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을 통한 하나님의 사랑(요 1:9-18)
본문
예수님을 통한 하나님의 사랑(요 1:9-18)
지난 주 우리는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그 내용이 무엇이었는지 간략하게 정리해보겠습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위험성에도 불구하고 고등한 인간을 만드신 분이며, 당신의 권리와 권한을 제한하는 분이십니다. 인간의 끊임없는 배신과 도전과 모독에도 불구하고, 인간과 인격적인 관계를 원하시며, 저주받아 죽어 마땅한 인간에게 축복과 생명을 주기로 예정하시고, 정작 자신에게는 인간이 받아야 할 저주를 대신 받기로 결정하신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이 하나님께서 당신의 아들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 인간들을 사랑하시고 구원하신 방법들은 참으로 특별합니다. 그 특별한 하나님의 사랑이 예수님을 통해서 어떻게 나타났는지를 몇 가지로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하나님의 사랑은 예수님을 ‘빛’이 되게 하신데서 나타났습니다. 본문 9절은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이 있었다.”고 적고 있습니다. 여기서 빛은 ‘계시의 빛’ 곧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볼 수 있도록 어둠을 밝혀주는 빛을 말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빛이신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알 수 있습니다.
본문 18절은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다.”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사람으로써는 하나님을 볼 수도 없고, 보는 즉시 잿더미로 변해버리기 때문에 봐서도 안 되지만, 아버지 품속에 계신 외아들 예수님이란 거울을 통해서 보면 볼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리스 신화에 보면, 왜 사람들이 제우스를 볼 수가 없고, 봐서도 안 되는가를 설명하는 에피소드가 있습니다. 사람들이 제우스를 보게 되는 경우는 제우스가 사람이나 짐승으로 변신을 했을 때뿐입니다. 이 변신, 곧 하나님의 변신을 성서와 신학에서는 계시의 모습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테바이라는 왕국에 세멜레라는 공주가 있었습니다. 바람둥이자 변신가인 제우스는 세멜레를 찾아가 사랑을 나눴고, 그 당연한 결과로 세멜레는 임신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만 세멜레는 제우스의 부인인 헤라의 꼬드김에 빠져서, 제우스에게 소원을 빌었고, 제우스는 스튁스 강에 맹세까지 하며 소원을 들어주겠다고 했습니다. 세멜레의 소원이란 “당신이 만일 제우스라면, 헤라 여신 앞에 나타날 때처럼 벼락을 찬 그 영광스런 모습을 나에게도 보여 주세요.”라는 것이었습니다. 음부의 강인 스튁스에 대고 한 맹세는 제우스 자신도 취소할 수 없는 것이어서 제우스는 눈물을 머금고 가장 약한 벼락만을 차고 인간인 세멜레에게 본 모습을 보이게 되었고, 불쌍한 세멜레는 오륌포스의 최고신이 내뿜는 그 어마어마한 광체를 견디지 못하고 새카맣게 타 죽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신화에서처럼 인간은 최고신인 하나님의 본 모습을 육안으로 볼 수가 없습니다. 보는 것 자체가 불행한 일입니다. 그렇다고 아주 못 보는 것은 아니고, 변신된 모습을 통해서 볼 수가 있습니다. 아까도 말씀드렸듯이 이 변신을 성서와 신학에서는 ‘계시’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우리 인간은 계시의 모습을 통해서 하나님을 볼 수가 있는데, 그 대표적인 계시의 모습이 예수님인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오해하지 말아야할 것은 계시의 모습이라고 해서 겉모습 곧 어떤 형태나 형상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사랑이나 공의와 같은 속성이나 성품 또는 경륜이나 섭리와 같은 하나님의 뜻을 말하는 것입니다. 변신이 참 모습이 아니듯이, 계시도 참 모습이 아니기 때문에, 예수님이 하나님의 계시의 모습이라고 해서 하나님이 예수님의 얼굴처럼 생겼다고 생각하면 곤란합니다. 하나님은 육체나 형체가 없으신 영이십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빛이라고 하는 것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속성이나 성품 또는 경륜이나 섭리와 같은 하나님의 뜻을 볼 수 있게 해줄 뿐 아니라, 그 뜻을 깨닫고 영접하면 영생을 얻을 수 있다고 해서 생명의 빛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태양빛이 지구상에 살고 있는 모든 생명체에게 생명의 근원이 된다는 것을 누구나 다 알고 계실 줄 압니다. 이 태양빛은 하나님과 예수님과 우리 인간들과의 관계를 가장 잘 설명해 줍니다. 태양은 하나이듯이 하나님도 한분이십니다. 태양에는 광선과 빛과 열이 있듯이, 하나님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인격체가 각각 있습니다. 광선이 눈에 보이지 않듯이 하나님도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보이지 않던 광선이 빛으로 환하게 드러나는 것은 광선이 물체에 부딪쳐 반사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마찬가지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환하게 보이는 것은 하나님이 예수님을 통해서 반사될 때입니다. 빛이 물체에 닿아 굴절할 때 열을 발산하듯이, 하나님과 예수님이 우리 가운데서 계실 때에 성령의 따스함을 느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보게 해주는 거울이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읽을 수 있게 해주는 편지입니다. 예수님은 우리 인간들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경륜과 섭리를 총체적으로 보고 듣고 느끼고 맛보고 경험하고 누리게 해주는 생명의 빛이십니다.
