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세와 풍성함이 있는 말과 행동(마 5:38-44)
본문
권세와 풍성함이 있는 말과 행동(마 5:38-44)
신약 성경 27권은 처음 쓰일 당시 그 글을 받아 보는 정해진 수신자들이 있었습니다. 이들 수신자들은 개인인 경우도 있었고, 교회와 같이 특정 집단인 경우도 있었습니다. 이렇게 신약성경은 불특정 다수를 향해서 쓰이지 않고 반드시 정해진 독자를 향해서 쓰였습니다. 이 가운데 몇 권의 책은 유대교에서 기독교로 개종한 유대인들을 위해서 쓰였습니다. 마태복음과 요한복음과 히브리서가 그렇습니다. 그래서 마태복음과 요한복음과 히브리서에는 예수님을 모세에 견주어 설명한 부분이 많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 말씀이 그 가운데 하나입니다. 모세는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고 하였습니다. “이웃을 사랑하고 원수를 미워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우리 예수님은 “악한 자를 대적치 말라”고 하였습니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 뺨도 돌려 대라”고 하였습니다. “원수를 사랑하고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고 하였습니다.
모세는 정의를 바로 세우기 위해서 율법을 강조하여 가르쳤고, 예수님은 사랑의 실천을 위해서 복음을 강조하여 가르치셨습니다. 정의실현도 소중하고 사랑실천도 소중합니다. 그러나 사랑실천이 없는 정의실현은 정죄가 앞서게 되고 자신의 피 흘림은 없고 언제나 상대방의 피 흘림만을 요구하게 됩니다. 그러나 사랑실천이 앞선 정의실현은 내가 피를 흘릴지언정 상대방의 피를 흘리지 않고 세우는 방법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죄를 대신해서 십자가를 지신 사랑실천이 바로 그런 정의실현의 방법이었습니다. 이로써 하나님도 정의롭게 되시고, 그 하나님의 사랑을 믿는 자들 또한 정의롭게 되는 것이라고 바울은 로마서 3장 26절에서 설명하였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고 하였습니다. “이웃을 사랑하고 원수를 미워하라”고 하였습니다. 모세의 이런 가르침에 명백한 결점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유대인들은 모세를 가장 위대한 선지자로 믿었고, 모세가 시내산에서 전해준 십계명과 율법서인 모세오경을 가장 훌륭한 책이라고 믿었습니다. 이 점에 있어서는 기독교에 개종한 유대인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오늘날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는 유대인들 곧 Messianic Jews들도 마찬가집니다. 그러나 이런 생각들은 자칫하면 기독교복음을 왜곡시킬 수 있습니다. 그래서 마태는 마태복음 곳곳에서 예수님과 모세를 유형적으로 비교해가면서 예수님이 모세보다 더 위대하다는 점과 예수님께서 전한 복음이 모세가 전한 율법보다 훨씬 훌륭하다는 점과 예수님께서 행한 기적들이 모세가 행한 기적들보다 훨씬 뛰어나다는 점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 내용을 몇 가지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예수님은 세상 그 누구보다 뛰어나신 분입니다. 마태 사도는 예수님을 유대인들이 참 예언자로 보는 세례 요한보다 더 크신 분(마 3:11), 유대인들에게 단 하나밖에 없던 성전보다 더 크신 분(마 12:6), 물고기 배속에 들어갔지만 살아 나온 요나보다 더 크신 분(마 12:41), 단 하나뿐인 하나님의 성전을 지은 솔로몬보다 더 크신 분(마 12:42)으로 강조하고 있고, 의미상으로는 이스라엘에서 가장 훌륭했던 다윗 왕보다 더 크신 분(마 22:41-46), 시내산에서 율법을 전해줘서 유대교의 기틀을 마련해준 모세보다 더 크신 분으로 소개하였습니다.
히브리서의 저자도 마태 사도와 마찬가지로 예수님을 다른 그 누구보다도 뛰어나신 분으로 소개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역대 어느 선지자보다 뛰어나신 그리스도시며(히 1:4), 천사보다 뛰어나신 그리스도시며(히 1:5-2:18), 모세보다 뛰어난 그리스도시라고 소개하였습니다(히 3:1-6). 이뿐 아니라, 예수님은 믿음의 최고 목표이며(히 3:7-4:16), 인류를 죄에서 구원할 큰 대제사장이시며(히 5:1-10:39), 탁월한 능력의 소유자(히 11:1-13-19)시라고 소개하였습니다.
