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과생명교회 주일설교

KCCS Digital Archive의 자료와 게시판을 분류별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설교자료 빛과생명교회 주일설교 KCCS Digital Archive

성령 충만한 예수님(눅 4:14-15)

페이지 정보

profile_image
조동호
댓글 0 조회 12,946 2005.10.21 06:57

본문

성령 충만한 예수님(눅 4:14-15)

누가가 전하는 강력한 메시지 가운데 한 가지는 이 시대가 성령님이 역사(役事)하시는 시대라는 것입니다. 성령님에 의해서 교회시대가 도래했고, 성령님에 의해서 은혜시대가 도래했고, 성령님에 의해서 구원시대가 도래했다는 것입니다. 성령님은 산소처럼 우리들의 영혼에 소중한 분이십니다. 우리 가운데 오셔서 구원을 이뤄주시고, 또한 이 구원을 보증하시며, 인(印)치시고, 그리스도의 나라의 시민권자로 만들어 주십니다. 이뿐 아니라, 굴절의 빛처럼 우리 가운데 따스하게 내재하시며, 의사처럼 영혼의 병을 고쳐 주시고, 변호사처럼 억울한 일을 도우시며, 상담자처럼 연약함을 도우시고, 교사처럼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십니다. 이 성령님을 통해서 죄인들은 중생의 기쁨을 얻게 되며, 당장의 시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나라의 축복을 앞당겨 미리 맛보고 체험하게 되며, 성화의 단계에까지 이르게 됩니다. 이 성령님을 통해서 구원을 보장받고 영생을 약속받은 성도들은 막연히 주의 재림을 피동적으로 기다리는 존재들이 아니라, 오히려 성령님의 도움을 힘입어 능동적으로 하나님이 없는 것 같은 이 세상을 하나님이 존재하신 세상으로 바꿔감으로써 참 평화와 기쁨을 맛보며 사는 존재들이 되는 것입니다. 또 누가는 우리가 교회시대와 성령시대를 살면서 거기에 걸맞게 참 평화와 기쁨을 맛보며 살기 위해서는 쉬지 않고 기도해야 할 것과 성령님으로 충만해야할 것을 강조하고 가르칩니다. 왜냐하면, 성도들의 삶은 하나님의 나라 곧 영생의 나라로 가는 나그네길인데, 이 나그네길 곳곳에는 많은 배척과 환란이 숨어 기다리고 있어서 한 순간도 마음을 놓고 진행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누가는 신약성경을 쓴 다른 어떤 저자보다도 ‘성령’과 ‘성령 충만’이란 단어를 많이 사용합니다. 성령님에 관한 단어가 마태복음에 17번, 마가복음에 23번, 요한복음에 21번 나오는데 누가복음에는 38번이나 나옵니다. 사도행전에 쓰인 69번까지 합하면 무려 107번이나 됩니다. 그만큼 누가는 성령 충만함을 많이 강조하였습니다. 성령 충만해야만 중도에서 포기치 않고 천성 예루살렘으로 가는 나그넷길을 완주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누가는 예수님의 성령 충만하심을 성도들에게 모델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누가복음을 보면, 마리아가 임신하였을 때, 성령님으로 예수님을 잉태하였습니다. 1장 35절에 보면, 천사가 나타나 말합니다.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이러므로 나실 바 거룩한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으리라.”고 하였습니다. 3장 22절을 보면, 공생애를 시작하시기 전에 침례를 받으시고 나서 비둘기 같은 형체의 성령님의 임재를 경험하셨습니다. 4장 1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성령님의 충만함을 입어 광야에서 사십 일 동안 성령님에게 이끌리셨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성령님으로 충만하셨기 때문에 사단의 강력한 시험을 하나님의 말씀을 인용하여 물리칠 수가 있었습니다. 또 4장 14절을 보면, 예수님은 성령님의 권능으로 갈릴리지역에서 사역하셨음을 볼 수 있습니다. 이어지는 18-19절을 보면,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되고,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한 원동력이 모두 다 성령의 충만함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10장 21절을 보면, 예수님은 “성령님으로 기뻐하셨고,” 12장 12절을 보면, 성령님의 가르침을 강조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신성을 가진 분이시기 때문에 성령님의 동행하심이 필요 없을 듯싶어도 인간의 몸을 입고 인성을 소유하신 분이기 때문에 더욱더 성령님의 능력을 힘입고 성령님의 능력이 나타나는 것이 필요했습니다. 예수님의 지혜와 은혜로운 말씀과 사람들의 마음속 생각에 대한 초자연적인 지식과 그분이 행하신 기적이 그분의 신성에서 나오는 것이라고만 생각하기 쉬우나 복음서의 기록은 이런 것들 모두가 성령님께서 예수님과 함께 하셨기 때문에 가능했으며 기도가 아니면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없다고 예수님께서 친히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인간으로 오셔서 성령님을 전적으로 의지하여 사셨다면 우리야 얼마나 더 성령님을 의지하고 살아야겠습니까? 지금도 성령님은 우리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기적을 체험하게 하시는데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은 그분이 받은 사명의 중요성 때문에 더욱더 충만한 성령님의 능력을 필요로 하였습니다. 