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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0-07-06 17:00
발톤 스톤(Barton Warren Stone) - 4. 그리스도인의 교회
 글쓴이 : 조동호
조회 : 2,468  

발톤 스톤(Barton Warren Stone, 1772-1844)

출저: D. Newell Williams, "Stone, Barton Warren (1772-1844)," The Encyclopedia of the Stone-Campbell Movement(Grand Rapids, Michigan: William B. Eerdmans Publishing Company, 2004)
번역: 조동호 목사(그리스도의 교회 연구소)
역자 주: D. Newell Williams는 그리스도의 제자들 소속 Brite Divinity School의 교수

목차

1. 서론
1.1 성인 같은 성품
1.2 신학적 논객
1.3 부와 접대

2. 장로교 목사 되기
2.1 가족 배경
2.2 교육
2.3 회심과 목회소명
2.4 삼위일체론에 대한 초기 난관들
2.5 연이은 신학적 난관들과 또 다른 소명을 찾으려한 결심
2.6 설교자격증과 안수

3. 대부흥회
3.1 남부 켄터키 주 부흥회 방문
3.2 믿음에 대한 새 빛
3.3 북부 켄터키 주 부흥회 진작과 엘리자베스 캠벨(Elizabeth Campbell)과의 결혼
3.4 켄터키 주 노회와의 결별

4. 그리스도인의 교회
4.1 유언서와 그리스도인의 이름
4.2 대속에 대한 새 빛
4.3 이전 동료들과의 결별과 신자들의 침수세례를 채택
4.4 <<제언>>(An Address) 출판, 셀리아 보웬(Celia Bowen)과 재혼, 테네시 주로 이주
4.5 켄터키 주로 귀환
4.6 삼위일체론과 대속론에 관한 논쟁을 일신

5. 알렉산더 캠벨의 추종자들과 연대

6. 교회와 사회
6.1 노예제도에 대한 초기 반대
6.2 해방 흑인들의 이주 지원 및 일리노이 주로 이사
6.3 노예제도의 즉각적인 폐지 지원
6.4 노예, 그리스도인 연합, 전 천년설
6.5 반정부입장 채택 및 평화주의

7. 스톤-캠벨운동과 그리스도인 연합에 관한 후기 회상
8. 죽음과 장사
9. 스톤-캠벨 운동에 관한 스톤의 영향
참고목록

4. 그리스도인의 교회

4.1 유언서와 그리스도인 이름

1804년 6월 28일 스프링필드 장로회의 회원들은 <<스프링필드 장로회의 유언서>>(Last Will and Testament of Springfield Presbytery)라 이름 붙인 한 문서를 채택하였는데, “우리는 이 장로회가 죽어 해체되어 큰 범위의 그리스도의 몸에로 연합하기를 유언한다.”고 선포하였다. 해체하기 이전 회원들이 “증인들”로서 서명한 <<유언서>>(Last Will and Testament)에 “증인들의 제언”(The Witnesses' Address)이란 제목의 부록을 달았는데, 그들이 장로회를 해체하게 된 그들의 이유들을 진술하였다. 그들은 “주로 인위적인 신조들과 치리 형태들의 채택으로 인해서 신앙을 고백하는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야기되는 분열들과 당파심을” 깊은 관심을 가지고 바라보게 되었다고 적었다. 그들은 “그들이 모든 그리스도인들과 더불어 사랑과 연합의 정신을 배양하려고 노력하였지만, 그들 자신이 다른 사람들과 분리된 한 당파였다는 생각을 극복하기가 지극히 어렵다는 점을 알게 되었다.”고 하였다. 또 그들은 한 장로회로써 마지막 모임을 가졌을 때 “교회 치리에 관한 관찰”(Observations on Church Government)이란 제목의 제언을 공표할 준비를 시작하였다. 거기서 세상 사람들은 “그리스도인의 교회 치리의 단순성의 아름다움과 인위적인 창안들과 군주적인 전통들의 제거”를 보게 될 것이었다. 그들이 그 주제에 관해서 조사를 진행하였을 때에 그들은 “곧 바로 신약성서에는 현대와 같은 교회조직들(confederacies), 즉 당회(Church Sessions), 지방노회(Presbyteries),(州) 노회(Synods), 전국총회(General Assemblies)와 같은 사례나 지시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들은 “교회치리에 관한 그들의 관점이 어떠했던 간에, 그들은 인위적인 조직의 이름과 승낙 아래서 벗어나 [역자 주: 신약성서의 가르침으로부터] 버렸을 것이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므로 “교회 안에 있는 분파와 당파의 존재 때문에 주님과 떨어져 죽어 가는 죄인들, 예수님이 소중하게 여겨 목숨을 바친 모든 이름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적용되는 사랑의 원리 때문에,” 그들은 “신선한 마음의 관점에서 멀어지는 소음과 격분의 당파싸움에서 후퇴하여 해체하여 죽기로 기꺼이 합의”하였다.