둘째, 하나님의 사랑은 예수님을 인간이 되게 하신데서 나타났습니다. 본문 14절에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고 하였습니다. 한분 하나님이 아들 독생자의 인격으로 인간이 되어 이 땅에 오신 것은 우리 인류를 죄에서 구원하기 위한 하나님의 지극한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이 사랑은 첫째로 자기 포기의 사랑이고, 둘째로 낮은 자들과 눈높이를 맞추는 자기 동일시의 사랑입니다. 이 자기 포기와 자기 동일시의 사랑을 가장 잘 표현해주고 있는 성구가 빌립보서 2장 6-8절의 말씀입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본래 말씀으로 하나님과 함께 계셨던 분이시고, 하나님의 본체였지만, 인간으로 이 땅에 오셔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게 해주셨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분이 우리에게 실천을 통해서 보여준 대표적인 삶은 소외당하고 멸시당한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가 되어 주신 것이고, 병자들을 고치신 것이며, 약자인 민중의 편을 드셨으며(마 11:19), 인류의 속죄와 구원을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것입니다.
셋째, 하나님의 사랑은 예수님을 부활의 첫 열매가 되게 하신데서 나타났습니다. 하나님은 싸늘한 시체로 무덤에 묻힌 예수님을 살리셨습니다. 고린도전서 15장 20절에서 이 예수님의 부활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라고 하였습니다. 농장주의 과원에 수백 그루의 무화과나무가 심겨있는데, 때가 되어 열매가 열리고 익기 시작했습니다. 농장주가 수확을 위해서 손을 뻗어 최초로 가장 잘 익은 열매를 따서 맛을 보았습니다. 달고 맛이 좋았습니다. 이제 본격적으로 수확을 해도 좋겠다는 확신이 섰습니다. 농장주가 따서 맛본 이 열매가 바로 첫 열매입니다. 첫 열매를 딴 후에는 줄줄이 이어서 나머지 열매들을 수확하여 들이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예수님을 부활의 첫 열매가 되게 하셨습니다. 그분이 부활하셨기 때문에 이제 남은 일은 하나님을 믿고 죽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부활시키는 일뿐입니다. 성경은 그 때가 바로 예수님께서 이 땅에 다시 오실 때라고 말합니다.
영국 옥스퍼드 대학의 종교 철학자 리처드 스윈번교수는 지난 2005년 7월 18일 호주 멜버른에 있는 호주 가톨릭대학에서 가진 공개강연에서 “부활의 문제는 신의 존재를 전제하지 않고는 판단할 수 없다”고 말한 뒤 수학공식을 통해 예수님 이야기를 조명해봤을 때 97퍼센트가 정확하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호주 언론들에 따르면 그는 “우선 신의 존재를 전제하고 그 다음은 신이 인간의 모습으로 나타날 수 있다는 사실을 전제하고, 인간의 모습으로 나타날 수 있다면 신이 예수가 살았던 것과 같은 삶을 살 수 있다는 사실을 전제해야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신약학자들은 예수부활에 대한 증거가 사복음서에 나온 증인들밖에 없다고 주장한다고 지적한 뒤 “이는 증거의 5퍼센트밖에 안 된다”며, 그러나 수학을 통해서 보면 확률은 97퍼센트에 달한다고 말했습니다.
