달라고 제우스에게 강력히 요청할 뿐 아니라, 곡물의 신인 데메테르가 딸을 찾는 동안 일을 하지 않아 기근이 지속되자 제우스도 할 수 없어서 페르세포네로 하여금 일년 중 4분의 3은 지상에서 지내게 하고, 나머지 4분의 1은 음부에서 지낼 수 있도록 중재 안을 내 놓았는데, 다행히 하데스와 데메테르 모두가 이 조건을 수락하여 그 때부터 페르세포네가 음부에 머무는 겨울동안 곡식이 자라지 않고 초목이 죽었다가 페르세포네가 지상으로 돌아오는 봄이 되면 데메테르가 대지에 생명을 불어넣어 부활케 하였다는 신화입니다. 이와 같은 신화들은 하나님의 창조정신과 부활의 정신을 담고 있는 자연의 섭리에 대한 인간들의 믿음에서 나온 것이라 믿어집니다. 그리고 이것은 부활이 있다는 사실을 정황적으로 입증해 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부활에 대한 염원과 신앙은 타종교들에서도 나타납니다. 아미타(阿彌陀)의 정토나 미륵의 용화세계를 말하는 대승불교, 사람이 죽으면 시신은 묻히지만 진짜 신체는 장생불사하는 신선들 틈에서 살게 된다고 믿는 도교, 죽어서는 천국환경에 맞는 몸으로 변형된다는 이슬람교, 계절에 맞는 옷을 갈아입듯이 이전에 의지하던 육신을 버리고 다른 육신으로 갈아입는다는 힌두교의 설명도 부활이 있다는 사실을 간접적으로 입증해 주는 것이라고 봅니다. 그러나 이들 종교들이 말하는 부활은 우리 예수님이 육체를 입고 다시 살아나신 것과 같은 분명한 육체부활에 대한 확신이 없다는데서 기독교의 부활신앙과는 큰 차이점을 보이고 있습니다. 계절의 변화를 통해서 부활의 가능성을 노래한 김남조 시인의 「생명」이란 시구를 같이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시인은 “생명은 추운 몸으로 온다. 벌거벗고 언 땅에 꽂혀 자라는 초록의 겨울보리, 생명의 어머니도 먼 곳 추운 몸으로 왔다. 진실도 부서지고 불에 타면서 온다. 버려지고 피 흘리면서 온다.”고 노래합니다. 이 시구에서 얻을 수 있는 교훈은 새 생명이 찾아오는 봄은 반드시 추운 겨울을 보내야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생명은 추운 몸으로 옵니다. 모두가 벌거벗겨지고 얼어붙어버린 죽음에 다름없는 고통과 시련의 터널을 지나야 봄은 옵니다. 마찬가지로 진실도 부서지고 불에 타면서 오고, 버려지고 피 흘리면서 옵니다. 따라서 우리 주님의 삼년 육 개월의 배척과 십자가의 수난은 부활을 위한 피해갈 수 없는 그분 생애 중 겨울나기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시인은 계속해서 이렇게 노래합니다. “겨울나무들을 보라. 추위의 면도날로 제 몸을 다듬는다. 잎은 떨어져 먼 날의 섭리에 불려가고, 줄기는 이렇듯이 충전 부싯돌임을 보라.” 이 시구에서 얻을 수 있는 교훈은 예수님의 부활은 또 다른 부활의 충전을 위한 부싯돌이란 점입니다. 겨울나무들이 면도날처럼 매서운 한겨울 추위로 제 몸을 다듬듯이 고통은 사람을 만듭니다. 찬 바람에 잎이 떨어져 나가듯이 자만하게 만들었던 헛것들은 고통을 만나면 바람에 날려가듯 다 날아가 버립니다. 그러나 절망만이 아닌 것은 바람을 맞고도 견디는 줄기가 있기 때문인데, 이것이야말로 내일의 희망이요 부활을 가져다줄 충전부싯돌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시인 구상이 「부활송」에서 노래했듯이, 부활이 있으므로 진리가 있고, 부활이 있으므로 정의는 이기는 것이고, 부활이 있으므로 달게 받는 고통은 값진 것이며, 부활이 있으므로 우리의 믿음과 바람과 사랑은 헛되지 않으며, 부활이 있으므로 우리의 삶은 허무의 수렁이 아닌 게 되는 것입니다. 김남조 시인은 “금가고 일그러진 것을 사랑할 줄 모르는 이는 친구가 아니다. 상한 살을 헤집고 입 맞출 줄 모르는 이는 친구가 아니다.”고 노래하였는데, “친구가 아니다”고 한 말은 금가고 일그러진 것을 사랑할 줄 모르거나 상한 살을 헤집고 입 맞출 줄 모르는 이는 부활의 기쁨에 동참할 수가 없다는 뜻입니다. 