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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버이는 누구인가?(눅 15:1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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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동호
댓글 0 조회 11,917 2005.07.11 08:57

본문

어버이는 누구인가?(눅 15:11-32)

오늘은 어버이주일입니다. 어버이들의 하늘같은 은혜와 바다와 같은 사랑에 고마움을 표시하는 날입니다. 오늘의 주인공이신 어버이들은 과연 어떤 존재일까요?
첫째, 어버이는 아낌없이 주는 나무와 같은 존재입니다. 미국 시카고출신의 쉘 실버스타인(Shel Silverstein, 1932-1999)의 작품 가운데 󰡔아낌없이 주는 나무󰡕라는 글이 있습니다.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한 그루의 사과나무가 있었습니다. 그 나무에게는 사랑하는 소년이 있었습니다. 소년은 하루도 빠짐없이 나무한테 와서 나뭇잎으로 왕관을 만들어 쓰기도 하고, 가지에 매달려 그네도 뛰고, 사과도 따먹고, 나무그늘에 앉아 쉬거나 누워 낮잠을 자기도 하고, 가끔씩 나무와 숨바꼭질놀이도 하였습니다. 소년은 나무를 너무나 사랑했고, 나무도 행복했습니다.
그러나 소년은 나이가 들면서 찾아오는 횟수가 뜸해졌습니다. 그래서 나무는 혼자 있을 때가 많아졌습니다. 어느 날 소년이 나무를 찾아왔을 때 나무가 말했습니다. “얘야, 예전처럼 가지에 매달려 그네도 뛰고, 사과도 따먹고, 그늘에 쉬면서 나하고 놀자.“ “나는 이제 나무랑 놀기에는 너무 커버렸어. 나는 돈이 필요해. 나에게 돈을 좀 줄 수 없겠니?“ 하고 소년이 말했습니다. “미안해. 나에겐 돈이 없어. 내 사과를 따다가 팔면 어떠니? 그러면 돈이 생길 거고, 너도 행복해질 텐데.“ 라고 나무가 말했습니다. 그래서 소년은 사과를 따가지고 가버렸습니다. 그래서 나무는 행복했습니다.
그러나 소년은 오랜 세월동안 돌아오지 않았고, 그래서 나무는 슬펐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소년이 돌아왔습니다. 나무는 너무나 기뻐서 몸을 흔들며 말했습니다. “얘야, 예전처럼 가지에 매달려 그네도 뛰고, 사과도 따먹고, 그늘에 쉬면서 나하고 놀자.“ “나는 한가롭지가 않단 말이야. 난 집이 필요해. 부인도 얻어야하고 자녀들도 길러야해. 그래서 집이 필요하단 말이야. 너 나에게 집하나 마련해 줄 수 없겠니?“ 라고 소년이 말했습니다. “난 집이 없어. 이 숲이 나의 집이야. 하지만 내 가지들을 베어다가 집을 짓지 그러니? 그러면 행복해질 수 있을 거야.“ 라고 나무가 말했습니다. 그래서 소년은 나무 가지들을 베어가지고는 집을 짓기 위해 가버렸습니다. 그래서 나무는 행복했습니다.
그러나 소년은 오랜 세월동안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소년이 돌아왔습니다. 나무는 말할 수 없이 기뻐서 이렇게 속삭였습니다. “얘야, 이리와 나하고 놀자.“ “나는 나이가 너무 들고 비참해져서 놀 수가 없어. 차라리 나를 멀리 데려갈 수 있는 배가 있었으면 좋겠어. 너 내게 배 한 척 마련해 줄 수 없겠니?” 라고 소년이 말했습니다. “그래? 그럼 내 줄기를 베어다가 배를 만들지 그러니. 그러면 너는 멀리 떠날 수 있고, 행복해질 수 있을 거야.“ 라고 나무가 말했습니다. 그래서 소년은 나무의 줄기를 베어서 배를 만들어 타고 멀리 가버렸습니다. 그래서 나무는 행복했지만, 정말 그런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오랜 세월이 지난 뒤에 소년이 다시 돌아왔습니다. “얘야, 미안하다. 이제는 너에게 줄 것이 아무 것도 없구나. 내게 남은 것이라곤 늙어버린 이 나무밑동뿐이란다.“ 라고 나무가 말했습니다. “이제 내게도 필요한 건 별로 없어. 그냥 앉아서 쉴 조용한 곳이 있었으면 좋겠어. 몹시 피곤하거든.“ 라고 소년이 말했습니다. “아, 그래. 앉아서 쉬기엔 늙은 나무밑동이 제격이지. 이리와 앉아. 앉아서 편히 쉬도록 해.“ 라고 나무는 말했습니다. 소년은 나무가 시키는 대로 나무밑동에 걸터앉았고, 그래서 나무는 행복했습니다.
이 글에서 나무는 어버이이고, 소년은 자식입니다. 이 글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어버이들의 진실한 사랑, 조건 없는 사랑, 아낌없는 사랑입니다. 세상에서 이런 사랑을 베풀 수 있는 사람은 어버이들 말고는 없습니다. 아무 대가도 없이 자신이 소유한 모든 것을 다 주고도 행복한 사람, 내가 아프면 나보다 더 아픈 사람, 내가 슬프면 나보다 더 슬픈 사람, 내가 기쁘면 나보다 더 기쁜 사람, 이런 사람은 우리를 낳아 길러주신 이 땅의 어버이들 말고는 없습니다. 그러나 어버이들은 늘 외롭습니다. 붙잡아 둘 수 없는 줄을 알면서도, 떠나갈 것을 알면서도 모든 것을 자식에게 안겨줍니다. 그래서 늘 외롭지만 행복해합니다.
둘째, 어버이는 늘 제자리를 지키는 나무와 같은 존재입니다. 어버이는 자식들의 영원한 고향이요 안식처입니다. 그래서 어버이들은 우리 모두가 돌아가야 할 집과 같은 존재요, 뒷동산의 바위와 같은 존재입니다. 김현승 시인의 글 가운데 “아버지의 마음”(1970)이란 글이 있어서 소개합니다.

