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사렛 예수님(눅 4:16-30)
본문
나사렛 예수님(눅 4:16-30)
‘나사렛’하면 떠올릴 수 있는 단어가 ‘배척’이란 두 글자입니다. ‘나사렛 예수’ 또는 ‘나사렛 사람들’하면 떠올릴 수 있는 단어가 ‘멸시’와 ‘천대’입니다. 여기서 ‘나사렛 사람들’이란 나사렛 동리에 사는 사람들을 말하는 호칭이 아니고, ‘나사렛 예수’를 따르는 무리, 곧 기독교인들을 호칭하는 말입니다. 지금도 유대인들은 기독교인들을 현대 히브리어로 ‘노쯔리’(Notzri)라고 부른다고 합니다. 아랍어로는 ‘낫스라이’라 하는데 둘 다 ‘나사렛 사람’이란 뜻입니다. 이 말에는 경멸의 뜻을 담고 있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여러 가지 호칭들 가운데, ‘나사렛 예수’란 호칭이 있고, ‘다윗의 자손 예수’란 호칭이 있습니다. 다 아시다시피 ‘다윗의 자손 예수’란 호칭은 메시아에 대한 호칭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이라 한 것은 예수님에 대해서 제대로 알고, 영적으로 깊이 아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높여서 부르는 호칭이 되겠고, ‘나사렛 예수’는 예수님을 피상적으로 알고, 육체적으로만 아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낮춰서 부르는 호칭이 되겠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이스라엘에서는 기독교인을 무시하는 유대인들은 '노쯔리' 혹은 '노쯔림‘이라 부르고 있고, 예수님을 믿는 유대인들은 메시아를 믿는 사람의 뜻으로 ’메시아킴‘이라 부른다고 합니다.
아시다시피 나사렛은 예수님의 고향이고, 부모인 요셉과 마리아의 고향입니다. 나사렛은 예루살렘에서 북쪽으로 92㎞, 갈릴리 바다에서 서남쪽으로 19㎞, 가나에서 남쪽으로 13㎞에 위치하고 있다고 합니다. 사방이 산으로 둘러있고, 해발 380미터 정도 언덕위에 세워진 작은 마을입니다. 현재 나사렛에는 4만 명 정도가 살고 있는데, 그 가운데 상당수가 아랍인이라고 합니다. 이스라엘의 다른 도시들과는 달리 나사렛 인구의 60퍼센트 이상이 기독인이고, 주일날에는 관공서를 제외한 모든 가게들이 문을 닫는다고 합니다. 이스라엘의 다른 도시들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풍경입니다.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겠느냐?”는 나다나엘의 반문에서 볼 수 있듯이, 예수님은 천한 지방의 출신이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스토아철학이 발전한 다소출생이요, 예루살렘의 명문인 가말리엘 문하생이었습니다. 젊은 바울은 예루살렘에서 기독교인들을 발견하고, 그들을 ‘노쯔림’이라고 무시하며 탄압하였고, 잡아다가 옥에 가두는 일에 앞장을 섰습니다. 그러던 바울이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 때 예수님이 바울에게 무엇이라고 했는지 아십니까? “나는 네가 핍박하는 나사렛 예수”라고 하셨습니다(행 22:8, 26:9). ‘나사렛 예수’와 그분을 믿는 ‘노쯔림’을 멸시하고 배척하는 바울에게 “나는 네가 핍박하는 나사렛 예수”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그 후로 바울이 어떻게 변화되었습니까? 그가 멸시하고 박해하던 ‘나사렛 예수’를 참 메시아로, 그분을 따르는 ‘노쯔림’을 진정한 ‘메시아킴’으로 확신하게 되었고, ‘나사렛 예수’를 따르는 ‘노쯔림’이 되기를 자청하였으며, ‘노쯔림’의 충실한 앞잡이가 되었습니다. 바울의 이런 변화, 곧 ‘나사렛 예수’를 참 메시아로, ‘노쯔림’을 ‘메시아킴’으로 인식하는 변화, 또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가 우리를 구원하는 하나님의 능력과 하나님의 지혜가 된다는 인식의 변화가 우리 모두의 마음 속 깊은 곳에서부터 일어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본문 말씀을 보면, 나사렛 사람들조차도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겠느냐?”라는 자기비하적인 천민근성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다 예수님을 칭찬하였고, 그분의 은혜로운 말씀에 경탄을 금치 못하면서도 “이 사람이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고 하면서 무시하고 배척하였습니다. “이 사람이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라는 말 속에는 여러 가지 뜻이 함축되어 있습니다.