고통의 의미를 모르고서는 부활에 동참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를 진 후에 부활이 있었듯이 낮아지고 난 다음에야 높아질 수 있습니다. 십자가는 모든 인류의 고난과 시련이지만 부활은 모든 인류의 희망입니다. 십자가 후에 부활이 있었듯이 끝까지 믿음을 지킨 성도들의 결말은 부활입니다. 그것을 믿고 나가는 자들만이 승리의 경험들을 차곡차곡 쌓아갈 수 있습니다. 이제는 성경에서 부활의 교훈을 찾아보고자 합니다. 오늘 말씀의 제목이 “죽음의 바다 건너편 해변”입니다. 성경에는 구원받은 성도들이 모여 “하나님의 종 모세의 노래, 어린 양의 노래”를 부르는 곳으로 해변을 말하고 있습니다. 계시록 15장 2절의 말씀을 보면, 적그리스도와 거짓선지자의 박해를 견디고 끝까지 믿음을 지키고 구원을 받은 성도들이 하나님이 주신 하프를 가지고 하늘 보좌 앞에 펼쳐진 수정과 같고 불이 섞인 유리 바다 가에 서서 “하나님의 종 모세의 노래, 어린 양의 노래”를 부릅니다. 이 부분의 말씀을 이해하려면 출애굽기 15장의 말씀을 참고해야 합니다. 출애굽기 15장에는 이스라엘 민족이 홍해를 무사히 건넌 후에 홍해 해변에 서서 부른 모세와 미리암의 노래가 실려 있기 때문입니다. 특히 미리암과 여인들은 손에 탬버린을 잡고 춤을 추면서 화답송을 불렀습니다. 여기서 이스라엘 민족이 홍해를 건넜다는 것은 바울이 고린도전서 10장 1-2절에서 지적한 대로 세례 또는 침례를 받았다는 의미가 되는데, 세례나 침례식에서의 물은 죽음을 상징합니다. 그러므로 홍해를 건넜다는 것은 죽음의 바다를 건넜다는 뜻이 됩니다. 실제로 성경에서 물은 죽음을 상징하기 때문에 물에서 건짐을 받았다는 것이 이스라엘 민족과 초기 기독교인들의 신앙고백입니다. 노아의 여덟 식구가 물에서 건짐을 받았고, 이스라엘 민족이 홍해에서 건짐을 받았으며, 죽음의 강 요단을 건너 가나안 복지에 들어갔으며, 요나도 물에서 건짐을 받았습니다. 같은 맥락에서 예수님의 제자들이 갈릴리 바다에서 수차례 건짐을 받고 있고, 하늘 보좌 앞 불이 섞인 유리바다 가에 선 성도들도 소돔성을 삼켰던 불바다 또는 박해로 상징되는 죽음의 바다를 건넌 후에 구원을 주신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바다는 흑암과 죽음을 말합니다. 그리스신화에서도 죽음의 세계인 하데스에 이르는 길을 아케루시아(Acherousia)호수와 아케론(Acheron)강으로 표현하고 있고, 지하세계에 도달해서는 다시 스튁스(Styx) 강을 건너야 하는 것으로 설명합니다. 이처럼 물은 흑암과 죽음을 상징합니다. 그 반대로 해변은 빛과 구원을, 바꿔서 말씀드린다면, 해변은 흑암과 죽음의 터널을 벗어나 부활한 자들이 밝고 안전한 곳에 도달한 상태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약속받은 사람들에게 흑암과 죽음은 빛과 구원 곧 부활을 위한 통과의례에 불과한 것입니다. 죽음을 상징하는 십자가가 산통이라면 부활은 출산에 해당되듯이, 죄악된 세상이 어둠의 터널이요 흑암과 죽음의 바다라면, 그것은 새생명을 위한 모태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부활은 마치 어둡고 긴 터널을 빠져나와 빛과 환희의 세계에 도달한 것과 같고, 출산됨으로 어둡고 출렁이는 파도의 세계를 벗어나 빛의 세계로 나온 것과 같은 것입니다. 또 부활은 요나가 어둡고 무덤과 속 같은 물고기의 뱃속에서 나와 빛의 세계 해변에 이른 것과 같고, 칠흑처럼 캄캄한 밤에 폭풍을 만나 죽음에 직면한 제자들이 예수님을 통해서 구원을 받고, 동터오는 미명에 갈릴리 해변에 다다른 것과도 같은 것입니다. 기독교는 예수님 탄생일을 12월 25일로 정하고 축일로 지키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12월 25일에 출생하신 것은 아니지만, 이날은 밤 시간이 최고로 길어지고, 반대로 낮 시간은 최고로 짧아지는 동지가 지난 직후입니다. 