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웅의 길(고전 1:18-25)
본문
영웅의 길(고전 1:18-25)
인간 공동체는 크든 작든 영웅을 고대합니다. 가정에서는 능력 있는 가장을 원하고, 교회는 능력 있는 목회자를, 회사는 능력 있는 사장을, 대학은 능력 있는 이사장이나 총장을 원합니다. 백성들은 배불리 먹고 평안하게 살게 해줄 탁월한 지도자를 고대합니다. 「불멸의 이순신」을 보아도 그렇고, 「알렉산드로스」란 영화를 보아도 그렇고, 「마지막 사무라이」를 보아도 그렇고, 「트로이 전쟁」를 보아도 그렇고, 「칭기즈 칸」을 보아도 그렇고,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인류가 영웅을 고대한다는 것입니다. 극도로 가난하거나, 억압과 고통 속에 있거나 할 때 더욱 간절하게 영웅을 고대합니다. 영웅은 어렵고 힘들고 배고플 때 기다려지는 것이므로, 잘 먹고 잘 사고 권세와 명예를 누리는 사람들은 영웅이 달가울 리 없습니다. 오히려 반대로 영웅이 나타나는 것을 가장 싫어하고 가장 두려워합니다. 누리고 있는 것을 다 뺏길까봐 그렀습니다.
광야에서 외치는 세례 요한을 보려고 요단강에 내려간 사람들 중에는 정보원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 찾아와서 이런 저런 질문으로 꼬투리를 잡으려고 했던 사람들이 바로 실세들이 보낸 정보원들이었다고 보시면 틀림없습니다.
「불멸의 이순신」에서 선조 임금이 특수요원들을 전라도에 보내 삼도수군통제사인 이순신을 제거하려했던 것이나 정탐하여 압송시킬 궁리만 했던 것도 다 같은 이유에서입니다. 침략자 왜군은 물론이고 연합군인 명나라 군에게조차 유린만 당하던 민중은 연전연승을 거두는 이순신을 연호하고 영웅처럼 받들지만, 조정에서는 그렇지 못했습니다. 선조와 윤두수를 비롯해서 많은 조정대신들이 이순신 제거에 혈안이 되어 있었던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진실한 영웅은 민중이 바라는 반역자가 되지 않고 순교자의 길을 걷습니다. 죽지 않아도 되었을 이순신이 적군의 통탄에 쓰러진 것이 그랬고, 왕이 되기를 바라는 민중의 뜻을 저버리고 십자가에 매달렸던 예수님이 그랬습니다. 그들이야말로 진정한 영웅이었던 것입니다.
복음서에서 가난하고 못 배운 민중은 예수님을 열렬히 환호하고 환영하지만, 부유하고 학식 있는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은 예수님을 몹시 싫어하고 눈에 가시처럼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어떻게 해서든 제거하려고 합니다. 이런 복음서의 이야기들이 있을 법한 사실적 기록이고, 그것을 역사가 입증한다는 것이 저의 소신입니다. 십자가의 길을 간 예수님에 관한 복음서의 기록에 신빙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걸었던 십자가의 길이 진정한 영웅들이 일찍이 걸었던 길이기 때문입니다.
한 때 기독교를 앞장서서 탄압했던 바울이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가, 그분이 겪었던 그 수치가 인류를 구원하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라고 했을 때, 바울은 비로소 진정한 영웅의 길이 무엇인가에 눈을 떴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를 제외한 수많은 유대인들이 그렇지를 못했고 지금도 마찬가집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메시아로 인정하지 못하는 이유들 가운데 가장 큰 이유가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는 수치를 당했다는 것입니다. 모름지기 메시아란 다윗 왕과 같은 영웅이어야 한다고 믿기 때문이며, 모세처럼 만나를 내려 먹일 수 있는 선지자여야한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런 영웅이라면 태봉 왕 궁예라든지, 알렉산드로스 대왕이라든지, 유대인 발 코크바라든지, 경제개발을 성공시킨 박정희 대통령에서 알 수 있듯이, 피비린내 나는 살육과 폭압정치를 각오해야 합니다. 이 사실을 모른 채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님을 참 메시아로 믿지 않기 때문에 유대인들은 지난 이천년 동안 거짓 메시아들에 속아서 살아왔습니다.
