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그네 예수님(눅 9:51-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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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그네 예수님(눅 9:51-62)
작년 오월에 소천하신 시인 구상의 시 가운데 1974년 5월 31일자 동아일보에 발표한 ‘그분이 홀로서 가듯’이란 유명한 시가 있습니다. 이 시를 지으시고 꼭 30년 만에 하늘로 부름을 받으셨습니다.
홀로서 가야만 한다. 저 2천 년 전 로마의 지배 아래 <사두가이>와 <바리사이>들의 수모를 받으며 그분이 홀로서 가듯 나 또한 홀로서 가야만 한다.
악의 무성한 꽃밭 속에서, 진리가 귀찮고 슬프더라도, 나 혼자의 무력에 지치고, 번번이 패배의 쓴잔을 마시더라도, 제자들의 배반과 도피 속에서, 백성들의 비웃음과 돌팔매를 맞으며, 그분이 십자가의 길을 홀로서 가듯, 나 또한 홀로서 가야만 한다.
정의는 마침내 이기고 영원한 것이요, 달게 받는 고통은 값진 것이요, 우리의 바람과 사랑이 헛되지 않음을 믿고서
아무런 영웅적 기색도 없이, 아니, 볼꼴 없고 병신스런 모습을 하고, 그분이 부활의 길을 홀로서 가듯, 나 또한 홀로서 가야만 한다.
이 시는 예수님께서 외롭게 나그네의 길을 걸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분이 홀로 가신 외로운 길이 십자가의 길이요, 권력자들로부터 수모를 겪은 길이요, 제자들로부터 배반을 당한 길이요, 돌봐준 사람들로부터 비웃음사고 돌팔매질 당한 길이요, 아무런 영웅적 기색 없이 볼꼴 없고 병신스런 모습으로 가신 길이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 길은 정의와 평화를 위한 길이요, 부활의 길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악의 무성한 꽃밭 속에서, 진리가 귀찮고 슬프더라도, 나 혼자의 무력에 지치고, 번번이 패배의 쓴잔을 마시더라도” 우리는 예수님처럼 이 외로운 나그넷길을 가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정의는 마침내 이기고 영원한 것이요, 달게 받는 고통은 값진 것이요, 우리의 바람과 사랑이 헛되지 않음을 믿고서” 가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또 시인 천상병의 글 가운데, ‘귀천’(歸天)이란 짤막한 시가 있습니다.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새벽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 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노을빛 함께 단 둘이서 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하면은,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
이 시에서 천상병은 이생에서의 삶은 하늘에서 잠시 지상으로 소풍 나온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인생은 아침이슬이나 저녁노을빛처럼 영롱하고 아름답기도 하지만, 그 또한 한 순간에 사라질 존재란 것입니다. 인생은 하늘로 돌아가는 나그넷길이란 것입니다. 이것을 모르고 산다면, 그 사람의 삶은 아침이슬이나 저녁노을빛처럼 영롱하고 아름다울 수 없고,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아름다웠다고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인간의 삶이 하늘을 떠나온 짧은 소풍길이요, 하늘로 돌아가야 할 나그넷길이란 것을 모른다면, 그 사람의 삶은, 한순간에 불과한 아침이슬이나 저녁노을빛을 영원한 것으로 착각한 삶이요, 사라져버릴 것을 붙잡으려고 발버둥친 허무한 인생이 되고 말 것입니다.
예수님의 짧은 인생도 떠나온 천국을 향한 외로운 나그넷길이었습니다. 핍박과 배척의 길이었고, 골고다에 세워진 십자가의 길이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분의 길은 부활의 길이었습니다. 누가는 이 예수님이 걸어가신 길을, 또 그분이 남기신 발자취를 우리 성도들이 따라가야 할 길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분이 가신 길이 비록 고난의 길이요, 외로운 나그넷길이었지만, 그 길이 진리의 길이요, 빛과 생명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누가가 소개하는 예수님은 배척을 당하신 분입니다. 배척당한 사람의 삶은 나그네의 삶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누가복음에서는 예수님의 공적인 생애를 나그네의 삶으로 그리고 있습니다. 또 이 나그네의 종착지가 골고다 언덕이고, 그 언덕 위에 세워진 십자가에 못 박혀 죽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조선시대 천주교인들 가운데 박해를 피해 전국의 깊은 산골로 떠돌 때에 상복차림을 했다는 것은 나그네의 삶과 죽음이 밀접한 관계에 있다는 점을 잘 말해줍니다.
