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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화의 힘, 믿음과 감사(마 13:3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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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동호
댓글 0 조회 12,413 2005.07.11 0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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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화의 힘, 믿음과 감사(마 13:31-33)

겨자씨와 누룩에 관한 비유는 기독교 신앙이 갖는 변화의 힘을 설명한 말씀입니다. 그리스 신화에 보면, 돌로 빚어졌던 갈라테이아가 피그말리온의 신에 대한 경건한 믿음과 감사 덕분에 사람으로 변하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고대세계에서 여신을 섬기는 신전이 있는 곳이면 십중팔구 성적으로 문란하였습니다. 아세라 목신(木神)이나 아스다롯 여신을 섬겼던 팔레스타인 지역도 그랬고요, 아프로디테 여신을 모셨던 고린도와 키프로스 섬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피그말리온은 키프로스 섬사람으로서 아프로디테 여신을 섬겼던 조각가였습니다. 키프로스는 고린도에 못지않게 성적으로 문란한 도시였기 때문에 피그말리온은 결혼도 하지 않은 채 독신으로 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혼자 산 것은 아니고, 정교한 솜씨로 조각한 눈같이 흰 여인의 석상과 함께 살고 있었습니다. 그는 이 석상을 사랑하고 있었습니다. 아니 석상을 사랑했다기보다는 석상 같은 여성을 아내로 맞기를 염원했다고 말하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그러던 그가 아프로디테 축제 때, 제 몫의 제물을 바치고 나서 제단 앞에서 더듬거리며 기도했습니다. “신들이시여, 기도하면 만사를 순조롭게 하신다는 신들이시여, 바라건대 제 아내가 되게 하소서. 저 처녀의 석상을.....” 하려다가 차마 그럴 용기가 없어서 “석상 같은 여자를.....”, 하고선 기도를 마쳤습니다. 때마침 제단으로 내려와 제물을 흠향하고 있던 아프로디테 여신은 그 기도의 참 뜻을 알아차리고, 그 기도를 알아들었다는 표적으로 제단의 불길이 세 번 하늘로 치솟게 하였습니다. 집으로 돌아온 피그말리온은 예전과 같이 석상을 대상으로 혼자말도하고, 어루만지기도 하였는데, 예전과는 달리 석상 처녀의 몸에서 온기를 느낄 수가 있었습니다. 석상 처녀가 아프로디테의 축복을 받고 생명을 얻어 인간의 몸으로 변해 있었던 것입니다. 피그말리온은 아프로디테 여신에게 감사예배를 드린 후에 여신의 축복을 받으며 돌이 변해서 사람이 된 여성(갈라테이아)과 결혼하여 아기(파포스)를 낳아 잘 살았다는 이야기입니다.
물론 우리는 이 신화가 진실이라고 믿지 않습니다. 그리스인들도 믿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믿어야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피그말리온의 믿음과 감사, 그리고 그의 믿음이 가져다준 변화의 능력만은 믿어야 합니다. 우리들의 믿음과 감사, 그리고 정성과 희망과 기대에 따라서는 돌이 변해서 사람도 되게 할 수 있다는 진실만은 믿어야 합니다.
일본인 작가 시오노 나나미가 쓴 󰡔로마인 이야기󰡕에 의하면, 헬라인이 생각한 '시민권'은 자신들과 피를 공유하는 것이었고, 로마인이 생각한 '시민권'은 자신들과 정신을 공유하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시민권은 어떤 개념일까요? 인류가 다 하나님의 자녀요, 형제와 자매라는 박애정신, 인류의 죄값을 치르신 그리스도의 희생정신, 하나님의 구원의 선물에는 값도 없고, 차별도 없다는 복음정신을 함께 나누는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혈통을 중시했던 헬라제국은 지중해 연안 세계를 250년 정도 지배할 수 있었습니다. 정신의 공유를 중시했던 로마제국은 헬라제국보다 배가 더 긴 500년 정도 지배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박애정신, 희생정신, 복음정신으로 무장한 기독교는 유럽세계를 무려 1,500년간이나 지배할 수 있었습니다.
2,000년 전 기독교가 전래되기 이전까지만 해도 그리스-로마인의 정신세계는 그리스-로마 신화가 지배를 했습니다. 중요한 사물의 이름들이 거의 다 신(神)의 이름으로 불릴 만큼 많았던 신들, 대표적인 신들에게 봉헌된 신전(神殿)들, 그리고 그들의 신심(信心)이 표현된 문화예술작품들이 그러한 사실을 입증해 주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오늘날에 있어서는 그리스-로마 사람들의 98퍼센트가 유일신 야훼 하나님을 믿는 기독교인들이며, 그리스는 동방교회, 로마는 서방교회를 대표하는 기독교의 양대 산맥이란 사실이 놀랍기만 합니다. 작은 키에 벗어진 이마, 매부리코에다 맞닿은 양미간 그리고 벌어진 다리를 가진 시세말로 얼짱이나 몸짱과는 거리가 먼 바울이란 한 사람의 희생적인 전도가 만들어낸 위대한 결과입니다. 바울은 제2차 선교여행 때에 그리스 전역에 걸쳐서, 곧 빌립보, 데살로니가, 베뢰아, 아테네, 고린도에 차례대로 교회들을 세웠습니다. 그리고 제4차 선교여행 때에, 이 때에는 죄수의 몸으로 네로황제의 재판을 받기 위해서 끌러간 신세였고, 몸은 자유롭지 못했지만, 바울은 로마에서 복음을 전파하는데 지장을 받지 않았습니다. 나중에 로마교회는 서방교회로 일컬어지는 가톨릭교회의 중심이 되었고, 그리스는 동방교회로 알려진 그리스정교회로 발전되었습니다. 그리고 1,500년대에는 서방교회인 가톨릭교회로부터 개신교회가 분리되어 나왔습니다.
