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닭이 울다(눅 22:54-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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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동호
댓글 0 조회 13,203 2005.09.11 07:17

본문

닭이 울다(눅 22:54-71)

2005년은 을유년(乙酉年), 닭의 해입니다. 닭의 해인 금년이 다 가기 전에 닭과 연관된 말씀을 한 번 더 전하고 싶었습니다.
오늘의 본문 말씀은 예수님께서 잡히시고 심문받으신 일과 베드로의 배교에 관한 기사입니다. 본문의 내용을 당시의 상황에서 재구성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잡히시던 밤에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 만찬을 잡수셨습니다. 유대인의 유월절 식사는 18단계의 식사일 뿐 아니라, 찬양과 권면과 문답이 있고, 식사를 겸한 경건한 예식이어서 시간이 상당히 걸리는 만찬입니다. 만찬 후 예수님과 제자들은 가까운 겟세마네 동산으로 이동을 했는데, 이 날은 춘분이 지난 첫 보름날 밤이고 달이 휘영청 밝게 뜬 날이어서 횃불이나 등불이 없이도 이동에 지장이 없는 밤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곳 동산에서 힘겨운 기도를 하셨고, 자기와의 싸움에 돌입하셨습니다. 누가의 기록에 의하면,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 같이 되더라.”(눅 22:44)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예수님의 내면의 큰 고통을 눈치 채지 못했고, 피곤한 육신을 가누지 못해서 예수님과 함께 깨어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한 밤중이 되자, 대제사장이 보낸 무리들이 겟세마네 동산에 나타났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즉시 체포했고, 대제사장의 집으로 끌고 갔습니다. 대제사장의 집 뜰에는 그날 밤의 거사를 도모하느라 이미 모닥불이 피어있었고, 쌀쌀한 밤 기온 탓인지 사람들은 일이 어찌 되어 가는가를 보려고 모닥불 곁에 모여들었습니다. 그들 사이에 베드로가 있었습니다. 그들 가운데 몇 사람은 초라한 행색의 그가 갈릴리 출신이고, 예수님의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이라는 것을 이내 알아보았습니다. 
여기서 베드로는 하찮은 무리들로부터 세 번이나 심문을 받는 꼴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그 때마다 강하게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하였습니다. 60절에 보면, 베드로가 세 번째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할 때 “닭이 곧 울더라.”고 하였습니다. 바로 그 때 예수님께서 돌이켜 베드로를 보셨고, 예수님과 눈이 마주친 베드로는 주님의 말씀 곧 “오늘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말씀하신 것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했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때 날이 새기 시작하였습니다.
닭이 울었다는 것은 예수님이 심문을 당하신지가 벌써 네다섯 시간이나 되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리고 새벽이 되고서야 비로소 대제사장들이 공회원들을 소집할 수 있었습니다. 날이 밝으면서 예수님에 대한 신상문제가 더욱 신속하게 처리되고 있었습니다.
로마제국 당시 고관대작의 집들은 대개가 이층집이고, 집 가운데에 뜰이 있었습니다. 닭이 울기 전에 베드로는 뜰에 있었고 예수님은 이층에서 심문을 받고 있었는데, 마가복음 14장 66절에 보면, “베드로는 아래 뜰에 있더니”로 되어 있고, 누가복음 22장 61절을 보면, “주께서 돌이켜 베드로를 보시니”로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대제사장들이 예수님을 죄인 취급하여 집안으로 들이지 않았을 뿐 아니라, 아래 뜰에 있는 사람들까지도 다 지켜볼 수 있도록 이층 난간 쪽에 세워놓고 심문을 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대제사장들의 다그침에 담대하게 답변하시던 예수님이 베드로의 배교행위에 안타까운 마음을 금치 못하고 아래 뜰에 있는 베드로를 연민의 눈빛으로 잠시 내려다보셨을 때에 때마침 닭이 울었고 동녘이 밝아오고 있었던 것입니다.
서울대학교 미대 김병종 교수는 자신이 그린 「닭이 울다」(1988)란 그림에 다음과 같이 해설을 붙이고 있습니다. “닭이 우는 시간은 통회와 고통 그리고 환희의 시간이다.” 닭이 우는 시간이 통회와 고통의 시간이라 말한 것은 이해가되는데, 김병종 교수가 왜 닭이 우는 시간을 환희의 시간이라고 했을까를 놓고 잠시 생각해 보았습니다.
배교와 닭의 울음과 동녘에 밝아오는 여명하면 가장 먼저 생각나는 것이 일본인 작가 엔도 슈사쿠의 󰡔침묵󰡕입니다. 엔도 슈사쿠의 󰡔침묵󰡕에 보면, “멀리서 닭이 울었다”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프랑스 파리 외방선교회본부 유물전시관에는 다 닳은 성모상이 새겨진 작은 성화판이 전시되어있다고 합니다. 1637년 일본 큐슈우 시마바라(島原)에서 농민들이 과중한 세금과 기독교금지에 반항하여, 16세의 소년 아마쿠사 시로오(天草四郞)를 대장으로 삼아 난을 일으킨 일이 있었습니다. 이때는 3대 막부인 도쿠가와 이에미쯔 시대였는데, 시마바라 난을 진압한 후, 기독교인들을 색출하기 위하여 이 성화판을 밟고 지나가게 하였습니다. 이렇게 해서 색출된 기독교인들을 ‘구멍 매달기’란 방법의 고문을 통해서 신앙을 포기토록 유도하였습니다.