우선 이런 사실이 예수님의 권위 있는 말씀 속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마태복음 5-7장에 실린 주옥같은 산상수훈, 13장에 실린 8개의 천국비유, 19-25장에 실린 많은 말씀들을 “무리가 듣고 가르치심에 놀랬다”(마 7:28; 22:33)고 마태는 민중의 반응을 소개하였으며, 마가도 “다 놀라 서로 물어 가로되, 이는 어찜이뇨? 권세 있는 새 교훈이로다.”(막 1:27)라고 무리의 놀람을 소개하였고, 누가도 “저희가 그 가르치심에 놀라니, 이는 그 말씀이 권세가 있음이라.”(눅 4:32)고 민중의 충격을 소개하였습니다. 모세의 율법밖에는 아는 것이 없었던 민중들이 모세의 가르침보다 더 권위 있는 예수님의 가르침에 ‘놀라워’했고, ‘새로운 교훈’이라고 했으며, ‘권세’가 있다고 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이 예수님의 많은 가르침들 가운데 하나입니다.
예수님의 권위는 그 분의 행동 속에서도 잘 나타나 있습니다. 마태와 누가는 각각 20개씩의 예수님의 기적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서 마태복음 8장 27절과 누가복음 8장 25절에는 바람과 바다가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을 본 제자들의 반응이 아주 잘 나타나 있습니다. “그 사람들이 기이히 여겨 가로되, 이 어떠한 사람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고 하더라.”(마 8:25), 또 “저희가 두려워하고 기이히 여겨 서로 말하되, 저가 뉘기에 바람과 물을 명하매 순종하는고 하더라”(눅 8:25). 이토록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의 권세와 행동의 권세에 다 놀라며 기이히 여겼습니다. 이를 두고 누가는 9장 43절에서 “사람들이 다 하나님의 위엄에 놀랐다.”고 했고, “저희가 다 그 행하시는 모든 일을 기이히 여겼다.”고 적고 있습니다. 그만큼 예수님의 말씀과 행동에서 나타난 권세는 일찍이 다른 사람에게서 찾아볼 수 없었던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과 행동에 권세가 있었던 것은 예수님의 말씀과 행동이 플러스가 되는 살림의 말씀이요 행동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믿지만 성도들의 삶에 권세가 없는 것은 말과 행동이 마이너스가 되는 죽임의 말이요 행동이기 때문입니다. 남에게 보탬이 되는 말과 행동, 살림이 되는 말과 행동에는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가 담겨 있어서 권세가 있는 것입니다.
둘째, 예수님이 전한 복음은 모세가 전한 율법보다 월등히 빼어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복음은 살리는 것이며, 죄를 용서받고 구원받는 길을 제시하지만, 율법은 죽이는 것이며, 죄를 깨닫게 하여 곤궁에 빠뜨리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복음은 모든 사람에게 ‘더하기’가 되지만, 모세의 율법은 모든 인간에게 ‘빼기’가 됩니다. 예수님의 복음은 긍정적이고, 능동적이고, 개방적이고, 미래지향적이고, 건설적이고, 창조적인 것이지만, 모세의 율법은 부정적이고, 수동적이고, 폐쇄적이고, 보수적이며, 파괴적인 것입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바울은 로마서 3장 20절에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고 하였던 것입니다.
요한 사도는 요한복음에서 이 점을 가장 극명하게 대조시켜 놓고 있습니다. 요한은 복음서에서 예수님의 기적을 일곱 개만 소개하였는데, 그 일곱 개의 기적들은 ①가나의 혼인 잔치에서 물을 포도주로 바꾼 일, ②백부장의 아들을 생사의 기로에서 살린 일, ③베데스다 연못가에서 38년 된 병자를 고친 일, ④풍랑만난 제자들을 바다에서 구원하신 일, ⑤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수천의 사람들을 먹이신 일, ⑥날 때부터 소경된 자의 시력을 회복시키신 일, ⑦죽어서 무덤에 장사된 나사로를 살려내신 일들입니다. 이 일곱 개의 기적들은 모두가 다 사람들에게 ‘더하기’가 되고, ‘살림’이 되는 것들입니다. 이들 가운데서도 특히 5,6,7번의 기적은 우리 예수님이 사람들에게 생명의 떡이 되시고, 빛을 주시는 분이시며, 생명을 주시는 분이심을 강조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 예수님의 기적들에 대조를 이루는 모세의 기적들은, 이스라엘 민족을 이집트에서 구원하기 위해서 베푼 재앙이긴 하지만, 아무튼 사람들에게는 ‘빼기’가 되고 ‘죽임’이 되는 것들이었습니다. 모세가 베푼 열 가지 재앙들 가운데 일곱 가지를 보면, ①물을 피로 바꿨으며, ②생축을 몰살시켰고, ③독종이 퍼지게 했으며, ④뇌성과 우박을 내리게 했고, ⑤메뚜기 떼의 재앙을 가져왔으며, ⑥암흑 세상이 되게 하였고, ⑦장자들이 몰살당하는 재앙이 내리게 하였습니다.