그들의 장로회 해체에 대한 그 장로회의 이유들 배후에는 천년왕국 즉 계시록 20장 1-6절에 예언되어져 있다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믿었던 그리스도의 천년통치가 멀지 않다는 강한 증거가 부흥이라는 그들의 확신 때문이었다. 천년왕국의 도래와 기독교의 성장과 증가된 영향력의 연관성은 영국 청교도주의를 통해서 16세기까지 거슬러 추적될 수 있다. 18세기에 요나단 에드워즈는 세계복음화와 사회변화가 “하나님의 영광스런 역사(役事)”인 천년왕국을 안내해 드릴 것이라고 그가 가르쳤다. [역자 주: 이런 주장을 일컬어 후천년설이라 부른다.] 교회에서의 분열과 “당파주의”는 천년왕국의 도래에 방해가 되는 것으로써 폭넓게 인식되었다. <<유언서>>(Last Will and Testament)에 포함된 다음의 조항(item)은 “설교가들과 사람들은 상호 관용의 정신을 배양하며, 더 많이 기도하고, 논쟁을 피하며, 시대의 징조를 보고 살피며, 구속이 가까웠음을 확고하게 기대할 것을 유언한다.”고 하였다. 그들의 “증인들의 제언”(The Witnesses' Address)의 결론에서 그들은 “우리가 바라기는, 복음이 만방에 전파되고 교회가 연합함으로 종결될 우리의 서부 지역(Western country)[역자 주: 1700년대 말 1800년대 초 오하이오 강(Ohio River)을 따라 형성된 변방 개척지를 말함.]에서 그가 계속해서 수행하시는 영광스런 사역 속에 그분의 선하심의 펼침으로 인해 하나님께 감사하면서 우리는 진심으로 모든 이름의 그리스도인 형제들과 연합한다.”고 선언하였다. 그들의 장로회를 해체함에 있어서 서명자들은 그들이 하나님의 영화로운 역사(役事)에 참여하고 있다는 것과 그래서 천년왕국의 도래를 재촉하고 있다고 믿었다.

<<유언서>>(Last Will and Testament) 서명자들이 대중의 시야에서 사라지려했다고 누구도 생각하지 못하도록 “증인들의 제언”에서 그들은 그들 자신들에 대해서 썼다. 장로회로써는 죽고, “죽을 운명인 틀을 제거했다 할지라도” 그들은 “여전히 복음의 자유의 땅에서 살고 또 말한다. 그들은 유빌레(jubilee)의 나팔을 불며, 강한 자들(the mighty)에 대항하여 주님의 도움에 자진해서 헌신한다.” 게다가 그들은 1804년 10월 14일 이에 공감하는 자들을 위해 주말에 벧엘교회에서 열린 대중 집회 때 광고함과 동시에 <<유언서>>를 소책자로 출판하였다. 그들은 렉싱턴에서 북서방향으로 11킬로미터 거리에 위치한 벧엘이 켄터키 주, 오하이오 주, 테네시 주에서 모이기에 적합한 중심지란 점을 주목하였다. 서명자들은 그들의 목회자의 특권을 포기할 의사가 전혀 없었다. 그들이 포기한 것은 그들 자신의 권위의 힘으로 교회를 위해 “입법할” 그들의 권세와 장로교회의 치리형식에 의해서 명백히 금지된 권세였다. 그리스도의 교회의 “장로들” 혹은 목회자들로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를 따르기보다는) 계시된 하나님의 뜻에 따라서 교회를 치리하고, 목사후보생들을 심사하며, 목사안수를 도울 권리를 존치시켰다.