ꡔ예기ꡕ에 “부모가 돌아가시면 삼년동안 상복을 입는다.”고 했습니다. 대개 사람은 태어나서 세살이 돼서야 젖을 떼고 어머니 품을 떠나 살 수 있으므로 자식은 부모가 돌아가시면 최소한 3년 동안은 상복을 입어 그 은혜에 보답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이 경우 항상 상복만 입어야 했고, 장례식과 제사 외에는 일체 다른 공식적인 모임에 참석할 수 없었습니다. 일체의 가무와 오락도 할 수 없었습니다. 게다가 어깨까지 덮는 방갓을 쓰고 땅만 보고 걸었고, 얼굴가리개로 입 코 눈까지 가렸습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이 조선풍속이 박해시대에 나그네 기독교인들, 특히 외국인 선교사들에게 외출이나 이동을 가능케 해준 훌륭한 도구가 되었던 것입니다.
이 같은 사실은 김대건과 함께 마카오에서 신학공부를 마치고, 김대건에 이어 두 번째로 국내에 들어온 최양업 신부가 1851년 10월에 쓴 편지에서 밝히고 있습니다. 또 다산의 조카사위 황사영도 1801년 신유박해(辛酉迫害) 때에 상복으로 변복(變服)하고 방갓을 쓰고 제천으로 무사히 피신한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늘로 돌아가는 나그네 신자들을 위해서 하나님이 어떤 장치를 마련해 놓으셨는가를 보게 됩니다. 우리는 그 속에서 ‘여호와 이레’ 곧 하나님의 경륜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은 오가작통법이 시행되던 그 살벌한 박해상황 속에서도 남의 눈에 띄기 쉬운 서양인 신부조차도 들키지 않고 이동할 수 있는 길을 마련해 놓으셨던 것입니다. 또 하나님은 박해나 배척을 받아 나그네 신세가 된 신앙인들에게 이 상복을 통해서 거룩한 순교와 죽음에 대해서, 또 이 땅이 영원히 살 본향이 아니란 점을 좀 더 깊게 생각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주셨습니다. 상복차림의 이동과 숨어 지내야했던 고통은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무엇을 뜻하였는지 뼛속까지 각인되었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말씀 누가복음 9장 51절을 보면, “예수께서 승천하실 기약이 차가매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기로 굳게 결심하시고”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승천’은 예수님께서 부활 후 40일간 지상에 계시다가 하나님의 나라에 가신 것을 말하는데 누가가 이 부분을 가장 먼저 큰 관심을 가지고 기록하였습니다. 그리고 승천이란 말과 부활 후 40이란 숫자는 이스라엘 민족이 홍해를 건넌 후에 사막에서 40년을 자기 집 없이 나그네 천막생활을 하다가 가나안 복지에 들어간 것과 관련해서 생각해 볼 때, 예수님을 모범으로 해서 우리 성도들의 삶은 그야말로 외로운 나그네의 삶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목적지가 없는 나그네의 삶이 아니라, 승천 또는 영광의 때를 바라보고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는 나그넷길인 것입니다. 예루살렘은 문자적으로 이스라엘의 수도를 말하지만, 영적으로는 천국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승천하실 기약이 차가매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기로 굳게 결심하시고”라고 한 말씀은 문자적인 의미 곧 사실적 표현이지만, 오늘의 우리 성도들에게는 영적인 의미, 곧 예수님 믿고 거듭난 후에 천국을 향하여 올라가기로 굳게 결심한 신앙생활을 의미할 수 있습니다.