기독교 복음이 율법과 다른 점은 율법이 사람들에게 ‘마이너스’가 되게 하고, 죽임의 말과 행동을 하게 한다면, 복음은 사람들에게 ‘플러스’가 되게 하고, 살림의 말과 행동을 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과 행동에 권세가 있었던 것은 예수님의 말씀과 행동이 플러스가 되는 살림의 말씀이요 행동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믿지만 성도들의 삶에 권세가 없는 것은 말과 행동이 마이너스가 되는 죽임의 말이요 행동이기 때문입니다. 남에게 보탬이 되는 말과 행동, 살림이 되는 말과 행동에는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가 담겨 있어서 권세가 있는 것입니다.
고대 유대인들은 숫자에 상징적 의미를 부여하는 관습이 있었습니다. 따라서 성경에는 상징적 의미를 갖는 숫자가 많습니다. 마태 사도도 2와 3과 같은 숫자들을 즐겨 썼는데, 유독 8이란 숫자는 감춰놓고 쓰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5장에 나오는 8복, 13장에 나오는 8개의 천국비유, 23-25장에 나오는 8개의 심판과 보상에 관한 비유들이 그것들입니다.
‘예수’란 이름 헬라어를 숫자로 바꾸면 888이 됩니다. 그래서 고대 시비린 신탁에서는 예수님을 숫자 8로 표기하였습니다. 또 초기 기독교인들은 십자가보다는 물고기를 더 많이 상징으로 사용하였습니다. ‘물고기’란 단어의 헬라어가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 구세주’란 낱말의 알파벳 첫 자들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기독교의 대표적인 상징인 이 물고기 그림은 숫자 8을 옆으로 눕힌 것과 같습니다. 순교자 저스틴의 150년경의 글을 보면, ‘제8일째 날’이란 말이 있습니다. ‘제8일째 날’이란 ‘주일’을 말합니다. ‘주일’은 ‘주님의 날’ 또는 ‘주께서 부활하신 날’을 뜻합니다. 이 날에 기독교인들은 한 곳에 모여 예배를 드렸습니다.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었던 유대인들, 곧 ‘Messianic Jews'은 일요일을 ‘주 첫날’ 또는 ‘안식 후 첫날’이라고 불렀지만, 헬라인 기독교인들은 일요일을 ‘제8일째 날’이라고 불렀던 것입니다. 그만큼 이 8이란 숫자는 초기 기독교인들에게 큰 의미를 지녔던 것입니다. 왜 일까요?
그 이유를 여기서 다 말씀 드릴 수는 없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8이 7보다 하나 더 많다는 것입니다. 기독교 전통에서 숫자 7은 ‘완전’ 또는 ‘거룩’을 뜻합니다. 따라서 8은 ‘플러스 1’의 의미를 갖습니다. 또 다른 기독교의 상징인 십자가도 ‘플러스’ 표시에 1을 덧댄 모양을 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숫자 8은 ‘넉넉히 이긴다,’ ‘이기고도 남는다,’ ‘넘친다,’ ‘넉넉히 구원한다’는 의미를 갖습니다.