첫째는 잘한다고 칭찬도 하고, 경탄해마지 않으면서도, “그 사람 천민 출신 아니냐? 그 친구 별 볼일 없는 사람 아니냐?”는 식의 무시와 경멸의 뜻이 담겨 있고, 둘째는 예수님을 그들이 기다리고 고대하던 메시아로 인정할 수 없다는 뜻이 담겨 있으며, 셋째는 고향 사람들이 예수님을 배척하고 죽이려고 했듯이, 동족인 유대인들에 의해서 배척을 당하시고, 결국에는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될 것을 미리 암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나사렛 사람들은 예수님에 대해서 선입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첫째는 그가 목수의 아들이고, 또 그 자신도 목수였다는 것입니다. 그런 그에게 어떻게 또 무슨 놈의 지혜와 권능을 기대할 수 있겠느냐는 식이었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예수님을 무시하고 배척하였습니다.
둘째는 나사렛 사람들이 예수님에 대해서 또 그분이 말씀하신 설교내용에 대해서 진지하게 숙고하기보다는 그들은 이미 알고 있고, 소문으로 들어서 아는 피상적인 지식만으로 예수님을 평가하려 하였습니다. 그들은 편견과 무지로 이미 눈이 어두웠고, 귀가 막혔던 것입니다. 따라서 그들은 예수님이 진정으로 어떤 분이신가를 알지 못했고, 사소한 일로 흥분하여 자기 마을 출신의 젊은이를, 그것도 가족이 버젓이 살아있고, 함께한 이웃인데도 불구하고, 오늘날에 추락산이라 불리는 높이 13-14미터 되는 동네 밖 산 낭떠러지까지 예수님을 끌고 가서 밀쳐 떨어뜨려 죽이려고 하였습니다.
셋째는 예수님께서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눅 4:18-19)는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읽으시고, 설명하신 후에 “이 글이 오늘날 너희 귀에 응하였다.”(눅 4:21)고 결론내리셨을 때에 겉으로는 그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예수님을 칭찬하고 경탄해 마지않는 듯이 보였지만, 실상은 그들이 전혀 깨닫지 못했고 이해하지 못했으며, 무지하였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기 자신이 메시아인 것을 분명하게 밝히셨지만, 그들은 그 사실을 전혀 알아듣지 못했던 것입니다.
이렇듯 나사렛 사람들은 예수님을 “육체대로”(고후 5:16) 혹은 세상적인 견해를 따라 혹은 혈통과 외모에 따른 편견으로 예수님을 알고 있는 자들이었습니다. 이런 피상적인 예수님에 관한 지식이 그들로 하여금 예수님을 올바르게 아는 것을 가로막고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편견을 버려야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처럼 예수님을 잘 안다고 자부하는 신앙인들 가운데 특히 예수님에 대해서 편견을 갖기 쉽고 잘못된 신앙에 빠지기 쉽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새롭고 올바른 지식을 거부하고 배척하는 경향이 있어서 오만이란 자기우상에 빠져 있는 것을 자주 봅니다.
이런 여러 가지 이유들 때문에 오늘날에도 예수님은 환영받지 못하고 배척당하고 계십니다. 누가복음에서 예수님은 고향사람들에게 배척당하시고, 사마리아 사람들에게도 배척당하시고(눅 9:51-56), 유대인들에게도 배척당하시고, 끝내는 십자가에 못 박혀 죽기까지 배척을 당하십니다. 고향사람들은 물론이고, 혼혈족인 사마리아인들과 동족인 유대인들조차도 그분을 배척하였습니다. 여기서 배척은 두어 가지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첫째는 우리 기독교인들의 삶 자체가 배척을 각오해야할 삶이란 뜻입니다. 예수님조차 배척당하셨는데, 하물며 그분을 쫓는 우리 신자들이야 어떻게 세상으로부터 배척을 피할 수 있겠습니까?
둘째는 복음을 받아야할 유대인들은 그들의 완악한 마음 때문에 받지를 못하고, 오히려 흑암에 살던 이방인들이 그 복음을 받았고, 그들이 유대인이 받을 축복을 대신 받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의 배척이 오히려 이방인들에게는 축복이 되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방인 사렙다 과부가 선지자 엘리야로 인하여 흉년에도 불구하고 집에 먹을 양식이 떨어지지 아니하였고, 죽었던 아들의 목숨이 되살아나는 큰 복을 받은 것과 시리아의 나아만이 엘리사로 인하여 문둥병을 고침 받고 제 나라로 돌아간 축복에 대해서 언급한 뜻이 여기에 있습니다.
