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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 민족의 추석(레 23:39-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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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동호
댓글 0 조회 12,656 2005.09.17 14: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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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 민족의 추석(레 23:39-44) 우리나라 팔월 한가위 곧 추석은 첫 곡식을 하나님께 바치는 추수감사절입니다. 이스라엘은 한해에 세 번 추수감사제를 드립니다. 초실절이라하여 유월절 안식일 다음날, 곧 우리의 부활절 때에 첫 수확한 보릿단을 바치는 축일이 있고, 맥추절은 그로부터 50일째가 되는 날인 오순절, 곧 우리의 성령강림절에 첫 수확한 밀을 봉헌하는 축일이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나라의 중추절인 추석과 동일한 초막절에 7일간 지키는 추수감사제가 있습니다. 초막절의 경우는 레위기 23장 39-44절의 말씀대로 첫날에는 아름다운 실과와 종려 나뭇가지와 시내버들을 들고 춤추며 하나님께서 비를 주셔서 농사를 잘 짓게 하시고 수확하게 하신 것을 감사하는 축제입니다. 또 조상들의 광야생활을 기리기 위해서 초막을 짓고 7일간 그 안에서 생활하는 축제입니다. 수확을 마치고 먹고 쓸 것이 풍성한 바로 그 순간에 가난하고 힘들었던 생활을 회상하고 체험해보는 뜻 깊은 축제인 것입니다. 가졌을 때 갖지 못한 때를 기억하고 갖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드리는 것이 초막절이 갖는 가장 큰 의미입니다. 초막절 때 예루살렘성전에서는 제단에 제물을 올려놓고 물을 붓는 행사를 갖습니다. 보통은 포도주를 붓지만 이 날만큼은 제사장과 함께 실로암 연못에서 떠온 물을 사용합니다. 물을 부을 때, 그들은 이사야서와 시편의 말씀을 낭송합니다. “풍성한 비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내년에도 풍성한 비를 주셔서 농사가 잘 되게 해 주십시오”라고 기원합니다. 축제는 칠일동안 계속 되는데 특히 마지막 날을 ‘구원을 위한 통회의 날’ 혹은 ‘하나님의 사죄의 날’로 선언하고, 실로암 연못에서 떠온 물을 계속해서 제단에 붓고 나팔을 불며 종려 나뭇가지를 흔들며 환호하면서 춤을 춥니다. 여기서 실로암의 물은 풍년을 위한 비와 구원을 위한 눈물과 주신 복에 대한 감사를 상징합니다. 레위기 23장 39절의 말씀에 “너희가 토지소산 거두기를 마치거든 칠월 십오일부터 칠일동안 여호와의 절기를 지키되 첫날에도 안식하고 제 팔일에도 안식할 것이요.”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칠월 십오일은 이스라엘의 성력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로 말하면 음력 8월 15일에 해당됩니다. 이스라엘이 바벨론에 유배가기 전에는 이 성력을 사용하였습니다. 성력으로는 유월절이 낀 니산월이 첫째달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지키는 부활절쯤이면 이스라엘의 성력으로는 1월 중순이 되는 셈입니다. 