따라서 침례를 받으시고 성령님이 비둘기의 형체로 임하자 예수님은 끊어 오르는 사명감을 추스르기 위해서 사막으로 나가 40일간 금식하며 기도하셨습니다. 자의로 금식했다기보다는 먹는 것조차 잊고 지내셨거나 사막이라서 먹을 것이 전혀 없었을 것입니다. 아무튼 이 40일 기도는 예수님의 3년 6개월의 공생애 기간에 있을 사역에 대한 청사진이 그려지는 순간이었을 것이고, 하나님과의 은밀한 만남의 시간들이었을 것입니다. 우리 성도님들이 잊지 말아야할 중요한 내용은 우리 예수님을 3년 6개월 공생애 기간을 지탱시킨 원동력이 성령님의 충만함이었다는 것과 성령 충만의 원동력은 기도의 힘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이 성령 충만함과 기도의 힘이 결국은 예수님의 배척당하심과 나그네의 삶을 지탱하게 해준 원동력이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누가가 복음서에서 우리에게 강조하고 있는 중요한 주제들입니다. 하물며 우리야 얼마나 더 기도해야하고 성령 충만해야 우리가 당면한 이 나그네의 인생길을 예수님처럼 잘 마칠 수 있겠습니까? 이 점을 강조하기 위해서 누가는 누가복음서에서 우리 주님의 기도생활을 할 수 있는 한 최대로 강조하려고 했고, 사도행전에서는 사도들과 초대교회 성도들의 기도생활을 할 수 있는 만큼 최대로 강조하려고 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기도생활이란 것이 유대인들처럼 하루 세 번씩 시간을 정해놓고 기도하는 것만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장소가 어디든, 시간이 언제든, 누구하고 있든, 무슨 일에 종사하든 하나님을 향한 묵상기도와 영적인 교제를 지속하는 것을 말합니다. 물론 예수님과 사도들 그리고 초대교회 성도들은 시간을 정해놓고 기도하기도 하고, 정기적인 집회에 참석하여 기도했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언제 어디서 무엇을 어떻게 하든 간에 순간순간 경건성을 잃지 않고 기도하는 생활일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만남과 교제의 시간을 개인적으로 갖는 습관이 매우 귀합니다. 이런 습관을 키우는 성도님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특히 가정에서 TV보는 시간을 한 시간 줄이시고, 성경도 읽고, 묵상기도도 하시고, 찬송도 부르시기를 바랍니다. 이런 개인 경건생활을 위해서 만들어진 책들이 시중에 있습니다. 두란노에서 출판되는 󰡔생명의 삶󰡕이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기독교 서점에도 자주 찾아가시고 유익한 기독교 서적들을 읽는 습관을 키우시기를 바랍니다. 기도와 성령 충만은 마치 전기와 같습니다. 우리가 전기가 없다고 해서 살아갈 수 없는 것은 아닙니다. 먼 옛날처럼 호롱불이나 촛불을 켜고 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전기 없는 생활을 한번 상상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전기가 없다면, 불편한 일이 얼마나 많을지 상상이 되십니까? 당장에 TV도 볼 수 없고, 등불도 켤 수 없고, 세탁기도 돌릴 수 없고, 헤어드라이어도 쓸 수 없고, 밥솥도 꽂을 수 없고, 할 수 없는 일이 너무나 많고 너무나 불편하여 살 수 없다고 아우성치게 되고 말 것입니다. 그러나 전기가 있다면, 또 그 전기를 잘 활용한다면 그 가능성과 충만한 능력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 그 이상의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기도와 성령 충만도 마찬가집니다. 기도가 마치 전기라면 성령 충만은 전력에 해당됩니다. 전기는 우리 눈에 보이지 않지만, 우리 주변에 늘 가까이 있습니다. 우리가 그것을 알고 잘 활용한다면 전력을 얻을 수 있습니다. 어둠을 밝히는 빛을 얻을 수도 있고, 기계를 움직일 동력을 얻을 수가 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성령님도 우리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전기와 같아서 늘 우리 곁에 가까이 계십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어떤 방법으로 성령님의 능력에 접근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우리 집에까지 전선이 연결되어 있다 해도 아무나 그 전력을 손쉽게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만들어진 것이 스위치입니다. 전기에 대해서 무식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필요한 전력을 손쉽게 얻을 수 있도록 고안한 것이 전기스위치입니다. 기도는 마치 전기스위치와 같습니다. 보이지 않는 성령님에게 접근하여 필요한 능력을 얻을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방법이 기도입니다. 그래서 기도는 성령님의 능력을 얻는 방법입니다. 우리 주변에 전기가 아무리 흔하다 해도 스위치를 누르지 아니하면 필요한 전력을 얻을 수 없는 것처럼 하나님의 능력의 기운이 항상 우리 주변을 덮고 있다할지라도, 우리가 무릎을 꿇고 기도하지 않으면 우리 생활에 엄습해 오는 어둠을 물리칠 수 없고, 우리 생활에 불어 닥친 혹독한 추위를 막을 수 없고, 기계 돌아가듯 우리의 삶을 힘차게 돌릴 수가 없습니다. 