무지한 나사렛 사람들도 예수님의 이 말뜻을 알아차렸는지, 분노하며 예수님을 배척하고 죽이려했습니다. 축복받을 자격은 없으면서 축복이 이방인들에게 넘어가는 것이 몹시 싫었던 모양입니다. 예수님이 사렙다 과부와 나아만을 거론한 것은 선민인 유대인들에 대한 모독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에베소서 3장 1-12절을 보면, 사도 바울은 “이방인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후사가 되고, 함께 지체가 되고, 함께 약속에 참예하는 자가 되는 것”을 하나님의 은혜의 경륜이라 하였고, 하나님께서 계시로 자기에게 알게 하신 비밀이라고 하였으며, “다른 세대에서는 사람의 아들들에게 알게 하지 아니하신 것”이며,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이며, “영원부터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속에 감취었던 비밀의 경륜”이며, “영원부터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예정하신 뜻”이라고 하였습니다. 사도 바울 자신은 이것을 위해서 부름을 받았고, 신실하게 그 직무를 수행한다고 했습니다.
여러분과 나는 세상 사람들이 천시하는 ‘나사렛 예수’를 쫓는 ‘노쯔림’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이 인정한 ‘메시아킴’이란 사실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에게 전파된 ‘나사렛 예수’에 대한 복음은 우리들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후사가 되고, 함께 지체가 되고, 함께 약속에 참예하는 자”가 되게 하는 것이며, 하나님의 은혜의 경륜이요, 하나님이 계시로써 사도들과 선지자들에게 알게 하신 비밀이며,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이며, “영원부터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속에 감취었던 비밀의 경륜”이며, “영원부터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예정하신 뜻”입니다. 우리도 바울처럼 이 복음을 위해서 부름을 받았고, 그 직무를 수행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소명의식이 필요합니다. 나사렛 예수님이 여러분에게는 빛이요 생명이신 사실을 비밀처럼 마음에 깊이 간직하시기를 바랍니다.
‘나사렛’하면 떠올릴 수 있는 단어가 ‘배척’이란 두 글자입니다. ‘나사렛 예수’ 또는 ‘나사렛 사람들’하면 떠올릴 수 있는 단어가 ‘멸시’와 ‘천대’입니다. 여기서 ‘나사렛 사람들’이란 나사렛 동리에 사는 사람들을 말하는 호칭이 아니고, ‘나사렛 예수’를 따르는 무리, 곧 기독교인들을 호칭하는 말입니다. 지금도 유대인들은 기독교인들을 현대 히브리어로 ‘노쯔리’(Notzri)라고 부른다고 합니다. 아랍어로는 ‘낫스라이’라 하는데 둘 다 ‘나사렛 사람’이란 뜻입니다. 이 말에는 경멸의 뜻을 담고 있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여러 가지 호칭들 가운데, ‘나사렛 예수’란 호칭이 있고, ‘다윗의 자손 예수’란 호칭이 있습니다. 다 아시다시피 ‘다윗의 자손 예수’란 호칭은 메시아에 대한 호칭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이라 한 것은 예수님에 대해서 제대로 알고, 영적으로 깊이 아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높여서 부르는 호칭이 되겠고, ‘나사렛 예수’는 예수님을 피상적으로 알고, 육체적으로만 아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낮춰서 부르는 호칭이 되겠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이스라엘에서는 기독교인을 무시하는 유대인들은 '노쯔리' 혹은 '노쯔림‘이라 부르고 있고, 예수님을 믿는 유대인들은 메시아를 믿는 사람의 뜻으로 ’메시아킴‘이라 부른다고 합니다.