기독교가 그리스-로마세계에 전파된 초기 300년간은 불법종교였고, 로마의 신들에게 충실하고자 했던 제국의 황제들로부터 10여 차례에 걸쳐서 대대적인 박해를 받았고, 수많은 기독교인들이 소중한 믿음의 가치를 지키기 위해서 목숨을 바쳐야 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위기의 상황에서도 기독교인구는 지속적으로 늘어났고, 결국 313년에는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밀란 칙령을 통해서 기독교를 합법종교로 인정하기에 이르렀으며, 392년에는 테오도시우스에 의해서 로마제국의 국교로 자리매김하게 되었습니다. 기독교 믿음이 갖는 변화의 능력이 얼마나 위대한가를 보여주는 역사적 사건들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경건한 믿음이 우리에게 작은 겨자씨만큼, 작은 누룩덩어리만큼만 있어도 오늘도 기적은 일어납니다. 작은 것이라도 하나님을 믿는 소중한 믿음만 있으면, 돌도 사람으로 변화시킬 수 있고, 위기도 기회로 바꿀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믿음입니다. 알렉산드로스가 칼로써 세계를 정복했듯이 복음으로 세계를 정복하겠다는 바울의 비전과 믿음이 현실로 이뤄졌습니다. 우리들의 믿음도, 우리들의 비전도 현실로 이뤄질 줄을 믿습니다.
󰡔역사의 연구󰡕를 쓴 아놀드 토인비(A. J. Toynbee. 1889∼1975)는 민족이나 국가를 연구의 단위로 삼은 종래의 역사연구방법을 버리고 `문명`을 역사연구의 단위로 삼았습니다. 토인비는 유럽의 여러 국가는 그가 기독교문명이라고 일컬은 하나의 문명 안에서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발전해 왔기 때문에 개별 국가를 따로 떼어 연구해서는 전체적인 역사의 운동을 파악할 수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토인비는 󰡔역사의 연구󰡕에서 지금까지 존재한 인류의 문명을 기독교문명, 인도문명, 중국문명 등 21개로 나누어 고찰하고 문명의 발생과 성장, 쇠퇴와 해체의 과정을 지배하는 보편적인 법칙을 세우려고 하였습니다. 이 방대한 작업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토인비는 역사학자들이 믿을 만한 자료로 취급하지 않는 신화와 성서, 문학 작품 등을 폭넓게 인용하였습니다.
토인비에 따르면, 인간의 문명은 자연환경의 도전에 직면한 인간이 성공적으로 응전을 한 지역에서 발생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문명이 계속해서 성장하고 지속적으로 발전을 하려면 새롭게 부닥치는 도전들에 대해서도 계속해서 성공적으로 응전을 해나가야 했습니다. 그러면 한 문명이 계속되는 새로운 도전들에 성공적으로 응전하면서 성장할 수 있게 하는 힘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요? 토인비는 그 해답이 `창조적 소수자`의 창조성에 있다고 했습니다. ‘창조적 소수자’의 창조성이 문명이 계속해서 발전해가는 힘의 원천이라는 것입니다.
토인비는 사회를 창조성을 지닌 소수자와 그렇지 못한 다수자의 집합으로 나눴는데, 창조적 소수자는 사회의 극히 일부이지만 새로운 도전에 성공적으로 응전하는 길을 제시함으로써 창조성이 없는 다수의 사람들, 곧 대중의 지지를 얻어 그들을 이끈다고 했습니다.
문명을 성장시키는 힘이 창조적 소수자에게 있다면, 그 쇠퇴의 원인도 창조적 소수자에게 있다는 것이 토인비의 생각입니다. 토인비는 창조적 소수자의 창조성에는 반드시 그에 상응하는 업보가 따른다고 보았는데, 창조성의 업보를 그는 ‘네메시스’라고 했습니다. ‘네메시스’는 도전에 대한 응전에 성공한 소수자가 자기의 인격과 제도와 기술을 우상화하는 데서 비롯됩니다.