스톤은 <<유언서>>(Last Will and Testament)에 서명하는 것에 추가해서 그와 그의 동료들이 1804년 6월의 모임에서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의 제자들에게 신적인 권위로 최초로 주어진 이름이었다는 것을 주목하면서 “그리스도인들(Christians) 이외에 다른 어떤 이름도” 취하지 않기로 결정하였다고 보도하였다. 그리스도인들 이외에 다른 어떤 이름도 취하지 않는다는 개념은 그리스도의 추종자들에게 하나님께서 주신 이름으로써 2개월 전 마샬의 벧엘 교회(Marshall's Bethel Church)에서 라이스 해가드(Rice Haggard)가 전한 설교에서 장로회에 추천되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 이름을 취함에 있어서 스톤과 그의 동료들은 그들 자신들이 최초로 무엇인가를 행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진행 중인 어떤 운동, 즉 그들이 믿기를 천년왕국을 안내해 들일 운동에 합류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하였다.

4.2 대속에 대한 새 빛

천년왕국이 가까웠다는 이전 장로회의 확신의 영향은 특별히 그리스도인 연합을 위한 노력들에 제한되지 않는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신자들을 오랫동안 당혹스럽게 했던 신학적 문제들이 천년왕국에서 해결될 것이라고 선언하였다. 1804년 겨울 동안 스프링필드 장로회의 회원들은 켄터키 주노회의 회원들이 목청을 높여 그들이 설교하는 것을 반대했기 때문에 “견디기 어려운 압박을” 받았다. 다른 19세기 개신교도들처럼 스톤과 그의 동료들은 그들이 16세기의 개혁가들로부터 물려받은 구속(救贖)에 대한 “대속의” 교리를 설교하였다. 이 견해에 따르면, 그리스도는 인류를 위해 대속자로서 죽었다. 인류는 하나님이 아담과 또 아담을 통해서 아담의 후손 모두와 체결한 계약법을 어겼다. 그리스도의 죽음이 없었다면, 인류는 죄를 미워하시고 범법을 징계하시는 하나님의 진노만을 걱정했어야 했다. 그리스도의 죽음이 없었다면, 하나님은 정의를 충족시키고, 하나님의 진노를 풀어줄 화목제물의 선택을 필요로 했을 것이 분명하다. 의로운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의로움이 죄인들에게 전가되도록 하기 위해서 그들을 대신하였고, 그들을 대신하여 고난을 당하셨다. 그분은 의롭다 함을 입은 자들 혹은 죄 사함을 받은 죄인들의 “보증인” 또는 대속자였으며, 그들을 대신해서 율법을 성취하셨다. 또 그분은 그들을 위한 희생양이었으며, 구약법아래서 동물제물들이 기대했던 것의 모형론적 성취였다.

켄터키 주노회의 회원들이 목청을 높여 스톤과 그의 동료들이 설교하는 것을 반대했던 주장은, 만약, 스톤과 그의 동료들이 그리스도께서 행하셨다고 선포했던 대로,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구원하기로 선택했던 인류의 한몫 또는 일부를 위한 것만이 아닌, 그가 율법의 요구들과 모든 죄인들을 위한 공의를 충족시키기 위해서 죽으셨다면, 그러면 모든 죄인들이 구원을 받게 될 것이라는 것이었다. 그것은, 만약 그리스도께서 율법의 요구들과 모든 사람들을 위한 공의를 충족시키셨다면, 그러면 아무도 그들이 범한 죄에 대해서 징계를 받지 않게 될 것이란 것이다. 스톤과 그의 동료들은 만인구원설, 즉 하나님은 모든 사람들을 사랑하셨고, 모든 사람들의 구원을 원하셨을 뿐 아니라, 하나님은 이생에서 개심을 했든 안했든 상관치 않고 모든 사람들을 구원할 것이라는 교리를 가르치고 있었다고 그들은 비난하였다. 스톤과 그의 동료들은, 대부분의 장로 교인들과 침례 교인들과 감리 교인들처럼, 성서는 만인구원설을 가르치고 있지 않다고 믿었다. 그래서 스톤은 그들이 대속에 관해서 “진리를 찾기 위해서 기도하는 마음으로(prayerful attention)” 성서로 돌아갔다고 적었다.