아시다시피 나사렛은 예수님의 고향이고, 부모인 요셉과 마리아의 고향입니다. 나사렛은 예루살렘에서 북쪽으로 92㎞, 갈릴리 바다에서 서남쪽으로 19㎞, 가나에서 남쪽으로 13㎞에 위치하고 있다고 합니다. 사방이 산으로 둘러있고, 해발 380미터 정도 언덕위에 세워진 작은 마을입니다. 현재 나사렛에는 4만 명 정도가 살고 있는데, 그 가운데 상당수가 아랍인이라고 합니다. 이스라엘의 다른 도시들과는 달리 나사렛 인구의 60퍼센트 이상이 기독인이고, 주일날에는 관공서를 제외한 모든 가게들이 문을 닫는다고 합니다. 이스라엘의 다른 도시들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풍경입니다.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겠느냐?”는 나다나엘의 반문에서 볼 수 있듯이, 예수님은 천한 지방의 출신이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스토아철학이 발전한 다소출생이요, 예루살렘의 명문인 가말리엘 문하생이었습니다. 젊은 바울은 예루살렘에서 기독교인들을 발견하고, 그들을 ‘노쯔림’이라고 무시하며 탄압하였고, 잡아다가 옥에 가두는 일에 앞장을 섰습니다. 그러던 바울이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 때 예수님이 바울에게 무엇이라고 했는지 아십니까? “나는 네가 핍박하는 나사렛 예수”라고 하셨습니다(행 22:8, 26:9). ‘나사렛 예수’와 그분을 믿는 ‘노쯔림’을 멸시하고 배척하는 바울에게 “나는 네가 핍박하는 나사렛 예수”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그 후로 바울이 어떻게 변화되었습니까? 그가 멸시하고 박해하던 ‘나사렛 예수’를 참 메시아로, 그분을 따르는 ‘노쯔림’을 진정한 ‘메시아킴’으로 확신하게 되었고, ‘나사렛 예수’를 따르는 ‘노쯔림’이 되기를 자청하였으며, ‘노쯔림’의 충실한 앞잡이가 되었습니다. 바울의 이런 변화, 곧 ‘나사렛 예수’를 참 메시아로, ‘노쯔림’을 ‘메시아킴’으로 인식하는 변화, 또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가 우리를 구원하는 하나님의 능력과 하나님의 지혜가 된다는 인식의 변화가 우리 모두의 마음 속 깊은 곳에서부터 일어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본문 말씀을 보면, 나사렛 사람들조차도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겠느냐?”라는 자기비하적인 천민근성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다 예수님을 칭찬하였고, 그분의 은혜로운 말씀에 경탄을 금치 못하면서도 “이 사람이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고 하면서 무시하고 배척하였습니다. “이 사람이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라는 말 속에는 여러 가지 뜻이 함축되어 있습니다.
첫째는 잘한다고 칭찬도 하고, 경탄해마지 않으면서도, “그 사람 천민 출신 아니냐? 그 친구 별 볼일 없는 사람 아니냐?”는 식의 무시와 경멸의 뜻이 담겨 있고, 둘째는 예수님을 그들이 기다리고 고대하던 메시아로 인정할 수 없다는 뜻이 담겨 있으며, 셋째는 고향 사람들이 예수님을 배척하고 죽이려고 했듯이, 동족인 유대인들에 의해서 배척을 당하시고, 결국에는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될 것을 미리 암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나사렛 사람들은 예수님에 대해서 선입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첫째는 그가 목수의 아들이고, 또 그 자신도 목수였다는 것입니다. 그런 그에게 어떻게 또 무슨 놈의 지혜와 권능을 기대할 수 있겠느냐는 식이었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예수님을 무시하고 배척하였습니다.
둘째는 나사렛 사람들이 예수님에 대해서 또 그분이 말씀하신 설교내용에 대해서 진지하게 숙고하기보다는 그들은 이미 알고 있고, 소문으로 들어서 아는 피상적인 지식만으로 예수님을 평가하려 하였습니다. 그들은 편견과 무지로 이미 눈이 어두웠고, 귀가 막혔던 것입니다. 따라서 그들은 예수님이 진정으로 어떤 분이신가를 알지 못했고, 사소한 일로 흥분하여 자기 마을 출신의 젊은이를, 그것도 가족이 버젓이 살아있고, 함께한 이웃인데도 불구하고, 오늘날에 추락산이라 불리는 높이 13-14미터 되는 동네 밖 산 낭떠러지까지 예수님을 끌고 가서 밀쳐 떨어뜨려 죽이려고 하였습니다.
셋째는 예수님께서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눅 4:18-19)는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읽으시고, 설명하신 후에 “이 글이 오늘날 너희 귀에 응하였다.”(눅 4:21)고 결론내리셨을 때에 겉으로는 그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예수님을 칭찬하고 경탄해 마지않는 듯이 보였지만, 실상은 그들이 전혀 깨닫지 못했고 이해하지 못했으며, 무지하였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기 자신이 메시아인 것을 분명하게 밝히셨지만, 그들은 그 사실을 전혀 알아듣지 못했던 것입니다.