사람들은 삶이 고달프고 힘들 때, 이 땅에서의 삶에 더 이상 희망이 없다고 생각될 때, 내세에 희망을 걸게 되고, 살기 좋은 세상을 만들어줄 강력한 지도자가 나타나주기를 바라거나 혁명이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이것은 어느 민족에서나 다 마찬가집니다. 특히 역사․정치적 상황이 비슷하고 오랫동안 한을 품고 살아온 유대민족과 우리민족에게 두드러진 현상입니다. 따라서 유대인들은 바벨론유배이후 메시아사상을 발전시켜왔고, 그 후로 30여 명이 넘는 많은 수의 자칭 메시아들이 나타났습니다. 우리민족은 삼국시대이후 미륵사상을 발전시켜왔고, 역시 많은 수의 자칭 미륵들이 나타났습니다. 이들 가운데 대표적인 유대인이 132-135년에 로마제국에 반란을 일으킨 열심당원 발 코크바이고, 1665년 5월 31일에 자신이 진정한 메시아라고 선포한 샤베타이 제비란 사람이고, 태봉의 왕 궁예입니다.
발 코크바는 ‘별의 아들’ 곧 다윗의 자손 메시아란 뜻으로 지구상에 처음 교회가 설립된 지 102년만인 주후 132-135년 사이에 있었던 제2차 유대전쟁 당시 유대인들과 그들이 존경했던 랍비 아퀴바로부터 메시아로 추앙받았던 혁명가였습니다. 이 사람의 본명은 ‘Simon ben Kosiba’ 즉 ‘코시바의 아들 시몬’입니다. 그를 추종하던 자들은 그를 ‘Bar Kochba’ 곧 ‘별의 아들’이라 불렀지만, 그러나 그에게 실망한 사람들, 예를 들면, 팔레스타인 탈무드의 편집자 같은 사람들은 그를 ‘Bar Kozeba’ 곧 ‘실망의 아들’ 혹은 ‘거짓말의 아들’이라 불렀습니다. 발 코크바나 궁예와 같은 자칭 메시아 또는 자칭 미륵들은 정치․군사적 혁명을 시도했던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혁명은 백이면 백 다 민중에게 큰 아픔과 시련을 안겨준 채 끝장나곤 했습니다. 그래서 ‘시몬 벤 코시바’는 ‘별의 아들’이란 이름까지 듣다가 나중에는 ‘실망의 아들’ 또는 ‘거짓말의 아들’로 추락했던 것입니다.
태봉 왕 궁예도 처음에는 백성을 구제하는 미륵처럼 행세하다가 나중에는 포악한 군주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이들 말고도 근대에 일어난 혁명들, 예를 들어, 19세기 중반 청나라 사람 홍수전의 태평천국의 난(1850-1864), 20세기 초 레닌의 러시아혁명(1917), 20세기 후반 우간다의 이디 아민, 이라크의 후세인, 박정희의 군사혁명에 이르기까지 그들 민족에게 시련을 안기지 않았던 예는 없었습니다.
유대인들은 과거 2,600년 동안 나라 잃은 설음 때문에 피폐할 때로 피폐해져 있었기 때문에 다른 어느 민족보다도 더 애타게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래서였는지 예수님 이후 지금까지 30명이 넘는 사람들이 자기가 메시아라고 주장하였으나 예수님처럼 영웅의 길, 곧 십자가의 길을 걸었고, 무덤에서 부활한 사람이 없습니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영웅 또는 메시아의 한 형태는 다윗 왕처럼 혁명가로써 나타났습니다. 알렉산드로스 대왕, 유대인 열심당원 발 코크바, 쿠바의 혁명 영웅 게체바라를 비롯해서 우리나라에서는 후백제의 견훤, 태봉의 궁예, 승려들이었던 묘청, 우본, 김윤후, 신돈, 조선시대의 임꺽정, 정여립, 이몽학, 홍경래, 전봉준, 그리고 근대에 와서 박정희 대통령 등이 대표적인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또 다른 형태의 영웅 또는 메시아는 모세나 엘리야처럼 종교적인 형태로 나타납니다. 유대인 가운데서 대표적인 사람이 1665년 5월 31일에 메시아로 선포한 샤베타이 제비입니다. 우리나라에는 동학창시자인 최제우, 통일교의 문선명, 천부교의 박태선과 같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최제우의 ‘제우’를 풀이하면 ‘구세주’란 뜻입니다.