바쁜 사람들도 굳센 사람들도 바람과 같던 사람들도 집에 돌아오면 아버지가 된다. 어린 것들을 위하여 난로에 불을 피우고, 그네에 작은 못을 박는 아버지가 된다. 저녁 바람에 문을 닫고 낙엽을 줍는 아버지가 된다.
세상이 시끄러우면 줄에 앉은 참새의 마음으로 아버지는 어린 것들의 앞날을 생각한다. 어린 것들은 아버지의 나라다. 아버지의 동포(同胞)다.
아버지의 눈에는 눈물이 보이지 않으나 아버지가 마시는 술에는 항상 보이지 않는 눈물이 절반이다. 아버지는 가장 외로운 사람이다. 아버지는 비록 영웅(英雄)이 될 수도 있지만…….
폭탄을 만드는 사람도 감옥을 지키던 사람도 술가게의 문을 닫는 사람도 집에 돌아오면 아버지가 된다. 아버지의 때는 항상 씻김을 받는다. 어린 것들이 간직한 그 깨끗한 피로…….

세상의 모든 아버지들은 집과 같은 존재입니다. 집이 있기에 사람들은 그 곳에 정처를 두고, 가정이란 보금자리를 이룹니다. 아낌없이 주는 나무처럼 집도 언제나 제자리를 굳게 지킵니다. 집이 비와 바람과 추위와 더위로부터 가족을 보호하는 것처럼 아버지도 항상 사랑과 근심으로 자식들을 돌보며 앞날을 걱정합니다. 그래서 아버지는 고독한 존재입니다. 가족부양이란 힘겨운 과제에 지쳐있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아버지는 보이지 않는 눈물을 말없이 흘립니다. 아버지는 가족들 앞에서 겉으로는 태연한척하지만, 속으로는 무력감과 허무감과 가족에 대한 걱정으로 괴로움을 겪는 존재입니다. 그러면서도 가장으로서 가족들의 버팀목이 되어야 하기 때문에 약한 모습을 보여서도 안 되는, 그래서 속으로 눈물짓는 그런 존재입니다. 이런 아버지의 깊은 고독을 씻는 힘은 오직 “어린 것들이 간직한 그 깨끗한 피”입니다. 비록 세파에 시달리며 힘든 삶을 사는 아버지이지만, 자신의 소망대로 자식들이 순수하고 올바르게 성장해 주는 것을 확인하는 순간, 고독과 수고로 얼룩진 더러움이 씻김을 받습니다.
이 땅의 아버지들이 가부장적인 태도를 갖고 있고, 때때로 가족들에게 상처를 남긴다는 점을 인정합니다. 그러나 그런 부정적인 면보다는 오히려 삶의 무거운 짐을 짊어진 채 묵묵히 가족들의 울타리가 되어주고, 자식들의 버팀목이 되어주고, 가족들의 그늘이 되어주는 아버지들을 오늘 하루만큼이라도 진지하게 생각 봤으면 합니다.
세상의 모든 아버지들은 뒷동산의 바위와 같은 존재입니다. 몇 년 전 인터넷에 소개되어 크게 화제가 되었던 “아버지는 누구인가?”란 글을 읽어드립니다.

