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과생명교회 주일설교

KCCS Digital Archive의 자료와 게시판을 분류별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설교자료 빛과생명교회 주일설교 KCCS Digital Archive

복음에 대한 바울의 인식(엡 3:1-9)

페이지 정보

profile_image
조동호
댓글 0 조회 12,632 2005.08.27 11:17

본문

복음에 대한 바울의 인식(엡 3:1-9)

복음이란 무엇인가? 왜 값진 것이며 소중한 것인가? 무엇 때문에 우리가 그것에 목숨을 걸어야 하는가? 이런 물음에 대한 해답을 사도 바울을 통해서 찾아보려고 합니다.
첫째, 복음이란 무엇인가?
다 아시다시피 ‘복음’이란 'Good News' 곧 ‘기쁜 소식’이란 뜻입니다. 그러면 무엇이 기쁜 소식이냐 라는 물음이 필요하겠지요? 그 기쁜 소식이란 ‘가장 값진 선물’, 곧 여러분과 나에게 주실 하나님의 선물에 관한 것입니다. 이 선물은 우리 모두를 어둠에서 빛에로 인도하시고, 죽음에서 생명에로 인도하시기 위해서 하나님이 예수님의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깨달음에 의하면, 하나님이 예수님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것은 우리 이방인들을 위해서, 성서의 다른 표현에 따르면,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이 아닌 외국인이었던 우리들을 자기 백성으로 삼으시기 위해서 오셨다는 것입니다. 본문 6절 말씀대로 우리 “이방인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후사가 되고, 함께 지체가 되고, 함께 약속에 참예하는 자가 되게 하여”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을” 나눠받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사실이 우리 이방인에게는 복음의 기쁜 소식이요, 만세 전부터 감추어졌던 하나님의 비밀이란 것입니다.
유대나라에 메시아가 오실 것이란 예언은 오래 전부터 선지자들의 입을 통해서 있어왔던 하나님의 약속이지만(롬 1:2), 이 약속이 유대인뿐만 아니라, 이방인을 위한 것이었다는 사실을 오랫동안 구약성서를 연구해왔던 유대인들은 정작 알지 못한 만세 전부터 감춰져 있던 비밀이란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복음이 유대인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이방인을 위한 것도 된다는 사실을 유대인들이 까맣게 몰랐던 하나님의 비밀이요, 그리스도의 비밀이란 것이 복음에 대한 사도 바울의 특별한 인식입니다.
사복음서와 사도행전을 보면, 심지어 예수님의 제자들조차도 이런 사실을 전혀 눈치 채지 못하고 있습니다. 바울과 바나바 그리고 빌립과 같은 이방나라 출신의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이 아니었다면, 우리 모두를 어둠에서 빛에로 인도하시고, 죽음에서 생명에로 인도하시기 위해서 하나님이 예수님의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셨고, 또 우리 “이방인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후사가 되고, 함께 지체가 되고, 함께 약속에 참예하는 자가 되게 하여”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을” 나눠받게 되었다는 이 엄청난 복음의 기쁜 소식이 오늘날 우리의 귀에까지 들리지 않았을는지도 모릅니다. 사도들의 대표자격인 베드로가 예루살렘에서 100여 킬로미터 떨어진 이스라엘 서해안 가이사랴에 주둔한 로마군대의 백인대장 고넬료의 가정에 이 복음을 전한 것은 예루살렘에 최초의 교회가 세워진지 무려 10여년이 지난 다음이었습니다. 그것도 하나님의 특별한 지시를 받고 가지 않을 수 없어서 전했던 것인데, 베드로가 예루살렘으로 되돌아갔을 때에 유대인들이 베드로의 이 일을 힐난하였다고 했습니다(행 11:2). 베드로가 고넬료의 가정에 도착해서 모인 무리에게 행한 첫 인사말도 “유대인으로서 이방인을 교제하는 것과 가까이 하는 것이 위법인 줄은 너희도 알거니와”(행 1028-29)라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유대인들의 분위기에서 우리는 왜 기독교 복음이 유대인들에게는 오랫동안 감춰져 있던 비밀일 수밖에 없었는지를 읽을 수 있습니다.