유대인의 거짓 메시아 샤베타이 제비(Shabbetai Zevi)는 터키 서머나 출생의 유대인입니다. 그는 성장기에 조울증으로 의심될만한 이상한 성향들을 보였고, 모세의 율법을 고의적으로 어긴다든지, 유대인들이 금하는 음식을 먹는다든지, 하나님의 이름을 입에 함부로 올린다든지 하는 식의 일련의 불경스런 행동들 때문에 1656년에 회당과 공동체로부터 추방당했습니다. 이스탄불에 가서는 토라가 폐지되었노라고 선포하였고, 카이로에 가서는 1648년 폴란드에서 자행된 유대인학살 때 피신하여 매춘부로 살고 있던 여인과 결혼함으로써 스캔들에 휩싸이기도 했습니다. 1662년에는 예루살렘 인근 가자(Gaza)에서 젊고 박식하고 축귀(逐鬼)에 능숙한 나단(Nathan)이란 랍비를 만났는데, 그로부터 샤베타이는 자신의 조울증 현상이 자신이 메시아임을 입증하는 증거란 말을 듣게 됩니다. 샤베타이는 랍비 나단의 설득으로 1665년 5월 31일 자신이 메시아임을 선포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의 이런 주장은 수세기에 걸친 박해와 추방으로 고립무원에서 고군분투하던 온 세계의 유대인들을 일시에 흥분시키기에 충분하였고, 전 유대인 역사를 통해서 30여명의 자칭 메시아들이 나왔지만, 그 누구도 샤베타이처럼 대중적인 지지를 일찍이 받아본 적이 없을 만큼 대단히 열광적이었습니다.
샤베타이의 지지자들은 부유한 사람, 가난한 사람, 배운 사람, 못 배운 사람을 막론하고 모든 계층에 유포되어 있었습니다. 팸플릿과 같은 전도용지들이 영어로 화란어로 독일어로 이탈리어로 만들어졌습니다. 폴란드와 리투아니아에서는 그를 치켜세우는 대중행렬들이 있었고, 오토만 제국에서는 예언자들이 거리를 오가면서 샤베타이가 옥좌에 앉은 것을 보았노라고 환상을 설명하였습니다. 모든 업무가 정지상태가 되었고, 터키의 유대인들은 그들의 안식일 기도들에서 술탄의 이름을 빼버리고 대신에 샤베타이의 이름을 넣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일련의 결과들로 인해서 샤베타이는 1666년 1월 이스탄불에서 반역죄로 체포되어 감옥에 투옥되었습니다. 샤베타이는 감옥에 있는 동안 자신이 쓴 편지에 “나는 주 너희 하나님이니라. 샤베타이 제비.”라고 서명하기 시작했지만, 정작 그가 술탄으로부터 이슬람에 개종하든지 죽음을 선택하든지 하라고 했을 때에 샤베타이는 이슬람교를 선택했고, 그는 즉각 석방되었으며, 그에게는 황실연금이 지급되었고, 명백하게 충성스런 무슬림으로서 살다가 1676년 9월 17일 사망하였습니다.
샤베타이 신드롬은 유대인들이 수세기 동안 박해와 유배와 굴욕을 당하며 살았던 데서 비롯된 것이며, 그런 처참한 상황에서 샤베타이의 등장은 희망의 등불이었고, 복음이었으며, 일시적인 해프닝으로 끝나긴 했지만, 전 세계의 유대인들이 내적으로는 자유와 해방을 경험하기도 했습니다.
최제우는 검가(劒歌)를 짓고 검무(劒舞)를 추곤 하였는데, 이것이 화근이 되어 죽음을 자초하게 된 것으로 나타나 있습니다. 최제우는 도를 깨닫고 전도한지 5년 만에 최시형에게 대를 있게 했고, 1864년 3월 10일 대구에서 참형을 받아 죽었습니다. 그의 죽음은 단순히 종교적인 이유보다는 검가와 검무로 인한 국가모반을 꾀한다는 죄명으로 처형되었습니다. 그리고 그와 관련된 이야기들은 복음서에 실린 예수님의 이야기와 너무나 흡사해서 모방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을 정도입니다. 그리고 통일교의 문선명과 천부교의 박태선은 종교보다는 사업이 더 앞선 사람들입니다. 이들 종교적인 거짓 메시아들의 삶에서 우리는 예수님이 걸었던 영웅의 길, 곧 십자가의 길을 전혀 찾아볼 수 없습니다.