스톤은 그리스도께서 죄인들을 위한 보증인 또는 대속자로 언급된 말씀을 찾으려 함으로써 대속에 대한 그의 연구를 시작하였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놀랍게도 단 한 구절의 성구에서도 그 개념을 찾을 수 없었다고 보도하였다. 다음에 그는 “보증인 그리스도의 의로움”이 죄인들에게 “전가되었다”고 언급된 말씀을 찾았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따라서 그는 율법과 공의가 “예수님의 대리적 순종과 고난”를 통해서 충족되었다고 언급된 말씀을 보기 위해서 성경을 뒤졌다. 그러나 다시 그는 한 구절도 발견할 수 없었다. 결국 그는 무슨 목적으로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셨고, 사셨으며, 죽으셨다고 언급되었는지를 물었다. 그는 예수님의 삶과 죽음의 목적이 아버지를 선포하려는 - 진리를 입증하려는 - 약속들을 확증하려는 - 죄인들을 하나님께 화해시키려는 - 죄인들을 구원하시려는 - 우리들을 하나님께 데려가시려는 것이었음을 발견하였다. 1805년 겨울동안 스톤은 그 주제에 관해서 장로교 목사 매튜 휴스톤(Matthew Houston)에게 두 개의 서신들을 보냈고, 1805년 봄에 그 내용을 “대속: 친구에게 쓴 두 개의 서신 내용”(Atonement: The Substance of Two Letters Written to a Friend)이란 제목으로 36쪽 팸플릿을 출판하였다.

스톤의 팸플릿은 그리스도께서 모든 사람들을 위해서 죽으셨다는 그의 가르침을 반대한 켄터키 주노회 회원들에게 해답을 주지 못하였다. 그 반대로 그의 서신들의 발행은 기독교 믿음에 대한 그들의 교리와 근본진리들을 공격한 서신들로 검토한 그의 이전 장로교 동료들과의 문서논쟁에 불을 붙였다. 데이비드 라이스(David Rice)는 <<기독교인으로 고백하는, 특히 장로 교인들로 불리거나 불리었던 자들인 켄터키 주민들에게 보내는 서신>>(An Epistle to the Citizens of Kentucky, Professing Christianity; Especially Those That Are or Have Been, Denominated Presbyterians)에서 스톤의 서신들을 반박하였다. 존 캠벨(John P. Campbell)은 <<탄핵, 대속이라 이름 붙여진 발톤 스톤이 출판한 두 서신들에 관하여>>(Strictures, On Two Letters, Published by Barton W. Stone, Entitled Atonement)로 스톤의 서신들에 반박하였다. 스톤은 라이스 서신에 대해서는 공식적으로 대응하지를 않았다. 그것은 아마도 스톤이 복음의 “아버지”로 간주한 라이스에 대한 예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스톤은 <<존 캠벨의 대속에 관한 탄핵에 대한 대답>>(A Reply to John P. Campbell's Strictures on Atonement)이란 글로 캠벨에 대응하였다. 이에 캠벨은 스톤의 대답에 <<방어자: 혹은 스톤의 대답에 반하여 입증된 탄핵 교리들>>(Vindex: Or The Doctrines of the Strictures Vindicated Against the Reply of Mr. Stone)로 대응하였다.

4.3 이전 동료들과의 결별과 신자들의 침수세례를 채택

스톤이 “대속”(Atonement)을 출판한지 6년은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분쟁과 분열로 점철되었다. 캠벨(John P. Campbell)은 그의 <<탄핵>>(Strictures)에서 그가 북 캐럴라이나 주의 신학도로서 아이작 와츠(Isaac Watts)를 읽음으로써 배웠던 견해인 삼위일체론에 대해서 스톤의 견해가 비정통적임을 내비췄다. 스톤은 캠벨이 자신을 삼위일체론의 이단자로 비난한 것을 유감으로 생각했다고 그의 자서전에서 밝혔다. 그것은 자기 자신과 “내가 믿었던 교리를” 방어하도록 그에게 요구했던 대로이다. 스톤은 자기가 삼위일체론에 대해서 결코 쓴 적이 없다고 하였고, 수년간 대중강연들에서 “그 주제에 관해서 침묵”했었다고 주장하였다. 설사 삼위일체론에 관한 스톤의 견해들이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 폭넓게 수용되었다할지라도 그것들은 내부 불화의 주제가 되었을 것이다.

1805년 봄에 그리스도인들은 동부에서 온 쉐이커(Shaker) 선교사들의 방문을 받았다. 이전 스프링필드 장로회의 창립멤버들이었던 리차드 맥네마르(Richard McNemar)와 존 둔라비(John Dunlavy) 두 사람은 쉐이커 교도가 되었다. 스톤은 있는 힘껏 쉐이커 교도들을 맞섰다. [역자 주: 쉐이커 교도들은 엄격한 금욕생활을 요구하며, 재산을 공동 소유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모든 사람들이 집단의 소득을 동일하게 분배하고 똑같이 산출물을 받는 일종의 생활공동체(commune)이다. 이들은 1774년 미국에 도착했으며 1850년경 약 4,000명에 이르렀으나, 그 이후 구성원들이 줄어들었다.]