아버지란 기분이 좋을 때 헛기침을 하고, 겁이 날 때 너털웃음을 웃는 사람이다. 아버지란 자기가 기대한 만큼 아들, 딸의 학교 성적이 좋지 않을 때 겉으로는, “괜찮아, 괜찮아” 하지만, 속으로는 몹시 화가 나는 사람이다.
아버지의 마음은 먹칠을 한 유리로 되어 있다. 그래서 잘 깨지기도 하지만, 속은 잘 보이지 않는다. 아버지란 울 장소가 없기에 슬픈 사람이다.
아버지가 아침 식탁에서 성급하게 일어나서 나가는 장소(그 곳을 직장이라고 한다)는, 즐거운 일만 기다리고 있는 곳은 아니다. 아버지는 머리가 셋 달린 용과 싸우러 나간다. 그것은 피로와, 끝없는 일과, 직장 상사에게서 받는 스트레스다.
아버지란 “내가 아버지 노릇을 제대로 하고 있나? 내가 정말 아버지다운가?”하는 자책을 날마다 하는 사람이다. 아버지란 자식을 결혼시킬 때 한없이 울면서도 얼굴에는 웃음을 나타내는 사람이다. 아들, 딸이 밤늦게 돌아올 때에 어머니는 열 번 걱정하는 말을 하지만, 아버지는 열 번 현관을 쳐다본다.
아버지의 최고의 자랑은 자식들이 남의 칭찬을 받을 때이다. 아버지가 가장 꺼림칙하게 생각하는 속담이 있다. 그것은 “가장 좋은 교훈은 손수 모범을 보이는 것이다”라는 속담이다. 아버지는 늘 자식들에게 그럴 듯한 교훈을 하면서도, 실제 자신이 모범을 보이지 못하기 때문에, 이 점에 있어서는 미안하게 생각도 하고 남모르는 콤플렉스도 가지고 있다.
아버지는 이중적인 태도를 곧잘 취한다. 그 이유는 “아들, 딸들이 나를 닮아줬으면”하고 생각하면서도, “나를 닮지 않아줬으면”하는 생각을 동시에 하기 때문이다.
아버지에 대한 인상은 나이에 따라 달라진다. 그러나 그대가 지금 몇 살이든지, 아버지에 대한 현재의 생각이 최종적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일반적으로 나이에 따라 변하는 아버지의 인상은, 4세 때, “아빠는 무엇이나 할 수 있다.” 7세 때, “아빠는 아는 것이 정말 많다.” 8세 때, “아빠와 선생님 중 누가 더 높을까?” 12세 때, “아빠는 모르는 것이 많아.” 14세 때, “우리 아버지요? 세대 차이가 나요.” 25세 때, “아버지를 이해하지만, 기성세대는 갔습니다.” 30세 때, “아버지의 의견도 일리가 있지요.” 40세 때, “여보! 우리가 이 일을 결정하기 전에, 아버지의 의견을 들어봅시다.” 50세 때, “아버님은 훌륭한 분이었어.” 60세 때, “아버님께서 살아 계셨다면, 꼭 조언을 들었을 텐데…” 아버지란 돌아가신 뒤에도, 두고두고 그 말씀이 생각나는 사람이다. 아버지란 돌아가신 後에야 보고 싶은 사람이다.
아버지는 결코 무관심한 사람이 아니다. 아버지가 무관심한 것처럼 보이는 것은, 체면과 자존심과 미안함 같은 것이 어우러져서 그 마음을 쉽게 나타내지 못하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웃음은 어머니의 웃음의 두 배쯤 농도가 진하다. 울음은 열 배쯤 될 것이다. 아들, 딸들은 아버지의 수입이 적은 것이나, 아버지의 지위가 높지 못한 것에 대해 불만이 있지만, 아버지는 그런 마음에 속으로만 운다.
아버지는 가정에서 어른인 체를 해야 하지만, 친한 친구나 맘이 통하는 사람을 만나면 소년이 된다. 아버지는 어머니 앞에서는 기도도 안 하지만, 혼자 차를 운전하면서는 큰소리로 기도도 하고 주문을 외기도 하는 사람이다. 어머니의 가슴은 봄과 여름을 왔다 갔다 하지만, 아버지의 가슴은 가을과 겨울을 오고간다.
아버지! 뒷동산의 바위같은 이름이다. 시골마을의 느티나무 같은 크나큰 이름이다.