최근 끝난 역사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으로 인해서 성웅 이순신의 죽음을 놓고, 그의 죽음이 자살이었느냐, 전사였느냐, 아니면 자작극이었느냐를 놓고 이런 저런 추측들을 하고 있는 줄로 압니다. 적군이 쏘는 조총 앞에서 투구만 벗었느냐, 갑옷을 통째로 벗었느냐, 또는 ‘투구를 벗는다’, ‘갑옷을 벗는다’는 등의 표현이 ‘죽기로 싸우겠다’는 의지의 표명일 뿐이냐를 놓고도 의견이 나눠지는 것 같습니다. 아무튼 30대 중반에 이른 한창의 나이에 통치자들의 심기를 건든 일련의 행동들을 통해서 자신의 죽음을 재촉했던 예수님의 모습과 노량해전에서의 이순신의 모습은 닮은꼴입니다. 이순신이 왜군과의 해전에서 23전 23승이란 연전연승을 거뒀지만, 조정의 선조 임금과 윤두수 일파로부터는 끊임없는 시기와 모함과 살해의 위협을 받았고, 견디기 힘든 어려운 지경에서도 오직 나라와 백성을 살리겠다는 충정으로 자신을 죽음으로 몰아갔던 것처럼, 우리 예수님도 나라와 백성들을 도탄에 빠지게 하는 가난과 질고의 상징인 사단과의 싸움에서는 연전연승하였지만, 그럴수록 지배자들인 사두개인들과 바리새인들로부터는 지칠 줄 모르는 시기와 모함과 살해의 위협을 견디어야 했고, 오로지 도탄에 빠진 인류를 구원코자 하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이루어 백성을 죄악에서 건지겠다는 충정으로 자신을 영웅의 길, 십자가의 길, 죽음의 언덕 골고다로 몰아갔던 것입니다.
칠년에 걸친 조일전쟁에서 가장 성공한 사람은 누구일까요? 임금 선조일까요, 윤두수 일파일까요? 왜적일까요? 명나라일까요? 다 아닙니다. 모함을 받아 누명을 쓰고 모진 고초를 당하면서도 자신의 신념에 흔들리지 않고, 나라를 살리는 옳은 일을 위해서 타협을 불사했던 이순신 장군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를 도와 국가를 위해 목숨을 바쳤던 수많은 무명의 용사들이었습니다. 그들이 진정한 승리자들이었습니다. 우리 예수님도 아무 까닭 없이 체포되어 갖은 고문과 모욕을 당하시다가 결국은 십자가에 못 박히는 수모를 겪게 되셨지만, 전혀 흔들림이 없었습니다. 샤베타이나 최제우가 보여준 최후의 모습과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예수님이나 이순신과 같은 분들의 삶의 결과가 가져다 준 보상이 어떤 것인지, 그것을 모르시는 분은 없으시겠지요? 이순신은 세상을 떠난 지 500여년이 흘렀지만 그분의 이름은 시간이 갈수록 더욱 빛나고 있고, 많은 사람들의 마음에 진정한 영웅으로 남아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예수님도 세상을 떠난 지 2,000여년이 흘렀지만, 그분을 존경하고 사모하는 사람들이 전 세계에 그 수를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로 많습니다. 진정으로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존경과 사랑, 박해하고 탄압하던 원수들조차도 그들에 대한 존경심을 숨길 수 없었던, 결코 적들이 이겨낼 수 없고, 어찌해볼 수 없는 그런 분들이었다는 것을 역사적 사료나 성서는 증언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가 우리를 구원하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라고 말한 사도 바울의 말씀이 얼마나 큰 가르침이요 깨달음인가를 새삼 느껴보면서 예수님이 걸었던 십자가의 길이야말로 영웅의 길이요, 만 인류를 구원하는 구세주의 길이었다고 확신합니다. 이 점을 깊이 생각하시면서 고린도전서 1장 18-25절을 한 번 더 읽고 마치겠습니다.
[18]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19] 기록된바 내가 지혜 있는 자들의 지혜를 멸하고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폐하리라 하였으니, [20] 지혜 있는 자가 어디 있느뇨? 선비가 어디 있느뇨? 이 세대에 변사가 어디 있느뇨?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케 하신 것이 아니뇨? [21]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고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22]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23]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24]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25] 하나님의 미련한 것이 사람보다 지혜 있고 하나님의 약한 것이 사람보다 강하니라.