2년 후 스톤을 포함해서 일부 그리스도인 설교가들은 침례를 믿는 자의 침수세례로 채택하였고 그 자신들도 침례를 받았다. 스톤은 믿는 자의 침수세례에 관하여 “모든 형제자매들이 그들의 믿음에 따라 행동해야한다”는 그리스도인 목회자들의 회의에서의 결정에도 불구하고, “설교하는 우리의 형제들 가운데 몇몇은 아직 그들이 이 성례의 적절성에 대해서 확신할 수 없는 상황에서 그들이 섬기는 회중들이(교회들이) 이 성례를 따르게 하고 있는 것을 오히려 불편해하고 불만스럽게 생각하는 것으로 나타났다”고 주장하였다. 설사 그들 목회자들이 그들이 섬기는 회중들(교회들)의 교인들 사이에서 믿는 자들의 침수세례의 인기가 높아지고 있는 점에 관해서 “거의 말하지 않았지만,” 그들 가운데 일부는 “우리가 성서이외에 다른 어떤 유대와 형제사랑의 수단을 가져야 한다는 것, 이것들은 우리의 성장하는 교회들을 하나로 묶고 그것들을 순수하게 유지하는데 충분치 않다는 것을 충고하기 시작하였다.”고 스톤은 적었다. “규정집”의 채택을 요구하는 목회자들 사이에는 마샬(Marshall)과 톰프슨(Thompson)이 있었다. 스톤과 다른 사람들은 규정집을 지지하는데 사용된 논쟁들이 “모든 인간 파당의 신조를 끌어들이기 위해 사용된 것들과 동일하다는 것을 명백히 보았다. 신조는 일찍이 세상에 부과되었고, 그래서 그것들이 위해(危害)하다는 충분한 확신을 가지고 그리스도를 위(爲)하여 규정집들을 반대하였다.”고 스톤은 진술하였다. 1810년 8월 벧엘에서 열린 그리스도인 목회자들의 회의 때 그리스도인들은 “공식적인” 연합체를 만들 수 있고, 그들의 현재의 견해들이 담긴 성명서를 발표할 수 있지만, 규정집을 채택하지 않는다는 일종의 타협이 이뤄졌다. 스톤, 마샬, 톰프슨 그리고 다른 두 명의 목회자들로 구성된 위원회는 성명서를 작성하려고 시도하였으나 마샬과 톰프슨과 다른 한 명의 목회자가 삼위일체와 대속에 관한 정통교리들을 확언하기를 원함으로써 그들의 현재의 견해들에서 합의에 도달할 수 없었다. 1811년 3월 다볼(Tabor) 산에서 열린 목회자 모임 회의가, 스톤의 지도에 따라서, 위원회 구성원들의 교리적 차이들이 친교를 갈라놓을 필요가 없으므로, 합의 성명서가 필요치 않다는 것을 선언했을 때, 마샬과 톰프슨은 장로교 교단으로 회귀해버렸다. 그래서 1811년 봄까지 스프링필드 장로회의 다섯 창립멤버들 가운데 스톤만 홀로 그리스도인들의 지도자로 남게 되었다.

4.4 <<제언>>(An Address) 출판, 셀리아 보웬(Celia Bowen)과 재혼, 테네시 주로 이주

1814년 스톤은 <<켄터키 주, 테네시 주, 오하이오 주의 그리스도인의 교회들에게 보내는 제언. 몇 가지 중요한 신앙의 교리들에 관하여>>(An Address to the Christian Churches in Kentucky, Tennessee and Ohio. On Several Important Doctrines of Religion)를 발표하였다. <<제언>>(An Address)에 삼위일체,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 대속, 성령의 작용들 그리고 믿음에 관한 부분들이 포함되었다. 스톤은 자신의 자서전에서 존 톰프슨(John Thompson)에 의해 “연결된” 교리 성명서를 쓰는데 실패한 작성 위원회의 한 사람으로서 그가 1811년에 쓴 응답이 이 책의 토대가 되었다고 적었다. 스톤의 제언이 3년 뒤에 나온 것은 십중팔구 작성 위원회에 임명되기 3개월 전부터 시작된 그의 개인적인 정황들 속에서 일어난 일련의 변화들 때문이었다.