넷째, 하나님의 사랑은 예수님을 맏아들이 되게 하신데서 나타났습니다. 예수님은 본디 하나님의 외아들이었으나 이제는 맏아들이 되셨습니다. 본디 하나님께는 외아들만 있었으나 이제는 많은 자녀들을 두셨습니다. 그 이유는 요한복음 1장 12절의 말씀처럼 하나님께서 외아들 예수님을 믿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이 특별한 은혜로 말미암아 인간으로 태어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유일신이신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게 된 것입니다. 이 사실이 얼마나 놀랍습니까? 요한일서 4장 9절의 말씀처럼,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바” 된 것은 하나님이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고 하신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사랑도 하나님의 사랑에 못지않고, 예수님의 희생도 하나님의 희생에 못지않습니다. 외아들의 신분을 포기하고 맏아들이 된다는 것은 재산권은 물론이고 기타 여러 가지 특권을 다른 많은 형제들과 함께 공유하고 나눠야 되는 큰 희생이 따른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아버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인류의 속죄와 구원을 위해서 또 그들을 대신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을 뿐 아니라, 외아들이 누릴 수 있는 많은 특권까지도 포기하셨습니다. 이런 일들이 얼마나 하기 어려운 일인가는 최근에 불거진 두산그룹의 형제들 간의 싸움과 지난해에 있었던 현재그룹의 가족 간의 싸움, 그리고 TV드라마 영웅시대에서도 묘사됐던 삼성의 창업주인 고 이병철 씨의 세 아들간의 알력을 통해서도 잘 드러난 부분입니다. 한국경제의 중추역할을 해온 재계의 주요 그룹들 중 상당수가 가족들의 경영권 분쟁이란 아픈 역사를 겪었다는 것이 매스컴의 보도내용이고, 이러한 경영권 또는 재산권 분쟁을 일컬어 ‘왕자의 난’ 또는 ‘숙부의 난’과 같은 말로 부르고 있습니다. 문제는 이와 같은 형제간 가족간 싸움이 대 그룹에서만 벌어지는 일이 아니고, 평범한 가정들에서도 다반사로 일어나는 일이란 것입니다.
이런 사례들에 비춰볼 때, 우리 예수님의 희생이 얼마나 하기 어려운 것이고, 얼마나 가치 있는 것인가를 깨닫게 해줍니다. 로마서 8장 29절은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이 맏아들이 되셨다는 말씀 속에는 예수님께서 소극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수용하셨다는 의미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오히려 더 적극적으로 주님을 따르는 자들에게 그들이 하나님의 자녀란 사실을 주저 없이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주기도문의 첫 소절이 무엇인지 아시지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마 6:9)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아버지!”하고 부르도록 가르치셨습니다. 어디 이뿐입니까? 예수님은 요한복음 20장 17절에서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이란 엄청난 선언을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님의 아버지가 우리의 아버지가 되고, 하나님의 외아들 예수님의 하나님이 우리의 하나님이 된다는 대 선언인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 선언은 역대 유명 인사들이 말한 그 어떤 명언보다도 위대한 것입니다. 본문 요한복음 1장 12절은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 는 “양자의 영”을 받아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된 것입니다(롬 8:15). 로마서 8장 16절은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신다.”고 하였습니다. 또 에베소서 1장 5절에서는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다.”고 하였습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을 “아버지!”하고 부를 수 있는 특권이 있다는 것, 철학자(Cynicist) 디오게네스가 ‘개 같은 인생’(Cynicos Bios)이란 말을 했듯이, 우리 같이 천한 인간이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특권이 있다는 것, 주기도문에서 볼 수 있듯이, 우리 같이 죄 많은 인간이 하나님을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하고 부를 수 있는 특권이 있다는 것, 이것이야말로 가장 큰 은혜 중의 은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표현된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성도들의 가슴 속에서 뜨겁게 역사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지난 주 우리는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그 내용이 무엇이었는지 간략하게 정리해보겠습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위험성에도 불구하고 고등한 인간을 만드신 분이며, 당신의 권리와 권한을 제한하는 분이십니다. 인간의 끊임없는 배신과 도전과 모독에도 불구하고, 인간과 인격적인 관계를 원하시며, 저주받아 죽어 마땅한 인간에게 축복과 생명을 주기로 예정하시고, 정작 자신에게는 인간이 받아야 할 저주를 대신 받기로 결정하신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이 하나님께서 당신의 아들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 인간들을 사랑하시고 구원하신 방법들은 참으로 특별합니다. 그 특별한 하나님의 사랑이 예수님을 통해서 어떻게 나타났는지를 몇 가지로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하나님의 사랑은 예수님을 ‘빛’이 되게 하신데서 나타났습니다. 본문 9절은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이 있었다.”고 적고 있습니다. 여기서 빛은 ‘계시의 빛’ 곧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볼 수 있도록 어둠을 밝혀주는 빛을 말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빛이신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알 수 있습니다.