인간 공동체는 크든 작든 영웅을 고대합니다. 가정에서는 능력 있는 가장을 원하고, 교회는 능력 있는 목회자를, 회사는 능력 있는 사장을, 대학은 능력 있는 이사장이나 총장을 원합니다. 백성들은 배불리 먹고 평안하게 살게 해줄 탁월한 지도자를 고대합니다. 「불멸의 이순신」을 보아도 그렇고, 「알렉산드로스」란 영화를 보아도 그렇고, 「마지막 사무라이」를 보아도 그렇고, 「트로이 전쟁」를 보아도 그렇고, 「칭기즈 칸」을 보아도 그렇고,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인류가 영웅을 고대한다는 것입니다. 극도로 가난하거나, 억압과 고통 속에 있거나 할 때 더욱 간절하게 영웅을 고대합니다. 영웅은 어렵고 힘들고 배고플 때 기다려지는 것이므로, 잘 먹고 잘 사고 권세와 명예를 누리는 사람들은 영웅이 달가울 리 없습니다. 오히려 반대로 영웅이 나타나는 것을 가장 싫어하고 가장 두려워합니다. 누리고 있는 것을 다 뺏길까봐 그렀습니다.
광야에서 외치는 세례 요한을 보려고 요단강에 내려간 사람들 중에는 정보원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 찾아와서 이런 저런 질문으로 꼬투리를 잡으려고 했던 사람들이 바로 실세들이 보낸 정보원들이었다고 보시면 틀림없습니다.
「불멸의 이순신」에서 선조 임금이 특수요원들을 전라도에 보내 삼도수군통제사인 이순신을 제거하려했던 것이나 정탐하여 압송시킬 궁리만 했던 것도 다 같은 이유에서입니다. 침략자 왜군은 물론이고 연합군인 명나라 군에게조차 유린만 당하던 민중은 연전연승을 거두는 이순신을 연호하고 영웅처럼 받들지만, 조정에서는 그렇지 못했습니다. 선조와 윤두수를 비롯해서 많은 조정대신들이 이순신 제거에 혈안이 되어 있었던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진실한 영웅은 민중이 바라는 반역자가 되지 않고 순교자의 길을 걷습니다. 죽지 않아도 되었을 이순신이 적군의 통탄에 쓰러진 것이 그랬고, 왕이 되기를 바라는 민중의 뜻을 저버리고 십자가에 매달렸던 예수님이 그랬습니다. 그들이야말로 진정한 영웅이었던 것입니다.
복음서에서 가난하고 못 배운 민중은 예수님을 열렬히 환호하고 환영하지만, 부유하고 학식 있는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은 예수님을 몹시 싫어하고 눈에 가시처럼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어떻게 해서든 제거하려고 합니다. 이런 복음서의 이야기들이 있을 법한 사실적 기록이고, 그것을 역사가 입증한다는 것이 저의 소신입니다. 십자가의 길을 간 예수님에 관한 복음서의 기록에 신빙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걸었던 십자가의 길이 진정한 영웅들이 일찍이 걸었던 길이기 때문입니다.
한 때 기독교를 앞장서서 탄압했던 바울이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가, 그분이 겪었던 그 수치가 인류를 구원하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라고 했을 때, 바울은 비로소 진정한 영웅의 길이 무엇인가에 눈을 떴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를 제외한 수많은 유대인들이 그렇지를 못했고 지금도 마찬가집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메시아로 인정하지 못하는 이유들 가운데 가장 큰 이유가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는 수치를 당했다는 것입니다. 모름지기 메시아란 다윗 왕과 같은 영웅이어야 한다고 믿기 때문이며, 모세처럼 만나를 내려 먹일 수 있는 선지자여야한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런 영웅이라면 태봉 왕 궁예라든지, 알렉산드로스 대왕이라든지, 유대인 발 코크바라든지, 경제개발을 성공시킨 박정희 대통령에서 알 수 있듯이, 피비린내 나는 살육과 폭압정치를 각오해야 합니다. 이 사실을 모른 채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님을 참 메시아로 믿지 않기 때문에 유대인들은 지난 이천년 동안 거짓 메시아들에 속아서 살아왔습니다.