󰡔침묵󰡕에 로드리고란 이름의 포르투갈 예수회 신부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데, 지독하게 믿음이 강한 이 신부를 배교시키려고 이미 몇 번씩이나 주님을 저주하고 성화를 밟고 배교한 농민들을 놓아주지 않고 그들을 거적에 말고, 양쪽 귓바퀴에 구멍을 뚫어 한 방울씩 피가 흐르게 한 뒤 좁은 구멍에 거꾸로 매달아 극도의 고통을 호소하면서 죽어가게 합니다. 결국 신부는 자기로 인해서 농민신도들이 엄청난 고통을 겪게 되는 현실을 감당할 수 없어서 그들의 고통을 면해주기 위해서 배교의 길을 택합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님의 성화판을 발로 밟고 지나갑니다. 엔도는 이 장면을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자신의 전 생애를 통해 가장 아름답다고 생각해 온 것, 가장 맑고 깨끗하다고 믿었던 것, 인간의 이상과 꿈이 담긴 것을 밟는 것이었다. 이 발의 아픔. 그 때, 밟아도 좋다고, 동판에 새겨진 그분은 신부에게 말했다. “밟아도 좋다. 네 발의 아픔을 내가 제일 잘 알고 있다. 밟아도 좋다. 나는 너희들에게 밟히기 위해 이 땅에 태어났고, 너희들의 아픔을 나누기 위해 십자가를 짊어진 것이다.” 이렇게 해서 신부가 발을 올려놓았을 때 아침이 왔다. 멀리서 닭이 울었다.
닭이 울고 동이 튼다는 것은 큰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닭의 울음은 곧 동터오는 새 날에 대한 전령의 외침이요, 그 외침에 눈을 뜨고 통회하는 자는 새 날을 맞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고 하신 말씀이 곧 이 뜻이라 봅니다. 수탉의 외침에 눈을 뜨고 귀를 여는 자만이, 회개의 눈물을 흘리는 자만이, 온몸과 마음으로 세례를 받는 자만이 새천년의 주인공이 될 것입니다. 환희를 맛보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김병종 교수가 자신의 그림 “닭이 울다”에 붙인 “닭이 우는 시간은 통회와 고통 그리고 환희의 시간이다.”는 해설은 큰 의미를 갖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주님의 눈과 마주쳤을 뿐 아니라, 닭이 울자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였다.”고 했습니다.
누가복음 18장에 보면, 세리가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가로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며 통회하듯이, 먼 옛날 야곱도 얍복 강을 건너기 전에 밤이 맞도록 가슴을 치며 통회하였습니다.
야곱이 건넌 얍복 강은 결단의 강이요 죽음의 강이었습니다. 통회와 고통의 강이요, 환희의 강이었습니다. 아버지 이삭과 형 에서를 속이고 하란으로 도망했던 야곱은 그곳 외삼촌 라반의 집에서 무려 20년을 종처럼 생활하다가 그곳에서 일가를 이루고 재산을 형성하여 떠나온 고향을 향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형 에서가 복수의 칼을 갈아 자기를 향해서 오고 있는 것을 알았습니다. 얍복 강을 건너게 되면 복수의 일념으로 지난 20년을 한결같이 칼을 갈아온 형과의 만남을 피할 수 없게 됩니다.
얍복 강가에도 밤은 찾아왔습니다. 이 칠흑 같이 어둔 밤은 야곱의 침통하고 암울한 현실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는 이 밤이 가기 전에 뭔가 모를 것과 사생결단을 내야했습니다. 그래서 야곱은 모든 가축과 가족들을 강을 건너 떠나보내고서는 자신은 강가에 혼자 남아 이 밤을 맞아 밤이 맞도록 하나님의 천사와 씨름하였습니다. 죽기를 각오하고 가슴을 치며 통회하고 회개했을 때, 먼동이 트는 새벽녘이 되어서야 비로소 하나님의 천사는 그에게 속임수와 남의 발뒤꿈치나 붙잡고 살아온 지난날의 ‘야곱’이란 이름대신에 새 이름 ‘이스라엘’을 주셨습니다. 그가 새 이름 ‘이스라엘’을 얻게 되었을 때, 어찌나 힘을 쓰고 뒹굴었던지 환도 뼈의 힘줄이 끊어져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 밤의 통회와 고통의 대가로 서광이 비치는 환희의 아침을 맞을 수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곳 이름을 ‘하나님의 얼굴을 뵈었다’는 뜻으로 ‘브니엘’이라 지었습니다. 야곱은 비록 다리를 절게 되었지만, 날아갈 것 같은 기쁨으로 약속의 땅을 향해서 통회와 고통과 죽음의 강을 건널 수가 있었습니다.
왜곡된 삶을 살아온 지난날의 잘못을 뉘우치고 통곡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새 날이 없습니다. 베드로나 세리나 야곱의 통회는 자기 잘못을 후회하고 자살한 가룟 유다의 것과 크게 다른 회개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가룟 유다의 후회는 잘못된 회개입니다. 진정한 회개는 가슴을 치며 불쌍히 여겨 달라는 겸손한 기도입니다. 하나님은 마음을 여는 자를 용서하시고 사랑하십니다.
닭이 우는 시점까지 베드로는 어둠에 묻혀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주님을 세 번씩이나 하찮은 사람들 앞에서 부인을 했던 졸장부였습니다. 그러나 그가 닭의 울음을 듣고 통회했을 때, 환희에 찬 새 날을 맞이할 수가 있었습니다. 통회와 고통이 없이는 하나님의 신령한 축복을 맛볼 수 없습니다. 이 해가 다 가기 전에 얍복 강을 건너기 전에 가슴을 치며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겨주옵소서. 나는 죄인입니다.”고 통회합시다. 하나님께서 반드시 브니엘의 아침처럼 서광의 빛을 비쳐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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