참고로 누가복음은 세 부분으로 되어 있습니다. 1장부터 3장까지는 서론부분이고, 4장부터 9장까지는 갈릴리지역에서의 활동, 10장부터 19장까지는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는 나그넷길, 20장부터 24장까지는 예루살렘에서 최후를 맞는 내용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 가운데서 오늘 우리가 다루고 있는 부분이 예수님이 예루살렘을 향해서 올라가는 나그넷길에 관한 것입니다. 누가는 이 나그넷길을 9장 51절부터 19장 44절까지 전체 24장 가운데 42퍼센트를 차지하는 무려 10장의 분량을 할애하고 있습니다. 그만큼 이 나그넷길이 중요하게 취급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가는 나그넷길이 순탄치 않다는 점이 예수님의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여정에서 드러나고 있습니다. 누가복은 9장 52-56절을 보면, 사마리아 사람들이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을 향하여 가시는 것을 배척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시는 나그넷길과 반복해서 배척당하시는 일들이 매우 밀접한 연관성을 맺고 있음을 암시하는 것입니다. 누가복음에는 몇 차례에 걸쳐 예수님이 배척당하신 일들이 소개되고 있는데, 예언자로서 공생애를 시작하는 시점인 4장에서 갈릴리지역을 대표하는 고향 나사렛사람들로부터 배척당하실 뿐 아니라 살해위협까지 받고 계시고, 갈릴리지역에서의 활동을 마치고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는 시점인 9장에서 예루살렘에서 배척당하여 죽게 될 것을 예고하셨고, 사마리아 사람들로부터도 배척을 당하십니다. 그리고 예루살렘 인근마을 여리고에서의 일을 소개하는 19장에서 열 므나비유를 통해서 배척당하여 죽게 되실 것을 암시하셨고, 예루살렘입성 직후부터는 예수님체포에 대한 구체적인 음모가 진행되었으며, 예수님은 예루살렘에서 정치․종교지도자들뿐 아니라, 심지어 민중과 제자들로부터도 버림을 당하고 체포되어 십자가에 처형당하십니다.
로마제국 당시 이스라엘은 세 개의 행정지방으로 나뉘어 있었습니다. 큰 호수를 끼고 있는 북쪽이 갈릴리지방이고, 가운데가 사마리아지방이고, 사해바다를 끼고 있고 메마른 남쪽이 유대지방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북쪽 갈릴리지방에 속한 고향 나사렛 사람들에게 배척당하셨고, 가운데 지방 사마리아 사람들에게 배척당하셨고, 남쪽 유대지방 사람들 특히 예루살렘의 정치․종교지도자들로부터 버림받고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이는 온 이스라엘 사람들로부터 배척당하여 십자가에 매달리셨음을 암시하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배척의 정도나 크기를 말해 주는 것으로써 땅도 예수님을 버렸고 하늘도 버렸기 때문에, 9장 58절에서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고 하신 말씀대로 의지할 곳 없던 예수님은 십자가에 의지해서 허공에 매달린 채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절규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사람들로부터 배척을 당하여 그 험한 십자가에서 처절하게 절규하며 비참하게 죽는 것에서 끝장을 보셨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복음서에서 승천과 하늘의 영광을 최초로 이야기한 사람이 바로 누가입니다. 누가는 예수님이 부활하셨을 뿐 아니라 하늘로 승천하셔서 하나님의 우편보좌에 앉아 영광과 찬양을 받고 계신다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이 예수님의 생애는 다름 아닌 복음서 기록 당시에 성도들이 처했던 어려운 형편들을 말해주며, 오늘날 우리 성도들의 신앙순례를 대변하는 것이란 점을 이어지는 9장 57-62절의 제자직에 관한 말씀을 통해서 잘 알 수가 있습니다.
57절의 “길 가실 때”란 말은 문자적으로 예수님께서 이스라엘의 수도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시는 길을 말하지만 영적으로는 예수님을 믿는 우리 성도들이 하늘나라의 수도 곧 천성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도들이 천성을 향하여 올라가는 길이 좁은 길이요 순탄한 길이 아닌 십자가의 길인 것은 58절의 말씀,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에서 알 수가 있습니다. 62절의 말씀,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치 아니하니라.”하신 예수님의 말씀에서 성도들이 천성을 향하여 올라가는 길은 복음의 일이요 하나님의 일이요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는 일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 길을 가는 성도들은 배척을 당하고 고난을 당하고 심지어 죽임까지 당할 수도 있지만, 그 마지막은 부활이요 승천이요, 그 최후는 영광이란 점을 명백하게 밝혀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 십자가의 길을 다 간 후에 해처럼 빛나는 부활의 영광이 있고, 승천의 영광이 있고, 세상에서 얻을 수 없는 커다란 보상이 기다리고 있다고 해도 마라톤대회에 나선 주자처럼 그 길을 완주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단지 그림의 떡일 뿐입니다. 그래서 누가는 예수님이 어떻게 이 험한 길을 끝까지 완주하시고 상을 받으셨는가를 우리에게 두 가지로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천로역정 곧 천성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는 그 길을 중도에서 포기하지 않고 쟁기 잡은 손을 중도에서 놓아버리지 않고 완주하기 위해서는 성령 충만해야 하고 성령 충만하기 위해서는 기도에 전혀 힘써야 한다고 말합니다.