1810년 5월에 엘리자베스가 죽었다. 그녀가 죽은 후에 그는 가사와 교인들 그리고 네 딸의 숙식을 돌보지 않았고, 오하이오 주, 켄터키 주, 테네시 주에서 설교와 교회들의 설립에 전념하였다. 1811년 10월 31일, 그는 19살의 엘리자베스의 조카 셀리아 윌슨 보웬(Celia Wilson Bowen)과 결혼하였고, 그가 엘리자베스와 결혼하기 전에 구입했던 켄터키 주 부르본 군(郡) 소재 농장에 가족을 위한 집을 재건하였다. 한 해 말에 그와 셀리아는, 스톤에 따르면, “충고와 심한 설득으로 권유를 받고 ”과부인 셀리아의 모친과 가까운 테네시 주로 이사하였다. 보웬 부인은 그들을 좋은 농장에 자리 잡게 하였지만, 안락한 집이 없었다. 그 결과 스톤은 그의 시간 대부분을 농장의 발전과 집을 건축하는데다 전념하였다고 스톤은 적었다. 스톤은 또 1812년과 그 다음해에 각각 얻은 두 아들로 인해 식구가 늘어남으로써 <<제언>>(An Address)을 출판할 마음의 여력이 없었을 것이다.

1815년 켄터키 주 멀세르(Mercer) 군(郡) 장로교 목사 토마스 클리랜드(Thomas Cleland)는 <<소시니-아리안 간파됨>>(Socina-Arian Detected)이란 이름을 붙인 100쪽 분량의 책이 스톤의 <<제언>>(An Address)에 대한 응답으로 출판하였다. 스톤은 그리스도인의 교리에 관하여 그의 마지막 말을 쓰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또 다른 7년간 다시 출판하지 않을 것이다. 그가 <<제언>>(An Address)을 출판하고 나서 머지않아 시작된 그의 개인적인 정황들 속에서 생긴 십중팔구 또 다른 연속적인 변화들 때문이었을 것이다.

4.5 켄터키 주로 귀환

스톤은 그의 자서전에서 그가 테네시 주에서 그의 장모가 농장의 권리를 그에게 주려고 계획하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그녀의 딸과 그녀의 자녀들에게 양도하려한다는 것을 알 때까지 “집을 짓고 농장을 발전시키기 위해서 열심히 일했다”고 보도하였다. 그의 첫 번째 부인이 죽었을 때, 그녀의 토지들이 켄터키 주법에 따라서 그녀의 자녀들의 재산이 되었기 때문에, 그는 이 결정에 대해서 그녀를 비난하지 않았다고 주장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톤은 장모의 결정을 알자마자 켄터키로 돌아가기로 결심하였다. 그는 셀리아가 그의 결심을 승낙했다고 보도하였다.

켄터키 주로 돌아간 후의 상황은 스톤이 일찍이 상상했을 법한 것 이상으로 더 어렵게 되었다. 1812년에 그는 부르본(Bourbon) 군(郡)의 농장을 팔았다. 한편 1812년의 전쟁으로 야기된 수요와 더불어 켄터키 주의 통행료징수소와 오하이오 주와 미시시피 주의 증기선 통행의 출범이 농장의 소출가격을 상승시켰고, 켄터키 주에서의 농지가격이 크게 뛰어올랐다. 스톤이 켄터키 주에서 농장을 구입하려고 했을 때, 그가 팔았던 비슷한 토지의 가격이 두 배 이상 뛴 것을 알게 되었다고 스톤은 보도하였다. 토지 가격의 상승으로 켄터키 주에서 농장을 구입할 수 없었기 때문에 스톤은 그의 가족들의 필요를 공급해 주겠다고 약속한 “렉싱턴의 형제들”(the brethren in Lexington) 사이에서 정착하라는 초대를 받아드렸다. 그러나 렉싱턴의 형제들은 그들의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그리고 조지아(Georgia) 주에서 교사로서 환영을 받았던 스톤은 그의 가족 부양을 위해서 렉싱턴에서 고등학교를 열라는 요청을 받았다.

1819년 스톤은 렉싱턴(Lexington)에서 북쪽으로 19킬로미터 떨어진 조지타운(Georgetown) 소재 리튼하우스 아카데미(Rittenhouse Academy)의 교장으로 임명되었다. 그해 가을 그는 조지타운 근처에 농장을 사서 그곳으로 가족과 함께 이사하였다. 1819-20의 가을과 겨울동안 아카데미의 교장으로서 그의 직무들을 수행하는 한편, 그는 조지타운에서 설교를 하였고, 조지타운에 그리스도인의 교회가 세워지고 곧이어 교인이 200명이 넘는 교회로 성장하는 결과들을 얻었다.