이것은 빛이 어둠을 점차 정복해간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세상을 비추는 생명의 빛으로 오셨다는 것을 뜻합니다. 죽음을 상징하는 어둠의 권세를 물리치기 위해서 오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같은 맥락에서 예수님은 낮과 밤의 길이가 같아지는 춘분이 지나고 첫 만월이 된 직후에 부활하셨습니다. 이것 역시 빛의 승리를 의미합니다. 낮이 밤을 이기고 빛이 어둠을 완전히 이긴 시점에 예수님이 부활하셨던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예수님의 부활사건은 빛이 어둠을 이기고 생명이 죽음을 이긴 사건들의 시발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로부터 죽은 예수님을 살리신 하나님을 믿는 것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는 그 믿음이 긍정의 변화를 가져오는 하나님의 능력과 하나님의 지혜가 되었고, “항상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이기게”(고후 2:14) 하셨던 것입니다. 오늘 아침 우리가 부활의 의미에 관심을 쏟고 있는 주제는 부활이 고난을 통해서 찾아온다는 것입니다. 그 고난이 죽음이든 박해든 시련이든 그와 같은 부정적인 것들을 이기고 극복했을 때에 찾아 올 수 있는 것임을 살펴보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종려주일의 환호성은 부활주일아침에 환희의 찬가를 부르기 위한 전주곡에 불과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종려주일의 환호성과 부활주일의 환희 사이에서 예수님은 침묵과 인내로써 극심한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먼저 고난을 받으시고 나중에 부활의 아침을 맞으셨던 것입니다. 종려주일의 환호성이란 입장에서 볼 때,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믿음으로 의롭다하심을 받고 충만한 기쁨으로 구원의 문(예루살렘 성문)에 들어섰으나, 예수님처럼 부활의 날까지 자기 십자가를 묵묵히 지고 인내함으로써 하나님의 뜻을 다 이룬 후에야 부활의 아침을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많은 고난에도 불구하고 침묵과 인내로써 부활의 그날을 소망 중에 바라보며 흑암과 죽음의 긴 터널을 지나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자연이 매서운 겨울을 보낸 후에야 소생의 봄을 맞이할 수 있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김남조 시인은 “생명은 추운 몸으로 온다.”고 했고, “추위의 면도날로 제 몸을 다듬고” 난 다음에 온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부활신앙을 소유한 자들은 “금가고 일그러진 것을 사랑할 줄” 알아야 하고, “상한 살을 헤집고 입 맞출 줄” 알아야한다고 했습니다. 성경은 그와 같은 자들이 죽음의 바다 건너편 해변에 설 자격자들이 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훗날에 보좌 앞 불이 섞인 유리바다 가에 서서 하나님이 주신 하프를 켜며 승리의 노래를 부르는 거대한 성가대의 대열에 합류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 이전글 어버이는 누구인가?(눅 15:11-32) 05.07.11
- 다음글 어둠을 찢는 절규(막 15:33-34) 05.07.11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