시인 구상은 예수님께서 그 외롭고 고독한 나그넷길을 홀로서 갔듯이, “악의 무성한 꽃밭 속에서, 진리가 귀찮고 슬프더라도, 나 혼자의 무력에 지치고, 번번이 패배의 쓴잔을 마시더라도” 우리도 묵묵히 그 길을 가야만 한다고 했습니다.
시인 천상병은 ‘귀천’(歸天)에서 이 세상에서의 삶은 하늘에서 잠시 지상으로 소풍 나온 것이라 하였습니다. 인생이란 아침이슬이나 저녁노을빛처럼 영롱하고 아름답기도 하지만, 그 또한 한 순간에 사라질 찰나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생이란 하늘로 돌아가는 나그넷길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 길이 예수님과 함께 걷는 길이라면, 이 세상에서의 소풍은 아름다운 추억일 수 있고, 아침이슬이나 저녁노을빛처럼 영롱하고 아름다울 수 있지만, 예수님 없이 걷는다면, 그 길은 허무한 인생길이 되고 말 것입니다.
누가는 예수님이 외롭고 고독한 나그넷길을 어떻게 끝냈는가를 보여주려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나그넷길은 배척의 길이요, 죽음의 길이었지만, 그 길이 온 인류를 구원하는 빛과 생명의 길이요, 승천과 영광의 길이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 길을 어렵다고 마다하지 않았고, 뒤돌아보지 않았으며, 매순간마다 기도하고, 성령 충만하심으로 그 길을 완주하셨다고 말하면서, 복음의 씨를 뿌리기 위해서 쟁기질하는 우리 성도들은 예수님처럼 뒤돌아보지 말고 포기하지 말고 우리에게 주어진 나그넷길을 완주하자고 했습니다. 이런 축복과 은혜가 성도들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작년 오월에 소천하신 시인 구상의 시 가운데 1974년 5월 31일자 동아일보에 발표한 ‘그분이 홀로서 가듯’이란 유명한 시가 있습니다. 이 시를 지으시고 꼭 30년 만에 하늘로 부름을 받으셨습니다.
홀로서 가야만 한다. 저 2천 년 전 로마의 지배 아래 <사두가이>와 <바리사이>들의 수모를 받으며 그분이 홀로서 가듯 나 또한 홀로서 가야만 한다.
악의 무성한 꽃밭 속에서, 진리가 귀찮고 슬프더라도, 나 혼자의 무력에 지치고, 번번이 패배의 쓴잔을 마시더라도, 제자들의 배반과 도피 속에서, 백성들의 비웃음과 돌팔매를 맞으며, 그분이 십자가의 길을 홀로서 가듯, 나 또한 홀로서 가야만 한다.
정의는 마침내 이기고 영원한 것이요, 달게 받는 고통은 값진 것이요, 우리의 바람과 사랑이 헛되지 않음을 믿고서
아무런 영웅적 기색도 없이, 아니, 볼꼴 없고 병신스런 모습을 하고, 그분이 부활의 길을 홀로서 가듯, 나 또한 홀로서 가야만 한다.