적절한 민족주의와 선민의식은 좋은 약이 될 수도 있지만, 지나친 민족주의와 선민의식은 독약이 될 수도 있습니다. 유대인들의 지나친 선민의식은 그들을 어두운 동굴에 묶어두는 족쇄였던 것이고, 그들을 소경과 귀머거리로 만드는 치명적인 질병이었던 것입니다. 오늘날까지도 많은 수의 유대인들은 신약성서의 이 복음의 기쁜 소식을 외면하고 있어서 그들에게는 여전히 기독교 복음이 하나님의 비밀로 남아있게 되는 것입니다.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를 보면, “사람은 자기가 보고 싶은 현실만 본다”는 말을 율리우스 시저가 했다고 적고 있습니다. 이 말을 좀 빌리면, 유대인들은 자기들이 보고 싶은 현실만 보았기 때문에 하나님의 깊은 뜻과 경륜을 알지 못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메시아께서 오시는 것이 유대인들의 구원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열방의 민족들 곧 모든 이방인들의 구원을 위한 원대한 하나님의 계획 속에 있었다는 사실을 유대인들은 보지 못했다는 것이고, 그들이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했기 때문에 이 사실이 하나님의 비밀이요 그리스도의 비밀이었지, 사실은 전혀 비밀이 될 수도 없고, 되어서도 안 될 비밀이었던 것입니다.
서남동 교수의 󰡔민중신학의 탐구󰡕란 책을 보면, 시중에 나도는 유언비어는 민중의 신음소리요, 민심은 곧 천심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천심을 누구만 모릅니까? 독재자만 모르고, 지배자만 모르고, 가진 자만 모릅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들의 눈은 보고 싶은 것에만 열리는 병든 눈이고,  듣고 싶은 것에만 열리는 병든 귀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사람이 다 아는 비밀이란 말이 있지요? 남들 다 아는 사실을 자기만 모르는 것, 이런 현상을 두고 사도 바울은 이방인 구원에 대한 하나님의 경륜을 하나님의 비밀 또는 그리스도의 비밀이란 말로 표현했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하나님의 이 깊은 뜻을 유대인들은 아주 오랫동안, 그러니까, 예수님이 오시고 천국복음이 선포 되고, 그리고 교회가 세워진 지금까지도 모르고 있었다는 뜻이 될 수도 있겠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사도 바울의 눈은 열린 눈이요, 사도 바울의 귀는 뚫린 귀였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지금도 그렇습니다. 눈이 열리고, 귀가 뚫리지 않고서는 예수님이 누구인지, 복음이 무엇인지를 알 수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기독교 복음을 만세 전부터 감춰져 있던 하나님의 비밀로 깨달았고, 일단 그것을 깨달은 후에는 자기 자신을 그 비밀을 맡아 전해야할 하나님의 일군으로 간주하였습니다. 로마서 16장 25-26절을 보면, “나의 복음과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함은 영세 전부터 감추어졌다가 이제는 나타내신바 되었으며”라고 했고, 에베소서 3장 9절은 “영원부터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속에 감추어졌던 비밀의 경륜이 어떠한 것을 드러내게 하려 하심이라”고 했으며, 골로새서 1장 26-27절은 “이 비밀은 만세와 만대로부터 옴으로 감추어졌던 것인데 이제는 그의 성도들에게 나타났고, 하나님이 그들로 하여금 이 비밀의 영광이 이방인 가운데 어떻게 풍성한 것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이 비밀은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시니, 곧 영광의 소망이니라.”고 했고, 스스로 이 비밀을 맡은 그리스도의 일꾼으로 간주하였으며(고전 4:1), 골로새교회와 에베소교회 성도들에게 부탁하기를,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되, 하나님이 전도할 문을 우리에게 열어 주사, 그리스도의 비밀을 말하게 하시기를 구하라. 내가 이것을 인하여 매임을 당하였노라. 그리하면 내가 마땅히 할 말로써 이 비밀을 나타내리라”(골 4:3-4, 엡 6:19)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복음을 담대하게 전하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기독교 복음에 대한 이해가 부족해서일까요? 아니면, 깨달음의 강도가 약해서일까요? 사도 바울은 기독교 복음이 무엇인지, 그 복음에 감추어져 있던 하나님의 비밀과 경륜이 무엇인가를 안후에는 주저 없이 그 복음을 전하고 밝히는 일에 일생을 바쳤습니다. 우리가 그렇게 못하는 이유가 있다면,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우리 각자에게 자문해 보았으면 합니다.
둘째, 기독교 복음이 왜 값진 것이며 소중한 것인가? 무엇 때문에 우리가 그것에 목숨을 걸어야 하는가?