스톤이 알지 못한 채 북 켄터키 주에 소재한 그리스도인의 교회들이 회집하여 스톤이 복음을 전파하는 일에 전념해야 한다고 결정하였다. 또 그를 아카데미로부터 해방시키기 위해서 그와 그의 가족을 부양할 것과 조지타운 근처의 농장을 구입하면서 생긴 빚을 갚기로 합의하였다. 스톤의 <<제언>>(An Address) 출판이후 또 다른 두 딸과 또 다른 한명의 아들(또 다른 한명의 아들인 스톤의 열 번째 아들은 1824년에 출생하였다.)까지 아홉 명으로 스톤의 자녀들의 수가 늘어난 만큼 교회들은 실제적인 도움들을 약속하였다. 그러나 미국은 1919년 중대한 경제 불황에 빠졌고, 농장에 대한 어음 지불 시기가 닥쳤을 때 약속된 기금은 모아지지 않았다. 스톤은 농장 빚을 갚을 돈을 빌려야했고, 그가 빌린 돈을 갚기 위해서는 조지타운에 학교를 열어야했다. 이 수단으로 그는 그의 빚을 갚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의 건강은, 그가 믿기를, “지속적으로 연구에 매달린” 결과로 나빠졌다. 결과적으로 그는 가르치는 것을 포기했고, 거의 50살이 되었지만, 농장의 “힘든 노동에로 돌아갔다.”

4.6 삼위일체론과 대속론에 관한 논쟁을 일신

1821년 스톤은 <<제언>>(An Address)의 재판을 발행하였다. 재판의 서론에서 그는 “진리를 널리 보급하고픈 충정에서” 그가 그리스도인의 교회들에게 “수정되고 상당히 증보된” 저술을 보내고 있다고 진술하였다. 재판을 초판과 비교해 보면, 책의 대부분이 실제로는 달라지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렉싱턴에서 가르치는 동안 스톤은 그가 “학식이 많은 유대인”으로 기술한 프로이센(Prussian) 의사와 함께 히브리어를 공부할 기회를 활용하였다. 클리랜드(Thomas Cleland)는 스톤이 “수박겉핥기식의 헬라어와 심지어 그보다 못한 히브리어 실력을 갖췄다”고 밝히면서 흠정역(KJV) 성경의 어떤 본문들의 번역에 대한 스톤의 비판을 조롱하였다. 대속론 부분에서 스톤은 “내가 나의 <<제언>>(An Address) 초판을 발행한 이후 내가 습득한 불완전한 지식”이라고 밝힌 히브리어로부터 “몇 개의 요점들”을 추가하였다. 모든 수정은 삼위일체론과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다룬 부분들에서 이뤄졌다. 초판에서 스톤은 와츠(Watts)를 따라서 하나님의 아들을 그리스도의 인간의 영혼(as the human soul of Christ)과 동일한 것으로 분명히 간주하였다. 게다가 그를 태어난 혹은 만들어진 자로 말하였다. 클리랜드는 그가 아들을 단지 피조물로 믿는 아리우스주의(Arianism)라고 비난하였다. 재판에서 스톤은 그리스도의 영혼을 인간(the soul of Christ as human)으로 말하지 않았다. 아들을 “만들어진”(created) 자로 말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그는 “아버지께서 예수님을 그 자신으로부터와 그 자신에 의해서 낳으셨기 때문에 아버지의 독생하신 자”로 예수님이 불렸다고 제시하였다. 스톤은 <<존 모어랜드에게 보낸 서신>>(A Letter to John R. Moreland)에서 그가 아리우스주의를 거부한다는 점을 명확히 하였다. 스톤의 <<제언>>(An Address)의 재판을 읽었다고 주장한 모어랜드는 <<마운트 플레전트 지역의 교회에게 보낸 서신>>(A Letter to the Church at Mount-Pleasant)에서 아들은 “만들어진 존재, 변하기 쉽고 변덕스런 피조물”이라는 가르침으로 스톤을 비난하였다. 모어랜드가 가르침으로 그를 비난한 견해는 아리우스의 견해였다고 스톤은 주장하였다. 아리우스는 아들이 무로부터 만들어졌다고 가르쳤다. 그러나 스톤의 견해는 “아리우스의 것들보다 월등히 높은” 것들이었다. 아리우스를 정죄한 교회 교부들의 가르침은 "아들은 아버지의 본체였다”는 것이었다고 스톤은 적었다. 만약 아들이 아버지의 본체(substance)라면, “그는 만들어진 자가 아니며, 아버지로부터 그의 존재가 기원(derived)되었다”고 스톤은 말하였다. “이것에 대하여 나는 아무런 반대가 없다”고 선포하였다.