이 시는 예수님께서 외롭게 나그네의 길을 걸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분이 홀로 가신 외로운 길이 십자가의 길이요, 권력자들로부터 수모를 겪은 길이요, 제자들로부터 배반을 당한 길이요, 돌봐준 사람들로부터 비웃음사고 돌팔매질 당한 길이요, 아무런 영웅적 기색 없이 볼꼴 없고 병신스런 모습으로 가신 길이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 길은 정의와 평화를 위한 길이요, 부활의 길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악의 무성한 꽃밭 속에서, 진리가 귀찮고 슬프더라도, 나 혼자의 무력에 지치고, 번번이 패배의 쓴잔을 마시더라도” 우리는 예수님처럼 이 외로운 나그넷길을 가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정의는 마침내 이기고 영원한 것이요, 달게 받는 고통은 값진 것이요, 우리의 바람과 사랑이 헛되지 않음을 믿고서” 가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또 시인 천상병의 글 가운데, ‘귀천’(歸天)이란 짤막한 시가 있습니다.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새벽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 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노을빛 함께 단 둘이서 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하면은,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
이 시에서 천상병은 이생에서의 삶은 하늘에서 잠시 지상으로 소풍 나온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인생은 아침이슬이나 저녁노을빛처럼 영롱하고 아름답기도 하지만, 그 또한 한 순간에 사라질 존재란 것입니다. 인생은 하늘로 돌아가는 나그넷길이란 것입니다. 이것을 모르고 산다면, 그 사람의 삶은 아침이슬이나 저녁노을빛처럼 영롱하고 아름다울 수 없고,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아름다웠다고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인간의 삶이 하늘을 떠나온 짧은 소풍길이요, 하늘로 돌아가야 할 나그넷길이란 것을 모른다면, 그 사람의 삶은, 한순간에 불과한 아침이슬이나 저녁노을빛을 영원한 것으로 착각한 삶이요, 사라져버릴 것을 붙잡으려고 발버둥친 허무한 인생이 되고 말 것입니다.
예수님의 짧은 인생도 떠나온 천국을 향한 외로운 나그넷길이었습니다. 핍박과 배척의 길이었고, 골고다에 세워진 십자가의 길이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분의 길은 부활의 길이었습니다. 누가는 이 예수님이 걸어가신 길을, 또 그분이 남기신 발자취를 우리 성도들이 따라가야 할 길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분이 가신 길이 비록 고난의 길이요, 외로운 나그넷길이었지만, 그 길이 진리의 길이요, 빛과 생명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누가가 소개하는 예수님은 배척을 당하신 분입니다. 배척당한 사람의 삶은 나그네의 삶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누가복음에서는 예수님의 공적인 생애를 나그네의 삶으로 그리고 있습니다. 또 이 나그네의 종착지가 골고다 언덕이고, 그 언덕 위에 세워진 십자가에 못 박혀 죽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조선시대 천주교인들 가운데 박해를 피해 전국의 깊은 산골로 떠돌 때에 상복차림을 했다는 것은 나그네의 삶과 죽음이 밀접한 관계에 있다는 점을 잘 말해줍니다.
ꡔ예기ꡕ에 “부모가 돌아가시면 삼년동안 상복을 입는다.”고 했습니다. 대개 사람은 태어나서 세살이 돼서야 젖을 떼고 어머니 품을 떠나 살 수 있으므로 자식은 부모가 돌아가시면 최소한 3년 동안은 상복을 입어 그 은혜에 보답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이 경우 항상 상복만 입어야 했고, 장례식과 제사 외에는 일체 다른 공식적인 모임에 참석할 수 없었습니다. 일체의 가무와 오락도 할 수 없었습니다. 게다가 어깨까지 덮는 방갓을 쓰고 땅만 보고 걸었고, 얼굴가리개로 입 코 눈까지 가렸습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이 조선풍속이 박해시대에 나그네 기독교인들, 특히 외국인 선교사들에게 외출이나 이동을 가능케 해준 훌륭한 도구가 되었던 것입니다.