마태복음의 중심은 13장인데, 그 13장에 하나님의 나라의 본질과 성격을 설명하는 8개의 비유가 나옵니다. 이 비유들 가운데는 좋은 땅에 뿌려진 씨가 30배, 60배, 혹은 100배의 결실을 맺는 ‘씨앗 비유’, 맨드라미 씨와 같이 아주 작은 겨자씨가 큰 나무가 된다는 ‘겨자씨 비유’, 밀가루 반죽을 부풀게 하는 ‘누룩에 관한 비유’ 등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이 예수님과 그분의 권세 있는 복음의 ‘풍성함’을 말해 주는 것이며, ‘플러스’와 ‘살림’을 말해 주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그분의 복음을 믿지만 성도들의 삶에 권세가 없고 풍성함이 없는 것은 말과 행동이 죽임의 말이요 죽임의 행동이기 때문입니다. 복음의 권세가 성도님들의 삶을 온전히 지배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신약 성경 27권은 처음 쓰일 당시 그 글을 받아 보는 정해진 수신자들이 있었습니다. 이들 수신자들은 개인인 경우도 있었고, 교회와 같이 특정 집단인 경우도 있었습니다. 이렇게 신약성경은 불특정 다수를 향해서 쓰이지 않고 반드시 정해진 독자를 향해서 쓰였습니다. 이 가운데 몇 권의 책은 유대교에서 기독교로 개종한 유대인들을 위해서 쓰였습니다. 마태복음과 요한복음과 히브리서가 그렇습니다. 그래서 마태복음과 요한복음과 히브리서에는 예수님을 모세에 견주어 설명한 부분이 많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 말씀이 그 가운데 하나입니다. 모세는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고 하였습니다. “이웃을 사랑하고 원수를 미워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우리 예수님은 “악한 자를 대적치 말라”고 하였습니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 뺨도 돌려 대라”고 하였습니다. “원수를 사랑하고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고 하였습니다.
모세는 정의를 바로 세우기 위해서 율법을 강조하여 가르쳤고, 예수님은 사랑의 실천을 위해서 복음을 강조하여 가르치셨습니다. 정의실현도 소중하고 사랑실천도 소중합니다. 그러나 사랑실천이 없는 정의실현은 정죄가 앞서게 되고 자신의 피 흘림은 없고 언제나 상대방의 피 흘림만을 요구하게 됩니다. 그러나 사랑실천이 앞선 정의실현은 내가 피를 흘릴지언정 상대방의 피를 흘리지 않고 세우는 방법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죄를 대신해서 십자가를 지신 사랑실천이 바로 그런 정의실현의 방법이었습니다. 이로써 하나님도 정의롭게 되시고, 그 하나님의 사랑을 믿는 자들 또한 정의롭게 되는 것이라고 바울은 로마서 3장 26절에서 설명하였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고 하였습니다. “이웃을 사랑하고 원수를 미워하라”고 하였습니다. 모세의 이런 가르침에 명백한 결점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유대인들은 모세를 가장 위대한 선지자로 믿었고, 모세가 시내산에서 전해준 십계명과 율법서인 모세오경을 가장 훌륭한 책이라고 믿었습니다. 이 점에 있어서는 기독교에 개종한 유대인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오늘날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는 유대인들 곧 Messianic Jews들도 마찬가집니다. 그러나 이런 생각들은 자칫하면 기독교복음을 왜곡시킬 수 있습니다. 그래서 마태는 마태복음 곳곳에서 예수님과 모세를 유형적으로 비교해가면서 예수님이 모세보다 더 위대하다는 점과 예수님께서 전한 복음이 모세가 전한 율법보다 훨씬 훌륭하다는 점과 예수님께서 행한 기적들이 모세가 행한 기적들보다 훨씬 뛰어나다는 점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 내용을 몇 가지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예수님은 세상 그 누구보다 뛰어나신 분입니다. 마태 사도는 예수님을 유대인들이 참 예언자로 보는 세례 요한보다 더 크신 분(마 3:11), 유대인들에게 단 하나밖에 없던 성전보다 더 크신 분(마 12:6), 물고기 배속에 들어갔지만 살아 나온 요나보다 더 크신 분(마 12:41), 단 하나뿐인 하나님의 성전을 지은 솔로몬보다 더 크신 분(마 12:42)으로 강조하고 있고, 의미상으로는 이스라엘에서 가장 훌륭했던 다윗 왕보다 더 크신 분(마 22:41-46), 시내산에서 율법을 전해줘서 유대교의 기틀을 마련해준 모세보다 더 크신 분으로 소개하였습니다.
히브리서의 저자도 마태 사도와 마찬가지로 예수님을 다른 그 누구보다도 뛰어나신 분으로 소개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역대 어느 선지자보다 뛰어나신 그리스도시며(히 1:4), 천사보다 뛰어나신 그리스도시며(히 1:5-2:18), 모세보다 뛰어난 그리스도시라고 소개하였습니다(히 3:1-6). 이뿐 아니라, 예수님은 믿음의 최고 목표이며(히 3:7-4:16), 인류를 죄에서 구원할 큰 대제사장이시며(히 5:1-10:39), 탁월한 능력의 소유자(히 11:1-13-19)시라고 소개하였습니다.