세상의 모든 어머니들은 위대한 존재입니다. 어느 소년이 집을 떠나 먼 길을 여행하였습니다. 이 소년에게는 위대한 사람을 만나고 싶다는 꿈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소년은 깊은 숲과 계곡을 헤매고, 사막까지도 돌아다녔습니다. 그러나 수년 동안 찾아다녔지만 위대한 사람은 만날 수가 없었습니다. 소년은 지칠 대로 지쳐 어느 숲에 도달해 풀썩 주저 않았습니다. 그리고 생각했습니다. “위대한 사람은 아마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멀리 더 깊은 곳에 있는 모양이야.” 그러나 그는 그분을 찾지 못한 것에 크게 낙심하는 표정이었습니다.
그때였습니다. 웬 노인이 소년 앞에 나타났습니다. 노인은 흰 수염과 맑은 눈동자와 온화한 모습으로 소년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소년은 “아, 저분이 내가 찾는 사람인가?”하고 생각했습니다. 그때 노인이 소년에게 물었습니다. “얘야, 어딜 그렇게 헤매고 다니느냐?“ 소년이 대답했습니다. “저는 위대한 사람을 만나고 싶어 이렇게 돌아다닌답니다.“ 노인은 소년을 보고 빙그레 웃으면서 말했습니다. “내가 그 사람이 어디 있는지 가르쳐 주마.“ “네?“ 소년은 너무 기뻐서 소리를 질렀습니다. “고맙습니다. 어서 가르쳐 주세요.“ “지금 곧장 너희 집으로 돌아가거라. 그러면 너희 집에서 신발도 신지 않고 한 사람이 뛰어나올 것이다. 그 사람이 바로 네가 찾는 위대한 사람이란다.“
노인은 그렇게 말하고 안개 속으로 사라졌습니다. 소년은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자기 집을 향해 마구 달렸습니다. 이제까지 자기가 그토록 찾고 싶었던 위대한 사람에 대하여 그 노인의 말이 진실일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숨이 턱에 찼지만 쉬지 않고 달렸습니다. 그렇게 며칠을 달리고 나서야 소년은 자기 집에 당도했습니다. 꼭 5년 만이었습니다. 소년은 위대한 사람을 한시바삐 만나고 싶어서 대문을 두들겼습니다. “위대한 사람, 안에 계십니까?“ 소년이 외치자, 누군가가 안에서 후다닥 밖으로 뛰어나왔습니다. 신발도 신지 않은 맨발이었습니다. 그 위대한 사람은 다름 아닌 바로 소년의 어머니였습니다.
예수님의 비유 가운데 탕자의 비유는 하늘 어버이의 사랑과 이 땅의 모든 어버이들의 자식 사랑이 어떠한가를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집나간 탕자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며 하루에도 수없이 큰길가를 서성이거나 먼 길을 내다보는 사람은 어버이였습니다. 아직 거리가 먼데도 돌아오는 아들을 알아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춘 사람은 아버지였습니다. 가산을 탕진하고 돌아온 탕자를 버선발로 뛰어나가 얼싸안으며 “아이고, 내 자식아!” 통곡하며 맞이할 사람도 어머니입니다.
삭개오처럼 나무에 올라가서 내려다보는 것을 한자로 뭐라고 하는지 아십니까? 친할 친(親)자입니다. 부친이나 모친을 말할 때 쓰는 말입니다. 친할 친(親)자는 설 입(立)자에 나무 목(木)자 그리고 볼 견(見)자로 되어 있습니다. 즉 ‘나무에 올라서서 본다’는 뜻입니다. 집나간 자식이 돌아오는가 해서 높은 곳에 올라 먼 길을 내다보는 사람이 어버이입니다. 그리고 돌아온 탕자를 위해서 살찐 송아지를 잡아 잔치를 배설하고, 새 옷을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워주고, 발에는 새신을 신겨준 사람도 어버이였습니다.
어버이는 아낌없이 주는 나무와 같은 존재입니다. 어버이는 스위트홈과 같은 존재이며, 뒷동산에서 놀던 바위와 같은 존재입니다. 이 땅의 어버이들은 위대한 존재입니다. 그들은 그들의 모든 것을 자식을 위해 쏟아 부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마땅히 존경과 사랑을 받아야 하며, 보살핌을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도 마찬가집니다. 하나님은 하늘의 어버이십니다. 신학자 칼 바르트의 말대로, 하나님은 이미 만세 전에 우리 인간에게 하나님의 몫인 축복과 생명을 아낌없이 주기로 예정하셨고, 그 대신 하나님은 우리의 몫인 저주와 죽음을 받기로 예정하신 분입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를 대신해서 죽기까지 사랑하신 분입니다.
이 땅의 어버이들의 진정한 모델은 하나님입니다. 그러므로 어버이들은 어버이의 진정한 모델로써 하나님 아버지를 본받아 실천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자녀된 자들은 어버이들에게 효도와 예절로써 행하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순종과 겸손을 배워 실천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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