이 같은 사실은 김대건과 함께 마카오에서 신학공부를 마치고, 김대건에 이어 두 번째로 국내에 들어온 최양업 신부가 1851년 10월에 쓴 편지에서 밝히고 있습니다. 또 다산의 조카사위 황사영도 1801년 신유박해(辛酉迫害) 때에 상복으로 변복(變服)하고 방갓을 쓰고 제천으로 무사히 피신한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늘로 돌아가는 나그네 신자들을 위해서 하나님이 어떤 장치를 마련해 놓으셨는가를 보게 됩니다. 우리는 그 속에서 ‘여호와 이레’ 곧 하나님의 경륜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은 오가작통법이 시행되던 그 살벌한 박해상황 속에서도 남의 눈에 띄기 쉬운 서양인 신부조차도 들키지 않고 이동할 수 있는 길을 마련해 놓으셨던 것입니다. 또 하나님은 박해나 배척을 받아 나그네 신세가 된 신앙인들에게 이 상복을 통해서 거룩한 순교와 죽음에 대해서, 또 이 땅이 영원히 살 본향이 아니란 점을 좀 더 깊게 생각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주셨습니다. 상복차림의 이동과 숨어 지내야했던 고통은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무엇을 뜻하였는지 뼛속까지 각인되었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말씀 누가복음 9장 51절을 보면, “예수께서 승천하실 기약이 차가매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기로 굳게 결심하시고”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승천’은 예수님께서 부활 후 40일간 지상에 계시다가 하나님의 나라에 가신 것을 말하는데 누가가 이 부분을 가장 먼저 큰 관심을 가지고 기록하였습니다. 그리고 승천이란 말과 부활 후 40이란 숫자는 이스라엘 민족이 홍해를 건넌 후에 사막에서 40년을 자기 집 없이 나그네 천막생활을 하다가 가나안 복지에 들어간 것과 관련해서 생각해 볼 때, 예수님을 모범으로 해서 우리 성도들의 삶은 그야말로 외로운 나그네의 삶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목적지가 없는 나그네의 삶이 아니라, 승천 또는 영광의 때를 바라보고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는 나그넷길인 것입니다. 예루살렘은 문자적으로 이스라엘의 수도를 말하지만, 영적으로는 천국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승천하실 기약이 차가매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기로 굳게 결심하시고”라고 한 말씀은 문자적인 의미 곧 사실적 표현이지만, 오늘의 우리 성도들에게는 영적인 의미, 곧 예수님 믿고 거듭난 후에 천국을 향하여 올라가기로 굳게 결심한 신앙생활을 의미할 수 있습니다.
참고로 누가복음은 세 부분으로 되어 있습니다. 1장부터 3장까지는 서론부분이고, 4장부터 9장까지는 갈릴리지역에서의 활동, 10장부터 19장까지는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는 나그넷길, 20장부터 24장까지는 예루살렘에서 최후를 맞는 내용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 가운데서 오늘 우리가 다루고 있는 부분이 예수님이 예루살렘을 향해서 올라가는 나그넷길에 관한 것입니다. 누가는 이 나그넷길을 9장 51절부터 19장 44절까지 전체 24장 가운데 42퍼센트를 차지하는 무려 10장의 분량을 할애하고 있습니다. 그만큼 이 나그넷길이 중요하게 취급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가는 나그넷길이 순탄치 않다는 점이 예수님의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여정에서 드러나고 있습니다. 누가복은 9장 52-56절을 보면, 사마리아 사람들이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을 향하여 가시는 것을 배척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시는 나그넷길과 반복해서 배척당하시는 일들이 매우 밀접한 연관성을 맺고 있음을 암시하는 것입니다. 누가복음에는 몇 차례에 걸쳐 예수님이 배척당하신 일들이 소개되고 있는데, 예언자로서 공생애를 시작하는 시점인 4장에서 갈릴리지역을 대표하는 고향 나사렛사람들로부터 배척당하실 뿐 아니라 살해위협까지 받고 계시고, 갈릴리지역에서의 활동을 마치고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는 시점인 9장에서 예루살렘에서 배척당하여 죽게 될 것을 예고하셨고, 사마리아 사람들로부터도 배척을 당하십니다. 그리고 예루살렘 인근마을 여리고에서의 일을 소개하는 19장에서 열 므나비유를 통해서 배척당하여 죽게 되실 것을 암시하셨고, 예루살렘입성 직후부터는 예수님체포에 대한 구체적인 음모가 진행되었으며, 예수님은 예루살렘에서 정치․종교지도자들뿐 아니라, 심지어 민중과 제자들로부터도 버림을 당하고 체포되어 십자가에 처형당하십니다.