바벨론에 유배가기전만해도 이스라엘에서는 몇 월 며칠이라고 할 때에 그 몇 월에 대한 이름을 우리처럼 그냥 1월, 2월, 3월하고 불렀습니다. 월에 이름을 갖게 된 것은 바벨론에 거주하면서부터입니다. 그러니까, 초막절이 있는 달은 성력으로 일곱 번째 달, 곧 칠월입니다. 그러나 지금으로부터 2,600년 전 바벨론에 유배된 이후로 이스라엘 민족은 바벨론의 영향을 받아서 민력을 갖게 되었는데, 성력으로 칠월이었던 티쉬레이가 1월로 바꿨습니다. 그래서 이 달 1일은 이스라엘의 설날이고 이틀간 신년축제를 갖습니다. 금년은 윤달이 낀 해라서 한달 늦은 10월 4일이 이스라엘의 설날이지만, 윤달이 없는 때면 우리의 음력 8월 1일이 이스라엘의 설날이 됩니다. 그리고 그로부터 열흘째 날에 대속죄일 축제가 있고, 그리고 또 5일 후인 음력 15일 보름날에 그들 말로 ‘숙곳’이라 부르는 초막절 축제를 7일간 갖습니다. 이스라엘의 이 초막절은 우리나라의 추석과 같은 날에 갖은 의미로 갖는 동일한 행사입니다. 이스라엘은 중국과 우리나라와 마찬가지로 월력주기를 19년으로 하고 있고, 윤년에는 평년 아달 월 다음에 열세 번째인 제2아달 월을 둡니다. 19년 주기로 3년째, 6년째, 8년째, 11년째, 14년째, 17년째, 19년째에 일곱 번 윤달을 넣어 사용합니다. 이렇게 윤달이 들어가는 해이면, 이스라엘의 초막절은 우리의 추석보다 만 1달이 늦은 보름날에 시작됩니다. 그러니까 우리 추석날과 같은 날에 초막절이 시작되기도 하고, 우리의 추석날보다 한 달 늦은 보름날에 초막절이 시작되기도 합니다. 아무튼 초막절이 낀 티쉬레이는 구약성서에서 말하는 성력으로는 7월이고, 이스라엘 사람들이 지키는 민력으로는 1월이며, 이달 1일은 해가 바뀌는 설날이고, 10일은 대속죄일이며, 보름날 달이 뜬 15일에는 초막절이 시작되는 날입니다. 이 초막절은 본래 추수감사절입니다. 이때쯤이면 농부들은 포도를 비롯한 과일 수확을 마치고 움막을 짓고 7일간 그 안에서 먹고 놀고 잡니다. 그 이유는, 첫째, 선조들이 광야에서 텐트를 치고 살았던 때를 잊지 않고 기억하기 위해서입니다. 둘째, 세월이 흐르면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 움막을 각종 과일과 채소로 장식하기 시작했고, 그것들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표시했습니다. 셋째, 초막절은 사람들에게 인생의 무상함을 깨우치고, 물질의 축복을 주시는 하나님께 의존하게 하려는 데 있습니다. 지붕은 나뭇가지나 잎들로 만들고 임시방편이지만 벽도 만듭니다. 그러나 하늘을 다 가려서는 안 됩니다. 해와 달과 별들을 볼 수 있는 틈들이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비바람이 친다면 움막으로 새는 비와 바람을 피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의 유한성을 강조하고 하나님의 도우심이 필요하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함입니다. 풍성한 수확을 주신 하나님을 잊고 자기 자신에게 영광 돌리지 않게 하기 위한 것이며, 튼튼하고 안전한 집을 떠나 홍수나 바람에 넘어지기 쉬운 움막에서 생활하면서 자기 자신의 연약함을 깨우치고 하나님의 보호인도하심을 전적으로 의지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움막에서 7일간 사는 것이 이 명절이 갖는 가장 큰 의미입니다. 하나님께 감사하지 못하는 ‘오만’은 인간을 파멸의 구덩이로 몰아갈 가공할 내면의 적이란 사실을 눈치 채는 사람만이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역사가 토인비는 지구상에서 한 때 찬란한 꽃을 피웠지만, 시들고 멸망해 버린 21개의 문명들을 연구한 끝에 결론내리기를, 21개의 문명들 가운데 19개 문명이 외부의 적이 아닌 내부의 적, 곧 내적인 문제로 말미암아 멸망했다고 하였습니다. 