한 가지 도전에 성공적으로 응전한 창조적 소수자는 다음번의 도전이 앞의 것과 전혀 다른 것인데도 불구하고, 예전에 했던 방식으로 응전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들 곧 창조적 소수자들이 과거에 이룬 성공에 도취되어 자만에 빠지기 때문이란 것입니다. 과거에 이룬 성공에 도취되는 것은 일종의 교만과 우상숭배여서 반드시 재앙과 파멸을 부른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교만과 오만에 빠진 소수자는 창조성을 잃게 되고, 창조자의 역할을 할 수 없을 뿐 아니라, 그가 속한 사회의 권력을 손아귀에 쥐고 새로운 도전에 성공적으로 응전할 수 있는 새로운 창조적 소수자들의 진출을 가로막고 그들을 억압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문명은 해체의 내리막길로 내달리게 된다고 했습니다. 유일신 사상에 도달한 유대인들이 그랬고, 높은 철학사상에 도달한 그리스인들이 그랬고, 르네상스 문명을 이룬 이탈리아인들이 그랬다는 것입니다. 특히 유대인들이 자기들의 천부적 재능으로 얻은 것보다 한층 더 큰 보물인 기독교 복음을 수용하지 못한 경우를 토인비는 그들의 네메시스 곧 창조성의 업보라고 하였고, 그 업보가 1,878년간이란 세월을 남의 나라에서 집시처럼 떠돌게 했던 것입니다. 사람이 합리적이고 귀납적이면 끊임없이 새로운 답을 추구해 나갈 수 있지만, 상대성에 지나치게 기우려지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 결과 상대적인 절대성에 이르게 되어 또 다른 네메시스, 곧 자기 우상화로 인한 업보를 받게 됩니다.
앞에서 우리는 신을 향한 경건한 믿음과 감사가 돌이 변하여 사람이 되게 하였다는 그리스 신화를 말씀드렸는데, 그리스 신화에는 신을 향한 오만과 자만이 사람을 돌이 되게 한 이야기도 소개되고 있습니다.
테바이의 왕비였던 니오베는 오만했습니다. 오만했기 때문에 신들을 가볍게 여기면 무서운 벌을 받는다는 교훈을 본받으려 하지 않았고, 감사예물을 바치지도 않았습니다.
니오베에게는 자랑할만한 것들이 많았던 왕비였습니다. 남편 암피온이 어찌나 수금을 잘 탔던지 수금 소리만으로 돌을 들어 성벽을 쌓았던 왕이었고, 다스리고 있던 왕국도 자랑거리였고, 무엇보다도 아들 일곱, 딸 일곱, 도합 14명이나 되는 자녀들이 자랑거리였습니다.
그 즈음에 예언자 만토가 예언의 권능을 받아 테바이 여자들에게 레토 신과 아폴론 신과 아르테미스 신에게 향을 사르고 경배하라고 외치고 있었습니다. 이에 테바이 여자들은 모두 신전으로 나와서 향을 피우고 기도를 올렸지만, 니오베만큼은 온갖 거드름을 피우며 나타나 예배하는 여자들을 신전에서 내쫓으며 하는 말이, “어찌 내가 레토 신만 못하단 말인가?” 라고 하였습니다. 때가 되면 죽음을 맞이해야 하는 인간은 절대로 신이 될 수 없습니다. 하지만, 니오베는 오만이 지나쳐 자신을 여신으로 착각하였습니다. 그래서 니오베는 ‘신이 혐오하는 인간’이 되고 만 것입니다. 피그말리온은 신들을 믿고 감사예배를 바침으로써 ‘신이 사랑하는 인간’이 되었지만, 니오베는 신들을 모욕함으로써 스스로 화를 자초하였습니다. 레토의 아들이자, 활의 신인 아폴론이 쏜 화살들에 14명의 자녀들이 모두 비참하게 세상을 하직하였고, 남편은 자살하였으며, 참기 어려운 슬픔은 니오베의 몸을 돌로 바꿔놓고 말았습니다. 슬픔과 분노로 일그러진 얼굴을 화살을 쏘는 아폴론을 향한 채, 제발 마지막 남은 딸만은 살려달라며 간청을 하면서, 몸뚱이로는 하나 남은 딸을 치마폭에 숨기고 있는 모습으로 돌이 되고 말았다고 합니다.
물론 우리는 이 신화가 진실이라고 믿지 않습니다. 그리스인들도 믿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믿어야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오만과 자만이야말로 스스로 불행을 불러들이는 어리석은 일이란 것을 말입니다. 공자님은 “하늘에 죄를 지으면 빌 데가 없다”는 말씀을 남겼다고 합니다.
우리는 오늘 추수감사예배로 드리고 있습니다. 추호라도 내게는 하나님께 감사할 이유가 없다는 생각을 하지 말았으면 합니다. 자만과 오만은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는 것들입니다. 조용히 뒤돌아보면, 하나님께 감사해야할 조건들이 아주 많을 것입니다. 나는 우리 성도님들이 피그말리온과 같은 경건한 믿음으로 얻어지는 놀라운 결과들에 대한 감사가 많아지기를 바랍니다. 작은 겨자씨가 자라서 새들이 둥지를 틀만큼 큰 나무가 되는 경험, 작은 누룩덩이가 온 가루반죽을 부풀게 하는 긍정적 변화의 경험, 이런 경험들에 대한 감사가 많아지기를 바랍니다. 이런 경험적인 감사가 값나가는 감사가 아닐까요? 하나님께서 성도님들에게 내년에는 금년보다 더 크고 많은 복을 내려 주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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