이렇듯 나사렛 사람들은 예수님을 “육체대로”(고후 5:16) 혹은 세상적인 견해를 따라 혹은 혈통과 외모에 따른 편견으로 예수님을 알고 있는 자들이었습니다. 이런 피상적인 예수님에 관한 지식이 그들로 하여금 예수님을 올바르게 아는 것을 가로막고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편견을 버려야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처럼 예수님을 잘 안다고 자부하는 신앙인들 가운데 특히 예수님에 대해서 편견을 갖기 쉽고 잘못된 신앙에 빠지기 쉽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새롭고 올바른 지식을 거부하고 배척하는 경향이 있어서 오만이란 자기우상에 빠져 있는 것을 자주 봅니다.
이런 여러 가지 이유들 때문에 오늘날에도 예수님은 환영받지 못하고 배척당하고 계십니다. 누가복음에서 예수님은 고향사람들에게 배척당하시고, 사마리아 사람들에게도 배척당하시고(눅 9:51-56), 유대인들에게도 배척당하시고, 끝내는 십자가에 못 박혀 죽기까지 배척을 당하십니다. 고향사람들은 물론이고, 혼혈족인 사마리아인들과 동족인 유대인들조차도 그분을 배척하였습니다. 여기서 배척은 두어 가지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첫째는 우리 기독교인들의 삶 자체가 배척을 각오해야할 삶이란 뜻입니다. 예수님조차 배척당하셨는데, 하물며 그분을 쫓는 우리 신자들이야 어떻게 세상으로부터 배척을 피할 수 있겠습니까?
둘째는 복음을 받아야할 유대인들은 그들의 완악한 마음 때문에 받지를 못하고, 오히려 흑암에 살던 이방인들이 그 복음을 받았고, 그들이 유대인이 받을 축복을 대신 받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의 배척이 오히려 이방인들에게는 축복이 되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방인 사렙다 과부가 선지자 엘리야로 인하여 흉년에도 불구하고 집에 먹을 양식이 떨어지지 아니하였고, 죽었던 아들의 목숨이 되살아나는 큰 복을 받은 것과 시리아의 나아만이 엘리사로 인하여 문둥병을 고침 받고 제 나라로 돌아간 축복에 대해서 언급한 뜻이 여기에 있습니다.
무지한 나사렛 사람들도 예수님의 이 말뜻을 알아차렸는지, 분노하며 예수님을 배척하고 죽이려했습니다. 축복받을 자격은 없으면서 축복이 이방인들에게 넘어가는 것이 몹시 싫었던 모양입니다. 예수님이 사렙다 과부와 나아만을 거론한 것은 선민인 유대인들에 대한 모독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에베소서 3장 1-12절을 보면, 사도 바울은 “이방인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후사가 되고, 함께 지체가 되고, 함께 약속에 참예하는 자가 되는 것”을 하나님의 은혜의 경륜이라 하였고, 하나님께서 계시로 자기에게 알게 하신 비밀이라고 하였으며, “다른 세대에서는 사람의 아들들에게 알게 하지 아니하신 것”이며,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이며, “영원부터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속에 감취었던 비밀의 경륜”이며, “영원부터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예정하신 뜻”이라고 하였습니다. 사도 바울 자신은 이것을 위해서 부름을 받았고, 신실하게 그 직무를 수행한다고 했습니다.
여러분과 나는 세상 사람들이 천시하는 ‘나사렛 예수’를 쫓는 ‘노쯔림’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이 인정한 ‘메시아킴’이란 사실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에게 전파된 ‘나사렛 예수’에 대한 복음은 우리들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후사가 되고, 함께 지체가 되고, 함께 약속에 참예하는 자”가 되게 하는 것이며, 하나님의 은혜의 경륜이요, 하나님이 계시로써 사도들과 선지자들에게 알게 하신 비밀이며,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이며, “영원부터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속에 감취었던 비밀의 경륜”이며, “영원부터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예정하신 뜻”입니다. 우리도 바울처럼 이 복음을 위해서 부름을 받았고, 그 직무를 수행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소명의식이 필요합니다. 나사렛 예수님이 여러분에게는 빛이요 생명이신 사실을 비밀처럼 마음에 깊이 간직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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