본문 18절은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다.”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사람으로써는 하나님을 볼 수도 없고, 보는 즉시 잿더미로 변해버리기 때문에 봐서도 안 되지만, 아버지 품속에 계신 외아들 예수님이란 거울을 통해서 보면 볼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리스 신화에 보면, 왜 사람들이 제우스를 볼 수가 없고, 봐서도 안 되는가를 설명하는 에피소드가 있습니다. 사람들이 제우스를 보게 되는 경우는 제우스가 사람이나 짐승으로 변신을 했을 때뿐입니다. 이 변신, 곧 하나님의 변신을 성서와 신학에서는 계시의 모습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테바이라는 왕국에 세멜레라는 공주가 있었습니다. 바람둥이자 변신가인 제우스는 세멜레를 찾아가 사랑을 나눴고, 그 당연한 결과로 세멜레는 임신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만 세멜레는 제우스의 부인인 헤라의 꼬드김에 빠져서, 제우스에게 소원을 빌었고, 제우스는 스튁스 강에 맹세까지 하며 소원을 들어주겠다고 했습니다. 세멜레의 소원이란 “당신이 만일 제우스라면, 헤라 여신 앞에 나타날 때처럼 벼락을 찬 그 영광스런 모습을 나에게도 보여 주세요.”라는 것이었습니다. 음부의 강인 스튁스에 대고 한 맹세는 제우스 자신도 취소할 수 없는 것이어서 제우스는 눈물을 머금고 가장 약한 벼락만을 차고 인간인 세멜레에게 본 모습을 보이게 되었고, 불쌍한 세멜레는 오륌포스의 최고신이 내뿜는 그 어마어마한 광체를 견디지 못하고 새카맣게 타 죽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신화에서처럼 인간은 최고신인 하나님의 본 모습을 육안으로 볼 수가 없습니다. 보는 것 자체가 불행한 일입니다. 그렇다고 아주 못 보는 것은 아니고, 변신된 모습을 통해서 볼 수가 있습니다. 아까도 말씀드렸듯이 이 변신을 성서와 신학에서는 ‘계시’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우리 인간은 계시의 모습을 통해서 하나님을 볼 수가 있는데, 그 대표적인 계시의 모습이 예수님인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오해하지 말아야할 것은 계시의 모습이라고 해서 겉모습 곧 어떤 형태나 형상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사랑이나 공의와 같은 속성이나 성품 또는 경륜이나 섭리와 같은 하나님의 뜻을 말하는 것입니다. 변신이 참 모습이 아니듯이, 계시도 참 모습이 아니기 때문에, 예수님이 하나님의 계시의 모습이라고 해서 하나님이 예수님의 얼굴처럼 생겼다고 생각하면 곤란합니다. 하나님은 육체나 형체가 없으신 영이십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빛이라고 하는 것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속성이나 성품 또는 경륜이나 섭리와 같은 하나님의 뜻을 볼 수 있게 해줄 뿐 아니라, 그 뜻을 깨닫고 영접하면 영생을 얻을 수 있다고 해서 생명의 빛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태양빛이 지구상에 살고 있는 모든 생명체에게 생명의 근원이 된다는 것을 누구나 다 알고 계실 줄 압니다. 이 태양빛은 하나님과 예수님과 우리 인간들과의 관계를 가장 잘 설명해 줍니다. 태양은 하나이듯이 하나님도 한분이십니다. 태양에는 광선과 빛과 열이 있듯이, 하나님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인격체가 각각 있습니다. 광선이 눈에 보이지 않듯이 하나님도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보이지 않던 광선이 빛으로 환하게 드러나는 것은 광선이 물체에 부딪쳐 반사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마찬가지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환하게 보이는 것은 하나님이 예수님을 통해서 반사될 때입니다. 빛이 물체에 닿아 굴절할 때 열을 발산하듯이, 하나님과 예수님이 우리 가운데서 계실 때에 성령의 따스함을 느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보게 해주는 거울이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읽을 수 있게 해주는 편지입니다. 예수님은 우리 인간들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경륜과 섭리를 총체적으로 보고 듣고 느끼고 맛보고 경험하고 누리게 해주는 생명의 빛이십니다.