로마제국 당시 이스라엘은 세 개의 행정지방으로 나뉘어 있었습니다. 큰 호수를 끼고 있는 북쪽이 갈릴리지방이고, 가운데가 사마리아지방이고, 사해바다를 끼고 있고 메마른 남쪽이 유대지방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북쪽 갈릴리지방에 속한 고향 나사렛 사람들에게 배척당하셨고, 가운데 지방 사마리아 사람들에게 배척당하셨고, 남쪽 유대지방 사람들 특히 예루살렘의 정치․종교지도자들로부터 버림받고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이는 온 이스라엘 사람들로부터 배척당하여 십자가에 매달리셨음을 암시하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배척의 정도나 크기를 말해 주는 것으로써 땅도 예수님을 버렸고 하늘도 버렸기 때문에, 9장 58절에서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고 하신 말씀대로 의지할 곳 없던 예수님은 십자가에 의지해서 허공에 매달린 채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절규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사람들로부터 배척을 당하여 그 험한 십자가에서 처절하게 절규하며 비참하게 죽는 것에서 끝장을 보셨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복음서에서 승천과 하늘의 영광을 최초로 이야기한 사람이 바로 누가입니다. 누가는 예수님이 부활하셨을 뿐 아니라 하늘로 승천하셔서 하나님의 우편보좌에 앉아 영광과 찬양을 받고 계신다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이 예수님의 생애는 다름 아닌 복음서 기록 당시에 성도들이 처했던 어려운 형편들을 말해주며, 오늘날 우리 성도들의 신앙순례를 대변하는 것이란 점을 이어지는 9장 57-62절의 제자직에 관한 말씀을 통해서 잘 알 수가 있습니다.
57절의 “길 가실 때”란 말은 문자적으로 예수님께서 이스라엘의 수도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시는 길을 말하지만 영적으로는 예수님을 믿는 우리 성도들이 하늘나라의 수도 곧 천성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도들이 천성을 향하여 올라가는 길이 좁은 길이요 순탄한 길이 아닌 십자가의 길인 것은 58절의 말씀,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에서 알 수가 있습니다. 62절의 말씀,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치 아니하니라.”하신 예수님의 말씀에서 성도들이 천성을 향하여 올라가는 길은 복음의 일이요 하나님의 일이요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는 일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 길을 가는 성도들은 배척을 당하고 고난을 당하고 심지어 죽임까지 당할 수도 있지만, 그 마지막은 부활이요 승천이요, 그 최후는 영광이란 점을 명백하게 밝혀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 십자가의 길을 다 간 후에 해처럼 빛나는 부활의 영광이 있고, 승천의 영광이 있고, 세상에서 얻을 수 없는 커다란 보상이 기다리고 있다고 해도 마라톤대회에 나선 주자처럼 그 길을 완주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단지 그림의 떡일 뿐입니다. 그래서 누가는 예수님이 어떻게 이 험한 길을 끝까지 완주하시고 상을 받으셨는가를 우리에게 두 가지로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천로역정 곧 천성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는 그 길을 중도에서 포기하지 않고 쟁기 잡은 손을 중도에서 놓아버리지 않고 완주하기 위해서는 성령 충만해야 하고 성령 충만하기 위해서는 기도에 전혀 힘써야 한다고 말합니다.
시인 구상은 예수님께서 그 외롭고 고독한 나그넷길을 홀로서 갔듯이, “악의 무성한 꽃밭 속에서, 진리가 귀찮고 슬프더라도, 나 혼자의 무력에 지치고, 번번이 패배의 쓴잔을 마시더라도” 우리도 묵묵히 그 길을 가야만 한다고 했습니다.
시인 천상병은 ‘귀천’(歸天)에서 이 세상에서의 삶은 하늘에서 잠시 지상으로 소풍 나온 것이라 하였습니다. 인생이란 아침이슬이나 저녁노을빛처럼 영롱하고 아름답기도 하지만, 그 또한 한 순간에 사라질 찰나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생이란 하늘로 돌아가는 나그넷길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 길이 예수님과 함께 걷는 길이라면, 이 세상에서의 소풍은 아름다운 추억일 수 있고, 아침이슬이나 저녁노을빛처럼 영롱하고 아름다울 수 있지만, 예수님 없이 걷는다면, 그 길은 허무한 인생길이 되고 말 것입니다.
누가는 예수님이 외롭고 고독한 나그넷길을 어떻게 끝냈는가를 보여주려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나그넷길은 배척의 길이요, 죽음의 길이었지만, 그 길이 온 인류를 구원하는 빛과 생명의 길이요, 승천과 영광의 길이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 길을 어렵다고 마다하지 않았고, 뒤돌아보지 않았으며, 매순간마다 기도하고, 성령 충만하심으로 그 길을 완주하셨다고 말하면서, 복음의 씨를 뿌리기 위해서 쟁기질하는 우리 성도들은 예수님처럼 뒤돌아보지 말고 포기하지 말고 우리에게 주어진 나그넷길을 완주하자고 했습니다. 이런 축복과 은혜가 성도들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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