이 ‘내부의 적’이 바로 ‘오만’입니다. 토인비는 ‘오만’을 ‘자기우상’이란 말로 표현했습니다. 그리고 이로 인해서 인간의 문명이 쇠퇴되고 해체되는 것을 토인비는 ‘네메시스’ 곧 ‘응보’라고 불렀습니다. 사도행전 27장 5절에 보면, 지금의 터키 땅 남쪽 해안에 루기아 도가 나옵니다. 옛날, 이곳 왕국에서는 나라를 쑥대밭으로 만드는 ‘키마이라’라는 괴물이 있었는데, 왕은 그 괴물을 퇴치할 용사를 찾고 있었습니다. 키마이라는 머리가 사자와 산양을 합친 듯했고, 꼬리는 용과 비슷했는데, 입으로는 불을 뿜어내기 때문에 이 괴물을 물리치고 살아 돌아온 용사가 아무도 없었습니다. 난공불락의 요새가 있으면 그것을 무너뜨리는 영웅이 나타나듯이, 이 키마이라를 물리친 용사가 있었는데, 그의 이름이 벨레로폰입니다. 벨레로폰이 괴물을 물리칠 수 있었던 이유가 몇 가지 있었는데요, 첫째는, 그가 괴물을 퇴치하러 가기 전에 제일 먼저 예언자(폴뤼이도스)를 찾아가 자문을 구한 일입니다. 예언자는 키마이라를 죽이려면 하늘을 나는 말인 페가소스가 있어야 가능하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벨레로폰이 말했습니다. “페가소스는 하늘을 나는 천마가 아닙니까? 천마는 지혜의 여신 아테나의 황금고삐에만 복종한다는데, 내가 무슨 수로 그 고삐를 구하겠습니까?” 예언자는 신에게 간절하게 간구하면 뜻을 이룰 수 있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둘째는, 벨레로폰의 경건한 신앙심 때문이었습니다. 길을 떠난 벨레로폰이 한 도시에 이르러서보니, 동쪽에는 지혜의 여신 아테나의 신전이 있고, 서쪽에는 애욕의 여신 아프로디테의 신전이 있었습니다. 두 신전 중 한 곳에서 하룻밤을 묵어가야하는데, 벨레로폰은 지혜의 신 아테나 신전을 선택했습니다. 애욕의 여신 아프로디테 신전의 여사제들은 나그네들에게 웃음을 파는 성창들이었기 때문에 벨레로폰으로써도 여간 마음이 쓰이고 끌리는 것이 아니었지만, 예언자의 충고를 잊지 않았던 것입니다. 밤에 아테나 여신이 꿈에 나타났습니다. “저 애욕의 신전에 들지 않고 이 지혜의 신전에 든 너의 선택이 기특하다. 너에게 황금고삐를 내릴 것인즉, 페가소스를 붙잡아 뜻하던 바를 이루라.”고 하였습니다. 벨레로폰이 꿈을 깨어보니, 과연 황금고삐가 옆자리에 놓여 있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벨레로폰은 예정대로 천마 페가소스를 붙잡아 탔고 키마이라를 죽이는데 성공하였습니다. 한낱 인간에 불과한 벨레로폰이 그의 작은 믿음 때문에 날개 달린 천마 페가소스를 얻어 탈수가 있었고, 천마 페가소스의 날개 덕분에 괴물을 물리치고 영웅의 자리에 오를 수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만 벨레로폰의 마음에 ‘오만’(Hybris)이란 이름의 ‘죽음에 이르는 병’이 도지고 말았습니다. 이 오만은 사람의 마음속에 만들어지기 쉬운 ‘자기우상’인데 자기우상숭배에 빠지게 되면 여기에 상응하는 네메시스, 곧 업보를 받게 되는데요, 벨레로폰도 이 업보로 인해서 추락하고 맙니다. 벨레로폰은 천마 페가소스를 타고 신들의 보좌에까지 오르고 싶어졌습니다. 신들의 보좌에까지 오르고자한 오만함이 주변 사람들에게는 또 어떻게 나타났을지 충분히 짐작이 가고 남으실 것입니다. 벨레로폰은 페가소스를 타고 하늘궁전을 향해서 오르고 또 올랐습니다. 제우스가 가만히 내려다보고 있으려니까, 벨레로폰이 하는 짓이 우습기도 하고 괘씸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제우스는 자신의 무기인 날벼락을 던져 태워버릴까 하다가 생각을 바꿔서 말의 몸에 붙어서 피를 빨아먹는 강력한 ‘등에’ 한 마리를 만들어 페가소스의 꼬리 밑에 붙어 피를 빨게 하였습니다. 