사람들은 삶이 고달프고 힘들 때, 이 땅에서의 삶에 더 이상 희망이 없다고 생각될 때, 내세에 희망을 걸게 되고, 살기 좋은 세상을 만들어줄 강력한 지도자가 나타나주기를 바라거나 혁명이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이것은 어느 민족에서나 다 마찬가집니다. 특히 역사․정치적 상황이 비슷하고 오랫동안 한을 품고 살아온 유대민족과 우리민족에게 두드러진 현상입니다. 따라서 유대인들은 바벨론유배이후 메시아사상을 발전시켜왔고, 그 후로 30여 명이 넘는 많은 수의 자칭 메시아들이 나타났습니다. 우리민족은 삼국시대이후 미륵사상을 발전시켜왔고, 역시 많은 수의 자칭 미륵들이 나타났습니다. 이들 가운데 대표적인 유대인이 132-135년에 로마제국에 반란을 일으킨 열심당원 발 코크바이고, 1665년 5월 31일에 자신이 진정한 메시아라고 선포한 샤베타이 제비란 사람이고, 태봉의 왕 궁예입니다.
발 코크바는 ‘별의 아들’ 곧 다윗의 자손 메시아란 뜻으로 지구상에 처음 교회가 설립된 지 102년만인 주후 132-135년 사이에 있었던 제2차 유대전쟁 당시 유대인들과 그들이 존경했던 랍비 아퀴바로부터 메시아로 추앙받았던 혁명가였습니다. 이 사람의 본명은 ‘Simon ben Kosiba’ 즉 ‘코시바의 아들 시몬’입니다. 그를 추종하던 자들은 그를 ‘Bar Kochba’ 곧 ‘별의 아들’이라 불렀지만, 그러나 그에게 실망한 사람들, 예를 들면, 팔레스타인 탈무드의 편집자 같은 사람들은 그를 ‘Bar Kozeba’ 곧 ‘실망의 아들’ 혹은 ‘거짓말의 아들’이라 불렀습니다. 발 코크바나 궁예와 같은 자칭 메시아 또는 자칭 미륵들은 정치․군사적 혁명을 시도했던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혁명은 백이면 백 다 민중에게 큰 아픔과 시련을 안겨준 채 끝장나곤 했습니다. 그래서 ‘시몬 벤 코시바’는 ‘별의 아들’이란 이름까지 듣다가 나중에는 ‘실망의 아들’ 또는 ‘거짓말의 아들’로 추락했던 것입니다.
태봉 왕 궁예도 처음에는 백성을 구제하는 미륵처럼 행세하다가 나중에는 포악한 군주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이들 말고도 근대에 일어난 혁명들, 예를 들어, 19세기 중반 청나라 사람 홍수전의 태평천국의 난(1850-1864), 20세기 초 레닌의 러시아혁명(1917), 20세기 후반 우간다의 이디 아민, 이라크의 후세인, 박정희의 군사혁명에 이르기까지 그들 민족에게 시련을 안기지 않았던 예는 없었습니다.
유대인들은 과거 2,600년 동안 나라 잃은 설음 때문에 피폐할 때로 피폐해져 있었기 때문에 다른 어느 민족보다도 더 애타게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래서였는지 예수님 이후 지금까지 30명이 넘는 사람들이 자기가 메시아라고 주장하였으나 예수님처럼 영웅의 길, 곧 십자가의 길을 걸었고, 무덤에서 부활한 사람이 없습니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영웅 또는 메시아의 한 형태는 다윗 왕처럼 혁명가로써 나타났습니다. 알렉산드로스 대왕, 유대인 열심당원 발 코크바, 쿠바의 혁명 영웅 게체바라를 비롯해서 우리나라에서는 후백제의 견훤, 태봉의 궁예, 승려들이었던 묘청, 우본, 김윤후, 신돈, 조선시대의 임꺽정, 정여립, 이몽학, 홍경래, 전봉준, 그리고 근대에 와서 박정희 대통령 등이 대표적인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또 다른 형태의 영웅 또는 메시아는 모세나 엘리야처럼 종교적인 형태로 나타납니다. 유대인 가운데서 대표적인 사람이 1665년 5월 31일에 메시아로 선포한 샤베타이 제비입니다. 우리나라에는 동학창시자인 최제우, 통일교의 문선명, 천부교의 박태선과 같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최제우의 ‘제우’를 풀이하면 ‘구세주’란 뜻입니다.