우선 이런 사실이 예수님의 권위 있는 말씀 속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마태복음 5-7장에 실린 주옥같은 산상수훈, 13장에 실린 8개의 천국비유, 19-25장에 실린 많은 말씀들을 “무리가 듣고 가르치심에 놀랬다”(마 7:28; 22:33)고 마태는 민중의 반응을 소개하였으며, 마가도 “다 놀라 서로 물어 가로되, 이는 어찜이뇨? 권세 있는 새 교훈이로다.”(막 1:27)라고 무리의 놀람을 소개하였고, 누가도 “저희가 그 가르치심에 놀라니, 이는 그 말씀이 권세가 있음이라.”(눅 4:32)고 민중의 충격을 소개하였습니다. 모세의 율법밖에는 아는 것이 없었던 민중들이 모세의 가르침보다 더 권위 있는 예수님의 가르침에 ‘놀라워’했고, ‘새로운 교훈’이라고 했으며, ‘권세’가 있다고 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이 예수님의 많은 가르침들 가운데 하나입니다.
예수님의 권위는 그 분의 행동 속에서도 잘 나타나 있습니다. 마태와 누가는 각각 20개씩의 예수님의 기적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서 마태복음 8장 27절과 누가복음 8장 25절에는 바람과 바다가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을 본 제자들의 반응이 아주 잘 나타나 있습니다. “그 사람들이 기이히 여겨 가로되, 이 어떠한 사람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고 하더라.”(마 8:25), 또 “저희가 두려워하고 기이히 여겨 서로 말하되, 저가 뉘기에 바람과 물을 명하매 순종하는고 하더라”(눅 8:25). 이토록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의 권세와 행동의 권세에 다 놀라며 기이히 여겼습니다. 이를 두고 누가는 9장 43절에서 “사람들이 다 하나님의 위엄에 놀랐다.”고 했고, “저희가 다 그 행하시는 모든 일을 기이히 여겼다.”고 적고 있습니다. 그만큼 예수님의 말씀과 행동에서 나타난 권세는 일찍이 다른 사람에게서 찾아볼 수 없었던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과 행동에 권세가 있었던 것은 예수님의 말씀과 행동이 플러스가 되는 살림의 말씀이요 행동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믿지만 성도들의 삶에 권세가 없는 것은 말과 행동이 마이너스가 되는 죽임의 말이요 행동이기 때문입니다. 남에게 보탬이 되는 말과 행동, 살림이 되는 말과 행동에는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가 담겨 있어서 권세가 있는 것입니다.
둘째, 예수님이 전한 복음은 모세가 전한 율법보다 월등히 빼어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복음은 살리는 것이며, 죄를 용서받고 구원받는 길을 제시하지만, 율법은 죽이는 것이며, 죄를 깨닫게 하여 곤궁에 빠뜨리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복음은 모든 사람에게 ‘더하기’가 되지만, 모세의 율법은 모든 인간에게 ‘빼기’가 됩니다. 예수님의 복음은 긍정적이고, 능동적이고, 개방적이고, 미래지향적이고, 건설적이고, 창조적인 것이지만, 모세의 율법은 부정적이고, 수동적이고, 폐쇄적이고, 보수적이며, 파괴적인 것입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바울은 로마서 3장 20절에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고 하였던 것입니다.
요한 사도는 요한복음에서 이 점을 가장 극명하게 대조시켜 놓고 있습니다. 요한은 복음서에서 예수님의 기적을 일곱 개만 소개하였는데, 그 일곱 개의 기적들은 ①가나의 혼인 잔치에서 물을 포도주로 바꾼 일, ②백부장의 아들을 생사의 기로에서 살린 일, ③베데스다 연못가에서 38년 된 병자를 고친 일, ④풍랑만난 제자들을 바다에서 구원하신 일, ⑤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수천의 사람들을 먹이신 일, ⑥날 때부터 소경된 자의 시력을 회복시키신 일, ⑦죽어서 무덤에 장사된 나사로를 살려내신 일들입니다. 이 일곱 개의 기적들은 모두가 다 사람들에게 ‘더하기’가 되고, ‘살림’이 되는 것들입니다. 이들 가운데서도 특히 5,6,7번의 기적은 우리 예수님이 사람들에게 생명의 떡이 되시고, 빛을 주시는 분이시며, 생명을 주시는 분이심을 강조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 예수님의 기적들에 대조를 이루는 모세의 기적들은, 이스라엘 민족을 이집트에서 구원하기 위해서 베푼 재앙이긴 하지만, 아무튼 사람들에게는 ‘빼기’가 되고 ‘죽임’이 되는 것들이었습니다. 모세가 베푼 열 가지 재앙들 가운데 일곱 가지를 보면, ①물을 피로 바꿨으며, ②생축을 몰살시켰고, ③독종이 퍼지게 했으며, ④뇌성과 우박을 내리게 했고, ⑤메뚜기 떼의 재앙을 가져왔으며, ⑥암흑 세상이 되게 하였고, ⑦장자들이 몰살당하는 재앙이 내리게 하였습니다.