만일에 우리들의 삶에 ‘춥다,’ ‘어둡다,’ ‘힘이 없다’ 하는 불평들이 있다면, 기도하지 아니한 우리 자신들의 문제에서 비롯된 것일 수도 있다는 진단을 내려 볼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으로 한 때나마 실망과 좌절과 비통함을 체험했던 제자들이 삼일 만에 찾아온 예수님의 부활을 경험하고부터는 기도라는 스위치를 통해서 변화된 능력의 삶을 살면서 천성 예루살렘을 향하여 나그넷길을 믿음과 용기를 가지고 달려간 것처럼 우리 성도님들도 기도라는 스위치를 통해서 주어진 환경을 극복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일과 복음의 일을 감당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헬라인이었던 누가는 예수님을 우리에게 소개함에 있어서 하나님의 아들 쪽보다는 오히려 인자 쪽에다 포커스를 맞췄습니다. ‘인자’란 ‘사람의 아들’이란 뜻입니다. 겸손을 나타내기도 하고 메시아를 뜻하기도 합니다. 이 칭호는 제 삼자가 예수님을 호칭할 때 쓴 말이 아니고, 예수님이 자신을 가리켜 호칭하실 때 쓰신 표현이었습니다. 인자로서 예수님은 기도하는 분이었고, 성령 충만한 분이셨을 뿐 아니라, 민중의 친구로서 짧지만 아름다운 삶을 사신 분이셨습니다. 하나님의 사명을 받고 죽음이 기다리는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는 나그네였지만 소외당하고 멸시받던 자들의 친구가 되어 주셨고, 가난한 자와 여인, 세리와 죄인, 사마리아인과 이방인에게 특별한 사랑과 관심을 쏟으셨습니다. 유대인의 입장에서 볼 때, 가난한 자나 여인, 세리나 죄인, 사마리아인이나 이방인은 피하고 싶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오히려 그들에게 다가가셨습니다. 그들이야말로 하나님이 진정으로 사랑하는 자들이고 또 그와 같은 사랑을 필요로 하는 자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을 불러 회개시키는 것이 하나님이 자신을 이 땅에 보내신 목적이라고 확신하셨습니다. 그래서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눅 5:32)고 말씀하셨습니다. 따라서 누가복음에는 다른 복음서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14개의 선교비유가 실려 있습니다. 이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선한 사마리아인’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선한 사마리아인은 비록 신분은 천했지만, 강도만나 죽어가던 자를 살린 강도만난 자의 진정한 이웃이었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은 우리가 근접할 수없는 초월적인 하나님의 아들로 다가오시기보다는 우리와 같이 낮은 신분의 사람의 아들로 우리를 살리시기 위해서 우리의 선한 이웃으로 다가오십니다. 이 예수님을 여러분의 이웃으로 또는 친구로 맞아드리지 않으시겠습니까? 이 예수님을 본받아 기도의 사람 성령 충만한 사람이 되지 않으시겠습니까? 누가복음에 예수님은 배척을 당하시고 나그네의 길을 가시는 분으로 설명되고 있습니다. 그분이 가신 길이 비록 십자가의 길이었지만, 그 길은 하나님의 나라를 향한 길이었습니다. 분명한 목적과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한 길이었습니다. 그래서 누가복음 9장 57절의 “길 가실 때”란 말은 문자적으로 예수님께서 이스라엘의 수도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시는 길을 말하지만 영적으로는 예수님을 믿는 우리 성도들이 하늘나라의 수도 곧 천성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도들이 천성을 향하여 올라가는 길이 좁은 길이요 순탄한 길이 아닌 십자가의 길인 것은 58절의 말씀,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에서 알 수가 있습니다. 62절의 말씀,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치 아니하니라.”하신 예수님의 말씀에서 성도들이 천성을 향하여 올라가는 길은 복음의 일이요 하나님의 일이요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는 일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 길을 가는 성도들은 배척을 당하고 고난을 당하고 심지어 죽임까지 당할 수도 있지만, 그 마지막은 부활이요 승천이요 그 최후는 영광이란 점을 명백하게 밝혀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 십자가의 길을 다 간 후에 해처럼 빛나는 부활의 영광이 있고 승천의 영광이 있고 세상에서 얻을 수 없는 커다란 보상이 기다리고 있다고 해도 마라톤대회에 나선 주자처럼 그 길을 완주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단지 그림의 떡일 뿐입니다. 그래서 누가는 예수님이 어떻게 이 험한 길을 끝까지 완주하시고 상을 받으셨는가를 우리에게 두 가지로 설명해 준 것입니다. 천성을 향하여 올라가는 길을 중도에서 포기하지 않고 쟁기 잡은 손을 중도에서 놓아버리지 않고 완주하기 위해서는 성령 충만해야 하고 성령 충만하기 위해서는 기도에 전혀 힘써야 한다고 말한 것입니다. 예수님처럼 시시때때로 기도하시고, 성령 충만하시고, 에너지가 넘치는 삶을 사시기를 축원합니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