유대인의 거짓 메시아 샤베타이 제비(Shabbetai Zevi)는 터키 서머나 출생의 유대인입니다. 그는 성장기에 조울증으로 의심될만한 이상한 성향들을 보였고, 모세의 율법을 고의적으로 어긴다든지, 유대인들이 금하는 음식을 먹는다든지, 하나님의 이름을 입에 함부로 올린다든지 하는 식의 일련의 불경스런 행동들 때문에 1656년에 회당과 공동체로부터 추방당했습니다. 이스탄불에 가서는 토라가 폐지되었노라고 선포하였고, 카이로에 가서는 1648년 폴란드에서 자행된 유대인학살 때 피신하여 매춘부로 살고 있던 여인과 결혼함으로써 스캔들에 휩싸이기도 했습니다. 1662년에는 예루살렘 인근 가자(Gaza)에서 젊고 박식하고 축귀(逐鬼)에 능숙한 나단(Nathan)이란 랍비를 만났는데, 그로부터 샤베타이는 자신의 조울증 현상이 자신이 메시아임을 입증하는 증거란 말을 듣게 됩니다. 샤베타이는 랍비 나단의 설득으로 1665년 5월 31일 자신이 메시아임을 선포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의 이런 주장은 수세기에 걸친 박해와 추방으로 고립무원에서 고군분투하던 온 세계의 유대인들을 일시에 흥분시키기에 충분하였고, 전 유대인 역사를 통해서 30여명의 자칭 메시아들이 나왔지만, 그 누구도 샤베타이처럼 대중적인 지지를 일찍이 받아본 적이 없을 만큼 대단히 열광적이었습니다.
샤베타이의 지지자들은 부유한 사람, 가난한 사람, 배운 사람, 못 배운 사람을 막론하고 모든 계층에 유포되어 있었습니다. 팸플릿과 같은 전도용지들이 영어로 화란어로 독일어로 이탈리어로 만들어졌습니다. 폴란드와 리투아니아에서는 그를 치켜세우는 대중행렬들이 있었고, 오토만 제국에서는 예언자들이 거리를 오가면서 샤베타이가 옥좌에 앉은 것을 보았노라고 환상을 설명하였습니다. 모든 업무가 정지상태가 되었고, 터키의 유대인들은 그들의 안식일 기도들에서 술탄의 이름을 빼버리고 대신에 샤베타이의 이름을 넣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일련의 결과들로 인해서 샤베타이는 1666년 1월 이스탄불에서 반역죄로 체포되어 감옥에 투옥되었습니다. 샤베타이는 감옥에 있는 동안 자신이 쓴 편지에 “나는 주 너희 하나님이니라. 샤베타이 제비.”라고 서명하기 시작했지만, 정작 그가 술탄으로부터 이슬람에 개종하든지 죽음을 선택하든지 하라고 했을 때에 샤베타이는 이슬람교를 선택했고, 그는 즉각 석방되었으며, 그에게는 황실연금이 지급되었고, 명백하게 충성스런 무슬림으로서 살다가 1676년 9월 17일 사망하였습니다.
샤베타이 신드롬은 유대인들이 수세기 동안 박해와 유배와 굴욕을 당하며 살았던 데서 비롯된 것이며, 그런 처참한 상황에서 샤베타이의 등장은 희망의 등불이었고, 복음이었으며, 일시적인 해프닝으로 끝나긴 했지만, 전 세계의 유대인들이 내적으로는 자유와 해방을 경험하기도 했습니다.
최제우는 검가(劒歌)를 짓고 검무(劒舞)를 추곤 하였는데, 이것이 화근이 되어 죽음을 자초하게 된 것으로 나타나 있습니다. 최제우는 도를 깨닫고 전도한지 5년 만에 최시형에게 대를 있게 했고, 1864년 3월 10일 대구에서 참형을 받아 죽었습니다. 그의 죽음은 단순히 종교적인 이유보다는 검가와 검무로 인한 국가모반을 꾀한다는 죄명으로 처형되었습니다. 그리고 그와 관련된 이야기들은 복음서에 실린 예수님의 이야기와 너무나 흡사해서 모방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을 정도입니다. 그리고 통일교의 문선명과 천부교의 박태선은 종교보다는 사업이 더 앞선 사람들입니다. 이들 종교적인 거짓 메시아들의 삶에서 우리는 예수님이 걸었던 영웅의 길, 곧 십자가의 길을 전혀 찾아볼 수 없습니다.