1822년 토마스 클리랜드는 스톤의 <<제언>>(An Address) 재판 본에 대한 172쪽짜리 리뷰(평론)를 <<그의 “제언” 재판 본에서 그가 행한 최근의 공격들에 반(反)하여 주로 삼위일체론, 구세주의 신성론(神性論)과 대속론(代贖論)의 해명을 담은 발톤 W. 스톤에게 보낸 서신들>>(Letters to Barton W. Stone Containing a Vindication Principally of the Doctrines of the Trinity, the Divinity and Atonement of the Saviour, Against His Recent Attack in a Second Edition of His "Address")이란 제목을 붙여 발행하였다. 매도성(罵倒性)의 <<소시니-아리안 간파됨>>(Socina-Arian Detected)과 클리랜드의 <<서신들>>(Letters) 양자의 어조를 간파한 다음, 1824년 스톤은 클리랜드의 <<서신들>>(Letters)에 <<토마스 클리랜드 박사의 논거들에 대한 대답으로 계획된 제임스 블라이스 박사에게 보낸 서신들>>(Letters to James Blythe, D.D. Designed as a Reply to the Arguments of Thomas Cleland, D.D.)이란 제목의 책으로 응대하였다. 로버트 마샬과 함께 블라이스는 장로회의 회원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으며, 스톤이 그에게 1798년 10월 그의 안수식 날에 장로교의 신앙고백서에 대한 자신의 어려움들을 털어놓았던 인물이었다. 스톤은 <<제언>>(An Address)의 초판과 재판 모두에서 아버지와 아들을 인격(persons) 혹은 “존재”(beings)로서 말하였지만, 성령을 존재로서 말한 적은 전혀 없었다. 스톤은 그의 <<블라이스에게 보낸 서신들>>(Letters to James Blythe)에서 성령에 관한 그의 입장을 명확히 하였다. “하나님의 성령에 의해서, 성령을 그 인격 자신(the person himself)으로가 아니라 한 인격(a person)으로 이해한다.”고 스톤은 썼다. “우리는 종종 성서에서 아버지가 아들을 사랑하신다는 것이나 아들이 아버지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읽는다. 그러나 우리는 아버지나 아들이 한 인격으로서 성령을 사랑하신다는 것이나 성령이 아버지와 아들을 사랑하신다는 것에 대해서 결코 읽지 않는다.”고 스톤은 적었다. 그는 또 “우리는 아버지와 아들을 사랑하고 예배하라는 사례들과 교훈을 가지고 있지만, 성서에는 성령을 예배하는 것에 대해서 한 건의 사례나 교훈도 없다.”고 썼다. 1825년 스톤의 재판 <<제언>>(An Address)에 대한 논쟁에서 클리랜드는 <<가면을 벗긴 일신론: 펼쳐진 반-기독교적 특징들: 그리고 유지될 수 없는 것으로 드러난 그것의 기초; 블라이스 박사 목사에게 보낸 발톤 W. 스톤의 서신들에 대한 대답에서>>(Unitarianism Unmasked: Its Anti-Christian Features Displayed: And Its Foundation Shewn to be Untenable; in a Reply to Mr. Barton W. Stone's Letters to the Rev. Dr. Blythe)로 마지막 공격을 퍼부었다.

참고목록

Dunnavant, Anthony L. Ed. Cane Ridge in Context: Perspectives on Barton W. Stone and the Revival (1992).
Hughes, Richard T.
Reviving the Ancient Faith: The Story of Churches of Christ in America (1996).
Stone, Barton Warren.
Biography of Elder Barton Warren Stone, Written by Himself, with Additions and Reflections by Eld. John Rogers (1847), reprinted in The Cane Ridge Reader (1972).
Ware, Charles C.
Barton Warren Stone, Pathfinder of Christian Union (1932).
West, William Garrett.
Barton Warren Stone: Early American Advocate of Christian Unity (1954).
Williams, D. Newell.
Barton Stone: A Spiritual Biography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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