둘째, 하나님의 사랑은 예수님을 인간이 되게 하신데서 나타났습니다. 본문 14절에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고 하였습니다. 한분 하나님이 아들 독생자의 인격으로 인간이 되어 이 땅에 오신 것은 우리 인류를 죄에서 구원하기 위한 하나님의 지극한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이 사랑은 첫째로 자기 포기의 사랑이고, 둘째로 낮은 자들과 눈높이를 맞추는 자기 동일시의 사랑입니다. 이 자기 포기와 자기 동일시의 사랑을 가장 잘 표현해주고 있는 성구가 빌립보서 2장 6-8절의 말씀입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본래 말씀으로 하나님과 함께 계셨던 분이시고, 하나님의 본체였지만, 인간으로 이 땅에 오셔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게 해주셨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분이 우리에게 실천을 통해서 보여준 대표적인 삶은 소외당하고 멸시당한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가 되어 주신 것이고, 병자들을 고치신 것이며, 약자인 민중의 편을 드셨으며(마 11:19), 인류의 속죄와 구원을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것입니다.
셋째, 하나님의 사랑은 예수님을 부활의 첫 열매가 되게 하신데서 나타났습니다. 하나님은 싸늘한 시체로 무덤에 묻힌 예수님을 살리셨습니다. 고린도전서 15장 20절에서 이 예수님의 부활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라고 하였습니다. 농장주의 과원에 수백 그루의 무화과나무가 심겨있는데, 때가 되어 열매가 열리고 익기 시작했습니다. 농장주가 수확을 위해서 손을 뻗어 최초로 가장 잘 익은 열매를 따서 맛을 보았습니다. 달고 맛이 좋았습니다. 이제 본격적으로 수확을 해도 좋겠다는 확신이 섰습니다. 농장주가 따서 맛본 이 열매가 바로 첫 열매입니다. 첫 열매를 딴 후에는 줄줄이 이어서 나머지 열매들을 수확하여 들이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예수님을 부활의 첫 열매가 되게 하셨습니다. 그분이 부활하셨기 때문에 이제 남은 일은 하나님을 믿고 죽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부활시키는 일뿐입니다. 성경은 그 때가 바로 예수님께서 이 땅에 다시 오실 때라고 말합니다.
영국 옥스퍼드 대학의 종교 철학자 리처드 스윈번교수는 지난 2005년 7월 18일 호주 멜버른에 있는 호주 가톨릭대학에서 가진 공개강연에서 “부활의 문제는 신의 존재를 전제하지 않고는 판단할 수 없다”고 말한 뒤 수학공식을 통해 예수님 이야기를 조명해봤을 때 97퍼센트가 정확하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호주 언론들에 따르면 그는 “우선 신의 존재를 전제하고 그 다음은 신이 인간의 모습으로 나타날 수 있다는 사실을 전제하고, 인간의 모습으로 나타날 수 있다면 신이 예수가 살았던 것과 같은 삶을 살 수 있다는 사실을 전제해야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신약학자들은 예수부활에 대한 증거가 사복음서에 나온 증인들밖에 없다고 주장한다고 지적한 뒤 “이는 증거의 5퍼센트밖에 안 된다”며, 그러나 수학을 통해서 보면 확률은 97퍼센트에 달한다고 말했습니다.