사도 바울은 이 물음에 다음과 같은 몇 가지 답을 주고 있습니다. 첫째는 기독교 복음이 모든 믿는 자들에게 구원을 주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이기 때문에 값진 것이고 소중한 것이며 그것에 목숨을 걸만한 이유가 된다는 것입니다. 로마서 1장 16절에서 바울은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로다”고 하였습니다.
목숨보다 귀한 것은 많지 않습니다. 그 목숨을 살리는 구원보다 귀한 것은 많지 않습니다. 명예나 권세나 재물보다 귀한 것이 목숨입니다. 그러나 기독교 복음은 일시적인 생명연장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영원한 생명을 보장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목숨보다 더 귀한 것입니다. 일시적인 목숨을 걸어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기에 목숨을 걸만한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둘째는 기독교 복음은 보배이기 때문에 값진 것이고 소중한 것이며 그것에 목숨을 걸만한 이유가 된다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4장 7절에서 바울은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고 하였습니다. 앞에서도 말씀드렸듯이 기독교 복음은 우리를 어둠에서 빛에로 인도하시고, 죽음에서 생명에로 인도하시기 위해서 하나님이 예수님의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것과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이 아닌 외국인이었던 우리들을 자기 백성으로 삼으시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후사가 되고, 함께 지체가 되고, 함께 약속에 참예하는 자가 되게 하여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을 나눠받게 한다는 기쁜 소식입니다. 그러므로 이 기쁜 소식은 보배 중에 보배요, 값으로 매길 수 없는 무한 가치인 것입니다. 목숨을 걸어 그것을 획득할 가치가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마태복음 13장의 천국비유에서 말씀하시기를, 기독교 복음은 마치 밭에 감춰진 보화와 같아서 이것을 발견한 사람이 숨겨두고 돌아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사듯이, 또 값진 진주를 만난 상인이 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진주를 사듯이 기독교 복음에는 목숨을 걸만한 가치가 있다고 하셨습니다.
지난주 성만찬 시간에 󰡔악타 마르티룸󰡕(Acta Martyrum)에 실린 막시밀리아누스에 관해서 말씀드렸습니다. 󰡔순교자 행전󰡕이란 뜻을 가진 이 책에 실린 막시밀리아누스는 로마제국의 황제 디오클레티아누스가 기독교를 본격적으로 탄압하기 8년 전인 295년에 북아프리카 누미디아 속주도시인 테베스테에 거주하는 세무공무원이었습니다. 병사였던 아버지를 두었기 때문에 22세가 된 막시밀리아누스는 병영세습제로 인해서 신체검사장인 병영에 나가 검사관인 군단장겸 총독인 디오에게 검사를 받게 되었는데, 키 150센티미터밖에 되지 않는 단신의 막시밀리아누스에게 입대하라는 합격통지를 내렸습니다. 그러나 막시밀리아누스는 기독교인이기 때문에 입대할 수 없다며 죽음을 무릅쓰고 거부하다가 즉결심판을 받아 참수형에 처해졌습니다. 그가 하나밖에 없는 귀한 목숨을 걸었던 것, 그가 자기 목숨을 걸어 지키려했던 것은 그의 기독교 신념이었습니다. 막시밀리아누스는 디오 총독에게 말했습니다. “저는 이 세상군대의 병사가 아니라 하나님군대의 병사입니다.... 제 영혼과 저를 부르신 분은 그리스도이십니다.... 저는 이미 그리스도의 병사배지를 가진 몸입니다.... 저는 기독교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을 받은 저는 목에 구리조각(황제를 상징하는 그림이 새겨진?)을 걸고 다닐 수 없습니다. 당신이 모르는 신의 아들, 인간을 죄로부터 구원하기 위해 하나님이 지상에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 인생의 인도자인 그분을 따르는 것만이 저의 사명입니다.... 몸은 죽어도 제 영혼은 죽지 않습니다. 이미 제 주님의 병사가 된 이상, 다른 군대의 병사가 될 수 없습니다.”
이 젊은 청년이 목숨을 버려 지키려했던 것이 무엇입니까? 무엇이 그의 목숨보다 더 소중하고 가치가 있었던 것입니까? 그 가치를 발견하고, 그 가치를 얻기 위해서 목숨을 바칠 수 있는 사람, 그가 바로 눈이 열리고 귀가 뚫린 사람이 아닐까요? 우리가 만일 그렇지 못하다면, 우리는 여전히 족쇄에 묶여 어둔 동굴에 갇힌 자들이고, 눈멀고 귀먹은 영적 장애인일 것입니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