기독교 복음이 율법과 다른 점은 율법이 사람들에게 ‘마이너스’가 되게 하고, 죽임의 말과 행동을 하게 한다면, 복음은 사람들에게 ‘플러스’가 되게 하고, 살림의 말과 행동을 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과 행동에 권세가 있었던 것은 예수님의 말씀과 행동이 플러스가 되는 살림의 말씀이요 행동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믿지만 성도들의 삶에 권세가 없는 것은 말과 행동이 마이너스가 되는 죽임의 말이요 행동이기 때문입니다. 남에게 보탬이 되는 말과 행동, 살림이 되는 말과 행동에는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가 담겨 있어서 권세가 있는 것입니다.
고대 유대인들은 숫자에 상징적 의미를 부여하는 관습이 있었습니다. 따라서 성경에는 상징적 의미를 갖는 숫자가 많습니다. 마태 사도도 2와 3과 같은 숫자들을 즐겨 썼는데, 유독 8이란 숫자는 감춰놓고 쓰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5장에 나오는 8복, 13장에 나오는 8개의 천국비유, 23-25장에 나오는 8개의 심판과 보상에 관한 비유들이 그것들입니다.
‘예수’란 이름 헬라어를 숫자로 바꾸면 888이 됩니다. 그래서 고대 시비린 신탁에서는 예수님을 숫자 8로 표기하였습니다. 또 초기 기독교인들은 십자가보다는 물고기를 더 많이 상징으로 사용하였습니다. ‘물고기’란 단어의 헬라어가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 구세주’란 낱말의 알파벳 첫 자들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기독교의 대표적인 상징인 이 물고기 그림은 숫자 8을 옆으로 눕힌 것과 같습니다. 순교자 저스틴의 150년경의 글을 보면, ‘제8일째 날’이란 말이 있습니다. ‘제8일째 날’이란 ‘주일’을 말합니다. ‘주일’은 ‘주님의 날’ 또는 ‘주께서 부활하신 날’을 뜻합니다. 이 날에 기독교인들은 한 곳에 모여 예배를 드렸습니다.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었던 유대인들, 곧 ‘Messianic Jews'은 일요일을 ‘주 첫날’ 또는 ‘안식 후 첫날’이라고 불렀지만, 헬라인 기독교인들은 일요일을 ‘제8일째 날’이라고 불렀던 것입니다. 그만큼 이 8이란 숫자는 초기 기독교인들에게 큰 의미를 지녔던 것입니다. 왜 일까요?
그 이유를 여기서 다 말씀 드릴 수는 없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8이 7보다 하나 더 많다는 것입니다. 기독교 전통에서 숫자 7은 ‘완전’ 또는 ‘거룩’을 뜻합니다. 따라서 8은 ‘플러스 1’의 의미를 갖습니다. 또 다른 기독교의 상징인 십자가도 ‘플러스’ 표시에 1을 덧댄 모양을 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숫자 8은 ‘넉넉히 이긴다,’ ‘이기고도 남는다,’ ‘넘친다,’ ‘넉넉히 구원한다’는 의미를 갖습니다.
마태복음의 중심은 13장인데, 그 13장에 하나님의 나라의 본질과 성격을 설명하는 8개의 비유가 나옵니다. 이 비유들 가운데는 좋은 땅에 뿌려진 씨가 30배, 60배, 혹은 100배의 결실을 맺는 ‘씨앗 비유’, 맨드라미 씨와 같이 아주 작은 겨자씨가 큰 나무가 된다는 ‘겨자씨 비유’, 밀가루 반죽을 부풀게 하는 ‘누룩에 관한 비유’ 등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이 예수님과 그분의 권세 있는 복음의 ‘풍성함’을 말해 주는 것이며, ‘플러스’와 ‘살림’을 말해 주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그분의 복음을 믿지만 성도들의 삶에 권세가 없고 풍성함이 없는 것은 말과 행동이 죽임의 말이요 죽임의 행동이기 때문입니다. 복음의 권세가 성도님들의 삶을 온전히 지배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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