넷째, 하나님의 사랑은 예수님을 맏아들이 되게 하신데서 나타났습니다. 예수님은 본디 하나님의 외아들이었으나 이제는 맏아들이 되셨습니다. 본디 하나님께는 외아들만 있었으나 이제는 많은 자녀들을 두셨습니다. 그 이유는 요한복음 1장 12절의 말씀처럼 하나님께서 외아들 예수님을 믿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이 특별한 은혜로 말미암아 인간으로 태어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유일신이신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게 된 것입니다. 이 사실이 얼마나 놀랍습니까? 요한일서 4장 9절의 말씀처럼,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바” 된 것은 하나님이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고 하신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사랑도 하나님의 사랑에 못지않고, 예수님의 희생도 하나님의 희생에 못지않습니다. 외아들의 신분을 포기하고 맏아들이 된다는 것은 재산권은 물론이고 기타 여러 가지 특권을 다른 많은 형제들과 함께 공유하고 나눠야 되는 큰 희생이 따른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아버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인류의 속죄와 구원을 위해서 또 그들을 대신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을 뿐 아니라, 외아들이 누릴 수 있는 많은 특권까지도 포기하셨습니다. 이런 일들이 얼마나 하기 어려운 일인가는 최근에 불거진 두산그룹의 형제들 간의 싸움과 지난해에 있었던 현재그룹의 가족 간의 싸움, 그리고 TV드라마 영웅시대에서도 묘사됐던 삼성의 창업주인 고 이병철 씨의 세 아들간의 알력을 통해서도 잘 드러난 부분입니다. 한국경제의 중추역할을 해온 재계의 주요 그룹들 중 상당수가 가족들의 경영권 분쟁이란 아픈 역사를 겪었다는 것이 매스컴의 보도내용이고, 이러한 경영권 또는 재산권 분쟁을 일컬어 ‘왕자의 난’ 또는 ‘숙부의 난’과 같은 말로 부르고 있습니다. 문제는 이와 같은 형제간 가족간 싸움이 대 그룹에서만 벌어지는 일이 아니고, 평범한 가정들에서도 다반사로 일어나는 일이란 것입니다.
이런 사례들에 비춰볼 때, 우리 예수님의 희생이 얼마나 하기 어려운 것이고, 얼마나 가치 있는 것인가를 깨닫게 해줍니다. 로마서 8장 29절은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이 맏아들이 되셨다는 말씀 속에는 예수님께서 소극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수용하셨다는 의미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오히려 더 적극적으로 주님을 따르는 자들에게 그들이 하나님의 자녀란 사실을 주저 없이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주기도문의 첫 소절이 무엇인지 아시지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마 6:9)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아버지!”하고 부르도록 가르치셨습니다. 어디 이뿐입니까? 예수님은 요한복음 20장 17절에서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이란 엄청난 선언을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님의 아버지가 우리의 아버지가 되고, 하나님의 외아들 예수님의 하나님이 우리의 하나님이 된다는 대 선언인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 선언은 역대 유명 인사들이 말한 그 어떤 명언보다도 위대한 것입니다. 본문 요한복음 1장 12절은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 는 “양자의 영”을 받아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된 것입니다(롬 8:15). 로마서 8장 16절은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신다.”고 하였습니다. 또 에베소서 1장 5절에서는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다.”고 하였습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을 “아버지!”하고 부를 수 있는 특권이 있다는 것, 철학자(Cynicist) 디오게네스가 ‘개 같은 인생’(Cynicos Bios)이란 말을 했듯이, 우리 같이 천한 인간이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특권이 있다는 것, 주기도문에서 볼 수 있듯이, 우리 같이 죄 많은 인간이 하나님을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하고 부를 수 있는 특권이 있다는 것, 이것이야말로 가장 큰 은혜 중의 은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표현된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성도들의 가슴 속에서 뜨겁게 역사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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