최근 끝난 역사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으로 인해서 성웅 이순신의 죽음을 놓고, 그의 죽음이 자살이었느냐, 전사였느냐, 아니면 자작극이었느냐를 놓고 이런 저런 추측들을 하고 있는 줄로 압니다. 적군이 쏘는 조총 앞에서 투구만 벗었느냐, 갑옷을 통째로 벗었느냐, 또는 ‘투구를 벗는다’, ‘갑옷을 벗는다’는 등의 표현이 ‘죽기로 싸우겠다’는 의지의 표명일 뿐이냐를 놓고도 의견이 나눠지는 것 같습니다. 아무튼 30대 중반에 이른 한창의 나이에 통치자들의 심기를 건든 일련의 행동들을 통해서 자신의 죽음을 재촉했던 예수님의 모습과 노량해전에서의 이순신의 모습은 닮은꼴입니다. 이순신이 왜군과의 해전에서 23전 23승이란 연전연승을 거뒀지만, 조정의 선조 임금과 윤두수 일파로부터는 끊임없는 시기와 모함과 살해의 위협을 받았고, 견디기 힘든 어려운 지경에서도 오직 나라와 백성을 살리겠다는 충정으로 자신을 죽음으로 몰아갔던 것처럼, 우리 예수님도 나라와 백성들을 도탄에 빠지게 하는 가난과 질고의 상징인 사단과의 싸움에서는 연전연승하였지만, 그럴수록 지배자들인 사두개인들과 바리새인들로부터는 지칠 줄 모르는 시기와 모함과 살해의 위협을 견디어야 했고, 오로지 도탄에 빠진 인류를 구원코자 하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이루어 백성을 죄악에서 건지겠다는 충정으로 자신을 영웅의 길, 십자가의 길, 죽음의 언덕 골고다로 몰아갔던 것입니다.
칠년에 걸친 조일전쟁에서 가장 성공한 사람은 누구일까요? 임금 선조일까요, 윤두수 일파일까요? 왜적일까요? 명나라일까요? 다 아닙니다. 모함을 받아 누명을 쓰고 모진 고초를 당하면서도 자신의 신념에 흔들리지 않고, 나라를 살리는 옳은 일을 위해서 타협을 불사했던 이순신 장군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를 도와 국가를 위해 목숨을 바쳤던 수많은 무명의 용사들이었습니다. 그들이 진정한 승리자들이었습니다. 우리 예수님도 아무 까닭 없이 체포되어 갖은 고문과 모욕을 당하시다가 결국은 십자가에 못 박히는 수모를 겪게 되셨지만, 전혀 흔들림이 없었습니다. 샤베타이나 최제우가 보여준 최후의 모습과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예수님이나 이순신과 같은 분들의 삶의 결과가 가져다 준 보상이 어떤 것인지, 그것을 모르시는 분은 없으시겠지요? 이순신은 세상을 떠난 지 500여년이 흘렀지만 그분의 이름은 시간이 갈수록 더욱 빛나고 있고, 많은 사람들의 마음에 진정한 영웅으로 남아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예수님도 세상을 떠난 지 2,000여년이 흘렀지만, 그분을 존경하고 사모하는 사람들이 전 세계에 그 수를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로 많습니다. 진정으로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존경과 사랑, 박해하고 탄압하던 원수들조차도 그들에 대한 존경심을 숨길 수 없었던, 결코 적들이 이겨낼 수 없고, 어찌해볼 수 없는 그런 분들이었다는 것을 역사적 사료나 성서는 증언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가 우리를 구원하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라고 말한 사도 바울의 말씀이 얼마나 큰 가르침이요 깨달음인가를 새삼 느껴보면서 예수님이 걸었던 십자가의 길이야말로 영웅의 길이요, 만 인류를 구원하는 구세주의 길이었다고 확신합니다. 이 점을 깊이 생각하시면서 고린도전서 1장 18-25절을 한 번 더 읽고 마치겠습니다.
[18]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19] 기록된바 내가 지혜 있는 자들의 지혜를 멸하고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폐하리라 하였으니, [20] 지혜 있는 자가 어디 있느뇨? 선비가 어디 있느뇨? 이 세대에 변사가 어디 있느뇨?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케 하신 것이 아니뇨? [21]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고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22]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23]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24]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25] 하나님의 미련한 것이 사람보다 지혜 있고 하나님의 약한 것이 사람보다 강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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