페가소스가 괴로움을 참지 못하고 몸부림을 치는 바람에 벨레로폰은 천마의 등에서 튕겨 나와 지상으로 추락하고 말았습니다. 날개 달린 페가소스가 몸을 날려 벨레로폰을 받아 줄만도 했지만, 그는 이미 신의 노여움을 받은 터라 페가소스로써도 그런 너그러운 자비를 벨레로폰에게 베풀 수가 없었습니다. 결국 벨레로폰은 ‘방황의 들’이라고 불리는 알레이온 벌판에 떨어졌는데요, 갈대숲덕분에 목숨만은 잃지를 않았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는 절름발이에 장님까지 되어 사람들의 발길이 뜸한 길만 골라 세상을 ‘방황‘하다가 쓸쓸하게 죽었다고 합니다. 하늘을 날 수 있는 날개가 있다고 하는 것은 크나큰 행운이요 축복일 수 있지만, 경건성을 잃고 자만하는 순간 추락하게 된다는 귀중한 교훈을 주는 이야기입니다. 저는 이번에 허리케인 카트리나와 태풍 나비를 보고 나름대로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자연재해들이 우리 인간들이 얼마나 연약하고 깨지기 쉬운 질그릇 같은 존재들인가를 교훈해 준다는 것입니다. 하늘 끝까지 솟아오를 것 같은 인간의 교만을 하나님이 산 자들은 깨달아 알라고 질책하시는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수천 년간 이어져 내려온 유월절, 곧 봄철이 되면 “우리가 지금은 비록 여기 타향에 살아도 내년에는 이스라엘 땅에서 살게 될 것이다. 지금은 노예이지만 내년에는 자유인이 될 것이다.”라고 희망을 노래하고, 이 초막절 축제, 곧 가을철이 되면, 7일간의 축제를 통해서 겸손을 배우고 하나님을 높이고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주시고, 집이라는 쉼터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훈련을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보다 몇 십 년 앞서 이집트에서 살았던 필로라는 유대인 학자는 초막절이 추수하여 먹을 것을 넉넉하게 쌓아둔 사람들에게 행복하다고 생각하는 그때에 곧 불행해질 수도 있다는 교훈을 주는 축제라고 하였습니다. 초막절의 시작은 광야에서 텐트 생활을 하며 방랑하던 때를 기억하게 하려는 데서 출발했기 때문입니다. 또 어떤 유대인들은 초막절이 유대인들에게 지금 그들이 세계 도처에 흩어져 단지 임시로 살고 있고 수천 년을 방랑하고 있다는 것을 기억나게 해 주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 장막생활을 하루 속히 끝내고 축복의 땅 가나안에 들어갈 수 있도록 해주십사고 활동을 제한하면서 하나님께 기도한다는 것입니다. 초막절의 또 다른 의미는 이 축제 때에 사람들을 환대하고 친절하게 접대하는 것입니다. 초막절의 본질적인 요소는 음식을 함께 나눠 먹는 것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식탁에는 찾아오는 손님들을 위해서 항상 빈자리와 의자가 놓여 있어야 합니다. 이는 초막절이 이웃과 더불어 사는 지혜를 배우는 귀중한 절기란 점을 말해줍니다. 추석명절을 맞이한 우리 성도님들도 초막절을 맞이한 이스라엘 사람들처럼 어려웠던 지난날을 돌아보고, 오늘날 이만큼 살게 해주신 하나님께 그 은혜를 보답하고 감사하며, 겸손함으로 “내년에도 변함없이 저희들을 돌보시고 인도하옵소서.”라고 기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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